〈 83화 〉 37. 부정한 자의 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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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선택받은 자는 혈통과 관련 없이 나타난다. 용사 중에서는 출신이 거지인 이도 있는 마당인데 혈통이 관련 있을 리가 없지.
그렇다면 선택받은 자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계는 강한가? 결론적으로만 말하자면 선택받은 자의 후계들은 강하지 않다.
선택받은 자는 말 그대로 어떤 존재에게 선택을 받은 이이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건대,
바르바라의 말이 진실이라면 진실일 가능성이 매우 크긴 하지만 의심의 끈은 아직 놓지 않았다. 아마 선택받은 자는 천족의 왕이 선택한 인간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선택받은 자의 힘은 고작 해봐야 1세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선택받은 자의 후손들은 딱히 특별한 재능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눈앞의 이 남자는 어떤가.
“나는 두 번째 용사의 혈통을 이은 자다. 나보다 성검에 어울리는 이가 있을 수 없다!”
이제는 외부인에게 성검을 주는 것이 아니꼬운 것만으로 모자라, 탐욕을 불태우고 있는 이 남자는 도대체 무엇일까.
안타깝게도 나는 너와 같은 가짜가 아니다. 너는 그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영웅의 후예일 뿐이다. 네 선조는 원래는 그저 평범했어야 하는 인간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어떤가.
나는 오로지 힘만을 추구해온 종족의 정점에 선 존재다. 그러나 저 남자는 모른다. 눈앞에 있는 이가 ‘진짜’인 줄을 몰라.
그저 아무런 힘도 없는 알량한 혈통을 믿고 말하는 모양새가 조금 불쌍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진짜 마스터라고 해도, 쉽게 지지는 않겠다. 아니, 위대한 혈통인 내가 질 리가 없다!”
도대체 왜 저래? 열폭이라도 하는 듯이 나를 쏘아붙이는 아켈트 후작의 작태에 불쌍하게 느껴지던 것은 온데간데없니 사라지고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그렇기에 남자를 무시한 채 루이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루이나.”
“네?”
“잘 봐둬.”
“뭐를요?”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아라엘 국왕은 내 힘을 시험해보기 위해서 아켈트 후작을 내세웠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생각해보면 바르크 백작 때도 이러지 않았던가? 누가 그 봉신의 그 국왕이 아니랄까 봐 하는 짓이 똑같네.
아무튼, 날 시험하려 드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다 엎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열이 받은 건 또 아니란 말이지.
질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이기면 ‘부정한 자의 성검’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싸우는 거.”
이번 결투의 메인은 저 아켈르 후작을 꺾는 게 아니다. 며칠째 이레네와 대결을 하면서 일격조차 제대로 막지 못한 채 지지부진 중인 루이나가 뭔가 깨달았으면 싶어서 내가 싸우는 걸 보여주려는 거다.
“시작하게나.”
국왕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후작은 검을 뽑았다. 거기까지는 좋아. 그런데 멋에 치중해서 자세를 잡는다. 실전에서 저렇게 멋 부리면 바로 골로 가는데 말이야.
“간다!”
아니. 실전에서 누가 저렇게 말을 하고 달려드냐. 어이가 없네, 진짜.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한 대 후려갈겨 주고 싶다. 그래 뭐, 기사도이니 정정당당한 대결이니 그런 걸 중시하는 건 좋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것도 상대를 봐가면서 해야 할 거 아니야.
“어?”
눈 깜짝할 사이에 후작의 검이 땅에 떨어졌다. 아펠크 후작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텅 빈 제 손을 바라보는 중이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차린 건 메르넬라와 이레네…….
이레네도 멀뚱멀뚱 있는 걸 보니 못 알아챘구나? 결국, 메르넬라만 알아차렸다는 소리네.
“실수하셨나 봅니다. 다시 검을 잡으시죠.”
“크흠. 기다리게.”
레벨이란 그 종족의 한계와 같다. 예를 들어 인간의 한계 레벨은 99다. 엘프나 드워프도 마찬가지야.
그리 치면 아칼리 후작은 제법 강한 편이다. 레벨로 치자면 한 80 정도나 될까? 레벨로만 치면 나와 처음 만났을 때의 루이나보다 강하다. 인족 중에서는 강자라고 할 수 있겠지.
그래 인족 중에서는 강자이기는 하지. 아마 한평생 무인으로써 무시당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족의 한계 레벨이 99라면 용은 한계 레벨도 99일까?
정답은 아니다, 다. 용의 한계 레벨이 어디까지인지는 모르나, 게임 내에서는 300레벨이 넘는 개체도 가끔 등장했었다.
그렇다면 마족은 어떤가. 두 번째 확장팩의 최종보스이자 세계에 멸망을 선사하려고 했던 라바나알의 레벨은 무려 700이 넘어갔다.
그러니까 결론을 말하자면.
“또?”
“또 검을 놓치셨군요? 괜찮습니다, 다시 드시지요. 기다리겠습니다.”
인간 아니, 인족은 약하기 짝이 없다. 그 약함을 초월하기 위한 시작 지점이 바로 마스터의 경지다. 그러니까 마스터에 도달했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는 거다. 마스터는 결국, 태생적으로 강한 종족에게 맞서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발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관문에조차 서지도 못한 애송이가, 나와 결투를 하겠다니. 정말이지 가소롭기 짝이 없어.
그러니까. 니가 오늘 느낄 부끄러움은 그 대가라고 생각해라.
“윽.”
아벨나 후작의 손이 또다시 검을 놓쳤다. 지금 행하는 묘기는 사실 별것 아니다. 저번에 루이나에게 한 수 가르쳐줬던 묘기의 연장선이라고 할까?
“허억.”
검이 맞닿았을 때 상대의 검이 나아가는 방향 쪽으로 힘을 준다. 거기까지는 저번과 같다. 그러나 이레네 정도로 검술이 형편없는 것이 아니면 보통 사람은 밀어 나는 힘을 다잡으려고 한다.
“어, 어째서.”
그 순간 보통 사람들은 반드시 멈출 수밖에 없다. 그때 다시 역으로 힘을 주면 자기도 모르게 손이 검을 놓치게 된다.
“검도 제대로 잡지 못할 정도로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 같군요. 계속하시겠습니까? 저는 기다릴 수 있습니다만.”
후작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검을 놓치는 중이다. 그리고 나는 계속해서 그가 검을 다시 집어 들기를 기다린다.
그 역시 바보는 아니다. 이쯤 되면 내가 검을 놓치게끔 만드는 중이라는 것을 깨달았겠지. 그러나 그 사실을 아는 이가 몇 명이나 될까.
일부러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속도로 검을 휘두르고 다시 집어넣는 중이다.
메르넬라와 이레네 그리고 루이나 정도만 내가 검을 휘두르고 있음을 알고 있겠지, 싶다.
“……기다리게.”
다시 말해 이 결투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내가 가만히 있는 것으로 보일 거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후작이 자꾸만 혼자서 검을 놓치고 있는 것으로 보일 거다.
그 때문에 그는 알고 있음에도 패배를 시인할 수 없다. 그럴듯한 결투는커녕, 내 앞에서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검을 놓치고 있으니까. 지금 패배를 시인하면 내게 겁을 먹어서 결투다운 결투조차 하지 못하는 꼴로 보임을 알기에.
그러나 땅에 떨어진 검을 잡으면 잡을수록 그의 창피함은 더더욱 커질 것이다. 그저 검을 놓치기만 할 뿐이니까.
아파트 후작에게 망신을 주기 위해서 보통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을 빠르기로 하고 있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건 속도가 중요한 기예가 아니다. 그저 정확한 힘의 배분이 필요할 뿐이지. 지금의 루이나도 훈련만 한다면 충분히 펼칠 수 있는 기예다.
“계속하시겠습니까?”
이쪽을 바라보는 벨라트릭스의 표정이 썩어들어가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왜, 네 말마따나 살살 상대해주고 있잖아. 이 정도로 살살 상대해줄 수가 있나. 상처도 내지 않고 그냥 검만 놓치게 하고 있는데.
저 후작이 검을 집어 드는 한, 나는 계속할 생각이다. 자 과연 언제쯤 패배를 시인할까.
되도록 늦게 해줬으면 좋겠다. 루이나도 뭔가를 깨달을 때까지 계속 덤벼주면 좋고. 국왕과 후작한테 약간 짜증이 난 것도 있지만, 그래도 궁극적인 목적은 루이나가 이것을 보고 뭔가를 깨닫기를 바라는 거니까.
메르넬라나 이레네한테는 이런 기예는 불가능하다.
아, 이레네한테는 가능하기는 한데 이레네라면 꼴사납게 검을 놓치지는 않을 테니까.
“크윽.”
이제는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후작이 나를 바라본다. 귀찮으니까 아무개 후작이라고 칭하자. 아무튼, 아무개 후작의 눈빛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일전의 고룡이, 일전의 자이로니아가, 일전에 겁박을 줬던 레베카의 부하들이 저런 눈을 내게 보였다.
압도적인 힘 앞에 절망하여, 빛이 사라져버린 눈동자다.
“계속하실 거지요? 기다리겠습니다.”
뭐하냐. 검 안 집어 들고.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패배를 인정할 생각은 아니겠지? 사람들이 보기에는 검도 한 번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하고, 내 위압감에 꼬리를 말고 도망친 개새끼라고 생각할 거 아니냐.
“내, 내가 졌네.”
벌써 졌다고 하는 건가? 아직 30분도 흐르지 않았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러니까 이름도 기억해두지 않은 거야.
루이나와는 다르다. 루이나는 내 실력을 보았음에도 계속 덤벼들었다. 대련을 빙자한 가르침을 내릴 때도 루이나는 수없이 검을 놓쳤지만, 내게 한 번도 검이 닿지 못했지만 계속 덤볐다.
“아. 그랬구나.”
순간 깨달았다. 내가 루이나를 신경 쓴 이유는 비단 게임 내에서 그녀가 죽었기 때문만이 아니었어. 그때부터 그녀가 마음에 들었던 거다. 꺾이지 않은 강함이 마음에 들었다.
다이나토스는 힘을 숭배하기에, 무력뿐만이 아니라 마음의 힘조차도 숭배하고 존경하기에.
아마 그때부터 나는 지구 사람이 아닌, 다이나토스로써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눈앞의 이 인간은 정말이지 무력하고, 나약하기 짝이 없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다. 그저 알량한 혈통만 믿고 윽박지르는 꼴이 정말이지 한심하기 짝이 없어서, 그래서 짜증이 났던 거다.
“그러시다면야.”
패배를 인정한 개새끼를 가지고 놀아서 뭐하겠는가. 검을 집어넣고 뒤로 물러나 메르넬라 쪽으로 향했다.
“추악하네요.”
“동의해.”
약하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저 후작은 추악해 보일 수밖에 없다.
“역시 인간은 추악하군요.”
“그건 아니지. 추악하지 않은 인간도 있어.”
“어머.”
뭐야 왜 그래?
“처음이시네요. 사람이 아니라 인간으로 지칭하시는 것은.”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야 내가 한 말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하지만, 메르넬라라면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부 기억할 테니까.
“그런데 추악하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나요? 적어도 이곳에는 없는 것 같은데요. 감히 아르켈님의 실력을 시험하려 들고, 구경하려고 들었던 추악한 이들뿐이지 않나요?”
“바로 옆에 있잖아. 루이나 정도면 훌륭하지 않아?”
나와의 대결에서도 끝까지 검을 놓지 않았다. 이레네의 불공평한 힘 앞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과연, 그렇네요.”
메르넬라의 입이 잠시 벌어지더니 이내 곡선을 그리며 내 말에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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