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게임 속 히든 보스가 되었다-84화 (84/99)

〈 84화 〉 37. 부정한 자의 검(4)

* * *

아무개 공작은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결투가 끝나자마자 도망쳐버렸다. 국왕을 비롯한 귀족들은 너무 싱겁게 결투가 끝나서 조금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결투라고 하기도 뭐한, 그런 거였지.

“알현실로 돌아가도록 하지. 거기서 마저 이야기하도록 하지.”

그래도 승리는 승리니까, 약속했던 대로 부정한 자의 검은 내 차지가 되겠지.

“적당히 했어야죠.”

다시 알현실로 가는 길에 벨라트릭스가 나를 쏘아붙였다.

“다치지도 않았으면 적당히 한 거 아닙니까??”

듣는 사람이 많아서 존대로 응대해줬다.

“그건 그렇지만! 하아, 됐어요. 말을 말죠.”

“그래 그럼. 루이나 잘 봤어?”

“……네.”

“그럼 됐어.”

너무 짧게 끝난지라 루이나가 뭘 깨달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냥 잘 봤으면 된 거지. 그래도 오늘 일이 나중에 루이나가 성장하기 위한 발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두 번째 용사의 검과 일대 귀족으로 자작 위를 수여하겠네. 대신 아라엘 왕국의 대소사에 참여하지 않아도 좋네. 단지 우리 왕국에 있어 주기만 하면 되네. 성검은 자네가 죽으면 왕국에 반납하는 것으로 하지. 이 정도 조건이면 어떤가.”

일대 귀족은 내 자식들에게는 작위를 세습할 수 없는, 나만 작위를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 대가로 왕국의 대소사에 딱히 참여할 필요가 없으니까 조건은 나쁘지 않다.

오히려 최고지. 귀찮은 일에 시간을 잡혀먹히지 않아도 되니까. 게다가 마지막 조건도 마음에 들어. 내가 죽으면 성검을 왕국에 반납하라고 했지만, 과연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겠다. 내가 죽을 때쯤이면 아라엘 왕국은 성검에 관한 것을 깜빡 잊어버릴 수도 있다.

실로 놀라울 정도로 내게 딱 맞는 조건이다. 벨라트릭스의 입김이 들어갔나?

벨라트릭스에게 시선을 돌리니, 우연히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벨라트릭스는 내 예상이 틀리지 않는다는 듯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녀의 입김이 들어간 게 맞는 것 같다.

“좋습니다.”

“작위 수여식은 넘어가도록 하지. 불만 없나?”

불만만 없겠나. 쌍수를 들고 환영해도 모자랄 정도다.

“보관함을 열어라.”

국왕의 명령에 따라 시종들이 부정한 자의 검이 들어있는 보관함을 열었다.

“가져가게. 그대가 살아있는 한, 두 번째 용사의 검은 그대의 것일세.”

“감사합니다, 전하.”

표면상으로는 봉신이니 최대한 감사함을 표현한 후 부정한 자의 검에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현재 목표3 : 부정한 자의 검을 획득하십시오(완료)」

「부정한 자의 검에 담긴 기록이 재생됩니다.」

눈앞에 글귀가 나타났다.

이건 또 뭐지 싶어 의문을 느낄 때.

시야가 반전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까마득한 구렁텅이이다. 너무 깊어서 떨어지면 도대체 어디까지 추락할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불길한 어둠이 꿈틀거리는 구덩이다.

조금 전까지 알현실에 있었는데 도대체 뭐지? 누군가 나를 강제로 이동시킨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아, 이게 부정한 자의 검에 담긴 기록인가? 그걸 환상으로 보여주고 있는 거야?

“이건 도대체 무엇이죠.”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넋을 잃고 말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메르넬라와 너무나 닮았기에. 하지만 메르넬라는 아니다. 분명 닮았지만, 목소리가 조금 달라. 생김새도 메르넬라와 달리 조금 더 날카롭다.

“나도 모르오, 리파.”

이번에 들린 목소리는 남자의 것이었다. 남자는 어떻게 생겼는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당신이 저지른 짓이 아니라고요?”

“그렇소.”

남자가 그렇게 대답했음에도 불구하고 리파라고 불린 여성은 그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의심스럽다는 듯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깊은 불신감의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적어도 여자는 남자를 적대하고 있다는 거다.

“거짓말.”

“……거짓이 아니오.”

반대로 남자는 여자를 적대하지 않고 있다.

“정말이오, 믿어주시오.”

오히려 자신을 불신하는 여성에게 진심을 전하느라 애를 쓰는 중이다.

“그럼 왜 당신이 여기 있죠?”

“불길한 힘이 느껴져 찾아온 것뿐이라오.”

“그것도 거짓말이군요.”

“……서로 반목할 시간에 이것을 어떻게 할지 이야기하는 편이 어떻소.”

“제 영역이니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러니 당신을 돌아가도록 하세요.”

“리파, 나는.”

“돌아가세요. 앞으로 나를 리파라고 부르지도 말고요. 아니 그냥 평생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남자는 여자에게 호의적이다. 그러나 여자는 그런 남자를 향해 일부러 날을 세우고 있다. 적어도 내 눈에는 여자가 남자에게 미련을 남기지 않으려고 일부러 그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저 둘은 누구지?

“아르켈님!”

“아.”

시야가 다시금 반전돼 눈앞에 알현장이 나타났다. 그리고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국왕과 벨라트릭스의 모습이 보였고.

“정신이 드세요?”

내 어깨를 잡고 흔들며 내 이름을 외치는 메르넬라가 눈에 들어왔다. 환상이 끝났나 보다.

“죄송하옵니다, 전하. 잠시 현기증이 일어나서.”

“괜찮은가? 방을 내어줄 터이니 쉬다 가게나.”

“……감사합니다.”

국왕에게 인사를 한 후 알현실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시종의 안내에 따라 방에 도착해 들어간 순간, 메르넬라가 나를 노려보았다.

“현기증? 현기증이요? 제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네요. 저희 다이나토스가 현기증이라니, 허참. 평생 들을 농담 다 들은 기분이에요.”

확실히 다이나토스가 현기증이라니 웃기는 소리기는 하지. 엉겹결에 현기증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말이기는 하다.

“내가 어땠었어?”

“기억조차 나지 않으세요? 그냥 가만히 서 계셨어요. 무려 5칼파 동안이나. 그래서 아르켈님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고 얼마나,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요?”

5분이나? 환상은 고작해봐야 1분도 안 된 것 같았는데. 그래서 메르넬라가 내 어깨를 잡고 흔들고 있었구나.

“저도 걱정했습니다.”

“둘 다 미안. 아, 루이나도 미안. 걱정했지?”

“……네.”

우선 메르넬라의 눈에 흐르는 한줄기 물방울을 닦아 준 후 자리에 앉았다.

“루이나 잠깐 자리 좀 비켜줄래?”

“네.”

루이나가 자리에서 벗어나자 메르넬라가 다시금 나를 노려보았다.

“도대체 왜 가만히 계셨던 거예요.”

“환상을 봤어.”

“환상이요?”

“어.”

내 말에 메르넬라는 눈을 찌푸렸다.

“말이 안 되지 않나요? 아르켈님께 환상을 보여줄 수 있는 수준의 마법사가 있을 리가 없잖아요.”

인간 기준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우리 중 가장 마법을 잘 다루는 에이글조차도 내 머릿속에 들어와 환상을 보여줄 수 없을 정도다. 이 육신의 마법 저항력은 그 정도로 높다.

그러니 메르넬라의 말은 타당하다.

하지만.

“마법이 아니야.”

그 환상은 결코 마법이 아니었다. 신 혹은 그에 준하는 존재가 준비한 것이 마법따위 일 리가 없지.

“예?”

“잠깐만 생각 좀 정리할게.”

환상 속 그 두 명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일단 남자의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여성의 모습은 확실히 보였다. 놀라울 정도로 메르넬라와 닮았었어.

그렇다면 우리와 관계가 있는 여성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선조께 들은 바로 우리의 첫 번째 왕님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고 했다.

이름이 뭐였는지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다행스럽게도 바로 옆에 있는 메르넬라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다.

“메르넬라. 초대 왕님의 성함을 기억해?”

“리파 소토르프님이시잖아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역시나 그런가. 예감이 맞아떨어졌다. 환상 속에 보였던 그 여자가 바로, 우리의 첫 번째 왕이었구나. 메르넬라와 외모가 비슷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단 여자의 정체를 안 것 만으로 소기의 성과가 있다.

참고로 소토르프라고 해서 초대 왕이 내 먼 조상님은 아니다. 그저 같은 동족의 선조일 뿐이지. 애초에 소토르프는 왕의 칭호와 같은 거다.

그런 그 남자는 누구인가. 그것도 예상이 가는 바가 있기는 하다.

“두 번째 왕님은 남자였지?”

“팬텀 소토르프 님이요? 네, 남자셨지요.”

초대 왕님께서 그 정도로 적의를 보일 정도라면 당연히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왕위를 찬탈해서 불멸성까지 앗아간 남자라면 그런 적의를 보여도 이상할 게 없다.

“왜 갑자기 선조 님에 관한 걸 물어보세요?”

“검을 잡으니까 환상이 보였어. 거기서 리파님을 뵈었고.”

“예?”

“그럼 초대 왕님께서 남기신 걸 찾으셨습니까?”

“그건 아니야, 이레네. 그냥 과거에 있었던 일을 본 것뿐이니까.”

봤던 환상을 대충 말해줬다.

“확실히 초대 왕님께서 그리 적대하실 분이라면 두 번째 왕님 뿐이리라 생각됩니다.”

“초대 왕님과 관련된 기록이면 아르켈님이 환상을 봤다고 해도 이해는 돼요. 하지만 그런 기록이 왜 인간의 검에 있는 거죠?”

“그건 나도 모르지.”

애초에 이 검이 어째서 부정한 자의 검인지도 모르겠어. 두 번째 선택받은 자와 관련된 정보는 굉장히 희박하니까.

“그것부터 알아봐야겠네요.”

메르넬라의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더 늘었음을 직감했다.

“그래. 두 번째 용사에 대해서 알아봐야겠네.”

그것부터 시작해서 거슬러 올라가면 어째서 이 검에 초대 왕님의 기록이 남겨져있는지를 알 수 있을 거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