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38. 그들은 선(Goodness)이다(4)
* * *
“누구냐고 묻지 않았나!”
“그건 댁이 알 바 없고.”
내 정체가 뭐가 중요해.
지금 중요한 건 단 하나.
네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뿐이잖아.
“경비병! 경비병!”
멍청하기는. 내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냥 들어왔을까.
“아무리 불러도 소용없어. 이 주변의 소리는 세어나가지 않도록 막아놨거든.”
이미 이 주변에 결계를 쳐서 소리가 새나가지 않게끔 해놨다.
“이 불경한 놈이! 뭣 때문에 이 신성한 곳에서 이런 짓을 저지르느냐!”
아직 아무 짓도 안 했다만.
뭐 지금부터 무슨 짓을 할 수는 있지만.
“거기 꼬마.”
소녀가 눈물이 맺힌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딱 말해. 구해줘, 아니면 내버려둬.”
그 물음에 소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대사제의 눈치를 보았다.
뭐 저게 정상적인 반응인가.
아마 저 소녀는 지금까지 대사제의 참견을 받아왔을 테니까.
저렇게 눈치를 보는 것도 당연하다.
“눈치 보지 말고, 네가 지금 생각하는 걸 그대로 말해.”
그 말에 소녀는 눈을 질끈 감더니.
“……구, 구해주세요.”
조그마한 목소리로 내게 구원을 바랐다.
“그래.”
한 명 구해주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저런 꼬꼬마가 구원을 바란다면 그 정도는 해줄 능력이 된다.
“에?”
“뭐, 뭐야! 어떻게!”
놀랄 만도 하지. 눈 깜빡할 사이에 소녀가 내 앞으로 이동했으니까.
“자, 보자.”
소녀의 등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애한테 할 짓이 있고, 못할 짓이 있다는 건 금수도 아는 것인데.
신을 모신다는 자가 이런 짓을 하다니.
“아…….”
원래는 그냥 구해만 줄 생각이었지만, 이 각인은 이대로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소녀의 등에 손을 대고 각인을 새기려던 상처를 말끔하게 지운다.
“상처도 치유했으니까, 이제 가. 지금 일어난 일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네, 네!”
대사제는 멍하니 소녀가 유유히 방 밖으로 빠져나가는 장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눈앞에 일어난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겠지.
“거기 이름 모르는 놈.”
그래, 이름 모르는 놈. 그 정도가 딱이다.
별로 이름을 알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까 저녁부터 계속 너를 보고 있었어.”
그렇게 멍하니 있으면 쓰나.
“그때는 니가 진짜 나쁜 놈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네.”
나는 지금부터.
“이 쓰레기 새끼.”
너를 죽일 생각인데.
“애한테 어떻게 그런 각인을 새길 수 있냐.”
조금 전 소녀의 등에 새겨졌던 각인은 평범한 것이 아니다.
“제물의 각인을 새기다니. 인간말종 새끼.”
제물의 각인.
각인이 새겨진 인간을 제물 삼아, 천사를 지상에 현현하는 각인이다.
당연히 각인이 새겨진 인간은 천사가 현현한 순간 죽는다.
그런 각인을 다 큰 어른도 아니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한테 새겨?
원래도 그냥 넘어가 줄 생각은 없었지만, 그냥 죽여야겠다.
“네놈 마족이로구나!”
흠?
물론 내가 마족 행세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걸 어떻게 알았대?
지금은 딱히 마족다운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는데.
“희생의 각인을 제물의 각인이라고 부르다니!”
아, 그래서 나한테 마족이라고 한 거구나.
확실히 마족들이나 그 각인을 제물의 각인이라고 부르지.
인간이나 천사는 보통 희생의 각인이라고 부른다.
내가 보기엔 희생의 각인보다는 제물의 각인이라고 부르는 쪽이 더 올바른 것 같다만.
“신성 영역!”
대사제가 거대한 지팡이를 들어올리며 외치자 순식간에 이 방이 신성한 빛으로 가득 메웠다.
“오.”
이건 조금 놀랐다.
외도라고 생각했더니, 이 정도 이적을 단숨에 발휘할 줄이야.
“네놈이 마족이라면 자유롭지 못할 터!”
확실히 중하급 마족이라면 이곳에서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겠지.
중급 마족 수준이라고 해도 움직이는데 제약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상급 마족이라면 이 정도 이적쯤은 무시할 수 있다.
더군다나 이 몸은.
“뭐래.”
사정 상 마족인 척하고 있지만, 본디 이 몸은 다이나토스다.
신성력에 영향을 받는 몸이 아니었다.
“어?”
내가 아무렇지 않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대사제는 기겁하고 말았다.
“마족이 아니었다고?”
그래.
너한테는 안타깝겠지만, 나는 마족이 아니야.
“그렇다면 네놈은 도대체 누구냐!”
그건 니가 알 필요 없고.
“아리아를 납치하라고 시킨 게 너지?”
“아리아? 아, 그렇군.”
대사제는 무언가 안심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왜 그런 미소를 짓는 거지?
아직도 자기가 앞으로 무슨 짓을 당할지를 모르는 건가?
“그 마을에 마스터가 있다고 하더니. 그게 바로 네놈인가 보구나.”
그게 내 위장 신분 중 하나이기는 하지.
“네 이놈! 어찌 감히 사람이 신이 수호하는 신전에서 이런 패악질을 부리느냔 말이냐! 썩 물러나지 못할까.”
“하, 거참.”
내가 마족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생각하자마자 저렇게 구는 건가.
무엇을 믿고 저리도 당당하게 굴 수 있는지 의문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직 자기가 어떤 상황에 부닥쳤는지 이해를 못 했나 본데.”
조금의 살기를 보이자, 대사제는 지레 겁을 먹었는지 뒷걸음질을 쳤다.
그래 그런 모습이 딱 어울려.
“대답부터 해. 아리아를 납치하라고 시킨 거, 너지?”
“아리아는 사제다! 신전의 아이다. 즉, 이 신전의 대사제인 내 수족과도 같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찌 그것을 납치라 표현하느냐!”
“지랄하네.”
단숨에 상당한 이적을 보이기에 나름 신실한 사제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아니 신실하다고 할지라도 이런 놈은 살려둘 가치가 없다. 신에
대한 믿음이 저리 왜곡된 놈을 어찌 살려둘 수 있을까.
“역시 넌 살려둘 가치가 없어.”
목을 베기 위해 검을 뽑는다.
그 모습을 목격한 대사제는 다시금 뒷걸음질을 치더니.
“내가, 내가 이런 곳에서 죽을 것 같더냐.”
응. 무조건 죽어.
내가 그렇게 결정했으니까.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을 내놓았는데! 조금 있으면 추기경이 될 몸이란 말이다!”
“너 같은 놈이 추기경?”
진짜 세상 말세다.
신전이 생각보다 썩어빠졌구나.
아랫물은 맑을지 몰라도, 윗대가리들은 썩어빠진 게 틀림없어.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놈이 추기경 자리를 노려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내가 그 꼴은 절대 못 봐주겠…….”
“나를 따라오면 후회하게 해주마!”
대사제의 목을 베려는 순간이었다.
놈은 거대한 지팡이를 들어 올리더니, 이내 바닥을 내리찍었다.
그러자 바닥이 무너졌고 대사제는 무너지는 바닥을 통해 지하로 도망쳤다.
“노인네 힘도 좋네.”
꽤 두꺼운 바닥인데 잘도 무너트렸다.
“그런데.”
깊이가 꽤 깊다.
왠지 조금 불길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도망치게 내버려둘 수는 없으니.”
어디 한 번 나를 후회하게 만들 수 있나 볼까.
지하로 내려온 순간, 밀폐된 공기 특유의 냄새 때문에 눈을 찌푸렸다.
“하아.”
지반을 깎아서 만든 것 같은 장소다.
이것만 보더라도 평범한 신전에 있을 법한 지하 시설이 아니라는 것쯤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조금 더 걸어가자, 이번에는 공동이 펼쳐졌다.
“이건 또 뭐야.”
공동에는 스무 여개의 기둥이 보였다.
그리고 그 기둥에는 무언가가 사슬에 묶여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한 순간, 나는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우웩.”
저건 인간이다.
그것도 전부 어린아이들이었다. 아니 저것을 인간이라고 부르는 게 옳을까?
기둥의 마력에 의해 강제로 생을 연명하고 있을 뿐, 반은 시체나 다름이 없다.
기둥에서 풀려나는 순간 저 아이들은 죽는다.
“이건 도대체……”
상태를 보아하니 오래전부터 이곳에 묶여 있었음이 틀림없다.
이런 건 내 머릿속에도 없는 정보다.
여기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거야.
“내 필시 경고했음에도 내려왔구나.”
눈앞의 펼쳐진 기괴한 광경에 대사제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대사제는 기둥 너머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감히 신의 뜻을 따르는 이 몸을 죽이려고 든 네게 벌을 내리도록 하마!”
“신의 뜻을 따라? 개소리하네.”
이딴 걸 보여주고도 그런 말이 잘도 튀어나오는구나.
무슨 짓을 하려는지는 모르겠다만, 나한테 이 지하를 보여준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어.
덕분에 너를 고통스럽게 죽일 이유가 늘어났다.
“깨어나 주십시오, 신의 사자님들이시여! 눈앞의 저 이단자를 벌해주십시오!”
대사제가 지팡이로 땅을 내리찍자 복잡한 문양이 바닥을 채웠다.
그 문양은 점점 기둥으로 향했고, 기둥이 문양에 반응하여 반짝였다.
“하.”
기둥에 묶여 있던 어린아이들이 일제히 몸을 뒤튼다. 살아있으나, 살아있지 않은 몸이기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저 입을 벌릴 뿐이다.
그리고 그제야 아이들의 몸에 새겨진 각인이 눈에 들어왔다.
“진짜로.”
기둥에 마력에 의해 아이들의 몸에 새겨진 각인 역시 빛을 내뿜는다.
그 각인이 무엇인지는 단번에 알아봤다.
바로 조금 전에 같은 걸 봤는데 어떻게 알아보지 못할까.
저것은 제물의 각인이다.
한 명의 인간이 스스로를 제물로 삼는다고 하더라도, 지상에 강림할 수 있는 천사는 고작 해봐야 하급 수준이다.
그러나 제물의 숫자가 많다면 어떻게 될까.
저리 많은 아이를 제물 삼아 도대체 어떤 천사를 강림시키려고 하는 걸까.
그리고.
“쓰레기 새끼였구나.”
그것이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