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 40. 팬텀
* * *
“마셔라.”
“됐어. 조금 전에 바르바라가 타준 차를 마셨거든.”
베르셀리우스가 건넨 차를 마다했다.
그러자 베르셀리우스가 조금 몸을 떨었다.
대마왕의 이름이 내 입에서 거론된 것에 놀랐나 보다.
“저를 보자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르켈님.”
“예?”
뒤이어 율리히가 그리 말하자, 베르셀리우스의 눈동자가 커졌다.
“주인어른, 아르켈‘님’이라니요?”
그러고 보니 저 영감은 아직 내 정체를 몰랐다.
그저 어렴풋이 내가 힘을 숨겼음을 알 뿐이지.
“이 분은 마족이 아니다, 베르.”
“마족이 아니라고요? 그럼 인간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천족?”
“고대 종족의 후예다.”
마족이라고 해도 다이나토스에 대해 제대로 아는 이들은 없다.
영겁의 시간 동안 대마왕의 직속 부하라고 할 수 있는 칠대 마왕도 여러 번 바뀌었으니까.
그래서 그냥 그렇게 알고 있으면 되겠거니 했는데. 갑
자기 베르셀리우스가 눈을 감고는 머리를 만지며 입을 열었다.
“다이나토스. 진짜로 살아있었다니.”
그리고 뜻밖에도 베르셀리우스의 입에서 우리 종족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영감이 다이나토스를 어떻게 알아?”
“그 질문에 답하기 전에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뭐지.
율리히가 일부러 베르셀리우스가 대답하려고 하는 걸 막으려고 한 것 같다.
율리히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 베르셀리우스는 대답을 해주지 않을 거다.
“……두 번째 선택받은 자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 왔어.”
“두 번째 선택받은 자라…….”
“바르바라가 내 질문에 무엇이든 답하라고 말했으니까, 발뺌할 생각은 하지 말고.”
“그럴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율리히는 잠시 찻잔을 쓰다듬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서 책상 서랍을 뒤지고는 무언가를 가져왔다.
“왠 목걸이.”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목걸이였다.
나한테 주지도 않을 거면서 목걸이를 왜 꺼낸 거지.
“아실지 모르겠지만, 다른 마왕들은 아르켈님을 그저 대마왕의 손님으로 대할 뿐입니다. 아르켈님이 얼마나 강하신지 모르지요.”
그거야 그렇겠지. 지금의 칠대 마왕도 다이나토스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까.
어, 잠깐만.
“너는 알고?”
저 말은 율리히 본인은 내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다는 듯이 들리는데.
“알다마다요.”
율리히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영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네도 앉지, 베르. 같이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계속 일어서있으면 다리 아프지 않나.”
“실례하겠습니다, 주인어른.”
“두 번째 축제 때 저는 던전 마스터였고, 베르는 제 부관이었습니다.”
와, 이 영감. 오래 살았다고는 생각했는데, 그렇게 오래 살았는지는 몰랐다.
더군다나 율리히의 부관이면 그 당시에도 강성한 마족이었다는 뜻이다.
도대체 얼마나 오래 산 거야?
“그리고 두 번째 선택받은 자는 저희 마족의 편이었지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용사가 마족의 편이었다고? 그게 말이 돼?”
내가 추측하기에 용사는 천족의 왕이 힘을 내린 인물을 뜻한다.
그런데 그런 용사가, 마족의 편이었다고?
“두 번째 선택받은 자는 특별했습니다. 아니.”
그렇게 말한 율리히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면 자신이 한 말을 부정했다.
“정확히는 그의 조력자가 매우 특별했지요.”
조력자가 특별했다고?
“팬텀.”
이건 또 무슨……
율리히의 입에서 절대 나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이름이 언급됐다.
“너……. 니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알아. 설마 그놈이 두 번째 용사의 조력자였다고?”
두 번째 축제가 벌어지기 한참 전에 불멸성을 잃고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팬텀이 그때까지 살아있었다고?
“말이 안 되지…….”
는 않지.
내 동포들도 지금까지 잘만 살아있다.
불멸성을 잃었다고 해도 팬텀이 그때까지 살아있었다고 해서 말이 안 된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대반란이 일어난 이후에도 지상에서 살아가고 있었다니.
“후에 팬텀 소토르프가 자신의 후예가 오면 주라고 했던 목걸이입니다.”
율리히는 이제야 손에 쥐고 있던 목걸이를 내게 넘겼다.
“사용처는 알아서 찾으라고 하더군요.”
목걸이를 잡자마자, 눈앞에 문장이 나타났다.
「금기의 사슬 획득 완료」
「아포디미아에 접촉 완료」
「빛을 잃은 목걸이 획득 완료」
「현재 ??의 조건 만족도 : ??%」
“하, 씨발.”
이건 또 뭐야.
이 목걸이를 쥐자마자, 신의 피에 손을 댔을 때 나타났던 문장과 똑같은 것이 나타나다니.
사용처는 알아서 찾으라고?
뭐 이렇게 수수께끼의 연속인지 모르겠네.
그냥 어디에 사용할지 말해주고 가면 어디가 덧나?
“이런 목걸이를 받았을 사이면, 꽤 친밀한 사이였었나 보네.”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응.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적어도 지금까지 니네가 했던 말을 생각해보면, 절대로 그럴 수가 없어.
“너는 내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안다는 듯이 말했고, 영감이 다이나토스를 알고 있다고 말했어. 보통 친밀한 사이가 아닐 거야.”
그렇지?
이렇게 된 이상 두 번째 선택받은 자와 팬텀에 대해서 전부 들어야겠다.
“전부 말해. 두 번째 용사가 어떤 놈이었고, 팬텀이 어떤 놈이었는지.”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베르. 자네가 먼저 말하게.”
영감은 잠시 과거를 떠올리듯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두 번재 축제 때 플락가의 후계자인 율리히님을 따라, 두 번째 축제에 참여했었다.”
한참을 침묵한 끝에, 영감이 입을 열었다.
“당시 나는 제법 강한 마족이었다. 내 힘에 도취되, 오만했었지. 칠대 마왕조차도 나보다는 아래라고 생각하던 시기였어.”
그래 뭐, 다 늙어서도 그 정도로 강하면 전성기 때는 얼마나 강했겠어.
그 생각 전부 이해한다.
그러니까 빨리 본론이나 말해라.
“그러다가 만난 게 그놈이었다. 두 번째 선택받은 자도 제법 강했지만, 내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놈은 차원이 다르더군.”
본래 힘을 다 냈다는 인상도 아니었다.
“나는 그 날, 대마왕님 이외에도 내게 공포를 줄 수 있는 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도 자신은 상대조차 되지 못해. 그것을 깨달았을 때, 베르셀리우스는 공포를 느꼈다.
“그런데 그놈은 나를 죽이지 않았어. 율리히님도 마찬가지로 죽이지 않았지. 오히려 반대로 같이 온 천족을 죽이더군.”
엥? 천족이 같이 왔다고?
천족은 함부로 지상에 올 수가 없는데.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꺼내더군. 지상에서 천족을 쫓아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힘이 필요하다고.”
“당시에는 지상에 천족이 머물고 있었어?”
“아르켈님은 지상에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르시겠지만, 본디 지상에는 천계와 이어지는 거대한 게이트가 있었습니다.”
내 물음에 율리히가 답해주었다.
그런 게 있었다고?
인간 역사에도 그런 기록은 없었던 거로 아는데.
“하도 오래돼서, 인간들 사이에서도 잊힌 이야기지요.”
아, 그런가. 하긴 두 번째 선택받은 자에 관한 기록도 안 남았는데,
충분히 그럴 만도 하지. 그런데 이상하다.
천족이 지상에 자유롭게 다닐 수 있던 시기였는데 용사가 왜 필요했지?
그리고 그 게이트는 지금 어디에 있는데.
“그럼 그 게이트는 어떻게 됐는데.”
“우리 마족과 두 번째 선택받은 자는 힘을 합쳐 게이트를 무너트렸습니다.”
아하. 천족을 쫓아낸다는 게 게이트를 무너트린다는 뜻이었구나.
“그 과정에서 많은 마족이 죽었습니다. 두 번째 선택받은 자 역시 목숨을 잃었고, 팬텀 역시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확실해?”
이미 죽었을 거로 생각했던 팬텀이 멀쩡히 살아있다는 말을 들으니, 이제는 진짜로 죽었는지 의심이 갔다.
“그 목걸이는 팬텀 소토르프가 죽기 전에 제게 맡긴 것입니다. 이 목걸이를 맡기고 게이트를 무너트리기 위해 장렬히 자폭했지요.”
자폭이라. 하.
“만약 지금도 게이트가 있었다면, 축제가 이리 쉽게 진행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거야 그렇겠지.
“첫 번째 축제 때는 살아남은 마족이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모든 마족이 천족과 싸우다가, 죽었죠.”
“그렇겠지.”
천족이 멀쩡히 지상에 있었으면 마족을 그냥 내버려뒀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천족은 지상을 지배하기를 원하니, 마족을 눈에 가시처럼 여겼을 것이다.
“그놈이 또 남긴 말은 없었어?”
“없습니다.”
그래. 그냥 그렇게 자폭하고 죽어버렸다는 말이지.
어이가 없네.
속죄를 한다면서 한 게 게이트를 무너트린 거냐.
잠깐만.
“그 게이트라는 거, 언제부터 있었어?”
“제가 알기로는 한참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렇단 말이지.”
무언가 한 가지 가능성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은 확신할 수 없어. 일단 확인이 필요하다.
그 전까지 이 생각은 그저 염두만 해두도록 하자.
“……가본다.”
이야기도 다 들었으니 식은 차를 마셔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르켈님.”
“왜.”
“……아닙니다. 안녕히 가시지요. 베르, 배웅해드리고 오도록.”
그대로 입을 닫아버린 율리히를 잠시 바라보다가, 방을 나섰다.
“영감.”
배웅을 위해 나를 따라오던 베르셀리우스를 부른다.
“왜 부르냐.”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어서 말이야.”
“무어냐.”
“팬텀이 자기가 다이나토스라고 말했어?”
“그러지는 않았지.”
“그럼 영감하고 율리히가 어떻게 다이나토스에 대해서 알고 있는데.”
“천족 놈들이 그랬었거든.”
천족이 그랬다고?
“게이트를 폭파하기 위해, 팬텀이 자폭했을 때 증오스러운 다이나토스라고 소리를 질렀었다. 그 이후 나와 주인어른은 대마왕님께 다이나토스가 무엇인지 물어서 들었지.”
그런가.
“그나저나 아가씨가 남자 하나는 잘 잡았군.”
“뜬금없이 뭔 소리래.”
“그 남자 같은 힘이라면,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거 아니냐.”
“하.”
베르셀리우스는 팬텀을 고평가하고 있지만, 글쎄올시다.
과연 그 평가가 옳은지 모르겠다.
“게이트 하나 폭파하자고 자폭한 놈이 뭐가 대단하다고.”
나라면 절대로 게이트 하나 폭파하자고 자폭하지는 않았을 거다.
“갈게.”
“그래, 가봐라. 나중에는 아가씨하고 같이 오고.”
“그건 율리히한테 달렸지.”
마계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레베카와 같이 오지 않은 이유야, 지금 율리히와 레베카를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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