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머리가 차분해진다.
나만 그런 건 아닌지 다들 언제 시시덕거렸냐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각자의 스태프와 원드를 꺼내 든다.
“페이 선배는 가운데로 오세요.”
“어…나도 간단한 골렘 정도는 만들 수 있는데? 즉석에서 만드는 거라 많이 약하겠지만.”
“무력이 어느 정도 되나요? 피셔맨 기준으로요.”
“평범한 피셔맨 한 마리 정도는 잡을 수 있을 거야!”
“두 마리는요?”
“…시간은 끌 수 있어!”
“세 마리 이상 만나면 순삭 당한다는 소리네요.”
“그윽….”
정곡을 찔렸다는 듯 자기 가슴을 움켜쥐는 페이.
마구잡이로 흔들리는 모습에 내 마음에도 파문이 일었다.
불안하잖아….
피셔맨은 최소 셋 이상이 뭉쳐 다니는 몬스터라고.
뭐…엄밀히 말해 페이의 골렘이 약한 건 아니다.
기본 실력이 워낙 뛰어나다 보니, 골렘 쪽에 해박하지 않아도 평균 이상의 스펙은 만들어낼 수 있을 테니까.
지금처럼 즉석에서 만들어낸다고 해도 겨우 피셔맨 몇 마리에게 고전할 리는 없을 거다.
약한 건 페이의 골렘이 아니라 페이 본인이라 문제인 거지만.
드워프는 종족 자체가 기본적인 전투력을 타고 난다고 하나, 혼혈인 페이마저 잘 싸우는 건 아니다.
내츄럴 본 제작직이라 그런지, 아니면 움직임을 방해하는 거대한 무게추 때문인지.
페이는 전투와 관련된 모든 요소가 처참한 수준이더라고.
독극물이나 폭탄을 던지면 죄다 빗나가며, 골렘을 조종해도 어째서인지 허공만 휘적댄다.
거기에 성격 자체가 소심해서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거나, 급작스런 상황의 대처 능력이 다소 떨어지기까지.
H&A에서도 그랬고 보아하니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네.
앞으로도 페이를 데리고 던전을 도는 경우가 있겠지만, 어지간하면 전투에는 참여시키지 않는 게 좋으리라.
“페이 선배가 나설 곳은 따로 있으니, 지금은 중앙에서 안전히 따라오세요.”
“응….”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페이. 그런 페이를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우선 길 안내 겸, 로브의 투명화 성능을 시험해봐야 하는 나는 맨 앞에.
이리스는 말했던 대로 우리 모두를 지켜볼 수 있는 맨 뒤.
남은 카를라와 엘리샤는 페이의 양옆에 서는 대형이었다.
“그럼 이제 출발하자. 미리 말했던 루트대로 가면 금방 클리어할 수 있을 거야.”
“네!”
다들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입구를 바라보았다.
푸른 빛이 감도는 돌로 이루어진 큼직한 원형 통로. 밑에는 발목 높이까지 물이 차올라 있었지만 던전 바깥쪽처럼 더러운 물은 아니다.
약간 짭조름하고 비린내 나는 평범한 바닷물이지.
첨벙 첨벙.
통로를 걸을 때마다 바닥에 고인 물이 채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다들 던전 내부라는 생각에 긴장한 건지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분명 하나의 거대한 통로였건만, 조금만 나아가자 두 갈래, 세 갈래 길로 나뉘며 길이 급격하게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이래서 미궁형 던전이 무서운 거다.
리젠형 던전이 시간선이 꼬여 일정 주기로 몬스터가 계속 되살아나 무한 소모전을 강요한다면.
미궁형 던전은 공간이 꼬여 길이 복잡하게 엉켜있는 던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이 던전의 지도 자체를 외우고 있는 내겐 별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본격적으로 내가 아는 H&A의 정보를 활용하기 시작하며 느낀 건데…사실 내가 가진 특성 중 가장 강력한 건 뛰어난 기억력 특성이 아닐까?
정작 지구에서 플레이 할 때는 폰에 띄운 누군가의 약도와, 내 플레이 화면을 몇 번이고 번갈아 봤건만.
지금은 그때의 기억이 선명히 떠올라 척척 길을 찾아다닐 수 있다니.
하지만 이렇게 한참을 걸어도 갈림길과 빈방만 나오자 긴장이 조금 풀린 걸까. 엘리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여긴 던전 바깥과 완전히 다른 환경이네요. 실습용 던전 때는 구조는 달라도 똑같은 숲이었는데.”
“아, 던전 내부는 외부의 환경과 관련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없는 경우가 더 많을 거야.”
“그런가요? 결국 던전이란 건 몬스터 채로 공간을 떼어내 만든 거니 어찌 보면 300년 전의 과거를 보존한 곳이라 할 수 있다고 배웠잖아요 얀델.”
“그건 맞아. 대부분의 던전은 300년 전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니까.”
지금은 멸종한 동식물이나 채굴량이 확 떨어진 희귀 금속을 얻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몇몇 던전은 클리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관리하며 자원을 뽑아먹기도 하는 것이고.
“근데 문제는 이게 꼭 공간을 떼어낸 장소에 던전이 생기는 게 아니라는 거지.”
던전 내부와 바깥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는 굉장히 흔하다.
애초에 던전이란 것 자체가 일대의 공간을 왜곡시켜 떼어내 버리려던 걸 미처 못 버린 경우에 발생하는 거니까.
휴지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더니, 테두리에 맞고 튕겨 나온 꼴이라고 생각하면 알기 쉬울 거다.
여기저기로 흩날리지 않던가. 딱 그 꼴이다.
“카를라랑 갔던 게프 시의 던전은 지하도에 생겼는데 내부는 늪지였어.”
“아. 빅 마우스가 나오던 곳 말씀이시죠?”
“응. 근데 게프시는 300년 전에도 교통 좋은 땅이었으니 늪지 같은 건 없었거든.”
“헤에…그럼 원래 어디였는지도 아시나요?”
“레반틴 제국 외곽에 있는 마녀의 금지 초입이었을 거야. 거기 살던 마녀들은 악신의 수하가 된 빅마우스에게 당해 뿔뿔이 흩어지고, 몬스터만 남은 지역이 되자 던전으로 만든 거겠지.”
과거의 어떤 지역이 던전화 된 건지는 던전 내부를 꼼꼼히 돌면 얻을 수 있는 문서 아이템들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데.
게프 시 던전 구석구석에서는 다 무너져가는 오두막 몇 개와 마녀들이 남긴 쪽지를 발견할 수 있다.
“참고로 우리가 지금 있는 이 던전은 지금은 멸망한 인어 왕국 아틀란티스의 시설이야.”
“아틀란티스라…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구나.”
아련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이는 이리스.
그런 이리스에게 페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이리스 님? 혹시 아틀란티스에 가본 적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되게 그리워하셔서….”
“맞네. 아직 내가 지금의 엘리샤보다 어린 시절에 스승님을 따라 가본 적 있네.”
“스승님의 스승님…어떤 분이셨나요?”
“훌륭한 정령술사셨지. 대전쟁 중에 용감히 싸우시다 전사하셨지만.”
“정령…술사요?”
“그땐 정령이 합법이었으니까.”
어깨를 으쓱이는 이리스.
아니. 장생종이 끼어있으니 이게 이렇게 되네.
상상도 못 한 이리스의 회상에 순간 흠칫한 것도 잠시.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던 이리스가 아쉽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허나 이곳이 어딘지는 잘 모르겠구나.”
“그야 그렇겠지. 여기 배수로거든.”
이리스가 스승을 따라 손님 자격으로 방문했다면, 다른 멋있는 곳을 보여주지 하수도를 보여주진 않을 테니 모를 수도 있지.
내 태연한 대답에 카를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인어는 물속에 사는 종족 아닌가요? 그런데도 배수로가 필요하나요 주인님?”
“당연하지. 오히려 물 속이라 배수로가 더 중요한 거야.”
잘못하면 온갖 쓰레기나 배설물 같은 게 여기저기 떠다니지 않겠는가.
이건 여담이지만 H&A에 인어는 실제로 등장하진 않고 설정 속에만 등장하는 종족이다.
신들의 전쟁 때 물 속이라는 이유로 다른 종족의 지원을 제때 받지 못해, 수중 몬스터에게 왕국이 함락당했거든.
몇몇 인어들이 도망치긴 했는데….
바다로 도망친 인어는 새로이 바다의 지배자가 된 수중 몬스터의 추적 끝에 사냥당했으며.
육지로 도망친 인어는 전란에 이리저리 치이다 결국 전부 죽었다더라.
애초에 인어 자체가 개체수가 적은 소수 종족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아틀란티스도 말이 국가지 규모만 보면 그냥 엄청 큰 도시 수준이다.
물론 국가라 인정받을 만큼 인어가 가진 힘은 대단했다.
적어도 물속에서는 최강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으니, 그리 허망하게 멸망할 곳이 아니었으나….
신들의 전쟁은 악신과 선신이 직접 개입해 치고받던 싸움.
편협한 찬탈이라는 악신이 왕국 전체를 수면 위로 들어 올리자.
물 밖에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던 인어는 물 밖에서도 잘 싸우는 피셔맨 군대에게 몰살당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여긴 이렇게 물이 발목까지밖에 안 오는 건데…아 다들 잠깐.”
말하다 말고 일행들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는 턱을 까딱이며 멀리 떨어진 곳의 방 하나를 가리켰다.
“저긴 몬스터가 있는 방이야. 이리스. 나를 제외한 전원에게 은신 마법을 걸고 따라와.”
나는 로브를 시험해볼 생각이거든.
걸치고 있는 새까만 로브에 마력을 불어 넣었다.
우웅-
내 몸이 풍경에 동화되듯 투명하게 녹아내렸다.
우웅-
내 몸이 풍경에 동화되듯 투명하게 녹아내렸다.
슬쩍 손을 들어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발치에 고인 물을 들여다보아도 마찬가지.
투명화는 제대로 작동하는 것 같네.
당연한 말이지만 이 로브의 기능이 투명화 하나만 있는 건 아니다.
아무렴 이리스가 그래도 상위 마법사인데 겨우 투명화 하나만 새겨넣었겠는가.
이 로브의 진가는 기척 차단에 있다.
투명화가 시전된 그 순간부터 일정 이상의 마나가 차단되며, 평범한 탐지 방법으로는 감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물론, 경지를 넘어선 이들이나 시각 이외의 감각에는 걸리겠지만…이 또한 어느 정도는 해결할 수 있다.
“침묵의 장막이여. 내 발 걸음을 숨겨라. 사일런스.”
이 정도 마나는 밖으로 새어 나가지도 않을 거다. 애초에 이러라고 만든 기능이겠지.
본격적인 공격 마법. 그리고 강력한 보조 마법을 사용하는 게 아닌 이상 마나가 밖으로 새어 나갈 일은 없을 거다.
…여기 수준의 피셔맨 중에 마나를 탐지할 수 있는 녀석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아무튼 마지막으로 인벤토리에서 꺼낸 냄새 제거 포션까지 샤워하듯 머리 위에서부터 뿌린 뒤에야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저 멀리 푸른색 인형 넷이 시야에 들어왔다.
생선을 닮은 대가리와 인간을 닮은 몸뚱이. 다만 전신이 비늘에 뒤덮여 있으며, 그 위에 거대한 소라나 게 껍데기로 만든 것 같은 경장을 걸치고 있는 모습.
저게 피셔맨.
인어를 몰아내고 바다의 지배자 자리를 탐냈던 어인.
뭐, 지금이야 대부분 던전에 갇혀 해적 비스무리한 취급을 받는 몬스터지만.
물고기 그 자체라 둔해 보이는 표정과 달리 코와 눈은 상당히 예민한 놈들이다.
특히 눈의 경우 멀리 있는 걸 잘 보는 게 아니라, 미세한 움직임을 잘 캐치하는 타입이라 여기서부터는 훨씬 더 조심해야 한다.
바닥에 고인 물을 밟지 않도록 주의하며 천천히 접근했다.
한 걸음, 두 걸음…그렇게 한 피셔맨의 바로 뒤에 도착할 때까지 놈들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넷이 옹기종기 모여 무기까지 내려놓고 잡담 중이라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Nina njaa.”
“kuwa mvumilivu.”
“kuwa mvumilivu? kiasi gani zaidi?”
“mpaka apige simu. hutakufa hata hivyo.”
신들의 전쟁이 일어나기 전. 에우렐리아 대륙 전체가 종족별로, 국가별로 나뉘어 자기들끼리 싸우던 때.
그때는 대부분의 종족과 나라가 각자의 언어를 썼다고 한다.
하지만 악신이 강림하여 다 같이 죽게 생기니, 공용어를 만들어 소통의 장벽을 허물었고.
엘프어가 따로 있음에도, 엘리샤와 이리스랑 대화하는 데 문제가 없는 것도 그래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