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무슨 일 때문에 엮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도 거기서 빨리 나와. 오래 있을 곳 아니야.’
재희는 이재석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가지 말았어야 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이 층 욕실에서 몸을 씻은 참이었다. 재희는 수건만 두른 나신으로 그녀의 집 계단을 내려다보며 재차 생각했다. 역시, 미네르바에 가지 말았어야 했어.
사방이 목재 벽으로 둘러싸인 좁은 계단은 오늘 오후에 갔던 커피숍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연상시켰다. 재희는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좁은 계단 위에서, 서로를 마주했을 두 남자를.
재희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몇 번이고 떠올렸던 생각들을 반복했다. 별다른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한영은 그냥, 우연히 재석을 만난 것뿐이다. 커피숍에 따로 한영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모르는, 그냥, 어떤 여자가.
이한영은 절대 오후 네 시 오십 분에 이재석을 만나러 미네르바에 온 것이 아니다.
재희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기 위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걸음은 속도 없이 거실 옆에 붙은 안방으로 향했다. 재희는 한영의 할머니가 쓰던 자개장 앞에 섰다. 액자 위에 먼지가 쌓여 있다. 잠자코 그것을 내려다보다 물 묻힌 천을 가져왔다. 천천히 먼지를 닦아 내며, 그리운 얼굴을 응시했다.
할머니가 보고 싶다.
그녀에게 ‘할머니’란 한영의 외할머니였다. 어렸을 때부터 그녀의 부모님은 바빴다. 그런 부모님을 대신해 한영의 할머니가 그녀를 돌보았다. 한영과 재희는 할머니 아래서 한 남매처럼 자랐다.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동안 한영이 그녀를 여동생처럼 싸고 감싸도, 재희는 이해해 왔다. 김선정의 일로 그의 마음속에 비틀린 무언가가 있음을 감지했을 때도, 슬퍼하고 그 이유를 궁금해하기도 했지만 무작정으로 수용했다. 그에게는 이제 그녀밖에 없었다. 할머니도 돌아가셨고, 부모님은 그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안 계셨다. 아무리 한영이라도, 쓸쓸했을 거라 생각해 왔다. 그 쓸쓸함이 비틀림을 가져왔을 거라고. 그래서- 괜찮다고. 이해할 수 있다고.
“요즘 바빠서 청소할 시간이 없었어.”
문가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재희는 고개를 들었다. 한영이 웃으며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가 잠긴 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오는 소리를 이미 들었다. 그의 인기척이 거실 테이블 앞에서 잠시 멈추는 것도, 곧 이어 부스럭거리는 소음도, 모두 들었다. 한영이 안방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놓치지 않으리란 것도 예상했다.
그래서 그의 등장에 놀라지 않았는데도- 재희는 한영의 웃음기 어린 얼굴을 보자 가슴이 시려 오는 것을 느꼈다.
“다녀왔어.”
“……어서 와.”
한영이 다가와 그녀의 손에서 부드럽게 천을 가져갔다.
“내가 할게.”
기계적이지만 세심한 손놀림으로 한영은 액자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 손길 속에서 그가 사진 속에 머무른 시간을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재희는 더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속속들이 다른 모습을 보여 주는 한영이라지만, 그의 본질이 얼마나 다정하고 자상한 것인지 안다. 얼마나 양심적인지도 안다.
그런데 왜 자신은 너무나 쉽게-.
재희는 생각을 멈췄다.
얼토당토 않는 의심이었다. 말이 안 됐다.
“……한영아.”
“응.”
“강대환 선배 있잖아.”
“…….”
“선배와 어떻게 친해졌어?”
“친하진 않았다니까.”
한영은 그렇게 대꾸하며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딘가 떠보는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해 줘?”
“……응.”
“학기 초에 선배가 내 약점을 눈치챘어.”
“약점……?”
“대환 선배가 사람들 없을 때 다가와서 그러더라. 내가 숨기는 게 뭔지 안다고.”
“…….”
“그렇게 안면을 텄지.”
“……약점이 뭔데?”
“남들에게 알려지면 곤란한 비밀.”
“…….”
“선배는 그걸 비밀로 해 주는 대신 가끔 몰래 다가와 성가시게 굴었어. 그런 사이였어. 내가 전에 말했잖아. 성가신 선배였다고.”
한영의 대답은 가벼웠다. 놀리고 놀림받는 관계였지만 사이가 본질적으로 나쁘지는 않았던 것처럼 얼굴이 다정했다.
아마 이틀 전의 마재희였다면 그 얼굴 앞에서 슬픔부터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재희는 달랐다.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현실을 앞둔 사람처럼, 두려움부터 느끼고 있었다.
“……누가 그랬을까?”
재희는 차마 한영을 보지 못하고 물었다. 할머니의 사진을 보며 말했다.
“……한영이 너는 어떻게 생각해? 재석 선배가 대환 선배의 거처를 누설했을 거라고 생각해?”
“대환 선배의 거처를 알고 있던 사람이 두 사람뿐이라고 들었어. 정말 호명 선배와 재석 선배만 알고 있었다면, 그 둘 중 하나에서 샜겠지.”
그녀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재희는 다시 물었다.
“……그래서 너도 재석 선배라고 생각해?”
“개인적으로는, 그래.”
그런 이재석을, 너는 왜 몰래 만난 거야?
재희는 숨이 막혀 오는 기분에 늘어트리고 있던 손을 주먹 쥐었다.
그녀가 어떤 심정인지 정말 조금도 몰랐을까. 재희는 알 수 없었다. 한영은 어떻게 저렇게 담담하게 일상을 물어볼 수 있는 걸까.
“오늘 작문 수업이었지? 어땠어? 또 교수님이 괴롭혔어?”
“……아니. 오늘 도망갔어.”
재희는 준비한 대답을 애써 차분히 내놓았다.
“친구들과 놀러 갔어?”
“아니. 경신이 생일이 얼마 안 남아서…… 그래서 선물 사러 갔었어.”
“그랬구나. 그래도 의외네. 이제껏 수업 빠진 적 한 번도 없더니.”
“……그냥, 오늘은 작문 교수님 보기 싫었어. 맨날 데모하는 친구들한테 뭐라고 해서…….”
“그랬구나.”
“…….”
“그래서 마음은 좀 풀렸어?”
“……응.”
재희는 화제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었다. 그러는 중에 문제의 사진을 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재희는 감히 그 액자를 화제 삼지는 못했다. 한영이 언제나 엎어 놓는 액자는, 한영의 옛 상처를 암시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문제는, 한영이 언제나 재희의 시선에 예민하다는 점이었다.
“이 사진을 엎어 놓는 이유가 궁금해?”
재희의 시선 끝을 확인한 한영이 액자를 집어 들었다.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 재희를 알았던가. 한영이 그녀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그렇게 보지 마.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니까.”
“……내가 뭘 생각하는데?”
“어머니 때문에 사진을 피하는 거라 생각하겠지, 아마.”
“…….”
“상현이도 그런 오해를 하고 있더라. 내가 아무 여자나 만나고 다니는 이유가 어머니 때문이라고. 어머니가 날 할머니 집에 맡기고 떠나서, 그래서 내가 상처받아 유난히 여자를 밝히는 거라던가.”
그렇게 말한 한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들은 것처럼 웃고 있었다.
“……그럼 진실은 뭐야?”
한영은 먼지를 다 닦은 천을 접으며 미소 지었다.
“재희야, 사진 속에는 어머니만 있는 게 아니잖아.”
“……아버지를 말하는 거야?”
“그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며. 너 태어나기도 전에 병으로 일찍 돌아가셔서…….”
“나와 너무 닮았으니까.”
“…….”
“그래서 보기 불편해. 너무 닮아서.”
그 말은 무슨 뜻일까.
더 묻지는 못했다. 한영은 거기까지라는 듯 몸을 돌리고 있었다.
“씻을게. 청소는 내가 나중에 할 테니까, 너는 쉬어.”
“……나도 같이 씻을래.”
“그럴래?”
이제 그 정도 대화는 자연스럽게 오가는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서로의 몸을 다 보고 느꼈는데도, 왜 한영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자꾸 생기는 걸까.
“그런데 재희야.”
“응.”
“오늘 선물 사러 간 곳이 신촌이었어?”
재희는 소매에서 팔을 빼내며 고개를 숙였다.
“응.”
“그랬구나.”
“……그건 어떻게 알았어?”
“널 봤다고 한 사람이 있어서.”
“아…….”
재희는 그게 누구냐고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자연스러웠으니까. 그러나 왜 하필 그때였을까. 그녀의 시야에, 거실에 있는 테이블이 들어온 것은.
그녀가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없던 물건이 테이블 위에 있었다.
갈색의, 서류 봉투가.
“왜?”
“……아니. 그냥.”
지나치게 오래 봉투를 보았다. 재희는 그런 자신을 깨닫고 급히 시선을 돌렸다. 무표정하게 그녀를 보고 있던 한영이 금세 잔잔히 미소 지었다.
“……우편이 왔더라고.”
“응…….”
재희는 상의에서 머리를 빼내는 척 얼굴을 숨겼다. 더 표정을 숨길 자신이 없었다.
한영은 일찍부터 거짓을 은은한 향수처럼 몸에 두르고 다녔다. 그 향기를 맡지 못하는 이, 아무도 없었다. 단지 그 향이 정확히 무엇인지 짚어 내는 이가 없었을 뿐이다. 한영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이들은 그 향을 잘 학습된 매너로 명명하고, 한영의 이중성을 흠모했다.
재희도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영이 새로운 면면을 보여 줄 때마다, 그녀가 당혹해하면서도 본심 깊은 곳에서는 기뻐하고 있었던 이유는.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달랐다.
이제 그 이중성에 숨은 깊숙한 이면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가 그녀 앞에서 눈 한번 깜빡이지도 않고 거짓말을 뱉을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공포마저 느꼈다.
“이번 고민은 오래가네.”
재희는 눈을 깜빡거리며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아.”
욕실에 찬 뜨거운 수증기가 한영의 피부를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완벽한 나신으로 욕조의 턱에 앉아 있는 그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평소처럼 무심히 웃는 것도, 가만히 관찰하는 것도 같은 시선이었다.
그의 젖은 머리카락에서 뚝, 물방울이 떨어졌다. 욕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그녀의 볼 위였다. 재희는 그것을 닦는 척 시선을 피했다. 씻겨 주겠다고 먼저 제안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런데도 다른 생각에 빠지다니.
“……미안해.”
“괜찮아.”
한영은 다정히 사과를 받고는 말했다.
“내가 그냥 할게.”
“……아니야. 내가 할래.”
재희는 비누 거품이 묻은 샤워 타월을 다시 움직였다. 묵묵히 한영의 가슴을 타월로 문질렀다. 언제나처럼 탄탄한 몸이었다. 공부만 하는 학생치고는, 이상할 정도로 단련된 몸.
“왜?”
“……운동하는 걸 한 번도 못 봤다는 생각이 들어서.”
“새벽에 하니까.”
한영이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 주며 답했다.
“……무슨 운동 해?”
“풀어낼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뭘 풀어내?”
“재희야.”
한영이 그녀를 부르다 말고 나직이 웃었다.
“잠기지도 않은 창문 두 개만 열고 넘어가면 네가 있어.”
“…….”
“너는 여태 그 의미를 몰라서 계속 창문도 안 잠그고 잤겠지만…… 이제는 알 때도 됐잖아.”
재희의 손이 멎었다. 멍하니 눈을 들었다.
한영과 시선이 부딪친 순간, 오해하면 안 된다고 속으로 되뇌려 했다. 그러나 홀린 듯이 올려다보는 그녀를 향해, 한영이 눈을 슬며시 휘었고- 재희는 그것이 유혹이라는 것을 불쑥 깨달았다.
현혹이었다.
그녀의 머리를 번다하게 채우던 모든 고민들을, 단숨에 밀어내 버리는.
“……오해하게 만들지 마.”
재희는 한영의 눈에서 시선을 못 뗀 채 중얼거렸다.
“……너 가끔, 정말 나빠. 그러지 마.”
“그러게.”
한영이 낮게 웃었다.
“내가 말했잖아. 이기적이라고.”
방황하던 그녀의 손을 한영이 잡았다. 그 손을 끌고 내려가 제 성기를 쥐게 했다. 타월이 툭 발밑으로 떨어졌지만, 어느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한영이 그녀의 손과 함께 성기의 기둥을 잡고 흔들었다. 그녀의 손바닥이 닿자마자 불끈 일어났던 물건은 금세 빳빳해졌다.
재희는 달아오르는 얼굴을 느끼며 시선을 내렸다. 한영이 흥분했음을 알리는 표식을 마주했다. 아랫배를 찡하게 번지는 감각을 느낀다. 그녀는 이제 한영의 흥분을 함께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열락을 반기는 몸이 되었다.
그러도록, 지난 시간 이한영은 마재희의 몸을 개발해 오지 않았나.
“……난 네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무방비하게 있을 때를 꽤 좋아하는 편이지만.”
속삭이는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러나 재희의 손을 그러쥔 채 위아래로 흔드는 힘은 그악했다.
“앞으로는 아닐 것 같아서.”
“아…….”
“그러니까 내게 집중해, 재희야.”
한영이 웃으며 그녀의 목덜미를 감쌌다. 재희는 그대로 끌려가며 가까워지는 한영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기이한 불꽃이 불붙은 그 눈동자였다. 지독한 불꽃을 숨기려는 것처럼, 한영이 눈을 휘며 웃었다.
그가 키스하기 전, 속삭였다.
“날 혼자 두지 마.”
무엇이 그렇게 한영을 불붙게 했는지 모른다. 재희도 자신이 왜 그렇게 흥분했는지 몰랐다. 그녀는 한영의 발기에 흥분하고, 또 한영은 그녀의 흥분에 동조해 사정했다. 그리고 다시 발기했다.
제대로 거품을 씻어 내기는 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몇 번이고 입을 맞추고 그녀의 몸을 애무하는 한영 때문에 욕실 문을 나섰다는 자각도 희미했다. 한영이 그녀의 몸을 수건으로 닦아 주었던 것도 마찬가지로 어렴풋했다.
이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 그런 재희를 붙잡아, 한영은 너무나 쉽게 안아 올렸다. 재희는 놀라지도 않고 코알라처럼 한영의 허리에 다리를 둘렀다. 엉덩이에 닿는 딱딱한 감촉을 감지하며 먼저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성기는 계단을 오르는 내내 그녀의 엉덩이를 찔렀다. 한영은 전과 달랐다. 그의 성기가 잔뜩 젖은 음순 사이를 정확하게 찔러도 회피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예감했다. 오늘의 한영은, 단순히 그녀의 몸을 애무하는 수준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목적지는 침실이 아니었다. 이 층, 한영의 서재였다. 한영이 그녀를 책상 위에 앉히자, 재희는 다리를 벌렸다. 그가 그 사이에 바로 자리를 잡고, 그녀의 가슴에 이를 세웠다. 그는 게걸스레 그녀의 가슴을 빠는 그 와중에도 한 손을 옆으로 뻗고 있었다. 그 손이 책상 한편에 놓여 있던 가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은 작은 상자였다.
재희는 그것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신음했다. 한영의 다른 손가락이 순식간에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아…….”
손가락 하나뿐이었다. 그럼에도 재희는 기뻐 몸을 파르르 떨었다.
한영의 손가락은 천천히, 하지만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재희의 민감한 내벽은 능수능란하게 적응했다. 손가락이 조만간 다른 것으로 대체되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예감한 것처럼 발씬거리며 손가락을 조였다. 재희의 가슴을 빨고 있던 한영의 입술에 미소가 번졌다.
천천히 늘어난 손가락이 순식간에 네 개로 늘어난 순간, 그녀는 그조차 버거워 헐떡였다. 재희의 목에 점점이 키스하던 한영이 애석하다는 듯 눈을 휘었다. 앞으로도 네가 아플 일은 많이 남았다는 듯이. 평소에 재희가 손끝 하나 베이기만 해도 구급약품을 꺼내 들던 남자는 지금 이 자리에 없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질척거리는 소음 속에서 한영은 잊지 않고 속삭여 줬다.
“아프거나, 그만두고 싶을 때는 언제든 말해.”
그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정했다. 반드시 말해야 한다고.
“……응.”
그러나 대답과 달리, 재희가 결단코 말하지 않으리라 속으로 다짐한 것을 알까. 한영의 목에 팔을 두르며 다리를 활짝 벌리는 재희의 눈동자 속에서 그 결의를 느꼈는지도 모른다. 한영이 희미하게 웃음을 띠었다. 그리고 다시 진한 입맞춤을 퍼부었다.
“으응…….”
뭉개지듯 희미한 신음을 흘리며 재희가 허리를 휘었다. 촘촘하던 구멍이 녹진하게 풀어진 것을 느낀다. 어서 한영이 들어와 주기만을. 애가 타 재희가 한영을 바라볼 때였다.
한영이 입에 무언가를 문 채 뜯고 있었다. 이윽고 그것을 성기에 씌우는 것을 본 순간, 재희는 바라 마지않던 일이 곧 일어나리란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기다리던 순간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재희는 그 순간 저도 모르게 당황했다. 그러나 한영은 더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가 자리를 잡았다. 재희가 다리 사이에 뜨거운 것이 닿았다, 느낀 찰나였다.
“아……!”
재희는 놀라 소리쳤다. 미간을 좁히며 웃는 한영의 얼굴이 보였다. 그도 괴로워 보였다.
그러나 정작 재희는 한영의 성기를 볼 때마다 우려했던 것만큼의 고통을 느끼지는 않았다. 물론 아팠다. 입구는 그렇게 풀어 주었는데도 찢어진 것처럼 쓰렸다. 그럼에도 아득바득 밀고 들어오는 거대함에 겁이 난다. 그렇지만-.
헐떡이며 한영을 올려다본 재희는 어떻게든 힘을 빼려 노력했다. 그의 목에 두르고 있던 팔에 힘을 주어, 그를 끌어당겼다. 한영은 거스르지 않고 그녀에게 몸을 숙였다. 입술이 맞닿았다. 재희는 한영이 그랬던 것처럼 부드럽게 아랫입술을 빨아 주었다. 맞댄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휘어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재희는 안다. 이한영이 그녀의 고통을 보며 같이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견딜 수 있었다. 오히려 더 그가 들어와 주기를 바랐다. 재희는 그의 엉덩이 위에 두르고 있던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 내벽에도 힘이 들어갔는지, 한영이 그녀의 귓가에 신음을 흘렸다.
“……그만 조여.”
“……아…… 으응…….”
“조절이 안 되나 보구나.”
한영이 잠시 멈추었던 몸을 다시 앞으로 밀어붙이며 중얼거렸다.
재희는 멋대로 움찔거리는 내벽을 느끼며 앓는 신음을 흘렸다. 진저리치듯 고개를 흔들었다. 한영은 끝이 없었다. 어디까지 들어와야 멈추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한영아…….”
“다 들어갔어.”
한영이 그녀의 귓불을 약하게 깨물고 말했다. 확인해 봐.
재희는 가쁜 숨을 흘리며 고개를 내렸다. 탄탄하게 조여진 한영의 아랫배 아래, 그의 사타구니가 그녀의 밑과 완벽히 맞물려 있었다. 서로의 음모가 뒤엉켜 있고, 그 거대하던 성기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재희는 그 모습에 경이부터 느꼈다. 환희마저 느꼈다. 통증은 어느샌가 희미했다. 그녀는 그저 결국 여기까지 왔다는 순간에 감격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한영은 그런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재희는 그것을, 놀랄 정도로 부드럽게 빠져나가는 한영의 몸을 통해 깨닫는다.
아. 재희가 움찔 몸을 조이며 신음을 흘릴 때였다. 쑥, 한영의 몸이 다시 밀고 들어왔다.
정확히, 그녀가 좋아하는 지점을 쳐올리며.
“아……!”
뭉근히 퍼지는 쾌감에 자지러지던 바로 그 순간, 재희는 모든 과정을 이해했다. 지난 시간, 이한영이 지불해야 했던 긴 가르침과 인내는, 전부 다 이 순간을 위한 것이리라고.
한영이 속삭였다.
“……아프진 않을 거야. 그렇지?”
재희는 덫에 빠진 기분을 느끼며 한영을 아연히 올려다보았다.
그는 사납게 웃고 있었다. 그동안의 인내가 그럼, 제게 어떤 대가도 주지 않을 것 같았느냐 묻는 것처럼.
언젠가 한영은 말했다. 어차피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서로 맞춰 가며 배워 가는 것이 성행위라고. 재희는 그동안 한영이 어떻게든 삽입을 피하며 그녀의 몸을 애무할 때마다, 그 말을 떠올리곤 했다. 이건 서로 맞춰 가는 과정이야. 한영이는 내가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려 주는 거야. 그렇게.
그러나 그런 게 아니었다. 아니, 어느 정도는 맞을 것이다. 그러나 재희는 이제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보다 더 깊은 곳에 숨은 이한영의 의도를 목격하고 있었다.
이한영은 그저, 그와 같은 수준으로 그녀를 끌어내리려 했던 것이다.
배려가 아니다. 이한영은 그가 앓고 있는 열락 속에 마재희도 빠트리기 위해, 한번 빠지면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치밀한 덫을 설치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잠깐, 잠깐만…… 한영아, 잠깐……!”
말을 못 마치고 재희는 몸을 떨었다. 허리가 활처럼 휘어지고, 그녀의 몸이 바짝 그를 조였다. 그녀의 귓가에서 들리던 한영의 숨소리가 일순 끊겼다. 허리를 움켜쥐고 있던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지만, 재희는 거의 느끼지 못했다. 감은 눈앞이 점멸하고 있었다. 두 번째였다. 한영은 내내 단 한 번도 사정하지 않았는데, 그녀 홀로 오르가슴을 느낀 것이.
한동안 부드럽게 치고 빠지며 서서히 그녀의 몸을 달구더니, 이한영이 악랄한 모습을 기어코 드러냈다. 그는 그녀의 절정을 배려하지 않았다. 프로그램 된 기계처럼 계속해서 전진과 후진을 반복했다. 그 값에 야성만 입력된 것처럼, 한영은 동물적으로 몸을 밀어붙였다.
재희는 거의 울부짖다시피 하며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러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허리를 움켜쥔 팔은 미동도 않았고, 오히려 더 죄어들었다. 착, 착, 착, 살 부딪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재희는 어느 순간 자극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성기가 마구잡이로 성감대를 내리눌러 무엇이 진정한 절정인지 알 수 없었다. 모든 삽입이 절정이었다. 엉망이었다.
이러다 미칠지도 모를 것 같단 두려움에 재희는 헐떡이며 눈을 들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몰두한 한영의 얼굴이 보인다. 난잡하게 흔들리는 야성적인 몸이 보였다. 계속해서 힘을 쓴 근육이 그새 더 사나워져 있었다. 조금의 방만함도 없는 근육질의 복근을, 그녀는 어떻게든 밀어내려 애썼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면서도 그 복근이 들썩일 때마다 눈에 비치는 시커먼 성기에 목말라하고 있었다. 눈이 붙잡힌 듯 들락거리는 성기를 주시한다. 입술이 바짝 말라 그녀는 입술을 핥았다. 귓가에 한영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재희는 그 웃음소리를 들은 순간 위험을 감지했다.
“나…… 나, 아파…….”
재희는 애원하는 눈빛으로 한영을 올려다보았다. 막 아슬아슬하게 고삐를 풀고 있던 한영이 그 말이면 다시 그 줄을 옭아맬 것이라 본능적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한영은 그녀의 예상대로 움직임을 멈춰 주었다. 강하게 그녀의 안을 쳐올린 채로.
“아……!”
“……내가.”
그녀의 안에 몸을 묻은 채 한영이 사납게 웃었다.
“……네가 아파하는지, 좋아하는지도 모를까 봐?”
“……진짜, 나 진짜, 아파…….”
“거짓말하지 마.”
“진짜, 진짠데…….”
억울해진 재희가 결국 발간 눈가를 적시자, 한영은 왜였는지 더 즐거워했다.
“……그래, 진짜였구나.”
한영이 잔잔히 웃으며 물었다. 아픈 데가 어딘데? 그리고 그는 마치 이곳이냐 묻는 것처럼, 성기의 끝으로 그녀의 성감대를 후비듯 문질렀다.
재희는 헐떡헐떡 뒤로 자지러지며 간신히 대답했다.
“등이, 허리가…… 책상이 딱딱해서 아파…….”
“아…… 그쪽.”
그쪽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한영이 미안하다며 눈을 휘었다.
“그랬구나.”
그 특유의 부드러운 추임새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지만, 재희는 방심해선 안 된다는 걸 바로 알았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 화려하게 웃고 있었으므로.
그가 재희의 몸을 번쩍 안아 들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그의 몸에 매달렸다.
“읏…….”
그녀의 안에 있던 성기가 반쯤 빠져나갔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그의 허리에 발을 감고 있던 재희는 곧장 다시 밀고 들어오는 성기를 느꼈다. 그녀는 작살에 꿰인 것처럼 몸을 파드득 떨었다.
한영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들썩들썩 몸이 위아래로 흔들린다. 재희는 앓는 신음을 흘리며 그의 어깨에 볼을 문질렀다. 그는 걷는 중에도 의도적으로 그녀의 음순 사이를 문지르듯 빠져나가고 들어오길 반복하고 있었다. 정확히, 그녀가 좋아하는 그 지점을.
“한영아…….”
재희는 자신이 무엇을 바라고 그를 그렇게 부르는지 몰랐다. 몸이 마치 반복 학습을 한 것처럼 내벽을 조였다. 그것을 느낀 한영이 낮게 웃었다.
한영이 그녀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을 때, 재희는 널브러지듯 침대로 누웠다. 그 순간에도 한영은 긁듯 마찰하고는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갔다. 그것이 유혹이라는 것을 안다. 앞으로 계속 이어질 행위를 예고하는 것임을 안다.
재희는 지친 눈을 들어 한영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녀 앞에 버티고 선 채 손에 들고 있던 콘돔 상자를 침대 한편에 던져두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이다. 마치 어떻게 요리하면 좋을지 냉정히 고민하는 요리사처럼.
그래서 재희는 붉어진 눈매를 내리뜬 채 말없이 다리를 벌렸다. 젖은 비부가 공기와 닿으며 서늘해지는 것을 느낀다. 한영이 진하게 미소 지었다. 그가 침대 위로 올라왔다.
삽입은 부드러웠다. 한영의 팔뚝과 허리를 잡은 재희의 손가락들이 움찔움찔 곱아들었다. 재희는 자신이 처음에 얼마나 한영의 것을 부담스러워했는지 잊은 것처럼 중얼거렸다.
“……좋아.”
천천히 성감대를 스치고 들어오던 한영이 그 말에 웃는다. 부드럽게 허리를 움직이며 한영이 물었다.
“좋아?”
“……응.”
“그럼 다리 더 벌려 볼래.”
재희는 그 말대로 했다.
한영이 그녀의 귓가에 웃음을 흘린다. 그 목소리만으로도 온몸이 곤두선다. 한영은 재희의 새하얀 피부에 열이 올라 있는 광경을 즐거운 듯 지켜보았다. 관조하듯 내려다보는 시선과 달리, 허릿심은 조금도 늦추지 않은 채.
새로운 길을 개척하듯 움직이던 성기가 서서히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난폭함을 내리누르듯 조용하고도 끈질기게 파도질 치다가도, 간혹 예고 없이 들이닥친 해일처럼 안쪽을 강하게 때렸다.
그 모든 행위에 고통은 없었다. 그런데도 재희는 언젠가부터 비명을 흘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한영이 기뻐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입맞춤이 얼굴 곳곳으로 떨어졌다.
솟구치는 애정을 참기 어려워 그녀도 한영의 목에 팔을 둘렀다. 언제 도망갔냐는 듯 내벽을 조였다. 그녀의 아랫입술을 빨고 있던 한영이 신음을 흘렸다. 신음의 말미에 낮은 웃음이 섞여 들었다. 음란한 웃음이었다. 그가 몸을 물렸다, 다시 깊이 삽입해 왔다.
책상에 몸을 걸친 상태도 아니었고, 푹신한 침대 위였다. 한영의 몸은 리드미컬했고, 그녀의 필요에 따라 움직일 줄 아는 영악함이 있었다. 재희가 녹진하게 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그는 서서히, 아주 서서히, 속도를 올려 갔다. 힘을 실어 갔다.
그리고 종래에는 쿵, 치듯 그녀의 안쪽을 올려 찍기 시작했다.
그즈음 그녀는 부끄러움도 완전히 잊어버렸다. 교성을 내지르며 온몸을 조였다. 한영이 그 조임에 기뻐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흐트러지는 그의 숨결로, 그가 온몸으로 뿜어 대는 열기로 알 수 있었다.
찡그리듯 눈웃음을 흘리며, 한영은 퍽, 퍽, 연달아 재희의 안쪽을 찧었다. 점점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가 되자, 재희도 엉망진창으로 그를 조였다. 푸는 것은 없이 있는 힘껏 조이기만 하는 서투른 속살에, 한영이 허리를 흔들면서도 이를 악물었다.
부딪치는 피부와 치골이 아프기도 했지만, 고통보다 은근히 피어오르는 감각이 더 강렬했다. 한영이 안쪽을 강하게 때릴수록, 뭉근하니 아랫배에 퍼지는 열감이 있었다. 한영이 깊이 파고들어 올수록, 강하게 내벽을 찌르고 때리고 성기 끝을 문댈 때마다 감각은 점차 강해졌다. 몸이 기대감으로 수축하기 시작했다. 한영의 허리에 감긴 다리가 바짝 조였다.
그녀는 헐떡이며 한영에게 입을 맞추었다. 한영의 입술이 휘어지는 것을, 맞댄 입술의 감촉으로 느꼈다. 그 순간, 한영의 움직임이 더할 수 없을 정도로 거세졌고, 재희는 익숙해진 오르가슴이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
눈앞이 번쩍이는 절정의 순간에, 재희는 자신이 얼마나 날카로운 비명을 흘리는지 몰랐다. 한영의 등을 긁어 놓고 있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한영이 재희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그녀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짜내기라도 하듯 그녀의 몸 안에다 묻는, 남성 하나뿐이었다. 토정을 반기듯 쥐어짜는 자신의 몸뿐이었다. 악착같이 그녀의 허리를 옥죄는 한영의 갈퀴 같은 손뿐이었다.
그리고 귓가에 들리는 한영의 신음- 그뿐이었다.
“……한 거야?”
절정의 변곡점을 막 찍고 내려오면서도, 재희는 한영의 상황을 물었다.
한영이 조용히 웃었다.
“했어.”
“사정했다고……?”
“그래.”
“……잘 모르겠어. 느낌이…….”
“콘돔 때문에 그럴 거야.”
달아오른 몸의 열기를 쉽게 꺼트리지 않겠다는 듯 한영은 느긋이 움직였다. 그 잔잔한 움직임만 보면 사정을 한 것은 맞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재희는 한영의 눈을 보며 의심했다. 사정했다는 사람의 눈이 왜 아직-.
“계속하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될 거야.”
“……아.”
그 순간 재희는 모든 것을 잊고 안도했다.
다음이 있는 거구나.
다음이, 있어.
그동안의 불안은 이것 때문이었을까. 모든 과정을 다 밟은 후에, 한영이 가르침은 끝이라 말하는 순간을 두려워했던 걸까.
“왜 그래.”
한영이 허리를 느리게 움직이다 말고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재희는 중얼거리듯 그간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끝까지 하면 그만둘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줄 알았어.”
한영이 잠잠히 웃었다.
“어쩌다 그런 오해를 했어?”
“……학교에 그런 소문이 있어서…….”
“다른 여자 없어, 재희야.”
“…….”
“네가 다 배웠다고 하기 전까지는 여자 만날 생각 없어.”
재희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응. 알아.”
매달리듯 한영의 몸에 엉겨 붙었다. 한영이 더 안아 줬으면 좋겠다. 아무 생각도 못 하게, 계속. 오래도록.
“……쉽게 믿어 주는구나.”
귓가에 울리는 한영의 고요한 음성 앞에서, 재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한영을 붙잡은 손에 힘만 주었다.
다시 한영이 낮게 중얼거렸다.
“……오해가 금세 풀려 다행이네.”
한영이 무슨 얼굴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재희는 눈을 감았다.
* * *
어느 때보다 피곤했는데도 눈이 뜨였다. 깊은 새벽이었다.
재희는 옆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언제고 꿈에 그리던 순간이 그곳에 있었다. 나신의 이한영이, 무방비하게 그녀의 옆에 누운 채 잠들어 있는 순간.
재희는 말없이 그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천사 같은 얼굴이었다. 조금이라도 이 순간을 연장하고 싶어지는 아름다운 얼굴.
그러나 재희는 천천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계단을 밟아, 일 층 거실로 내려왔다.
거실은 오후와 그대로였다. 같이 씻겠다고 욕실에 들어가느라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들, 어수선하게 열린 안방 문과 욕실 문,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갈색의 서류 봉투까지.
“…….”
재희는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이재석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무슨 일 때문에 엮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도 거기서 빨리 나와. 오래 있을 곳 아니야.’
재희는 어떻게든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양호명이 이를 악물고 뱉어 낸 고백을 들은 이후 어쩌면 이재석이 정말로 프락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왔지만- 그 의심에 증거는 없었다. 이재석을 잘 아는 양호명의 의견, 그것 하나만으로 진실을 판단할 수는 없는 법이다.
말과 소문, 추측은 혐의만 더할 뿐, 진실이 될 수는 없다.
그러니 이재석이 미네르바의 통로 계단에서 한영을 만난 일은- 별것 아닐 것이다. 다른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프락치로 완전히 낙인찍힐 뻔했던 순간에, 이재석을 유일하게 믿어 주고 도와준 사람이 한영이니까-.
재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니까- 그때 일이 고마웠을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서울을 뜨기 전에 한영을 만나려 했던 것이다.
‘너도 거기서 빨리 나와. 오래 있을 곳 아니야.’
연거푸 되풀이되는 재석의 마지막 목소리에, 재희는 진저리 치듯 걸음을 옮겼다. 거실 테이블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어차피 우편물이다. 한영이가 우편물이라고 했으니까. 차라리 안을 보고 확인하는 거야. 그래서 지금 이 추적추적한 기분을 빨리 떨쳐 내는 거다. 재희는 손을 뻗었다. 봉투를 집어 들었다.
갈색 서류 봉투는 얇았다. 단단히 봉해져 있었다. 집어 올리면서 재희는 저도 모르게 그 윤곽을 더듬어 만져 보았다. 안에 든 것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종이 뭉치였다. 재희는 금세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사진.
“…….”
그녀의 손에서 떨어진 봉투가 탁, 테이블에 부딪쳤다. 그러나 재희는 그것을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그겁니까?’
‘어.’
‘필름은요?’
재희는 한참을 말없이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만약 이것을 열어, 안에 있는 것을 확인한다면.
그 이후는 어떻게 되는 걸까.
“…….”
팔목에 남은 붉은 흔적이 문득 시야에 들어온다. 한영이 행위 중에 빨아들이며 남긴 울혈이었다. 그 흔적을 본 순간 재희는 저도 모르게 강하게 원했다.
한영이와 더 계속 있고 싶어.
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저, 오늘 같은 밤이 반복되기만 한다면.
천천히 재희는 몸을 일으켰다. 봉투는 원래 있던 자리 그대로 두었다. 그대로 등을 돌아 계단으로 향했다. 한영이 있는 이 층 침실로 향했다.
최대한 침대가 흔들리지 않게 하려 노력했는데, 소용없었다. 재희가 제대로 눕기도 전에 한영이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재희의 허리를 휘어 감고는,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내가 깨웠어?”
“아니.”
그 목소리에, 졸음기는 전혀 없었다.
숨죽인 채 재희는 한영의 가슴팍을 보았다. 눈앞에 있는 흉곽 때문에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한영아.”
“응.”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괜찮아, 재희야.”
한영은 단지 그렇게만 말했다. 그녀의 머리에 다정히 입을 맞추며.
괜찮아.
그 말은 한영이 어렸을 때부터 재희에게 하던 입버릇이나 다름없었다. 마재희가 다른 이들에게 상처받아 멍하니 홀로 앉아 있을 때마다, 한영은 그녀에게 다가와 그렇게 말해 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재희야.
“……응.”
재희는 그래서 어린 시절의 마재희처럼 답했다. 한영이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거다. 언제나 그랬다. 한영이 괜찮다고 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으니까. 모든 문제가 다 잊혔으니까.
그러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 * *
한영은 모든 게 처음인 재희를 배려하고 있었다. 처음 사내의 몸을 받아 낸 재희의 몸이 단순히 가벼운 근육통 수준에서 후유증을 치른 것도 그 배려 덕분이었다. 그러나 처음 이틀은 운신하기가 힘든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재희는 학교도 안 나가고 꼼짝없이 한영의 집에만 있었다.
한영은 그녀를 알뜰살뜰 보살폈다. 뭉친 근육을 주물러 주고, 근육통에 좋은 약을 발라 주었으며, 그러다 자신의 성기를 움켜쥐고 수음했다. 그랬다. 이한영은 처음인 마재희를 분명히 배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재희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조바심을 냈고, 한영이 아침에 학교에 갈라치면 붙잡고 싶어졌다. 한영은 칼같이 시간 맞춰 등교했다. 마치 학교에 가야 할 중대한 사명이 있는 사람처럼.
결국 재희는 조급함을 이기지 못했다. 사흘이 되는 날, 일찍 들어온 한영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것만으로도 전하고자 하는 말은 충분히 전해졌다. 그러나 한영은 간이라도 보려는 것처럼 재희의 성기를 애무했다. 무리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도 하루가 지나서야 그녀를 안았다. 그러고 다시 하루의 간격을 휴식으로 두는 것이었다. 그러면 재희는 그 하루가 멀다 생각하며 다시 한영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다른 이였다면 그런 그녀를 귀찮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재희는 알고 있었다. 재희가 붙잡으면 붙잡을수록, 이한영의 인내심이 짧아지고 있음을. 게다가 한영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다정하지만은 않은 사람이었다.
이한영은 사실, 자기 필요할 때만 다정해진다.
“……재희야, 왜 도망가.”
한영이 재희의 허리를 잡아 끌어 내리며 물었다. 어조 끝을 올리지 않는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득하다.
재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한영은 평소에도 심술궂을 때가 종종 있기는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괴로워?”
한영이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속삭이듯 물었다. 숨에 섞인 헐떡임이 뜨겁다. 웃음기 실린 목소리와 다르게 뒤에서 재희의 엉덩이를 가르고 파고드는 몸짓은 사납다. 제멋대로 날뛰는 것 같으면서도 모든 움직임은 재희가 좋아하는 곳을 겨냥하고 있다.
재희는 대답조차 못하고 다시 한번 허리를 바르르 떨며 절정에 올랐다. 처음과 다르게 숱하게 오르내린 열락의 고개는 많이 깎이고 낮아진 것일지도 모른다. 뭉근하니 이어지는 오르가슴에 재희는 끙끙거리며 이불을 그러쥐었다. 한영이 뒤에서 낮게 웃는다. 목덜미와 어깨가 이어지는 부근을 핥으며 한영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잘 따라오네.”
행위 내내 그녀가 좋아하는 곳을 빠짐없이 핥아 주던 한영을 쭉 지켜봐 왔기 때문에, 재희는 지금 한영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알고 있었다. 웃고 있겠지. 그녀가 좋아하는, 예의 그 눈웃음으로.
한영이 재희의 몸을 돌려 눕혔다. 삽입한 채 자세를 바꾸는 통에, 재희는 다시 허리를 휘며 신음을 흘렸다. 그렁그렁한 눈으로 재희는 한영을 올려다보았다. 한영이 만족한 듯 웃고 있다. 아니, 아직 만족은 하지 않은 것 같다. 찬찬히 얼굴을 훑는 시선이 여전히 뜨거웠으니까.
문득 재희는 제 얼굴이 온통 젖어 있음을 깨달았다. 엉망인 얼굴을 옆으로 돌려 시선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그 전에 한영이 재희의 입에 키스를 내려 붓는 통에 불가능했다.
양물을 난폭하게 휘두르는 자신은 잊으라는 듯 한영은 부드럽게 그녀의 혀를 빨았다. 그러고는 웃으며 중얼거리는 것이다. 예쁘네. 재희야, 예뻐.
“……아.”
재희는 그 순간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이전에 한영이 그녀가 화장한 모습을 보고 똑같은 말을 했던 것이 부지불식간 떠올랐던 것이다.
그때도 그는 그녀에게 예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철저히 제어된 단어와 어조, 억양 속에서 재희는 상처를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맞대고 있는 살 때문일까, 아니면 한영이 정욕 때문에 방심한 탓일까.
재희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한영의 진심을.
“……좋아.”
그래서 재희는 한영의 목을 감싸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마치 한영이 주는 감각에 단순히 기뻐하는 것처럼.
좋아해, 라는 단어에서 한 음절을 잘라 내면 놀라울 정도로 의도가 모호해진다. 재희는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며 한영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다시 고백했다.
“……한영아, 좋아.”
한영의 시선이 깊어지는 이유를 묻고 싶지만, 재희는 참는다. 거기가 마지노선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고요한 눈을 마주하며 재희는 먼저 입술을 부딪쳤다. 그녀의 얕은 수작을 한영이 몰랐으면 싶기도 하고, 알았으면 싶기도 하는 충동이 속에서 부딪쳤지만, 그것은 금세 잊혔다. 한영이 거세졌다.
본래 그렇게 벌려져 있었던 것처럼 재희의 다리가 유연히 허공에서 흔들린다. 계속해서 한영의 사타구니에 부딪힌 엉덩이와 치골이 아팠다. 잘고 강하게 흔들리는 몸을 느끼며 재희는 생각했다. 내일이면 멍이 들어 있을지 모른다고. 온몸 이곳저곳에, 그렇게 한영의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그래도 좋았다.
재희는 다시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몸을 느끼며 미소 지었다. 내리뜬 물기 어린 시선과 희미하게 번진 미소에서, 짧게나마 여자로서의 정염을 읽었을까. 집요하게 내려다보고 있던 한영의 눈에 그 순간 불빛이 스쳤다.
그와 거의 동시에 한영이 강하게 재희의 안쪽을 때려 박았다. 재희는 그 순간 비명을 지르며 단숨에 위로 솟구쳤다. 한영이 목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소리를 흘리며 아랫도리를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저 깊은 곳까지 닿으려는 것처럼.
탐욕스럽게 빨아들이는 속살을 나무라듯 한영이 사납게 웃었다. 더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성기를 깊숙이 박은 한영이 푹, 푹 안을 찔렀다. 그것이 분출의 신호임을 재희는 이제 안다. 그녀는 기다렸다. 한영이 사정하는 순간을.
그러나 짜릿한 충족감이 먼저 그녀의 몸을 휩쓸었다.
“……아아…….”
재희는 부들부들 떨며 몸을 휘었다. 아찔할 정도의 추락감은 이제 익숙했는데. 좋아. 재희는 점점 더 불어 가는 만족감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몸을 휩쓸고 간 열락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재희는 젖은 눈으로 한영을 담았다. 한 발 늦게 절정에 오른 그는 계속되는 사정에 몸을 굳히고 있었다. 흉흉하게 근육이 일어선 몸도, 땀에 젖은 피부, 핏줄이 보일 정도로 힘을 준 목의 선, 야릇하게 일그러진 얼굴도- 모든 것이 재희에게 시각적인 자극이자 기쁨이었다.
몸이 자극에 먼저 반응했다. 재희도 모르게 한영의 몸을 조였다. 그것을 느꼈는지 한영이 눈을 뜨고 재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녀를 보며, 웃는데-.
“아…….”
재희는 뜨겁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느꼈다. 야한 이한영. 그 미소에 이제 익숙해질 법도 했는데, 얼굴이 저도 모르게 옆으로 돌아갔다.
그것을 곧 한영이 다시 돌려놓았지만.
“……재희야.”
흐트러진 숨을 고르며 한영이 그녀를 불렀다. 후희를 잊지 않았다는 듯 다시금 한영이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며 그녀를 다시 불렀다.
“재희야.”
“……응.”
재희는 작게 신음을 흘리며 한영을 올려다보았다. 한영이 머리맡을 곁눈질로 살피고는 다시 그녀를 보았다. 그로서는 드물게 노골적인, 아쉬움 섞인 눈이다.
“콘돔이 하나 남았네.”
그 말의 의도를 알 수 없어 재희는 눈만 깜빡였다.
한영이 잔잔히 눈을 휘며 당부했다.
“이번에는 그렇게 조이지 말아 달라고.”
“……아.”
한영이 다정히 재희의 입가에 입을 맞추며 웃었다. 그가 재희의 허벅지와 치골이 이어지는 부위를 누르며 자신의 성기를 빼냈다. 아, 하고 앓는 소리를 흘리는 재희를 내려다보는 눈이 뜨거웠다. 마지막이라 말했던 콘돔을 제 성기에 씌우는 손은 급했다. 그리고 다시 재희의 안으로 들어오는 몸짓조차도.
“아아……!”
그 시점에 이르러서 재희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재희는 신음을 흘리며 한영에게 매달렸다.
* * *
다음 날 재희는 오래간만에 책상 앞에 앉았다. 늘 성실한 학생이었던 것처럼 가방을 싸려 했다. 그러나 재희는 금세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지난 며칠을 내내 한영과 몸을 섞느라,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재희는 아연한 눈으로 날짜를 셈해 본다. 잘못 센 게 아니다. 이번 주가 중간고사 기간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금요일 아침부터 학교를 가겠다고 책상에 앉아 있었다.
문제 생길 일은 없었다. 중간고사를 원래도 보지 않으려 했었다. 그러나 정말로 문제가 없는 걸까?
재희는 학생들이 단체로 중간고사를 거부하는 이유를 떠올렸다. 강대환 때문이었다.
“…….”
이러면 안 될 것 같아.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그런 목소리가 울렸다. 계속 이러면 안 돼. 이건 옳지 않아.
그러나 무엇이 옳지 않다는 걸까.
재희는 더 생각을 이어 나가지 못했다. 매일 잠잠하던 재희의 집 초인종이 하필 그 순간 울리고 있었다.
“우리 딸!”
재희는 집 문을 열자마자 달려드는 몸에 깜짝 놀라 눈을 깜빡였다. 김 여사, 재희의 어머니였다.
쾌활하게 잘 지냈느냐 묻는 어머니의 등을 감싸며, 재희는 시선을 옮겼다. 뒤에 서 있던 마 사장이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딸을 보는 것이 반갑기는 한데 괜히 또 살갑게 말 붙이기는 민망한 듯했다. 마 사장의 옆에 서 있는 한영은 그저 가볍게 미소 짓는 얼굴이었다.
“아…… 가게는요?”
“일주일 동안 휴업이야. 건물 수도관 공사 때문에.”
“아…….”
“여보, 뭐 해요?”
김 여사의 재촉에, 마 사장이 무뚝뚝하게 잘 지냈느냐 물었다. 재희도 조용히 잘 지냈다 대답했다. 찰기 없어 보이는 부녀 관계에 김 여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데 우리 아들은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 딸, 혼자만 맛있는 거 챙겨 먹은 거야?”
“저보다는 어머니가 더 많이 빠지셨죠.”
곤란해진 재희를 ‘아들’이 지원하고 나섰다.
“그새 얼굴이 반쪽이 되셨어요.”
“어머, 그럼 좀 젊어 보이니?”
입을 가리며 웃는 김 여사의 얼굴이 환했다. 한영이 예의 바르게 미소 지으며 어른들을 천천히 문 안으로 밀었다.
“들어가서 말씀 나누세요.”
쥐 죽은 듯 고요했던 재희의 집에 오랜만에 활기가 들어찼다. 이것저것 말을 붙이고 안부를 묻는 부모님에게 대답하며 재희는 한영을 살폈다. 그는 어른들 앞에만 보이는 정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상황이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드러나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재희는 저 홀로만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마냥 반가워하는 부모님에게 죄송했다.
물론, 부모님이 반가워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너희들 요즘도 창문 넘고 다니냐.”
오랜만에 다 함께 점심 식사를 하는 도중, 마 사장이 훅 선공을 쳤다.
사실 그것은 재희에게만 공격처럼 느껴졌을 뿐이지, 한영에게는 가벼운 인사였는지도 모른다. 한영이 예의 바른 태도로 웃어 보였다.
“급할 때 말고는 안 넘어요, 아저씨.”
온화하게 웃는 한영의 얼굴에서 틈을 잡을 수 없었는지, 마 사장은 엄한 기운을 누그러트리며 말했다.
“너희 이제 다 큰 성인이다. 언제까지 격 없이 그럴 거냐.”
“조심할게요.”
한영은 웃으며 고분고분 대답했다.
그때 우아하게 웃으며 김 여사가 나섰다.
“세상에, 마 사장님. 오랜만에 본 애한테 또 구박 주시는 거예요?”
“……이봐, 김 여사. 재희도 이제 다 큰 처녀인데…….”
“재희 핑계 대지 마세요. 우리 한영이가 어떤 앤데 자꾸 의심을 하세요?”
그 순간 재희는 정갈히 젓가락질을 하던 한영이 묘하게 미소 짓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 얼굴은 그녀의 부모님께 미안해하는 얼굴처럼 보였지만, 언뜻 ‘의심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식의 발칙함으로도 읽혔다. 그러나 그는 표정을 놀라울 정도로 빨리 감추었고, 어른들 앞에서는 예의 바른 이한영으로 돌아왔다.
‘건실하고 착한 이한영’은 원체 빈틈이 없었다. 한영은 식사를 끝마치고 그녀의 부모님과 오순도순 대화를 나눈 후, 당연하다는 듯 홀로 집에 돌아갔다.
“한영이는 별일 없다지?”
이 질문에 뭐라 대답해야 하는 걸까.
재희는 순간적으로 속에서 왈칵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르며 마 사장에게 답했다. 네.
“네가 가장 가까운 친구니까, 잘 살펴봐라. 그놈도 자기 필요한 거 말할 줄을 몰라서……. 친척들에게서 연락 오거나 그러지는 않던?”
“……들은 건 없어요.”
한영의 할머니가 돌아가신 직후, 유산 문제로 한동안 잡음이 일었던 적 있었다. 할머니가 남긴 부동산을 둘러싸고 집안싸움이 발생할 뻔했던 것을, 어떻게든 변호사를 구하고 수습해 주었던 사람이 그녀의 아버지, 마 사장이다. 남의 가족 문제에 끼어들어 돈 뜯어먹으려 한다는 모욕을 듣고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아버지에게 재희는 늘 감사하고 있었다.
“마 사장님, 한영이가 있는 자리에서 그렇게 살갑게 대해 보세요.”
“……무슨 좋은 기억이라고 그걸 건드려. 뒤에서 살피면 되는 거지.”
김 여사가 못 말리겠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마 사장이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한영이 그놈, 얌전히 있다 부뚜막 위에 가장 먼저 올라갈 고양이 상이야. 말 안 한다고 안심하지 말고 잘 살펴 줘라. 알겠지.”
“어머, 언제부터 관상을 다 보셨다고. 안 그래, 딸?”
재희는 침묵했다. 그녀는 가끔 마 사장의 통찰력에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한시나마 재희를 둘러싼 울타리가 공고해졌다. 아무리 재희의 부모님이 한영을 아들처럼 아낀다 한들, 다 큰 딸이 다 자란 남자 집 창문을 넘나들게 둘 부모는 아니었다.
물론 재희나 한영이나, 부모님과 나쁘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가끔 가다 둘의 시선이 부딪치고, 또 그 시선에서 서로가 숨기지 못한 열망을 느꼈어도, 오랜만에 경험하는 가족다운 활기를 즐겼다.
그래서 재희는 부모님이 계시는 일주일 동안, 한영이 정말 얌전히 있을 계획인 게 분명하다고 멋대로 오해하고 있었다.
그 착각은 사흘 만에 깨졌다.
“재희야.”
들려온 목소리에 재희는 옷을 입다 말고 창문을 열었다.
난간에 걸터앉아 웃고 있는 한영이 보였다.
“심심해.”
“응……?”
한영이 눈을 휘며 웃었다.
“같이 놀자.”
“…….”
“무슨 생각 하는데 귀가 빨개져.”
아무것도 아니란 허무한 대꾸조차 그 순간 나오지 않았다. 달빛 아래 비친 한영의 화사한 미소를 보며 깨닫는다. 이한영은 작정을 하고 그녀를 꾀고 있었다.
“이쪽으로 와, 재희야.”
재희는 홀린 듯이 한영만 바라보았다. 얼핏 일 층에서 부모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텔레비전 소리도 여전했다. 그럼에도 재희는 안 된다, 그 한마디를 하지 못했다.
아니, 하고 싶지 않았다.
“……응.”
재희는 창틀에 발을 올렸다.
같이 놀자는 단어를 배덕하게 입에 올렸던 한영은, 재희가 그의 침대로 안착하자마자 이불 속으로 끌어들였다. 다정하게 이것저것 말을 붙여 오면서, 마치 파렴치한이라도 된 것처럼 옷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옆으로 누운 그녀의 등에 붙어 가슴을 움켜쥐었다. 팬티 속에 손을 넣었다.
창문에서 실금의 틈을 비집고 바람이 새어 들어왔지만, 재희는 헐떡이느라 거의 느끼지 못했다. 사흘의 금욕이 그렇게나 길었다고 몸은 순식간에 젖었다. 더 기다리지 않고 단단한 성기 끝이 꾹, 입구를 누르며 들어왔다.
“아…….”
유독 속이 빠듯하게 느껴져 재희는 허리를 바르르 떨었다. 한영은 숨 고르는 시간마저 아까운 듯 꾸역꾸역 밀고 들어왔다. 숱하게 많은 행위로 그 크기에 익숙해졌던 몸이 고작 사흘 만에 익숙함을 잃었나. 아프지는 않았으나, 버겁다.
“아파?”
“아…… 아니.”
대답과 달리 경련하는 내벽을 통해 재희가 거짓말을 하는 거라 판단했을까. 한영의 삽입은 조금 더 느긋하고 부드러워졌다.
그는 얕은 삽입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입구부터 얕게 치고 들어왔다 빠져나가고, 조금 더 깊이 들어왔다 또 내벽을 긁고 내려가는, 은근하고 음흉한 의도가 섞인 움직임이었다.
그것을 재희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이불 너머로도 들려올 정도에 이르렀을 때, 한영의 성기는 이미 재희의 가장 깊숙한 안쪽을 지그시 짓누르고 있었다.
“으응……!”
그때 한영이 손을 뻗어 창문을 닫았다. 그 바람에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이 몸에서 흘러내렸다.
한영은 이불을 다시 끌어 올리지는 않았다. 드러나면 드러난 대로, 풍만한 가슴을 움켜쥔 채 허리를 들썩였다. 재희의 아랫배를 간신히 덮고 있던 이불이 그 움직임을 따라 천천히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한영의 허리 놀림은 내내 유연하고 너그러웠지만, 재희는 그 고요함이 그녀를 더 괴롭힐 수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한영아…….”
“왜?”
“……아.”
저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모른다. 재희는 달아오른 볼을 느끼며 앓는 소리만 흘렸다. 뒤에서 한영의 잔잔한 웃음소리가 울린다.
그가 손을 뻗어 재희의 한쪽 허벅지를 붙잡았다.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무릎이 접혀 벌어진 다리 사이로 한영은 계속해서 샅을 밀어붙였다. 옆으로 베고 누운 베갯잇을 쥐어뜯고 있던 재희의 손이 어쩔 줄 모르고 뒤로 향했다.
그녀의 뒤에 붙은 한영의 허리와 허벅지를 더듬었다. 재촉하는 게 아니다. 말리고 싶었다. 바뀐 자세 때문에 삽입이 깊기도 깊었지만- 뒤늦게 자신과 한영이 취하고 있는 자세를 깨달았던 것이다. 창문을 향해 젖은 두 성기가 끈덕지게 맞붙고 떨어지는 광경을 내보이고 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한영, 한영아, 이불을…….”
“무슨 걱정을 하는 거야, 부모님이 창문을 넘을 리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재희는 눈을 질끈 감으며 진저리 치듯 몸을 떨었다. 안쪽에서 뭉근한 열이 시작되고 있었다. 빠르게 집중력이 그쪽으로 쏠려 간다.
한번 삼켰던 말을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조금 더-.
“……더 빨리?”
한영이 다 안다는 듯 웃음기 어린 음성으로 물었고, 재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애타게, 위아래로.
기다렸다는 듯 한영이 웃었다. 그가 갑자기 재희의 몸을 끌어다 그의 몸 위로 올렸다. 자연스레 뒤로 넘어가는 몸에 당황한 재희가 움찔 내벽을 조였다. 그는 신음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는 웃고 있었고, 재희는 그것을 등에 닿는 몸의 들썩임으로 알았다.
“……무거워.”
“안 무거워.”
다정한 대꾸와 함께 한영이 양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 그리고 언제 배려가 넘쳤냐는 듯, 서서히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아, 아, 잠깐, 아……!”
사람 하나를 태우고 허리를 흔들기란 요원한 일이었을 텐데, 한영은 그칠 줄도 몰랐다.
그는 점차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몸을 흔들었다. 덜덜덜 떨리며 나아가는 트랙터의 진동도 이보다는 느릴까. 침대 스프링이 연신 끽끽거렸다. 재희는 자신의 뒤통수를 한영의 가슴팍에 문대며 도리질하고 비명을 질렀다가, 또 옆집에 있을 부모님을 떠올리고 입술을 꽉 물었다. 다급히 잦아드는 신음에 한영이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렇게 거칠게 허리를 쳐올리면서도, 숨 하나 가쁜 기색도 없이.
말도 안 돼.
재희는 헐떡이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 말을 무슨 의미로 들었던 걸까, 한영이 웃으며 좋으냐고 물었다. 재희는 그 질문을 듣지 못했다. 이한영은 지독했다. 작정을 한 것 같았다. 맨살을 때리듯 요란한 소리가 나는데도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
요동치는 몸이 못 버티고 상체가 한영의 몸에서 삐끗 미끄러졌지만, 한영은 그것조차 하나의 행위로 연결 지었다. 상체를 일으켜 세운 한영이 그녀의 몸을 마주 보게 돌려 앉혔다. 빠져나갔다 다시 들어오는 성기에 맞춰 한영의 얼굴이 보이자, 재희는 냉큼 그의 목에 매달렸다.
그녀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는 한영은 다사롭게 웃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방아 찧듯 치고 올리는 허리는 여전히 난잡했기 때문에- 재희는 서서히 배 속을 뭉개듯 번지는 열감을 느끼고 있었다.
한영은 제 욕구만 채우듯 몸을 움직이면서도 재희의 몸에 일어나는 변화를 읽어 낸 게 분명했다.
“아…… 왜……?”
갑작스레 잠잠해진 몸에 애가 타 한영을 올려다보았다. 한영이 잔잔한 미소가 번진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다. 그 시선의 의미를 도저히 모를 수 없었다.
재희는 눈가에 눈물이 훅 도는 것을 느끼며 조르듯 한영을 불렀다.
“한영아…….”
한영이 슬그머니 눈을 휘며 재희의 눈꺼풀에 입을 맞추었다.
“혼자만 가면 재미없잖아.”
“아…….”
그러면서도 깊숙이 삽입한 성기는 재희의 성감대를 부드럽게 마찰하고 있었다. 혼자만 가는 건 안 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열이 식어서는 안 된다는 것처럼. 한영은 몽니를 부리고 있었다. 성감대만 집요하게 자극하던 게 언제였냐는 듯, 그 주변을 슬금슬금 성기로 간지럽히며.
애가 탔다. 서서히 몸을 달구던 중에 끊긴 자극에 대응해야 했다. 판단보다 본능이 더 빨랐다. 재희의 내벽이 일순, 강하게 한영을 움켜쥐었다. 한영은 신음을 숨기지 않았다. 나른한 듯 목을 긁고 나온 신음에, 듣고 있던 재희의 몸이 더 달아올랐다.
그 경험은 어쩌면 새로운 눈을 뜨게 한 걸지도 모른다. 재희는 한영이 저로 인해 자극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자각했다. 손을 뻗었다. 한영이 걸치고 있는 옷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의 맨살을 부드럽게 만졌다. 단단하고 딱딱한 몸이 한영의 숨을 따라 옅게 들썩이고 있었다. 재희의 시선이 천천히 위로 향했다. 한영은 그녀가 무엇을 하나 지켜보겠다는 듯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의 차분함이 문득 못마땅했다.
재희는 한영과 시선을 엮은 채, 다시 한번 몸을 조였다. 부드러운 속살이 움켜쥐는 감각이 자극적이었나. 재희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몸의 근육이 불끈 조였다 풀어진다.
이미 서로의 신체에 일어난 반응을 감지했다. 더 이상 가식은 필요 없었다.
재희는 더 돌아보지 않고 그를 공략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몸이었다. 애초부터 한영이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나. 자존심이든 체면이든, 침대 위에서는 신경 쓸 일 없는 것이라고.
그래서 재희는 배운 대로 했을 뿐이다.
재희가 그에게서 손을 떼고 천천히 상체를 뒤로 기울일 때만 해도 한영은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두 팔을 뒤로 기울여 버틴 채 허리를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는, 그도 그 의미를 깨달았을까.
한영의 입가에 서서히 농염한 미소가 스몄다.
재희는 한영의 시선 아래서 천천히 허리를 띄우고 또 주저앉혔다. 보란 듯이 내벽을 조였다.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면서, 여체의 곡선을 자랑하듯 나긋나긋 허리를 뒤틀었다.
잠시 찾아온 소강상태에 조용하던 공간으로, 다시금 질척거리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재희는 검붉은 성기가 자신의 몸에 꽂혀 들다 빠져나가는 광경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로지 한영의 눈만 올려다보았다. 네가 움직이지 않으니, 내가 이렇게 움직이지 않느냐, 탓하는 눈길로. 저도 모르는 교태를 두른, 그리고 간구하는 시선으로.
한영의 입가에 번진 미소가 진해졌다.
그 시선 또한 점차 강렬해지고 있음을 재희는 느낀다. 몸 안에 품은 성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콘돔을 쓴다 해도, 부풀어 오르는 부피조차 감지 못할 것은 아니기에-.
“마재희.”
그리고 그 한마디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예고 신호였으리라.
이한영은 결코 재희를 ‘마재희’라 부르지 않는다. 그 어감이 자칫 냉담하게 들릴 수 있기에 한영이 내심 주의하던 것을, 재희는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이한영은 마재희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는다.
늘 마재희가 원하는 것에 자신의 모든 행동을 맞춰 주었으니까.
“한영아…….”
조르듯 그를 불렀다. 이번에도 맞춰 달라고 부탁하듯 올려다봤다. 어차피 너나 나나 같은 것을 원하는 것 아니냐고. 그렇게 여유 부릴 때가 아니지 않느냐고. 그렇게 묻는 눈이었을 텐데도, 한편으로는 영락없는 응석둥이의 눈이기도 했다.
“……이거 봐.”
한영이 눈을 휘며 중얼거렸다. 그녀를 천천히 뒤로 밀었다. 재희는 기다렸다는 듯 등을 침대에 기댔다. 한영이 그녀의 몸 위로 올라오며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말한 대로잖아. 똑똑하다고.”
“아……!”
재희는 소스라치며 몸을 휘었다. 한영은 시작부터 거셌다.
더 이상 그녀가 움직이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점차 속도를 높여 가는 추삽질 속에서 재희는 신음하면서도 황홀한 듯 한영을 올려다보았다. 한영도 음란하게 허리를 움직이면서도 그녀를 끈질기게 눈에 담고 있었다.
그 눈동자 속에 담긴 열망이 오래도록 지속되었으면 했다. 재희는 의도적으로 한영의 장단에 맞추었다. 자극과 반응의 일환으로 수축하던 몸이 의도를 담고 조이자, 한영이 아찔히 눈을 찌푸리면서도 웃었다.
“……배우는 게 빠르네.”
낮게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는 삽시간에 거칠어지는 몸짓 속에 묻혔다. 재희의 입에서 비명이 흘러 나갔다. 한영이 그 입을 입술로 막지 않았다면 옆집까지 들렸을 것이다.
분명 시작은 옷을 걸친 채였다. 그런 점을 보아서는 한영도 오래 침대에 머무를 작정은 아니었던 듯한데, 상황은 점차 격렬해지며 달라졌다. 마냥 정신없이 흔들리기만 한 것 같은데, 어느 사이엔가 저도 한영도 옷을 벗고 있었다.
노골적으로 드러난 살갗 앞에서 한영은 더 장난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사나운 빛이 흐르는 얼굴은, 마냥 짐승이었다.
재희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한영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아래서 활을 그리며 뻣뻣하게 굳어 버린 몸을, 그가 기어코 아득바득 움켜쥐며 몸을 밀어붙였다. 한 줌 허리를 죄어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싶었을 때, 한 발 늦게 한영이 사정에 이르렀다.
으응.
재희의 신음이 한영의 입술에 막혀 나오지 못했다. 서로의 몸이 맞물린 채 움찔움찔 떨렸다.
이대로 있고 싶다.
재희는 붕 뜬 기분 속에서 아스라이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이대로 계속 있었으면. 부모님도, 다른 무엇도, 다 잊어버리고 그냥-.
“……재희야.”
퍽, 퍽, 마지막 분출을 그녀의 안에 털어 넣으며 한영이 중얼거렸다.
바로 앞에서 달싹이는 입술이 간지러워 재희는 혀를 내밀었다. 한영이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입술과 혀를 빨았다.
“……앞으로도 즐겁게 해 줄 테니까.”
난잡하게 오가는 혀와 숨결 속에서, 한영이 다시금 속삭였다.
“부모님이 계셔도, 내 방으로 놀러 와.”
“응…… 응…….”
“……이상한 생각 들 때면, 꼭.”
“응…….”
재희는 꼭 그러겠노라 몇 번이고 대답했다. 이한영만 마재희에게 늘 맞춰 주는 것은 아니었다. 재희 또한 한영이 원하는 바에 절실히 맞춰 주는 것은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