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20)

19장.

한영과 약속한 날이 오기 사흘 전, 재희는 재석을 다시 한번 만나러 갔다. 그러나 날이 좋지 않았던 것인지 가게에 재석은 없었다. 재석의 부인만 또 왔느냐며, 대체 무슨 일로 이렇게 찾아오는 것인지 물었다. 재희가 변호사라는 것만은 재석이 말해 주기는 했는지 애먼 오해는 하지 않는 듯했지만, 재석의 부인은 영문을 몰라 불안해하고 있었다.

재희는 그녀 앞에서 더 무어라 말을 하지 못했다. 죄송하단 말만 남기고 가게를 나섰다. 사무실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 재희는 이제는 정말로 포기해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생각했다.

그렇게 심란한 와중이었으니 한영과의 약속이 쉽게 잊힐 법도 하건만. 가슴은 때를 가리지도 못하고 두근거렸다. 법정과 사무실을 오가고 수임한 사건 기록을 들여다보는 중에도 마재희는 이한영을 때때로 떠올렸다. 약속한 시간을 기다렸다. 마치 스무 살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천지분간 못 하고, 남의 고통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이한영만 바라보던 스무 살의 그때, 그 시간으로.

그래서 약속한 시월 마지막 주 금요일이 찾아왔을 때, 재희는 익숙한 죄책감과 묘한 설렘이 뒤섞인 마음으로 한영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철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시간에는 죄책감마저 없었다. 그 순간 그녀는 모든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오전 오후 내내 재판으로 고민하고 있었던 게 순 거짓인 것처럼.

그러나 초인종을 몇 번이고 눌렀는데도, 한영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즈음 재희의 가슴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

가만히 응답 없는 인터폰을 보다, 다시 한번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나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재희는 가장 먼저 손목에 찬 시계부터 확인했다. 약속한 시각에서 십 분 일찍 오긴 했다. 그러나 십 분 뒤 찾아올 손님을 두고 집주인이 선뜻 집을 비우기에는 모호한 시각이었다.

슬며시 창살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려던 재희는 멈칫했다. 철문이 그녀가 미는 대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저 올 손님을 위해 시간 맞춰 문을 열어 둔 것이리라 여기면 될 일인데. 재희는 불현듯,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빠르게 철문을 넘었다. 마당을 가로지르고,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다. 현관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거기서 재희의 예감은 더 흉흉히 날뛰기 시작했다.

“……한영아.”

재희는 들고 온 비닐봉지를 거의 떨어트리다시피 현관에 내려 두고 한영을 불렀다. 한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거실에는 텔레비전이 켜져 있었다. 뉴스의 아나운서가 두 전임 대통령의 재판 소식을 알려 주는 동안, 재희는 일 층의 방문을 열어 보았다. 안방에도, 화장실에도 한영은 없었다. 주방에는 냄비만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이 층의 계단을 올라갈 무렵에는, 그녀는 거의 뛰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서재 문을 벌컥 열었다.

“한영아.”

서재 바닥은 쏟아진 원고지들로 엉망이었다. 빽빽이 글이 적힌 원고지들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한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가빠져 있던 재희의 숨이 덜컥 멈췄다.

그녀가 그 순간 피부로 예민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한영의 눈빛에서부터 느껴지는 거절이었다. 수십, 수백의 바늘이 뭉치로 날을 세우고 있는 것을 볼 때도 이렇게 곤두서는 기분을 느낄까. 어떻게든 날 선 기운을 죽이려 하는 그의 눈빛은, 상처 입어 예민해진 짐승의 것이었다.

한영의 턱 근육과 목 줄기가 꿈틀거렸다. 그는 이를 악물며 호흡을 억누르고 있었다. 재희는 한영의 이마와 관자놀이에 맺힌 흥건한 땀을 보았다. 재희의 손끝이 차게 시려 왔다. 재희는 냉수를 맞아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왔구나.”

한영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는 한번 호흡을 깊게 고르고는, 평온히 웃어 보였다.

“원고지 정리하다가 엎었네. 정리하고 내려갈게. 냄비 끓고 있을 텐데, 불 꺼 줄래?”

“……응. 알았어.”

“고마워. 금방 갈게.”

“……응.”

재희는 더 한영을 보지 못하고 등을 돌렸다. 그가 원하는 대로, 문을 닫았다.

그대로 서재를 나와 계단을 내려가는 기분이란, 처참했다. 재희는 계속해서 자신의 감정과 싸우고 있었다. 설렘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이제 현실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마도 한영에게는 늘 현실밖에 없었을 것이다. 재희는 그것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자신이 그동안 다시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봐야 할 것을 또 보지 못했음 또한.

재희는 분주히도 주방에서 움직였다. 한영이 끓인 국의 간을 보고, 갓 지은 밥이 고슬고슬한지 확인했다. 오는 길에 사 온 소고기도 구웠다. 길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짧은 시간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영은 일 층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참고 참던 재희의 눈시울이 결국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할 무렵, 한영은 내려왔다.

“미안. 많이 늦었지.”

“……아니. 마침 잘 맞춰 왔어.”

재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밥통에 다가갔다. 그릇에 밥을 담으며, 눈가를 어떻게든 식혔다.

그날 재희는 식사만 하고 일찍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한영은 웃으며 재희를 붙잡았다.

“모처럼 왔잖아. 바쁘게 시간 냈는데 그러지 마.”

“…….”

“저번에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조금도 조바심을 내거나 서두르지 않는 어조였음에도, 재희는 어쩐지 알 것 같았다. 한영은 서두르고 있었다. 기어코 그녀를 그의 집 소파에 주저앉힌 한영을 보면서, 재희는 그런 생각을 한다. 한영에게 이 순간은, 어쩌면 빨리 관통해야 할 하나의 관문에 불과했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세 번의 관문 끝에 자유가 있었고, 그는 지금 두 번째 관문을 기어코 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간신히 견디고 견뎌 문을 넘으려는데, 그 문이 더 멀어지는 것을 과연 누가 기뻐할까.

재희는 소파에 앉아 한영이 쥐여 준 찻잔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모든 자신감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재희야.”

“……응.”

재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한영은 습관 같은 옅은 미소만 띤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기색은 조금도 없었고, 그는 언제나처럼 아름다웠다.

재희는 간신히 맞물린 입술을 떨어트렸다. 할머니 장례식까지 했었어.

* * *

원래부터 속내를 숨기지 않은 김종석이었지만, 계약을 맺은 이후로는 노골적으로 야심을 드러냈다. 그는 하나하나 손수 한영에게 가르쳐 주었다. 전화기 선에 도청기를 설치하는 간단한 기술에서부터, 사람들에게서 듣고자 하는 정보를 얻어 내는 교묘한 심리 전술까지.

한영이 보기에 김종석은 퍽 그에게 공을 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성의와 시간을 투자하는 점을 보았을 때, 그와 김종석의 근로 계약은 약속한 기간만으로 끝이 날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약속한 기한이 지나면 자유롭게 해 주겠다는 김종석의 말을 한영은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얌전히 김종석의 말을 따랐다. 그가 가르치는 게 무엇이든 해 오라는 것이 무엇이든 성실히 해냈다.

심지어 트라우마의 영역을 건드리는 지령일지라도.

“한영아…….”

달큼한 신음이 상대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한영은 무감각한 얼굴로 손을 움직였다. 여성용 팬티가 그의 손등을 조였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촉은 뜨겁고 질퍽했다.

“좀 더 위에…….”

“여기?”

“응, 거기…….”

“…….”

한영은 상대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었다. 자신이 한영보다 이 년 선배라며 한영의 고백을 수줍게 거절했던 여자는 만난 지 사흘도 안 돼 그의 가슴팍에 매달려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감상에 빠질 생각은 없음에도, 한영은 잠시 잠깐 마재희를 떠올렸다.

그러나 그는 금세 재희의 얼굴을 지워 냈다. 그는 한 가지 목적만 남은 사람처럼 침대에 누운 여자를 손가락으로 농락했다. 철저하게 욕구만을 자극하는 손길에, 여자는 얼마 가지 않아 절정에 올랐다.

“……더 안 해?”

여자가 아쉬운 듯 물었다. 옷 안으로 손을 넣을지언정 벗기지는 않는 한영을 의아해하는 얼굴이었다.

한영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

“말했잖아요, 누나.”

“……우리 부모님은 어차피 모를 건데.”

“천천히 가요. 우리 아직 사흘도 안 됐는데.”

“응…….”

“씻고 와요.”

한영은 어린아이 구슬리듯 그녀를 욕실로 보냈다. 여자는 뭉그적거렸으나, 달달한 말과 입맞춤에 곧 웃는 얼굴로 욕실 문을 닫았다. 한영도 그 문이 닫힐 때까지 웃는 눈으로 지켜보았다.

달칵, 욕실 문이 닫혔다.

한영은 말없이 욕실 문을 보았다. 다행히 물 트는 소리가 금방 들렸다. 그제야 한영은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여자의 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한영은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알고 있었다. 처음 온 공간인데도 막힘없이 그는 나아갔다. 발걸음 소리는 없었다.

서재의 문을 열자마자 한영은 빠르게 공간을 훑어보았다. 책상 뒤편 벽에 붙은 액자로 다가갔다. 액자 속을 열었다. 검은 기계 장치가 시야에 잡힌다. 그것을 회수해 주머니에 넣으면서도, 그는 책상에 놓인 전화기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렇게 서재에 있던 도청기들을 신속하게 하나하나 회수했다.

욕실에서 들리던 물소리가 뚝 끊길 무렵, 한영은 서재 문을 닫고 나왔다.

“뭐 해?”

주방 싱크대로 쏟아지는 물을 보며 한영은 답했다.

“손 씻어요.”

“……저, 한영아.”

한영은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욕실 앞에 선 여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덜 여문 육체였다.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자연의 나체.

한영은 말없이 그 몸을 보다 서늘히 웃었다. 저 정도까지 나왔으면 응해 주긴 해야 할 터.

“……씻고 갈 테니, 침대에서 기다려요.”

외부 전화박스 안에 있을 도청기는 아무래도 나중에 회수해야겠다고, 한영은 냉정히 판단했다.

김종석은 이한영의 외향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또 그 점을 이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영은 달랐다. 김종석이 지목하는 여자들과 곧잘 어울리고 그들의 부친이나 남자 형제들을 감시하는 작전에 훌륭히 일조했지만, 그뿐이었다.

“언제까지 지켜 준다는 소리만 할 거니? 날 사랑은 해?”

여자들은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이별을 고했지만, 사실 이한영의 몸은 너무나도 정직했다. 그는 여자들과 몸을 섞을 수 없었다. 사실 벌거벗은 몸에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는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 김종석은 아쉬워했지만, 그래도 한영이 여전히 쓸모가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하진 않았다.

그리고 그즈음, 이한영은 새로운 갈등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가 알아서는 안 되는 진실을 결국 알아 버린 탓이었다.

그 진실을 처음으로 알려 준 여대생은 깔깔거리며 한영을 놀렸다.

“한영이 너 순진하구나? 당연히 여자도 느끼지. 친구들하고 야한 영화 안 보니?”

“남자들 보기 좋으라고 연기하는 게 티가 나던데. 그걸 사실로 믿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일찍부터 기만을 꿰뚫어 보는 데 능통했던 것이 이 경우에는 혼동을 준 셈이었을까. 아니면, 고등학생씩이나 되어서도 옛 상처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던 걸까. 한영은 그런 의문을 띄우곤 했으나 무심히 넘겼다. 어차피 이유는 필요 없었다. 그가 새로 알게 된 사실만이, 그에게는 오로지 중요했을 뿐.

여자도 즐길 수 있다.

제대로 풀어 주고 녹여 주고 애무해 준다면, 여자도 즐거워할 수 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이한영은 누구를 떠올렸던가.

무엇에 그리도 흔들렸던가.

“재희야.”

“……응?”

“왜 그렇게 떨어져 있어. 이쪽에 누워. 부채질해 줄게.”

“……으응.”

가까이 오라는 말에 마재희는 단 한 번도 불응한 적 없다. 경계조차 하지 않고 그의 옆자리에 누웠다. 거리낌 없이 사내 앞에서 눈을 감았다. 아마도 손을 달라고 했다면 얌전히 그에게 손을 내밀었을 것이다. 그 손으로 그의 샅을 문지르게 했다면, 조금은 놀라겠지만, 어쨌든 그 순한 눈망울을 깜빡이며 그에게 손을 맡겼으리라. 그 작은 머리통 앞으로 발기한 성기를 들이댄다면, 깜짝 놀라려나. 그러나 그렇다 해도, 마재희는 결국 그 입술에 그의 성기를 담았을 것이다. 이한영은 그렇게 만들 자신이 있었고, 또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인간이었다.

한영은 다정한 얼굴로 느긋이 부채를 흔들며 생각했다. 한번 선을 넘으면 결국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것일까. 날이 갈수록 죄책감은 희미해져 갔다. 상상은 난잡해지고, 욕망은 끝을 모르고 추악해졌다. 마지막 남은 양심이 어떻게든 뻗어 나가려는 손을 막았지만, 이한영의 머리는 이제 그 양심에게조차 반박하고 있었다. 여자도 즐길 수 있다잖아. 재희도 언젠가는 결국 하게 될 행위인데.

그걸 나와 하는 게 뭐가 나쁘다는 거지?

“한영아, 나 어제 이상한 꿈을 꿨는데…….”

한영은 이기적인 생각에서 빠져나와 재희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말을 하다 말고 재희의 시선이 슬그머니 옆으로 돌아갔다.

시선을 피해? 재희가?

한영이 내심 놀라 재희의 얼굴을 주시하던 찰나였다. 그는 그제야 재희의 이상을 눈치챘다.

“……잠깐, 재희야. 볼이 붉은데.”

“응?”

한영은 부채를 내려놓고 재희의 이마를 짚었다. 불덩이였다.

둔감한 마재희에게는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다. 자신이 아픈지도 모르고, 자신이 앓고 있는지도 모르는 마재희. 그러니 곁에 있는 이가 좀 더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하는데, 그녀 곁에 유일하게 같이 있던 이한영은 저만의 상상으로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한영의 후회는 깊었다.

“죽 먹을 수 있겠어?”

침대에 누운 재희는 미약하게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가련하기까지 한 몸짓에 한영은 심각해졌다. 침대에 눕힌 후 두어 시간이 흘렀는데도 열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는 재희를 보며 한영은 갈등했다. 병원에 데려가는 게 좋을까. 열 자체는 높지 않은데.

그리고 한영은 그런 고민 앞에서, 그간의 경험을 통해 답을 구하곤 했다.

“복숭아는?”

“……복숭아?”

재희의 눈이 조심스레 뜨였다. 그 눈동자가 바로 한영의 손에 들린 통조림으로 향하는 순간, 한영은 시름을 덜었다. 그는 웃음기가 언뜻 번진 얼굴로 통조림을 땄다. 병원은 안 가도 되겠네.

“먹여 줄까?”

“응.”

한영은 웃었다. 마재희는 아프면 응석둥이가 된다. 그는 그것이 늘 기꺼웠다.

통조림 복숭아는 단물에 절여져 있었다. 끈적끈적한 단물 때문에 과육은 숟가락에서 몇 번이고 미끄러졌다. 숟가락이 가까워지자 재희는 입술을 벌렸다. 한영은 붉은 입술이 주황빛 과육을 삼키는 광경을 말없이 눈에 담았다. 단물에 젖어 입술이 번들거렸다.

한영은 가만히 지켜보다 손을 뻗었다. 턱을 타고 흐르는 단물을 손가락으로 느긋이 닦아 올렸다. 그 손가락이 재희의 입술 앞에서 멈추자, 재희는 망설이지도 않고 입술을 벌렸다. 혀를 내밀어 그의 손가락에 묻은 단물을 핥았다. 매끈하고 뜨거운 혀였다. 한영의 미소가 진해졌다.

그는 점잖이 손을 물렸다. 재희의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긴 후였다. 재희의 눈은 가느스름하게 접혔다. 마치 쓰다듬는 주인을 노곤히 바라보는 고양이처럼.

그리고 어딘가, 생각에 잠긴 눈빛이기도 했다.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나 재희는 그 후로도 계속 한영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데, 혼란스러워하는 것도 같았다. 한영은 재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으나 캐묻지는 않았다. 기다려 주면 언젠가는 말해 줄 것이다. 그것이 해야 할 말이라는 판단이 그녀 나름으로 선다면.

“……이제 내가 먹을게.”

“그럴래?”

한영은 자상히 웃으며 그릇과 숟가락을 건넸다. 재희는 왜였을까, 아쉬워하는 기색으로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한영은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을 잘 지켜보다 웃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분명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기색이긴 한데.

“……먹고 있어. 물수건 다시 적셔 올게.”

“응.”

한영은 수건을 들고 방을 나섰다.

그들밖에 없는 재희의 집은 고요했다. 재희만 쓰는 이 층 화장실은 한영도 어릴 때를 제외하면 들어와 본 적이 없는 공간이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으나, 그의 시선은 훈련받은 대로 공간 곳곳을 확인했다. 재희가 쓰는 비누, 재희가 썼을 샤워기와 욕조.

이곳에서 매일, 마재희는 옷을 벗고 몸을 씻었을 것이다.

한영은 고요한 움직임으로 세면대의 물을 틀었다. 쏴- 물 떨어지는 소리 한가운데 물수건을 내려놓았다. 그대로 그는 손을 아래로 가져갔다. 방에 있을 때부터 터질 것 같았던 바지춤을 풀었다.

무표정한 눈으로 발기한 제 것을 내려다보았다. 흥분도 흥분이지만, 앞으로도 이런 식이면 곤란했다. 재희의 상태를 보아서는 밤에도 간호해야 했으니.

어디까지나 번거로운 일 해치우는 심정으로 그는 성기를 손에 쥐었다. 그러나 성기는 사실은 그뿐만이 아니지 않느냐는 듯 펄떡거렸다. 한영은 이를 악물었다. 불쑥 솟구치는 흥분을 억눌렀다. 숨은 골랐으나, 손은 점차 저절로 빨라졌다. 재희의 혀가 닿았던 손이 다시 번들거리며 젖어 갔다. 그때였다.

끼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영의 손이 우뚝 멈췄다.

물 쏟아지는 소리 속에 묻혔을지라도 그는 분명 들었다. 그가 있는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그는 천천히 바지를 여몄다. 쏟아지는 물에 손을 씻으며 문을 돌아보았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듯, 욕실 문은 열려 있었다.

열린 건가?

가끔 욕실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으면 그냥 열린다는 말을 지나가듯 들은 기억이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한영이 그렇게 수도꼭지를 잠그던 찰나였다.

철퍼덕, 문 밖에서 뭔가 바닥에 세게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한영은 바로 욕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계단 앞에 엎어져 있는 재희가 시야에 들어왔다.

“괜찮아?”

“……아파.”

한영은 서둘러 다가갔다.

“다쳤어? 어디.”

“아, 아니야. 그냥 부딪혔어.”

대체 어떻게 넘어지면 이마부터 찧을 수 있을까. 부축하고 보니 재희의 이마가 불그스름했다. 사실 이마뿐만이 아니었다. 재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한영은 그런 그녀를 똑바로 일으켜 주며 생각해 보고 있었다. 지금 마재희는 단순히 맨땅에서 넘어진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건가? 그게 아니면-.

“뭘 보고 이렇게 놀랐어?”

“……으, 응?”

엉거주춤 일어나던 재희가 말을 흐렸다.

“그냥…… 발에서 힘이 빠져서 넘어졌어.”

한영은 가만히 그녀를 보다 조용히 웃었다.

“……그러게 아픈 사람이 왜 나왔어.”

“아…… 그릇 갖다 놓으려고……. 계속 너만 고생하는 것 같아서…….”

한영은 바닥에 엎어진 그릇과 수저를 보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고생한 적 없어, 재희야. 어서 가서 누워. 열 오르겠다.”

“……으응.”

얌전히 침대로 향하는 재희의 뒷모습을 보며, 한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봤네.

몇 년이 지나서야 한영은 그날 재희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어쨌든 당시의 그는 그렇게 판단했다. 마재희가 이한영의 자위를 목격하고는, 충격을 받았으리라고. 그래서 그를 불편해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 오해를 확신 수준으로 올려 준 것은 사실 마재희의 탓이 컸다. 그날 이후 재희의 태도에 미세한 변화가 생긴 것이다. 가까이 갈라치면 쭈뼛거리기 시작했다. 손끝 하나 건드릴라치면 긴장하기 시작했다. 재희 스스로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한영은 예민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들에게 없던 거리감이, 서서히 생겨나고 있음을.

이한영은 마재희가 긴장하는 얼굴로 그의 앞에 있을 때마다, 많은 생각을 했다. 충격을 받았던가? 놀라 얼이 빠졌다거나 상처를 받지는 않았지만, 분명 충격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처음 겪는 재희의 거부 반응 앞에서, 그저 잘 훈련된 개처럼 반응했다. 사냥감이 저 멀리 등을 보이며 뛰어가는데, 주인의 호각 소리가 들리지 않아 달려가려는 것을 참는 사냥개처럼.

차츰 거리를 두기 시작하는 재희를 가만히 주시하고만 있었지만, 당시의 그도 알았다. 자신이 퍽 아슬아슬한 상태였음을.

“이냐시오야, 두 사람이 한 몸일 수는 없단다.”

그 무렵 안드레야 주임 신부는 한영이 고해 성사를 마친 후 그렇게 말했다.

“사람 간에는 거리가 있어야 해. 마음에 안 든다고 거리를 멋대로 좁힐 수는 없는 거란다.”

“이번에도 제가 참아야 한단 말씀을 하시려는 거군요.”

“참아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곳에 와 고해한 것 아니니.”

“…….”

“너는 잘 참을 거란다.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한영이라고 몰랐던 것은 아니다. 자신이 줄곧 마재희를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재희를 도와준다고, 또 보호해 준다고, 그의 품에만 계속 품고 있으려 했다. 그래서 그 결과가 어떠했나. 고등학생씩이나 된 마재희는 이한영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한영도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알고는 있었다.

“……이곳에 올 때마다 알 것 같아요. 할머니가 왜 제게 고해 성사를 꼬박꼬박 하라는 유언을 남기셨는지.”

“왜 그러셨을 것 같니?”

“할머니는 언제나 절 금방이라도 터질 폭탄처럼 보셨죠.”

한영은 웃으며 고해소 한쪽에 둔 코트를 몸에 걸쳤다.

“신부님께 주기적으로 고해 성사라도 해야 제가 사람 구실을 하며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을 거예요.”

“그보다는 네 말을 들어 줄 사람을 만들어 주고 싶으셨던 건 아닐까?”

“신부님이 그렇게 믿고 싶으신 건 아닐까요?”

“……이냐시오야, 네 세례명을 정할 때 내가 제안한 세례명이 뭔지 기억하니?”

“‘이냐시오’와 ‘안젤로’였죠.”

“나는 네가 안젤로이기를 바랐단다.”

“기억해요. 제가 진저리를 치며 싫다고 했던 것도요.”

한영이 가볍게 웃으며 답하자, 안드레야 신부도 잔잔히 미소 지었다.

“내게 너는 언제까지고 안젤로란다.”

말없이 한영은 미소 지었다. 그는 몸을 돌렸다.

“요한 신부님께 당분간 연락하지 못한다고 전해 주세요.”

“……조심하거라.”

“신부님도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한영은 안드레야 신부의 충고를 잘 지켰다. 재희와 저 사이에 생긴 거리감을 받아들였다. 남녀유별을 받아들였다. 한영은 이제껏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시정하려는 것처럼 재희의 귀에 희망을 주는 말들을 속삭이기 시작했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 다른 사람들보다 좀 늦어도 괜찮다는 말, 그래도 천천히 자기 할 일을 하면 된다는 말 등등. 고치 속에 똘똘 말려 있던 재희가 서서히 밖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을, 이한영은 잠자코 지켜보았다. 그리고 확신했다.

역시, 자신이 마재희를 망쳐 놓고 있었던 거라고.

속에 품은 소회가 어떠하든, 재희 볼에 묻은 밥풀 하나 마음껏 떼어 내지 못하는 상황에 익숙해지기는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점점 극렬해지는 기갈만큼은,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었다.

“이한영, 너 요즘 왜 그래?”

고등학교도 졸업이 가까운 어느 겨울날, 인혜는 팔짱을 단단히 끼곤 물었다. 담배를 문 인혜 입술에서 담배 연기보다 하얀 입김이 더 풀풀 날리는 추운 골목이었다.

“너 자꾸 그렇게 엉망인 애들만 만나고 다닐 거니?”

“엉망이라니?”

한영은 무성의하게 대꾸하며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인혜는 인상을 구겼다.

“너 우리 학교에까지 소문났어.”

“언제는 내 소문이 없었어?”

“너랑 이번에 헤어진 애가 무슨 말 하고 다니는지는 알아?”

“……아아.”

한영은 무심히 웃었다.

“내가 변태 성욕자라는 말?”

“……‘아아?’ 그게 다야? 내가 그 계집애 때문에 얼마나 속이 뒤집혔는데, 겨우 고작, ‘아아?’”

씩씩거리기 시작하는 인혜에, 한영은 웃었다.

“사실 그게 틀린 말도 아니라서.”

“네 취향 따위는 내 알 바 아니고, 소문이나 어떻게 잠재울 생각부터 해.”

싸늘히 인혜는 마법의 문장을 덧붙였다.

“재희가 속상해하니까.”

한영은 말없이 담배 연기를 입술 사이로 흘렸다.

인혜가 그간 단단히 별러 온 것처럼 입을 뗐다.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해. 답답하게 방황하지 말고. 넌 맨날 뭐가 그렇게 복잡하니?”

복잡한 이유는 복잡한 상황 속에 놓여 있기에 생긴다. 한영은 이해를 구할 생각이 없었다. 그냥 그는 그렇게 태어난 것이고, 그냥 그런 환경 속에서 살고 있었다. 솔직해지면, 약점부터 파악당하고 덜미만 움켜잡히는 곳에서.

한영이 대학 입학을 앞둔 시점에 이르러서 김종석은 이한영을 어린것 취급하던 태도를 거두었다. 그래서 한영은 거름망 없이 많은 것을 보고 들을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정보만 전하던 수준에서는 알 수 없었던 진실들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물밑에서 벌어지는 진실이란, 얼마나 추악한지. 그 얼마나 더러운 세상인지.

그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한영이 담배에 버릇을 들이기 시작한 것은.

“……무슨 오해를 하는지 알겠는데, 나 재희 안 좋아해.”

한영은 담뱃재를 털며 웃었다. 진창에는 혼자 굴러야 하는 법이다. 둘은 아니다.

“그냥 친구야. 재희와 나는.”

“재희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니?”

“네 멋대로 재희 마음 단정 짓지 말아 줄래.”

“너야말로 단정 짓고 이러는 거 아니야?”

“난 재희와 이 이상으로 가까워질 생각 없어.”

“…….”

“우린 이대로가 좋거든.”

“……나도 몰라, 이제. 너 알아서 해, 멍청아.”

답답하다는 듯 인혜는 물고 있던 담뱃불을 꺼트렸다. 꽁초를 쓰레기통 안으로 던지는 폼은 익숙하다 못해 이골이 난 것이었다.

한영은 그 몸짓을 가만히 주시하다 말했다.

“재희 집에 있어.”

“어머, 세월 참 무상하다. 어릴 때는 내가 조금만 재희 옆에 붙어 있어도 괴롭히더니.”

한영은 무심히 담뱃불을 튕기며 재차 권했다.

“재희 집에서 쉬다 가.”

“됐어. 이제 오빠 올 시간이야.”

“알아서 밥 먹고 왔겠지.”

“그 인간이 언제 그러는 것 봤니?”

“인혜야, 형님이 밥을 먹고 오든 말든,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우리 부모님이 너를 조금만 닮았다면, 내 흡연량이 지금보단 줄었겠지?”

“…….”

“어쨌든, 재희 좀 그만 걱정시켜. 내가 지켜보고 있다, 너.”

끝까지 모난 눈으로 노려보고 돌아서는 인혜를 앞세운 채, 한영은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대로가 좋다-.

인혜에게 내뱉은 자신의 말이 본심이 아니라는 것쯤은 한영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더 이상 본심이나 마음은 중요하지 않았다.

한번 결론을 내렸으면 다시는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흔들리고 돌아보는 순간 고꾸라지는 벼랑 위에 서 있지 않나. 이미 그의 앞을 걷던 자들이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광경을 보았다. 한영은 그들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곡예를 하려면, 흔들리는 마음도 버려야 하는 법이다.

“도움 안 되는 개잡놈의 새끼들…….”

한영이 대학교에 입학한 이후, 김종석은 때때로 욕설을 중얼거리는 일이 잦아졌다. 김종석은 서둘러 진급하고 싶어 했다. 일선에서 물러나 서류나 들여다보길 원했다. 그러나 그는 변방에 밀려나 있는 무사와 같았다. 묵묵히 일을 수행하나, 제대로 봐주는 이 없는 서러운 충정.

김종석은 자신이 군 출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는 부류였다. 그런 이가 주변 시선 신경 안 쓰고 욕을 할 때면 어지간한 분노는 아니라는 의미였다. 한영은 그의 기분에 맞춰 주기로 했다.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무는 김종석에게 조용히 라이터의 불을 내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놓쳤어.”

“학생 회장 건 말입니까?”

“어.”

“이해할 수 없네요. 그걸 어떻게 실패합니까?”

“짭새들이 조급하게 울어 버린 거지. 멍청하게.”

한영은 냉정히 김종석의 표정을 살피며 입에 담배를 물었다. 짜증이 난 얼굴을 하고도 김종석은 한영이 손에 쥔 라이터를 가져갔다. 김종석은 퍽 친밀한 태도로 불을 붙여 주었다. 한영은 그를 무감정하게 내려다보다 입술을 뗐다.

“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비효율적이지 않습니까?”

“뭐가?”

“똑같은 목적을 두고 기관끼리 경쟁하는 거요. 밥그릇 싸움하니 매번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 아닙니까.”

“이 지경까지 왔는데 누가 공조를 하자고 하겠어? 우리 쪽은 저쪽에 대한 신뢰가 없고, 저쪽은 저들 예쁨받겠다고 저 지랄인데 말이야.”

한영은 담배를 쥐는 척 손바닥으로 입가를 가렸다. 혹여나 새어 나올지도 모를 냉소를 그렇게 숨겼다.

“제가 노력한 보람이 없어졌네요.”

“미안하게 됐어.”

“술이나 사 주시죠, 그럼.”

“주정뱅이 다 됐어. 대학생이라고 이제 술이 입에 착착 감기나 보지?”

아니, 당신이 술에 약하니까.

속으로 중얼거리며, 한영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게 밤늦게까지 김종석의 술주정을 상대하고 집에 돌아오는 날이면, 한영은 수를 헤아리곤 했다. 그가 설정해 둔 미래의 시간까지 남은 날짜 수를 계산하는 것이었다. 과욕을 부려 일을 그르치지 않는 이상, 김종석은 끝까지 아무것도 모르리라. 그 이후는 한영의 승리이자, 자유일 것이다.

그러니 그날이 올 때까지, 그는 숨을 죽이고 있어야 했다. 아주 조용히.

“재희야, 그래도 한영이한테만이라도 말하자.”

“안 돼.”

“왜?”

“걱정해.”

그래서 도서관에서 재희와 상현의 대화를 엿들었을 때, 한영은 숨을 죽이고만 있었다. 마재희에게 독립심을 심어 주려던 자신의 노력이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영향을 미친 것을 깨달았음에도, 기어코 참았다.

그러나 재희가 김선정의 경호원에게 쫓기는 광경을 목격했을 때는 결국 참지 못했다. 그는 눈알이 시뻘게진 사람처럼 움직였다. 김선정의 경호원을 구슬리는 데 성공했고, 그렇게 김선정을 마재희의 인생에서 치워 냈다.

그렇게 제 무덤을 판 격이었다.

어떻게든 참고 숨을 죽이겠다는 본래의 계획을 어그러트린 채.

그러나 어리석게도 이한영은 무덤 판 자리에 서서 계속 다른 것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재희, 너 요즘 수상하다? 왜 자꾸 예뻐지려고 해?”

거실에서 들려오는 영재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영은 사과 껍질을 깎고 있었다. 토요일이었고, 언제나처럼 친구들이 놀러 온 날이었다. 그와 동시에- 마재희가 다른 남자와의 미팅을 앞두고 있었던 날이기도 했다.

“왜 저래.”

“미쳤나 봐.”

“뭐. 어쩌라고.”

친구들이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들리는 동안, 사과 껍질은 싱크대로 툭 떨어졌다. 뱀이 똬리를 튼 모양이었다. 한영은 잠시 그것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다 사과를 잘랐다. 기계적으로 자른 사과를 그릇에 담았다. 그대로 몸을 돌려, 거실로 나아가던 참이었다.

그는 몇 발자국 걷지 못하고 우두커니 멈춰 섰다.

“…….”

마재희가 웃고 있었다. 인혜와 영재를 보며, 여느 때보다 또렷해진 입매와 눈가로 웃고 있었다. 창문에서 떨어지는 오후의 햇살마저 그 위로 떨어졌다. 마치 성화 속 인물 같았다. 한영은 그가 속할 수 없는 세계 한복판에 있는 재희를 응시했다. 고요한 낯과 달리 한영의 속에서 이는 생각이란 적나라했다.

아아, 그래.

저렇게 예쁘게 꾸미고, 다른 남자를 만나러 간다고.

“…….”

“한영아, 또 사과야? 포도는 없어?”

상현의 목소리를 따라 재희가 고개를 들었다. 한영은 그녀와 시선이 부딪힌 순간 정신을 차렸다. 재희의 까만 눈동자가 긴장해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영은 웃었다. 웃어 내 보였다.

“봐 봐. 재희 화장했어.”

“봤어.”

한영은 상현에게 대꾸하곤 재희를 다시 보았다. 얼굴을 의식적으로 부드럽게 움직였다.

“예쁘다, 재희야.”

“……고마워.”

눈꺼풀을 내리뜨는 모습조차 예뻤다. 한영은 손을 뻗고 싶었으나 참았다.

“놀라지 않는 거야? 난 깜짝 놀랐어. 우리 재희가 이렇게 예쁜 줄 몰랐는데.”

“네가 보는 눈이 없어 그래.”

“너희들…… 이렇게 나오기야?”

닭살이라며 진저리치는 상현을 보며 한영은 웃었다. 마재희를 거절할 남자는 없을 것이다. 한영은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의 토요 명화 앞에서 한영은 계속해서 김선정의 경호원에게 쫓기던 순간을 떠올리고 있었다. 영화는 보지도 않았다. 담벼락에 기댄 채 그를 올려다보던 마재희의 눈빛만 떠올렸다. 부끄러워하면서도, 설레고 있던 그 까만 눈동자. 좋아하는 사내를 앞에 둔 여인이 보일 법한, 볼가와 귓불의 홍조.

한영은 소파 팔걸이에 기대고 있던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인내심이 빠르게 닳아 가고 있었다. 평생을 억눌러 온 본성인데, 그 세월이 길고 지난한데, 그 시간들이 전부 한순간에 무너질 위기에 있었다. 이성으로 눌러 놓았던 저열함이 다시 기세등등하게 살아나 속삭였다.

마재희가 너를 좋아하잖아.

앙큼하게 그동안 그 마음을 숨겨 온 거잖아.

너를 헷갈리게 해 놓고, 애간장을 타게 만든 주제에.

그런 주제에, 이제 곧, 다른 남자를 만나러 간다잖아.

한번 흔들린다 싶자, 본능은 이때다, 싶어서 계속 속삭였다. 어차피 계획은 물 건너갔어. 운이 나쁘다면, 김종석이 이번 일로 뭔가 있다는 것을 의심하겠지. 한번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면 결국 모든 비밀을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일 테고.

그러니 그냥 마지막으로, 단 한 번만이라도- 가져. 안아. 네 것으로 삼아. 원래 네 것이었어.

처음부터 마재희는, 내 사람이었어.

“맞다, 한영아. 나 물어보고 싶은 거 있는데.”

“……뭔데?”

상현의 대화에 응해 주는 동안에도, 한영의 시선은 한결같았다. 텔레비전 앞에 붙은 재희의 여린 등만 보고 있었다.

자꾸만 귀를 속살거리는 간사한 본능에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인내심을 믿었고, 이성을 믿었다. 충동대로 행동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짐승이다.

할머니도 유언으로 남기지 않았나. 짐승과 오래 놀면 못쓴다고.

그래.

사람은 사람과 어울려야 한다.

한영의 이성적인 결론은 언제나 그랬다.

“그런데 한영아, 제일 관건은 생김새야. 재희가 주야장천 네 얼굴만 보고 자랐잖아.”

무릎을 세우고 웅크리고 앉아 있는 재희의 한쪽 어깨가 반쯤 드러나 있었다. 희고 보들보들한 살을 잠시 주시하다, 한영은 옆에 놓인 이불을 집어 들었다.

“……글쎄, 그런 쪽의 이상형이라면…… 저기 있네.”

“어?”

“화면에. 지금.”

“……엉?”

모두의 시선이 텔레비전으로 쏠리는 동안, 한영은 재희에게 다가갔다. 드러난 어깨를 이불로 감싸고 그 허리를 안아 들었다. 낱장의 이불 아래로 움찔 굳어지는 몸을 느꼈다. 그러나 한영은 흔들림 없이 그녀를 텔레비전으로부터 떨어트렸다.

“눈 나빠진다고 했잖아.”

서서히 붉어지는 재희의 귀와 목덜미를 내려다보며, 한영은 소리 없이 웃었다. 다른 남자에 집중한 마재희를 보는 기분이란 좋지 않았다. 들끓는 질투가 낯빛에 스쳤을까. 한영의 얼굴을 정면에서 본 영재가 질렸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여튼 저 새끼도 제정신은 아니야.”

한영도 그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 그는 그 무렵,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한영은 교만했다. 십 년 가까이 참았다는 이유로 자신의 이성을 맹신했다. 그날 술을 마시지 말았어야 했다. 그다음 날 재희의 치마 안에 손을 밀어 넣어서는 안 되었다. 그 감각을 잊지 못할 자신을 예상했어야 했다. 재희가 그의 집 대문 앞을 찾아와 섹스를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 단박에 흔들려 무너질 자신을 예견했어야 했다. 기다렸다는 듯 냉큼 그녀의 손을 잡고 끌어들여서는, 안 되었다.

이성이 흐려진 시점은 불분명했다. 재희와 불건전한 관계를 시작할 무렵에는 그래도 그녀에게 남길 유언장을 미리 작성할 정도의 이성이 남아 있었다. 그는 그때 재희의 미래를 걱정했다. 욕정에 굴복하면서도, 분명히 그랬다.

그러나 언제부터였나.

의심과 불안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재희를 보고서도, 제 욕심만 채우기 시작한 것은.

이한영은 마재희가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재석과의 접선을 지켜보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이재석이 건넨 갈색 서류 봉투를 끝내 들여다보지 못하고 침대로 되돌아온 것도 알고 있었다. 이한영이 심 교수를 감시하는 프락치라는 진실을 끝내 추리했다는 것까지, 전부 다 알고 있었다. 그렇게 재희가 믿음과 불신 사이에 갈팡질팡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한영을 향해 믿어 준다고 말해 주었다. 강대환을 도와주려 했다는 이한영의 선의를 믿겠다고. 어쩌면 그 순간이 다시 상황을 원래대로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영은 그 기회를 놓쳤다. 맹목적으로 믿어 준다고 말해 주는 마재희를 보고 어떻게 그녀를 놓아줄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이한영은 그럴 수 없었다. 그러지 못했다.

마재희는 펜대 한번 대지 않은 순백의 종이였다. 그녀에게 계속 얼룩을 남기는 이가 붉은색이라면 붉은 종이가 되고, 검은색이라면 그저 검은 종이가 되어 버리는 무색의 인간. 그리고 자신은 그런 그녀를 물들이고 있었다. 물들이다 못해, 날카로운 펜촉으로 울퉁불퉁한 글씨 자국을 남겨 놓고 있었다. 색은 다른 색으로 물들이면 금세 덮인다. 그러나 자국만큼은, 어느 누구도 어쩌지 못한다. 아무리 누르고 피려고 해도 본연의 매끄러운 백짓장으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정확히 이한영이 원하는 것이었다. 마재희에게는 이한영의 흔적이 언제까지고 남아 있어야 한다.

언젠가는 그녀의 안이 다른 색으로 뒤덮이게 될지라도.

붕괴의 전조는 그렇게 뚜렷하게 그의 속에서부터 드러나고 있었다. 가시적으로 드러난 시점은 아마, 그날이었을 것이다. 더 이상 자신의 정체를 숨기지 못하게 된 그날 밤. 재희가 그의 뒤를 따라 골목을 쫓아온 밤. 그리고 그가 처음으로 피임 기구를 하지 않은 채 재희를 안은 날.

그는 그날부터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그것을 몰랐다. 미래를 꿈꾸고 있었으니까. 그는 기세등등하게 계획을 전면으로 수정하고 있었다. 김종석을 그의 인생에서 제거해 버리고, 마재희와 함께할 새로운 인생을 살 계획을 도모했다.

서랍 속에 두었다가 단테의 신곡에 꽂아 놓은 유언장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가 누군가를 팔아넘기며 이득을 취해 왔다는 사실을 잊었다. 의심스러운 정황에도 한결같이 믿어 준 신부님과 교수님을 무책임하게 등졌다. 강대환에게 입었던 은혜를 기억 속에서 지워 버렸다.

종래에는- 김종석을 살해할 마음을 품고,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려 했다.

당시 그는 그 길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사실 그는 미개척지를 앞둔 정복자처럼 흥분하고 있었다. 뼛속까지 깊은 곳에서부터 자신이 사실 그 순간만을 기다렸음을 느꼈다. 그가 원한 것은 고작 자유 같은 애매모호한 것이 아니다. 그가 그간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김종석의 머리를 내려치고 그 골수가 땅에 뿌려지는 것을 똑똑히 그의 눈으로 지켜보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는 기꺼이 그 길을 밟았을 것이다.

그 죄악의 현장에, 마재희가 오지 않았다면.

“한영아.”

“…….”

“한영아?”

멍투성이가 된 몸으로 그를 부르는 재희를 보며, 한영은 찬물을 맞은 사람처럼 머리가 식는 것을 느꼈다.

“한영아.”

한영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그 순간 잊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을. 남자들이 다녀간 후 그의 어머니는 어린 한영을 안고 고장 난 인형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괜찮아.”

“…….”

“나 정말 괜찮아.”

어머니의 목소리가 재희의 목소리에 덧씌워지던 그 순간, 한영은 받아들였다. 그동안 눈감고 있던 진실을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고.

자신은 독이었다.

마재희를 병들게 하는, 독.

그래서 이한영은 김종석을 놓아주었다.

그 선택의 끝이 어찌 되돌아올지, 예견하고도.

한영은 강릉에서 재희와 보내는 사흘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머리는 어느 때보다도 명징했다. 이한영은 그동안 자신을 억누르던 한 꺼풀의 허물을 벗어던졌음을 깨달았다. 그간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감정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꼈다. 마재희를 향하던 애욕이든, 김종석을 향하던 증오든. 무엇이든.

그런 것들은 그에게 더 이상 유의미한 것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한영은 먼저 잠든 재희를 보며 몇 번이고 생각해 보곤 했다. 나는 재희를 통해 무엇을 하고 싶었던 걸까. 정말로 재희를 사랑하기는 한 걸까?

한 점 얼룩 없는 깨끗한 머리로 이한영이 판단한 바로는,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파괴다. 멀쩡한 사람 하나를 망가트리는 관계였다. 정서적 학대이자, 착취였다. 순수하고 누구보다도 양심적이던 마재희를 그와 똑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그가 사는 밑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재희의 눈과 귀를 가리고 속였다. 둘이 같이하면 행복할 거라고. 그러니 이 오욕 같은 진창 속에서, 함께하자고.

그것은 사랑일 수 없었다. 사랑이어서는 안 되었다.

잠든 마재희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던 밤, 이한영은 후회했다.

처음부터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

처음부터 재희에게 손대지 말았어야 했다. 할머니의 유언을 떠올려야 했다. 짐승과 오래 놀면 물든다. 할머니는 그 말을 마재희에게도 남겨 줬어야 했다. 짐승인 이한영이 아니라, 인간인 마재희에게.

* * *

“거짓말하지는 않아. 나는 내 방식으로 너를 사랑했어.”

길고 긴 이야기 끝에 한영은 말했다. 사랑했다는 말과 어울리지 않는 건조한 어조로, 서른두 살의 마재희에게 말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들려준 이야기로 너도 알겠지. 내가 널 사랑한 방식이 남들과 달랐다는 것을.”

처음은 어머니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데서 오는 한풀이로 시작했다. 어머니 아닌 사람과 관계를 맺어 본 게 처음이라 집착할 줄밖에 몰랐다. 널 욕망은 했다. 남들보다 아끼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나는 네 감정은 조금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어. 네가 어떤 마음이든, 나는 상관없었어. 널 안을 수 있기만 한다면.”

한영은 고요히 웃었다.

“재희야, 그런 걸 남들은 착취라고 불러. 사랑이 아니라.”

어렸을 때처럼 여전히 어여쁜 마재희가 눈시울을 붉힌다. 한영은 상처 입었을 그녀를 찬찬히 눈에 담았다. 스물다섯의 해 어느 날, 교도관이 다가와 건넸던 말을 떠올렸다.

‘계속 찾아오는 여자분, 오늘 한참 울다 돌아갔습니다.’

저린 손끝으로 몇 번이고 편지에 쓸 말을 고르던 그날의 밤, 한영은 알고 있었다. 그 순간은 결국, 지나가야 할 통과 의례일 뿐이라는 것을. 이한영 없는 마재희는 훌륭하게 홀로 서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아름다운 성인이 되어,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지난 시간 버틴 데 미련이 생기겠지. 이해해. 그렇지만 관성대로 나와 함께하려 한다면, 네 미래는 지난 십일 년과 다르지 않을 거야. 몰래 뒤에서 옥바라지하는 게 아니라, 십수 년, 어쩌면 수십 년을 남의 병구완으로 씨름해야 한다는 것이 다를 뿐.”

한영은 그런 미래를 재희와 함께하고 싶지 않았다.

“재희야, 평범하게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나.”

그것이 진심이라는 것을 마재희도 알았을 것이다.

그녀는 곧 떠났다.

한영은 몸에서 힘을 뺐다. 풀썩 뒤로 쓰러졌다. 소파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며, 다시 찾아온 고통과 씨름했다. 아무리 몸을 단련해도 형체 없는 통증은 끈질기게 찾아왔다. 한영은 자신의 몸이 빈껍데기 같다고 느꼈다. 거추장스러운 몸뚱이 따위, 지금 당장 버려 버리고 싶었지만.

어느새 땀으로 젖은 눈가를 움직였다. 벽에 붙은 달력 위로 동그라미가 그려진 날짜를 확인했다. 그의 새 시집이 나오는 날은, 아직도 멀기만 했다.

한영은 피로감에 휩싸여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러나 그는 곧 다시 눈을 떴다. 그의 옆에 무언가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재희였다. 일곱 살이던 시절의, 어린 마재희.

한영은 오래도록 환영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사라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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