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11. 도쿄 패닉.
11. 도쿄 패닉.
워싱턴.
미국의 수도로도 유명하지만, 던전 협력기구 D10의 총본산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던전과 관련된 모든 국제법이 이곳에서 제정되며, 모든 길드와 모험가가 소속된 곳이다.
정기적인 회의는 한 달에 한 번 열리고, 거기서 앞으로의 방향을 결정하거나 중대한 사항에 대한 논의를 하게 되는데, 오늘, 갑작스럽게 회의가 소집됐다.
보통 회의를 할 때면 (가)급인 본부와 (나)급, (다)급인 각 지부장이 모이게 되는데, 그 수는 총 15명으로, 사실상 D10을 이끌어가는 이들이다.
(가)급으로는 던전 협력기구 총 본부장, (나)급으로는 유럽 지부장, 아시아 지부장, 러시아 지부장, 중국 지부장, 미국 지부장, (다)급으로는 일본 지부장, 한국 지부장, 영국 지부장, 이탈리아 지부장, 인도 지부장, 독일 지부장, 프랑스 지부장, 남미 지부장, 동남아 지부장, 호주 지부장이 있다.
직접 비행기를 타고 본부까지 날아와 참석하는 것이 정석이지만, 급히 소집된 지금은 어쩔 수 없이 화상으로 회의를 진행하게 되었는데, 분위기가 사뭇 심상찮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인지 설명해 줄 수 있습니까? Mr.킴."
백발이 희끗한 본부장이 날카로운 표정으로 중년의 남자에게 물었다.
영상 너머에서도 느껴질 정도의 식은땀을 흘리며 난감해 하고 있던 남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직...상세한 상황은 파악 중에 있습니다...하지만 확실한 건 군부의 생각이 모두 그랬던 건 아니고, 한사랑 소령의 독단적인 판단에 의해 발생한 일이라는 겁니다."
"소령?"
옆에있던(정확히는 옆에서 비춰지는) 아시아 지부장이자 일본 지부장인 남자가 하! 하며 비웃음을 날렸다.
"아니, 한국은 일개 소령이 마구 총을 갈겨댈 수 있는 나랍니까? 장관이 그랬다 해도 믿지 못할 판국인데."
"...개정된 군법과 7공화국 특례조항 때문입니다. 국가가 과도하게 우리와 모험가를 견제하고 있어요."
"어허. 그걸 관리하는 게, 김부장님 일 아닙니까? 그러게 누누히 말했잖소. 우리 아시아 지부와 좀 더 돈독하게 관계를 가지고 함께 일해야 한다고! 그렇게 뻗대면서 혼자 이것 저것 다 하려고 하니까 그런 문제가 터지는 거 아닙니까."
"흥. 아시아 지부? 뭐 어딜 봐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지부라는 겁니까? 거기 일본 지부 아닙니까? 일개 한 국가를 대표하는 지부가 다른 나라까지 대표하겠다니 욕심이 참 지나치시군."
"욕심이라니! 엄연히 한국 지부는 아시아 지부의 산하기관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중국 지부도 산하 지부인데 솔직히 영향력은 중국 지부가 더 강하지 않습니까? 이미 그 시점에서 유명무실하다는 걸 모르십니까?"
"아니 이 사람이!"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기다.
보통 조직이라 하면 각 기관끼리도 상하관계가 있기 마련이다. (가)급, (나)급, (다)급 등으로 나눠진 것도 그런 이유다.
명목상 최고 기관은 본부이고, 그 다음이 유럽 지부와 아시아 지부, 남미 지부와 같은 '대륙 지부'다.
하지만 D10의 창설국이자 핵심 이사국인 중국과 한국의 지부는 그 영향력이 여타 국가 지부와 비교도 안 되게 강력하기에 대륙 지부의 통솔을 사실상 받지 않으며, 심지어는 남미 지부와 동남아 지부, 호주 지부 등 다른 대륙 지부와 동등하거나 더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국 지부는 일개 국가를 대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급에 해당하며, 총 본부와 미국 지부, 중국 지부를 통틀어 던전 협력기구 내 가장 강력한 3개 지부 중 하나다.
상황이 이러하니 일본 도쿄에 있는 아시아 지부는 사실상 대륙 지부의 역할을 못하고 있으며, 그나마도 자체적으로 던전과 몬스터를 처리하지 못했던 기타 회원국을 원조하거나 하는 등의 일만 하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그것 조차 요즘 떠오르는 OPEC 지부로 인해 점점 밀려나는 실정. 이런 추세라면 몇 년 이내 아시아 지부는 정말 말 그대로 일본 지부로 추락할 수밖에 없다.
"적당히 좀 하세요!"
보다못한 한 여인이 호통을 치듯 외쳤다.
분명 중년의 여인인데 상당히 아름답다.
"언제까지 그렇게 싸우고만 있을 겁니까? 우리가 한가해서 이렇게 시간을 냈나요? 그리고, 아시아는 유럽 좀 본받으세요. 유럽 지부는 잘만 돌아가는데 아시아는 왜 그 모양인가요?"
"어디 유럽이랑 아시아랑 같습니까? 우리는ㅡ."
"서로 전쟁했다고요? 유럽은 전쟁 안 했나요? 2차 세계대전 당사국들인데요? 지방대 지방으로 갈라져서 수백년 동안 전쟁했는데요. 그래도 미래와 국익을 위해 서로 협력하고 있는데 아시아도 좀 그렇게 해봐요."
"荒谬绝伦!(어이없군!)."
중국 지부장이 황당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제대로 된 사정도 모르면서 아무렇게나 뱉는 말이라니. 이래서 서양인들은 안 된다. 자신들이 우월하고 아시아는 상대적으로 열등하다는 걸 밑바탕에 깔고 시작한다. 그래서 맘에 안 들었다.
역시 중화인민공화국의 부흥만이 세계를 구원하고 아시아를 구하는 일! 이런 사소한 말다툼에서도 그 모든 세계의 이치가 들어있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탕탕!
미국 지부장과 함께 유이하게 화상이 아닌 총 본부장이 법봉 같이 생긴 망치를 두 번 두드렸다.
"조용히 합시다. 자꾸 엇나가지 않습니까."
"흠..흠흠..."
아시아 세 나라와 유럽 지부장이 흥! 하며 고개를 돌렸다.
"Mr.킴, 이 일은 굉장히, 굉장히 중대하고 심각한 일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모든 전황을 알아내고 그에 걸맞는 대책을 세워야 해요. 자칫하면, 기껏 세운 기반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모든 걸 국가에게 넘겨주는 수가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한사랑 소령이 저지른 '한남동 대학살'사건은 벌써 한국 언론과 SNS를 타고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사람들의 반응은 경악 그 자체.
어디 구석에 짱박힌 소말리아 같은 국가에서 총격이 발생하고 탱크가 포격하고 한 게 아니다. G20에 OECD회원국, D10 핵심 이사국인 대한민국에서 국가의 군대가 모험가와 길드를 향해 직접적으로 무력을 사용한 것이다.
이는 갱이나 악질 길드가 판치는 개발도상국에서 벌어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을 선사했다. 특히 한국에서의 반응은 엄청나게 격렬했다.
여론이 극단적으로 양분되어 한사랑 소령을 당장이라도 사형 시켜야 한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경찰이 못하는 일을 군대가 잘 처리했다는 사람도 있다.
문제는, 이 사건으로 인해 한국의 모험가와 각 길드의 기가 팍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미친년 하나가 나와서 경고 하나 없이 총을 갈겨대는데 현대인이라면 움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 다른 나라들이 이러한 상황을 보고 '어? 효과 있는데?' 라고 생각해서 본격적으로 군대를 이용해 길드를 압박하기 시작한다면? 나아가 던전 협력기구의 지위까지 위협한다면? 이는 D10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 이 일은 한국 지부에서 최대한 신속하게 처리해 주시고,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죠."
일단은 이 얘기는 여기서 끝이다.
아직 발생한 지 하루밖에 안 됐고, 이것 말고도 오늘은 중요한 사안이 또 있다.
그는 아시아 지부장 겸 일본 지부장을 바라봤다.
"전에 말씀 드렸다 시피, 일본에서 B급 던전이 근시일 내에 발생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장소는 도쿄의...고쿄입니다."
"음...."
일본 지부장이 신음했다.
고쿄라면 일본 천황이 사는 곳이다. 뭐, 이제 와선 아무 의미도 없는 인간인지만 그래도 일본의 상징. 하필이면 이곳에 던전이 발생한다니 넌센스다.
"아시겠지만 B급이면 세계 역사상 최초입니다. 그 위력이 얼마나 강할 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D급 던전이 일개 '구'를 날려 버리고, C급 던전이 거대도시의 4분의 1을 날려버렸다는 걸 생각했을 때...."
본부장이 침을 삼켰다.
"최악의 경우 도쿄..아니 도쿄권이 붕괴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곧, 일본의 붕괴를 뜻하기도 합니다."
"...대비를 철저히 해야겠죠."
굳은 얼굴의 일본 지부장.
사실 고등급 던전이 생기는 건 국가적으로 경사나 다름 없다. 뉴욕의 4분의 1을 날려버린 맨하탄 던전이 그 예로, 뉴욕이 반쯤 붕괴하면서 생긴 피해를 복구하고도 남는 이익을 1년 만에 창출해냈다. C급이 그러할 진데, B급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일본의 수도권, 즉 도쿄권은 그 자체로 1조 6천억 달러 가량의 GDP를 갖고 있다. 거의 한국 만한 경제규모다. 그리고 일본의 중심이다.
도쿄가 무너진다는 건, 국제 사회에서 한국만한 경제력이 순삭된다는 걸 의미하고, 더 나아가 연관된 일본이 박살난다는 걸 뜻한다.
그 뒤의 세계 경제는 굳이 말할 것도 없다.
안 그래도 던전 때문에 세계가 망하네 마네 말이 많고, 불과 1년 전에 뉴욕의 4분의 1, 그것도 맨하탄이 날아가서 휘청 거렸는데여기서 도쿄까지 무너지면세계 경제는 정말 침체의 끝을 향해 달려갈 것이다.
"지부장님은 어떻게든 일본 정부 설득해서 고쿄를우리에게 개방해 주십시오. 민간인에게도 허용된 곳 말고 '전부' 말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Mr.킴, 이번 사태는 한국 지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우면서도 강력한 모험가 전력과 군대를 갖고 있죠."
"구,군대? 지금 우리나라에 한국 군대를 들이라는 말씀이십니까?!"
"당장 며칠 내에 도쿄가 붕괴할 수도 있는데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우리 입장에서도 언제까지고 군대가 던전을 진압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도쿄가 붕괴하는 건 더 안 좋습니다. 그래서 말씀 드리는 겁니다."
"흐음...파병이라...."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리도 자위대가 있고 미군도 있습니다. 모험가 전력도 한국보다 강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한국의 군대를 들여야 한다는 것입니까!!"
"한국 군대만 가는 게 아닙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미군과 UN군도 함께갈 것이며, 근방에 있는 모든 군대가 일본을 도와줄 것입니다. 그리고 모험가와 길드도 마찬가지고요."
침착하게 일본 지부장을 설득해 보지만, 그는 길길이 날뒬 뿐,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다.
"절대 안 됩니다! 아니, 이건 제가 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일본 국민이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한국군이라니!!"
"Mr.이시다."
"UN군의 자격으로 오는 거라면 상관 없지만, 한국군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진정하세요 이시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반응이 격렬하다.
"이시다. 일본이 망해야 정신 차릴 겁니까?"
"...."
"압도적인 힘에 의해 도시가 붕괴되고 나라가 망하는 건, 한 번이면 족합니다. 그렇죠?"
"...!"
"한국도 힘들겠지만 세계를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력이 있을 때 도와주어야, 혹시 같은 참사를 맛보게 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후...노력해 보죠."
"마침 한국의 강남...이던가요? D급 던전을 통일한 길드가 등장했다고 들었습니다."
"하렘단 말이군요."
"그 길드에게도 꼭 좀 요청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인류의 최대 전력으로, 도쿄 붕괴를 막아야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