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화 〉21. 개장!
다행히 믿는 눈치다.
황명 스킬 덕분인가. 희대의 망언 효도드립도 어명 단계에서 먹혀들었는데 그보다 업그레이드 된 황명인 데다가 그렇게 이상한 말을 한 것도 아니니까.
나름 진심이라고?
"그 말...믿어도 돼?"
눈동자가 살짝 불안하게 떨리고 그윽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그래도 신뢰를 기반으로 한 표정이다.
나는 잡았던 누나의 어깨를 스윽 쓰다듬어 주었다.
"물론이죠. 제가 소라누나를 버릴 일은 없을 거예요. 얼마나 매력적인 사람인데."
"...."
그녀가 말 없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감동 먹었나? 역시 황명을 등에 업은 나의 말빨은ㅡ,
"여자는 말야."
"네?"
"그냥 말로만 들어서는 안심이 안 돼. 증거가 필요해."
엥.
"증...거라면 어떤?"
설마 애를 낳자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그, 있잖아...앙리에타라는 애. 결국 빈으로 올렸잖아. 근데 나도 빈이란 말야. 그런 의도는 아니라고 말은 하지만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좀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달까."
정확한 단어는 말하지 않고 '그렇다'정도의 단어로 기분을 묘사하고 있다.
아무래도 최대한 조심하는 모양....
그러고보니 유나씨랑 소라누나를 비로 올려주려 했는데 워낙 일이 펑펑 터지다 보니 까먹고 있었네...반지까지 만들었는데 말야. 반성하자.
"2차 전직하면서 비 슬롯 늘었다면서?"
"정확히는 퀘스트."
"아무튼...그 자리...내가 들어가도 돼?"
여기서 대답을 끌거나 망설이는모습을 보이면 끝이다. 이건 씹덕 오타쿠도 알 수 있는 넘나 간단하고 쉬운 문제야.
당연히 '그럼요!'하고즉답하는 게 좋겠지만,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가면 더욱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에헤이 누나. 급하긴."
"응?"
"안 그래도 오늘 그 얘기 하려고 했는데 김새버렸네."
"그게 무슨 소리야?"
"그건...."
얇은 허리에 팔을 두르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쪽.
"가보면 알아요."
"?"
"어쨌든 다시는 그런 고민 하지 마요. 괜히 이상한 생각으로 빠질라."
"...알았어."
어떻게든 납득은 한 모양.
자, 그럼 이제 내게 필요한 건...
'스피드!'
"누나 나 잠깐 화장실 좀."
"응? 좀만 걸어가면 집이잖아. 저기 바로 보이는데."
"저 건물은 강남 어디서든 보여요. 잠시면 됩니다."
그 말을 남기고 쏜살처럼 옆 건물로 들어온 나.
괘씸하게도 화장실 문이 잠겨 있었지만 발로 걷어 차고 들어갔다.
그리고는한창 공방에서 시녀전용 무기를 제작하고 있을 은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주인님.
"은주야! 너 저번에 말한 반지 다 만들었지?"
-그럼요. 그게 언제인데요. 다 만들고 드렸잖아요.
"그,그랬지. 지금 소라누나랑 가고 있거든? 뭐든 준비해봐."
-...네? 무슨...말씀이세요?
"일이 좀 이상하게 흘러가서 반지 주는 이벤트 지금 당장 해야 될 거 같아."
-...진작 좀 하시지. 얼마나 걸리는데요? 한 시간 정도라면 어떻게든ㅡ,
"...5분."
-...네?
"5분이면 도착해."
-....
잠시동안 말이 없다.
-농담이죠?
"아니 진짠데. 바로 앞이야 지금. 건너편 건물 화장실에서 전화하고 있어."
-아,아니 5분안에 어떻게....
"일이 좀 그렇게 됐어. 어떻게 좀 해봐."
-차라리 데이트를 하고 오세요.
"어? 그럴까?"
-거절할 리는 없으니까 어디 가서 놀다 오자고 해요.
"그,그래야겠어. 그러네. 그러고보니 소라누나랑 어딜 다녀본기억은 없는 거 같아."
-근데 무슨 이벤트 하실 건데요?
"...그러게."
-...에휴.
건방진 한숨이지만 지금 만큼은 할 말이 없다...
-그럼 그냥 제가 하라는 대로 하세요.
"으,응."
-전에 제가 드린 드레스코드 아이템 있죠?
"어. 갖고 있어."
우리 길드 기본 지급 아이템 중 하나인데 없을 리가 없지.
-일단 깔끔한 옷으로 갈아 입으세요. 캐쥬얼한 거 말고. 좀 댄디한 걸로.
"댄...디한 게 뭐야?"
-음...그럼 그냥 단정하게 입으세요 알아서. 지금보단 낫겠죠.
"내가 지금 뭘 입었는지 어떻게 알아?"
-뭘 입으셨든 쿵떡하고 오셨을 텐데 별로 안 좋을 게 뻔하잖아요.
"그렇구나."
일단 갈아입었다.
패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단정하게 입으라고 하니 흰색 와이셔츠랑 검은색 정장바지를 입었다.
"넥타이도 해야 하나?"
-어떻게 입...아 그냥 화상통화로 해요 주인님.
은주가 전화를 끊더니 화상통화를 걸어 왔다.
그리고는 화면을 보자마자 '힉'하는 소리를내더니 이것저것 따져가며 지적...그나마 시간이 없어서 간결하게 끝낸다는 느낌이다.
"근데 내가 등록한 세트 중에서는 그나마 이게 제일 단정해."
-....
절망이 그녀의 표정에 드리워졌다.
-흰색 와이셔츠...나쁘진 않아요 나쁘진 않은데....
계속 그렇게 중얼거리다 결국 체념했는지 다음 지도로 넘어갔다.
-아시는 레스토랑 있으세요? 잘 하는 곳으로.
"음...아! 전에 사랑씨랑 같이 갔던 곳 있는데 거기꽤ㅡ,"
-탈락.
"응? 아,아직 다 안 말했는데...."
-다른 여자랑 간 시점에서 탈락이에요. 잘못해서 그 사람 이름이라도나오면 그 순간 분위기 파토나니까요.
"그,그럴려나...."
-아무리 그냥 넘어가고 있다지만 사람이 그럴 수밖에 없죠.
"하긴 그래."
그럼 어쩌지. 내가 아는 곳이 없는데. 그보다꼭 레스토랑일 필욘 없지 않나. 아직 저녁까진 시간 좀 남았는데.
차라리 명품관을 하나 사서 개관해버려?그게 더 빠르고효과적일지도...쉽기도 하고.
돈은 좀 들겠지만 조단위로 굴리는 내 기준으론 별 거 아닐거고.
-그럼 저녁은 여기서 준비할 테니 적당히 데이트 하시면서 분위기 달구어 주세요. 아시겠죠? '분위기'에요 분.위.기. 막 섹스섹스 이러지 마시고.
"안 그래."
내가 무슨 짐승인 줄 아니.
-데이트 정도는 하실 수 있죠?
"그럼."
-뭐 하실 거에요?
"음...영화?"
-영화는 안 돼요. 영상만 보다 오잖아요. 많이 얘기하는 게 중요하다구요.
"그럼 어디가지. 미디어방? 요즘 유행한다던데."
-아니....
레알 핵답답한 표정이다.
어쩔 수 없어. 난 모쏠인걸.
-뭐 하고 싶으신 거 없으세요? 여친이랑 가보고 싶은 곳이라던가.
"잘 모르겠는데...누나한테 물어보면 어떨까?"
-안 되죠...지금 잠깐 화장실 가겠다고 들어오신 거라면서요. 미리 준비해 놨다는 식으로 말하고 오신 거 아니에요?
"맞아...."
어쩌지.
-아...시간이...일단 얼른 나가세요. 나가서 아무거나 해요. 영화빼고.
"그래도 좀 확실하게 해두는 게 낫지 않을까? 큰 거 보고 왔다고 하면...."
-안 믿을 걸요. 또 어디서 여자 주워서 하고왔나보다 하겠죠.
"날 대체 어떻게 보고 있는 거냐...."
-자업자득입니다 주인님.
"오냐. 우리 크림빵 많이 컸네?"
-흠흠. 아무튼 분위기 있게 가급적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걸로 선정하세요. 전 여기서 반지랑 같이 준비하고 있을게요.
"알았어."
.
.
"섹스하다 왔어? 숏타임? 너무 빨리 뺀 거 아냐?"
"...."
쓸데없이 은주의 예상이 맞아버렸네.
"아닙니다. 옷 갈아입고 나왔어요."
"그러고보니 좀 깔끔해졌네. 잘 어울린다. 근데 왜?"
그녀의 물음에는 여러 가지가 함축되어 있었다.
'이제 집에 갈 건데왜 굳이?'
'혹시 진짜 섹스하다 온 거 아냐? 흔적 지울려고 갈아입었니?'
'이왕 갈아입는 거 좀 제대로 된 거 입고 오지 그랬니?'
등등...
물론 내가 그렇게 느낄 뿐이지만 맞는 거 같애.
나는 소라누나와 팔짱을 끼며 감동적인 대사를 읊었다.
"아름다운 숙녀분을 에스코트하는데 이상한 옷을 입을 순 없죠."
"뭔가 더 이상한데...집에 가는 거 아냐?"
"후후."
그녀는 나를 수상히 여겼지만 더 의심하진 않았다. 나름 기분 좋은 듯.
"그건 숙녀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야. 그냥 평소대로 해. 이상하잖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내 몸에 기대온다.
흐흐. 이대로 모텔에 가...아,아니지. 데이트를 해야지 데이트.
+++
"비상이에요."
처억.
하고 은주가 시녀들 앞에 섰다.
유은의 1호 좆물받이인 그녀의 힘은 예상외로 꽤 컸는데, 유은이 이것저것 많이 시켜대다보니 자연스레 많은 일을 담당하게 되었고, 그게 권력처럼 고착화 된 것이다.
때문에 유은도 없고 서현도없고 소라나 유나, 소냐 모두 없다면 하렘궁의 가장 어른(?)은 은주였다.
"멍청한 주인님이 해야 할 일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사단을 내고 만 것이죠."
"그런 적이 한 두번도 아닌데 이번엔 또 뭐에요?"
"사모님에게할 반지 이벤트를 급히 오늘 하기로 했어요."
"...왜요?"
"그러게요."
"...."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 우리도 해야 할 일을 해야겠죠."
시녀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그래서 할 일이 뭔가요?"
"일단은 세팅이요. 지금 당장 일류 호텔리어, 셰프, 오케스트라등 섭외해 주세요."
"이,이렇게 갑자기...?"
"이 황궁광장을 전부 활용해서 이벤트를 열 거예요. 아주 성대하게."
갑작스런 일에 당황했던 시녀들이지만, 곧 은주의 지휘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궁에 배정된 시녀들만 2천명이 넘는다.
제 힘을 발휘한다면 그깟 이벤트 쯤은 껌.
각자 파트를 나뉘어서 꾸밈조, 섭외조, 세팅조,홍보조 등으로 일을 진행하기 시작했고, 불과 20여분만에 서울의 유력한 인사들이 섭외 되었다.
각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이들, 곧 모험가, 연예인, 아이돌, 가수, 정치인, 경찰, 검사, 군인 등등 이름만 대도 알 만한 이들이었고, 심지어는 대통령까지 있었다.
현재의 하렘궁이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약 1시간 3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대략적인 구성이 나왔고, 섭외된 인물들 역시 대부분 도착했다.
"아니, 선배!"
"야...너두?"
"여기서 이렇게 뵙다니...하하."
"이야...오랜만이다야!"
"아이고 김 의원님!"
"이거 서 의원님 아니십니까!"
"충!성!"
"충성."
사방에서 펼쳐지는 상봉의 향연.
그 안에는 이 나라의 대통령도 끼어 있었다.
보통은말도 안 되는 스케쥴 때문에 섭외가 불가능한 인물이지만, 유은이 부른다는 말을 듣고 한 걸음에 달려왔다.
"이거...뭔가하는 모양인데요."
"상류파티라도 하려는 걸까요?"
"사교를 즐기는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상봉(?)의 반가움을 느낀 후, 그들은 의아함을 느끼게 되었다.
상당히 큰 행사를 열 것 같긴 한데, 정확히 뭔지는 전달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 내빈 여러분들, 모두 주목해 주십시오."
그런 가운데 은주가 단상에 섰다.
"오늘 이렇게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있을 행사에서 박수부대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이지요."
"박...수부대?"
"환호성을 지르셔도 좋습니다."
"아니 무슨...."
급한 일이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