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8화 〉25.NTL판타지
유은과 유나를 날려보낸 뒤, 쟌다르크가 몸을 일으켰다.
하얗고 기분 나쁜 액체로 된 주제에 쓸데없이 효과는 좋아서 컨디션은 최상.
역시 '색욕'이 맞는 듯싶었다.
"강한 놈이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긴 놈이 강한 거란다. 애송이."
차갑게 분노를 불태우며 황량한 폐허가 된 유랑도시 내부를 거닐었다.
신기하게도 그럴 때마다 무너져 내린 건물들이 재건되었다.
마치 씨앗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가지가 나며 마침내 나무가 되는 것과 같은 탄생의 과정.
망가진도로도 복구되고, 마천루는 높이 솟았으며, 유랑도시를 관장하는 캐슬 역시 웅장하게 건설 되었다.
고도로발달된 마도과학과 '현상'을 뒤섞어 만들어낸 궁극의 서번트. '유랑도시'.
특성상 자원만 있다면 얼마든지 복구할 수 있고, 다친 사람들도 다량의 자원을 소비하여 되살릴 수 있다.
지금은 대부분 죽어버려서 문제지만.
"인구야 노예들도 채우면 그만이고...병사들은 개조해야지. 당분간은 타격이 좀 크겠어."
그래도 걱정은 없다.
몇몇의 이례귤러를 제외하면 지구라는 행성은 미개하기 짝이 없는 곳이고, 그녀 혼자라 해도 얼마든지 지배할 수 있다.
지구를 지배하에 두고 각지에 있는 자원지(던전)에서 자원을 수집하고 지구인을 노예로 부려 유랑도시로 입성 시킨다.
그렇게 수십년에 걸쳐 지구의 자원을 쪽쪽 빨아내고 나면 비대해진 덩치를 가지고 다른 먹이를 향해 이동한다.
그런 계획을 세우며 중얼거리던 그녀가 발을 멈추었다.
눈 앞에 한 여인이 막아 선 까닭이다.
"...넌 또 뭐야?"
행색을 보아 바르카나인이 아니다. 아마도 지구인.
또 방해물인가.
하고 생각할 무렵, 여인이 입을 열었다.
"주인님은 어디 가시고 너 혼자 있는 거죠?"
"주인님? 아. 그 되먹지 못한 변태놈을 말하는 건가."
"...."
여인, 서현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피식 하고 웃는 쟌다르크.
"보면 몰라? 아, 내가 누군지 모르겠구나."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정리하며 짤막하게 본인을 소개했다.
"유랑도시 바르카나의 주인, 바르카나 쟌다르크다. 보통 '시장'이라 불리지."
"...대충 예상은 했습니다만 너가 그 시장이라는 것이군요. 남자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반말을 하든 존대를 하든 하나만 하지 그래? 뭐든 애매한 건 쓸모 없다는 걸 모르니."
"아 그래? 그럼 쉽게 말해줄테니까 귓구멍 열고 제대로 들어. 3초 내로 주인님 어디 계신지 말해."
험악하게 변한 인상. 하지만 쟌다르크는 여유만만이다.
"모르는데 나도."
"뭐?"
"모른다고."
"아~ 그래?"
뚜둑.
서현이 오른손가락에 힘을 주어 굽혔다.
뼈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제법 크게 울렸다.
거기에 대고 쟌다르크가 첨언했다.
"날려버렸음 그만이지 어디로 날려졌는지 알 게 뭐야."
"그게 무슨 소리지?"
"지금쯤 블랙홀에 빨려 들어갔을 수도 있고~ 다른 우주탄생의 순간에 끼어 같이 터졌을 수도 있고~. 아님 뭐 운 좋게 살만한 곳에 떨어졌을 수도 있지."
처억.
그녀가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왔다.
"중요한 건, 그 괴물들은 여기 없고, 대신 내가 있다는 사실이지. 그러니 너희들은ㅡ,"
빠악 - !
채 말이 끝나기도 전, 서현의 주먹이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듯 쟌다르크의 뺨에 적중했다.
순간 입술이 터지며 피가 흩날렸고, 그녀의 몸은 바닥에 널브러졌다.
"힘 조절했다 씨발년아."
"크...."
무슨 상황인지 인지가 안 돼 약 0.5초간 멍하니 있던 쟌다르크는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일어서려 해봤지만 그 전에 서현이 발을 휘두르는 게 먼저였다.
푸욱!
"커억!"
사장없이 복부를 밟아 버리고 이어 무자비한 폭격(?)을 시행했다.
'무,무슨...!'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려 해 보지만, 여의치 않다.
한 방 한 방이 끔찍한 고통을 동반하고, 맞으면 전신의 힘이 쭉 빠지곤 했다.
+++
"...그게 무슨 소리에요?"
"...죄송합니다."
적당히 죽지 않을 정도로 시장을 패준 서현이 축 늘어진 그녀를 끌고 돌아왔다.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소라가 유은과 유나에 대해 추궁했다.
"그러니까, 저년이 은이랑 유나를 다른 차원으로 보내버린 것 같다, 이 말이에요?"
"일단 들은 내용으로 유추한 바는 그렇습니다. 물론 아직 말 뿐이니 마냥 믿을 수만은 없습니다만, 현재로서는 그 방향으로 생각해야 할 듯 싶습니다."
"...그냥 숨어서 섹스하고 있을 가능성은?"
"그럴...수도 있으시겠지만 설마요."
"아냐. 그녀석이면 가능해요."
"...."
도대체 얼마나 신뢰받지 못하고있는 걸까.
"일단 알았어요. 시녀분들이랑 아흑이 분신 풀어서 계속 찾아봐요."
"네."
"그리고 저거...어쩔 거예요?"
"시장도 우리 손에 있으니 우리가 인수하는 게 옳다 여겨집니다."
"인수라...세계가 가만 안 둘 것 같은데...."
무려 UFO 비스무리한 존재다.
하늘을 둥둥 떠 있는 도시라니! 성이라니! 이런 걸 하렘궁이 소유하겠다고 한다면 국제사회가 그냥 보고 있을 리 없다.
게다가 만에 하나라도 유은과 유나가 정말로 차원의 저편으로 날아가 실종된 거라면 하렘궁의 전력약화를 빌미로 삼아 이런저런 것들을 뜯어내려 할 수도 있다.
"그럴 수 없을 겁니다."
.
.
하루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인천사태는 어느 정도 진정 되었다.
허공에 떠 있던 유랑도시는 흑흑이와 아흑이가 힘을 합해 서해상으로 옮겼고, 여기저기 박살난 인천에는 엄청난 수의 자원봉사자들과 구호단체 등이 몰려들어 복구에 힘을 보탰다.
동시에 유랑도시가 처음 등장했던 곳 중앙에 커다란 광장구획이 만들어졌고, 간이로다가 무수한 비석이 세워졌다.
소라의 활약이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자그마치 30만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
여론은 들끓었으며, 국가의 무능함과 모험가들의 삽질을 욕했다.
특히 한국지부는 지부가 있는 인천에서 이런 사단이 벌어졌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며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았고,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2만에 달하는 사상자를 낸 군대 역시 그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군의 경우 절대다수가 강제징병으로 징집된 인원이었기 때문에 국민들의 성화와 분노가 심상치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까방권을 얻은 곳이 있다면 바로 하렘궁.
일단 유은의 펫인 아흑이가 미지의 적 공군을 쓸어버리는 장면이 필름에 담겼고, 이후 유은이나 유나가 쳐들어가는 장면, 무엇보다 유소라의 인천 전역을 감당하는 말도 안 되는 힐 필드까지.
국가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하면서 나라와 국민을 보호했는데, 그에 비하면 유은이 벌이는 짓들은 그냥 사소한 것에 불과하지 않냐는 의견이 속속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한 번 국가와 정면으로 충돌할 뻔한 적이 있었고 그게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라는 점을 들어 말도 안 된다 여기는 이들도 있었지만,상대적으로 소수였다.
"정작 그놈이 없지만."
후우.
지친 듯 의자에 몸을 맡긴 여자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번 인천사태에서 가장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할 수 있는 그녀는 전 세계에서 빗발치는 인터뷰 요청을 모두 씹어버리고 서현과 함께 유은을 찾는 것에 몰두했다.
거의 하루 꼬박을 잠도 자지 않고 천여명의 시녀들을 풀어 찾아 보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고, 덕분에 이렇게 늘어진 것이다.
"뭐 어디 가서 죽거나 하진 않을 놈이지만...그래도...."
딱히 그의 신변에 대한 걱정은 되지 않았다.
스펙이 좀 넘사벽이어야 그런 걱정도 할 텐데, 유은은 궤를 달리하는 괴물이다.
게다가 유나도 있지 않은가.
유은 혼자라면 힘은 강력해도 애가 띨빵하고 멍청해서 그쪽 방면으로는 걱정을 좀 했을 텐데 다행히 야무진 유나가 함께다.
"부러운 년. 혼자 신혼여행 하고 있네."
+++
"으음."
지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유은과 유나.
둘은 일단 바닥으로 내려왔다.
군데군데 도시나 마을이 보였지만 어차피 각봤자 말이 통할지도 미지수이고, 적어도 상황 파악 정도는 제대로 해야 할 것 같았다.
"일단 여긴 이세계인 것 같아요."
"네."
"그리고 우린 어떤 경로를 통해 이세계로 오게 된 거고요."
"아마 그년 때문이겠죠. 그러니 확실히 죽였어야 했어요."
"아무튼 당연하지만 이세계로오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 꼭 필요한 물건이 없습니다."
여러 구호도구는 고사하고 당장 이번 저녁에 먹을 식량조차 없다.
그렇다고 유은이나 유나가 요리를 할 줄 알고 식재료에 대해 빠삭하게 알아서 제대로 된 식사를 준비할 수 있느냐?
그렇지도 않다.
유은은 요리라고는 라면 밖에 해본 적 없는 인간이고, 유나 역시 딱히 접점이 없다.
"마을에 가서 집 하나만 달라고 해볼까요?"
"퍽이나 주겠어요."
"제 힘을 보여주면 되죠."
"인간이 할 짓이에요 그게?"
"인간이니까 하는 짓이랍니다."
"전 싫은데요. 그러지 말고 어차피 추위 같은 거 안 느끼니까 대충 있어요."
유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옷이 더러워졌지만 어차피 드레스코드를 이용하는 옷이었기에 오염은 딱히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밥은 어떻게 하고요?"
"...."
"아무거나 먹...어도 되긴 하겠지만 그래도 그건 좀 인간으로서 아니라고나 할까. 존엄성이 훼손된다고나 할까."
"무슨 존엄성까지 나와요. 이런 상황에."
유나가 투덜거리며 품을 뒤졌다.
"자요. 초콜릿 하나 있는데 배고프면 먹어요."
"유나씨는요?"
"전 아직 괜찮아요."
"음...그래도 이럴 땐 역시 유나씨가 먹는 게......아! 아니지. 제가 먹을게요."
"?"
갑자기 생각이 변했는지, 유은이 싱글벙글 웃으며 유나의 손에 올려진 초콜릿을 집어갔다.
"일단 저만 제대로 먹으면 우리의 식량 문제는 오케이에요."
"...무슨 소리에요?"
문득 오한이 드는 유나.
저 망할 입에서 대체 무슨 망언이 나올까.
"제가 식량으로 에너지를 보충한 뒤, 유나씨가 제 정액을 짜서 드시면 됩니다. 그럼 1명분의 식량으로 2명이 식사를하는 거죠."
"미쳤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