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2화 〉26.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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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할 기사분들은 준비 되었나요?"
붉은 머리의 여인.
유은과 유나가 이 대륙에서 만난 여인...아니 사람들 중 가장 아름다웠다.
뭐랄까, 분위기부터 다르다고 해야 할까?
흡사 이소냐를 처음 봤을 때의 그런 느낌이었다.
"...물론이예요. 전하."
아마르 자작령과 라이젠 남작령에 각각 2일씩 머문다던 공주.
그녀는 아무래도 라르나르의 패배를 기정사실로 여기는 듯했다.
대놓고 그런 기색을 보이진 않았지만 그녀가 라르나르를 볼 때의 눈에 언뜻언뜻 동정심이나 안쓰러움 등이 비춰졌다.
"내일까지 저는 여기 있을 테니 그때까지 리스트 부탁해요."
분명 준비가 다 되었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했는데 굳이 내일까지 시간을 준다.
아마 구하지 못했는데 어떻게든 실낱같은 희망을 잡고 시간을 벌려는 것처럼 본 모양이다.
라르나르도 그러한 기색을 읽었으나 내색하진 않았다.
"예. 전하."
"그런데 이 분들은? 여기 있을 법한 분들인가요?"
고개를 돌린 공주가 찻잔을 든 채로 유은과 유나의 면면을 살폈다.
흑발을 길게 늘인 여인은 대단히 아름다웠다.
자신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을 정도, 아니 어쩌면 밀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가질 정도로 예뻤다.
하지만 분위기는 뭔가 애매하다고나 할까.
피부라던가 몸 상태, 입고 있는 옷 등은 매우 고품질의 것으로 갖추고 있는데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몸에 배어있는 예의라던가 하는 게 딱히 없었다.
물론 유나는 현대 지구의 상류층에서 태어난 여인이고 나름의 예의를 갖추고 있지만, 당연히 지구의 예의따위 여기선 아무 의미 없다.
그런 걸 알 리 없는공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남자도 마찬가지.
얼굴은 굉장히 잘생겼다. 계집애처럼 생긴 게 그녀의 취향과는 좀 안 맞았지만, 어느 시대나 취향의 차이를 무지막지한 미모로 돌파해버리는 인간들이 존재한다. 유나와 마찬가지로 유은 역시 그런 유형. 여자라면 그냥이유 없이 옆에 있고 싶은 얼굴이었다.
다만 옆에 있는 여자와 비교해도 없다시피할 정도의 예와 저열한 웃음, 방정맞은 표정 등이 점수를 상당수 깎아내렸다.
그저 평범한 아낙네나, 그저 그런 귀족가의 영애였다면 그녀도 입을 헤 벌리며 유은을 탐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왕실의 여인.
사람이 갖고 있는 분위기에 민감했고, 그런 점에서 유은은 낙제점이었다.
이렇게 평가했을 때, 과연 그들이 남작인 라르나르와 더불어 자신 앞에 있을 수 있는 사람들인지에 대해 의문이 생겼다.
"아...이 분들은...."
라르나르가 머뭇거리는 사이, 유은이 앞에 있는 차를 홀랑 마셔버리고는 개인 접시에 있는 마지막 과자를 집어 먹었다.
"우음...다 먹었네."
"제꺼 드세요."
옆에 있던 유나가 거의 손대지 않은 자신의 접시를 스윽 밀었다.
유은은 고맙다며 얼른 가져가 과자를 먹기 시작했다.
뒤에 있던 시녀가 다가와 차를 따라줄 때까지, 거의 10개는 집어먹으며 아삭거리는 소리를 냈다.
"...?"
공주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유은을 바라봤다.
들고 있던 찻잔도 덜덜 떨렸다.
대체 뭔가? 이 남자는.
차라리 몰랐다면 상관없다. 하지만 자신이 공주라는 걸 뻔히 알면서 마치 평민가정에서나 할법한 행동들을 하다니.
옆에 있는 여자도 그렇다.
개인접시를 왜 남에게 준단 말인가.
과자를 안 먹어서? 옆에 있는 남자가 다 먹어서? 그래서 준 건가?
아마 그런 이유인 것 같은데, 그녀가 태어난 이래 이렇게 황당한 건처음 봤다.
다과 따위는 가만히만 있으면 얼마든지 시녀가 와서 리필해준다.
실제로 차도 다시 따라주지 않았는가.
애초에 식사하는 자리가 아니다. 다과는 그저 담소에 곁들이는 부가적인 요소에 불과하다. 과자가 그렇게 먹고 싶으면 혼자 있을 때 왕창 가져가서 먹으면 된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그걸 굳이 공주 앞에서, 그것도 영지가 날아가니 마니 하는 아주 중요한 얘기를 나누는 이 자리에서 저렇게 아삭거리면서 과자를 처묵하고 심지어 옆에 있는 사람의 것까지 가져가서 먹는다니.
예의는 둘째치고 개념이 없어보인다.
누구는 지금 대머리 할아버지에게 첩으로 팔려가니 마니 하고 있는데 고작 과자따위에 집중하며 쩝쩝대는 꼴이라니.
'아무리 잘 쳐줘도 졸부...아니면...잘나가는 용병? 그 정도인가.'
톡.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왜인지 기분이 불쾌해지면서도 라르나르를 향한 안쓰러움이 진해졌다.
얼마나 몰렸길래 이런 인간들이 이 자리에 앉을 수 있단 말인가.
얼마나 사람이 없으면 이런 인간들을 불렀겠는가.
그녀는 나중에 따로 영주와 얘기하겠다 다짐하며 일어서려 했다.
더 이상 저런 예의 없는 것들과 상종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근데 공주는 이름이 뭐야? 아까 말했었나?"
"...예?"
막 엉덩이를 떼려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녀가 멈칫했다.
'반...말...?'
순간적으로 든 생각을 부정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공주한테 반말이라니.
분명 잘못 들었을 거다.
그렇게 위로하며 다시 일어서려는데,
"나이는? 한 21살 정도 되려나? 나랑 별 차이 안 날 거 같은데."
"...."
또 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백한 반말.
누구도 반박 할 수 없는 무개념.
이 너무도 황당한 사태에 그녀는 물론이고 그녀 뒤에서 호위하던 기사들과 이 영지의 주인인 남작조차입을 떡 벌린 채 굳어버렸다.
"뭐 하는 거예요. 무례하게."
찰싹!
하고 옆에 있던 여인이 그의 허벅지를 때렸다.
그 소리에 정신이 든 기사 한 명 - 역시나 그 다혈질적인 - 이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베겠습니다."
이번엔 차마 공주도 말릴 여력이 없었다. 너무 놀랐기에.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막지 않았을 것이다.
씨잉!
잘못 휘두르면 다른 사람도 다칠 수 있기에 위에서부터 유은의 정수리를 내려치는 식으로 전개된 궤적.
순식간에 그의 머리 바로 위로 도착한 검은 곧 물렁한 두부자르듯그의 머리를 갈라낼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유은이 누군가.
검 따위로는 흠집도 낼 수 없는 인간이다.
그리고 그가따로 뭘 하지 않더라도 바로 옆에 유나가 있다.
그를 반으로 가르는 건 그저 꿈.
실제로 기사의 검은 유나에 의해 막혔다.
놔둬도 상관은 없겠지만, 반사적으로 손이 올라간 것이다.
"...!"
검 같은 무기로 막은 것도 아니고, 당장이라도 그의 머리를 쓰다듬을 것 같은 어정쩡한 자세의 손등으로 기사의 검을 받아냈다.
물론, 실선 하나 그어지지 않았고 되려 기로 보호되고 있던 검날이 나가버렸다.
"내 검을...막아...? 그것도 손등으로?"
"아무리 이 인간이 개념없고 차라리 없어지는 게 모든 인류를 위해 낫다지만 그래도 반말했다는 이유만으로 베는 건너무하잖아요."
"에헤...유나씨 절 구해주다니 감격이네요~."
유나가 살짝 기사를 노려볼 때, 유은이 헤실거리며 유나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꺄악! 뭐 하는 거예요! 이런 상황에!"
찰싹! 하고 등을 두들겨 맞았지만 그래도 떨어지지 않는다.
어쩜 저리 저렴하고 품위 없을까.
공주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는자리에서 마저 일어났다.
"거두세요."
싸늘하게 한 마디 하고는 몸을 돌렸다.
"라이젠 남작,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따로 둘이서 하도록 하죠."
"아...네."
"그리고, 이 일이 끝나면 저런 저급한 분들이랑은 연을 끊는 게 좋을 거예요. 특히 저 남자."
공주는 유은을 흘끗 노려봤다.
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창남 출신인가요? 왜 이리 급 떨어져."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발걸음을옮겼다.
뒤늦게 유나가 일어나 뒤에다 소리쳤다.
"야!!"
"?"
요새 잠잠했지만, 한참 손윗사람인 경찰서장에게 대놓고 반말에 욕설을 퍼부을 정도로 한 성깔 하는 여자다. 물론 상대방이 먼저 도발했다는 가정 하에.
지금은 명백히 공주측에서 먼저 도발했다.
게다가 남편을 보고 창남출신이냐며 모욕까지.
그녀가 참을 이유가 없었다.
그럴 여자도 아니었고.
공주가 물음표를 띄우며 돌아볼 때, 식탁 위를 밟으며 호다닥 달려갔다.
"이게 누구한테 창남이래."
공주의 시선이 유나에게 마주쳤을 땐 이미 점프까지 한 풀스윙 준비자세가끝난 상태.
공주의 두 눈이 커질 즈음 큰 궤적을그리며 휘둘러진 유나의 손바닥이 그대로 공주의 오른뺨을 후려쳤다.
공주 자신도 상당히 단련된 기사였지만 맞은 순간 대뇌에 전두엽까지 울리는 충격을 버틸 수가 없어 바닥에 쓰러졌다.
"씨발년이 돌았나."
생전 처음으로 뺨을 맞아 얼떨떨한 얼굴로 유나를 올려보는 공주.
유나는 씩씩대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물론 따지고 보면 유은은 창남보다도 질이 나쁘다.
아니 질이나 급을 따질 것도 없이 그냥 개쓰레기. 유나도 그걸 인지하고 있기에 차라리 그런 쪽으로 욕을 했다면 오히려 수긍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그녀의 남편.
공주의 '창남 출신이냐?'라는 말은 앞전에 했던 '저급한' '급떨어지는'이라는 말과 함께 그냥 근본에서부터 유은과 그녀를 무시하는 말일 뿐이었다.
아마도 공주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하찮은 남자가 창남이겠지. 그래서 그런 말을 했으리라.
그러니 응징의 싸대기를 날릴 수밖에.
공주고 나발이고 현대인인 그녀에게있어 그딴 건 아무짝에도 의미 없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헤?"
그 광경을 목격한 라르나르는 눈 앞이 깜깜해지고 전신에 오싹하게 오르는 소름에 털썩 주저앉았다.
끝났다...
이 영지는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