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8화 〉28.재회, 재회.
"또! 또 여자! 충분히 막대한 이득을 뽑아낼 수 있는 걸 고작 여자로 퉁친다는 게 말이 돼요???"
유나는 유은을 붙잡고 마구 흔들며 잔소리를 늘어 놓았다.
긴장감 만땅이던 이곳이 순식간에 웃긴 장소로 변했다.
"에...유나씨, 사람의 목숨보다 소중한 건 없답니다. 사람이 제일이죠."
"닥쳐!"
둘이 투닥거리는 사이, 공주는 짐짓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베로니카와 귀족 처녀 10명.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 누가 자기 딸을 원수나 다름없는 남자에게 시녀로 내어준단 말인가. 게다가 유은의 시녀는 통상적으로 왕실이나 고위 귀족가에서 여겨지는 만큼의 명예나 영예 따위가 전혀 없는 직종이다. 말만 시녀일 뿐, 실상은 그저 노예.
누구라도 자기 딸, 혹은 누이를 내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반드시 국가의 무력이 동원돼야만 조건을 들어줄 수 있을 터.
'이권을 나누어 준다면 모를까.'
거기에 베로니카.
신분만 따지고 보면 그저 기사일 뿐이지만, 일단 본인이 기사국의 부국장인데다 국재 35위, 그 중에서도 6위를 담당하고 있는 고위 국재다.
무엇보다 그녀는 루드밀라의 오른팔이며 그녀가 어렸을 적부터 함께해온 친우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를 시녀로 요구하다니. 그것도 어제까지만 해도 부인부인 거리던 인간이그러니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베로니카의 표정도 가히 좋지 않았다.
안 그래도 그녀는 오늘의 사건 때문에 극도로 분노한 상태였는데, 그런 짓을 벌인 인간의 주인이라는 놈이 자신을 시녀로 요구한다면 당연히 최악의 기분일 수밖에 없다.
아무튼 베로니카와 귀족처녀 10명만 해도 꽤나 힘겨운 요구다. 하지만 그것도 유나가 유은을 제지하기 전의 얘기고, 아마 더한 요구사항이 뒤따를 것이 분명.
'분명 내가 따지고 용서해 주는 입장이었는데...반대가 돼버렸어.'
그런 상황이 못내 좋지 않았지만 그녀는 참고 기다렸다.
"영지 수십개를 받아도 모자랄 판에! 생각을 좀 해요 생각을."
"으으...나름 엄청난 건데."
"전혀요. 가치를 생각해 보면 향후 대륙 하나를 통째로 받아가도 쌀 정도라구요."
"그래 맞아. 최소 나라 몇 개는 받아가야지. 너도 그 편이 좋지 않겠어? 나라마다 귀족을데려가던가 하면 되잖아."
"오?"
다행히 단순하기 짝이 없는 유은은 유나와 소라의 설득에 간단히 넘어가 버렸다.
"흠흠."
그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다시 공주에게 제안했다.
"베로니카와 귀족 처녀 10명은 그대로 하고, 너네가 속한 곳 말고 다른 대륙을 우리가 가져가겠어."
"...저기요 잊고 있는 모양인데, 귀족 처녀 10명? 당신이 다 이상한 거 씌워가지고 다 데려갔잖아요!"
"아."
그러고보니 그랬다.
어제 있었던 왕궁초토화 사건으로 인해 엄청난 수의 귀족과 기사들이 죽고, 미녀들은 강제로 유은의 시녀가 되었다.
심지어 그렇게 시녀가 된 이들 중에는 루드밀라를 제외한 라이젠 왕국의 공주들과 왕비도 있었다.
"그럼 정정. 베로니카와 어제 시녀가 된 여자들의 소유권...뭐 이미 내 시녀가 된 시점에서 어쩔 수 없는 거지만 어쨌든. 그거랑 대륙이랑. 이렇게 하면 되겠다. 오케이?"
"...베로니카는 빼줘요. 왜 자꾸 넣는 건데."
"그야 여기사니까."
"?"
유은의 감성을 이해하지 못한 루드밀라가 고개를 갸웃 할 때, 계속 착잡한 얼굴을 하고 있던 베로니카가 입을 열었다.
"뭘 원하시는 겁니까?"
"음...으으음...."
유은이 부인들을 흘끗 쳐다봤다.
"여기서 말하긴 좀 그렇다고나 할까...."
"뭐래. 보이는 여자마다전부 데려다가 물고빨고 하면서 뭘 이제와 숨기는 척이야."
"헤헤...."
"그렇게 웃지 마. 때리고 싶잖아."
정말 끝없이 한심해보이는 모습에 공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좀 만족이라는 걸 하세요. 어제 시녀로 만든 사람들만 해도 몇인데 베로니카까지 데려간다고요?"
"다다익선이라는 말 모르니."
"그게 뭔데요."
"아...음...아 맞아 너 이세계인이었지."
"...."
왠지 안 좋은 예감에 그녀의 인상이 팍 일그러졌다.
아니나다를까, 척 하고 손가락을 세운 채 늘어놓는 설명에, 루드밀라는 그야말로 혐오의 표정을 드러냈다.
"넣을 수 있는 구멍은 많고 다양할 수록 좋다는 거지."
"...."
대체 왜 이런 인간이 힘을 가지고 있는 걸까.
새삼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무한한 의심이 들었다.
"...왜 이런 사람이랑 결혼한 거예요?"
그리고 당연하게 떠오르는 질문을 부인들에게 던지기도 했다.
"그러게."
"그러게요."
"사정이 있었죠."
"...."
뭔가 제대로 된 인간들이 아니다.
"어쨌든 내 요구는 그거야. 그것만 지킨다면 너는 이 세계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될 수 있을 걸."
"...."
공주가 고심하다 답했다.
"역시 베로니카는 안 돼요. 어제 시녀가 된 사람 중엔 공주나 왕비도 있잖아요. 차라리 그들을 부리세요."
"걔들은 이미 포함돼 있잖아. '시녀가 된 여자들의 소유권'이라는 대목에서."
"정말...꼭 이래야겠어요?"
루드밀라가 부들부들 떨며 그를 노려봤다.
애초에 이런 협상을 하게 된 계기가 하렘궁 측에서 - 정확히는 임서현이 - 벌인 학살극 때문인데 염치와 양심이 있다면 좀 물러설줄도 알아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유은은 그런 게 없다. 줄기차게 베로니카를 요구한다.
"잊은 모양인데, 여기 광경을 좀 보시죠. 그쪽에서 그렇게 뻗대면서 마구잡이로 요구할만한 상황인가요?"
"아니라고 말은 하겠지만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어. 힘은 나한테 있으니까."
"...."
뻔뻔하기 짝이없는 태도에 루드밀라가 부들부들 떨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맘에 안 들었는데 역시나. 맘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다.
"뭐,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하긴 하겠지? 천천히 생각해. 정 아니다 싶으면 교류 독점 같은 거 말고 다른 걸 요구하면 되잖아. 옆나라 제국을 박살내 주세요 같은 거. 그런 건 쉬워."
"...."
말을 잃은 루드밀라를 뒤로하고 유은이 서현을 불렀다.
"저기 저택 안에도 사람 있는 거야?"
"네. 나갈 수 없도록 미리 기막을 쳐놨습니다."
"그래. 미녀들 빼고 전부 처리해. 무슨말인지 알지?"
"예. 주인님."
유은은 일부러 공주일행 앞에서 그런 명령을 내렸다.
"잠깐만요!"
"응? 왜?"
"지금까지 얘기한 게 그런 짓 좀 하지 말고 저 여자 제어하라는 거잖아요!!"
어제와 오늘 일어난 임서현의 대학살.
그걸 좀 제어하고 재발을 방지하라는 게 결국 오늘 그녀가 유은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충 얘기가 마무리 되나 싶은 순간 이번엔 본인이 직접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이다.
충분히 화가 폭발할 만한 상황.
하지만 그녀는이어지는 유은의 대답에 얼이 나가버렸다.
"응. 근데 협상 결렬됐잖아."
"...."
너무나 간단하고 너무나 어이없고 너무나 기가막히는 발언.
"아니 결렬은 아니지만 어쨌든 생각해본다고 했으니 타결되지 않은 거고, 그럼 그 전에 나로서는 최대한 이익을 땡겨야 하지 않겠어?"
"무...슨...."
"아무튼 그렇게 알고 천천히 생각해. 참고로 저귀족들은 걱정하지 말고. 어차피 나한테 해코지하려던 것들이니까. 언제가 됐든 죽을 운명이었어."
유은은 그런 말을 남기고 부인들과 함께 사라졌다.
"뭐 저런...!"
루드밀라의 분노가 유은들의 뒤통수를 따갑게 만들었지만, 그 뿐, 그들이 다시 돌아오진 않았다.
.
.
.
"야 북부사태는 그냥 내가 가서 후딱 처리할게."
다시 방으로 돌아온 유은일행.
소라가 뜬금없이 그런 말을 꺼냈다.
"솔직히 좀 미안하잖아. 우리가 너무한 짓을 하기도 했고. 그러니까 그거라도 빨리 진압하자는 거지."
"아. 음. 확실히 끝내는 거야 어렵지 않죠. 같이 가요."
"아냐. 됐어. 나 혼자면 될 걸 뭐하러 너까지 가. 너는 유나랑 소냐씨...그리고 사랑이나 잘 챙겨줘."
"...알았어요. 다녀와요."
"응."
그렇게 소라가 다시 밖으로 사라졌다.
비록 수십만이나 되는 군세를 자랑하는 북부사태였지만, 워낙 넘사벽의 스탯을 가진 여인이라 걱정은 되지 않았다.
"사랑씨는 어디 있어요? 좀 봬야 할 거 같은데."
"알아서 알아 보세요."
"에.."
찬바람 쌩썡 날리는 유나의 대답.
하긴. 한사랑이 어디서 뭘 하는 지 그녀가 알 턱이 없다.
"도시복구를 도와주고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보다 경공 알려드린다고 했었죠? 나오세요."
유나는 한 층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더니 방을 나섰다.
"어...안 알려주셔도 되는데...."
유은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그녀를 따라나서고, 소냐도 그 뒤를 따랐다.
"툭하면 품위 어쩌구 하는공주의 말에 모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당신은 어느 정도 형식을 갖출 필요가 있어요. 적어도 날아가서 쳐박히진 말아야죠."
"바로 나올 수 있습니다."
"그 이전의 문제예요."
결국 유은은 유나의 잔소리를 들으며 경공을 배우게 되었고, 날뛰는 서현을 최대한 억제하며 - 사실 거의 억제되지 않았지만 -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하고 돌아온공주는 그 천하태평한 소식을 듣고 머리 끝까지 분노하여 길길이 날뛰었다.
그나마 일말의 이성은 있어서 찾아와 난동을 부린다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