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대 던전은 나만의 기회 (391)화 (390/517)



〈 391화 〉34. 발악.

잠시 카쿠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고개를 갸웃했던 아녜스가 곧 싸늘하게 표정을 굳혔다.


하렘궁과 관련된 중요한 정보가 있다길래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이렇게 독대한 것인데, 이제와서 정보가 없다니? 그럼 그냥 자신과 어떻게든 만나보기 위해 뻥카를 쳤다는 게 아닌가.


물론 이렇게 해서라도 줄을 대고 싶은 마음이 이해 안 가는 건 아니다.


아녜스쯤 되면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고위인사이고, 그럴 마음만 먹으면 어지간한 중소국가는 지구상에서 지워버릴 수도 있으니까.


하렘궁이라는 독보적인 길드가 있다 해도, 아직 전 세계 대부분의 모험가, 대부분의 길드들은 D10에 소속되어 있고, 계약조항에 따라 유사시 던전협력기구의 명령을 듣게 되어 있다.
그리고  명령의 주체는 각급 지부의 지부장이 되며, 그 지부장에게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아녜스다.


또, 직접적으로 무력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세계에 퍼져있는 던전에서 나오는 각종 부산물, 제작물, 그리고 장비등에 대한 자잘한 세금과, 관련된 산업에 사용되는 기술 및 특허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관여할 수 있기 때문에 과장 조금 보태면 손가락 하나로 일개 국가의 모험가를 철수시켜서 바로 무방비상태로 만들어버린다던가, 던전산업에 태클을 걸어서 경제를 마비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이렇게 엄청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대통령이라 해도 그녀를 쉽게 대할 수 없었고, 당연히 항상 날파리들이 꼬이는 편이다.


그녀와 아주 사소한 인연이라도 만들  있다면 무엇이든 할 사람들이 지천에 널려 있는 것이다.

그러니 카쿠처럼 쓸만한  있다는 식으로 과장하여 관심을 끄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많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사람들은 '그럴듯한' 모양새라도 만들어 온다. '과장'의 영역이라는 뜻이다.

하지만카쿠는?
그냥 정면에서 '지금은 정보가 없다'라고 말했다.

누구나 알법한 정보를 '아무나 알지 못하는 중요한 정보'로 포장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없는  있다고  것이다.


이쯤되면 거의 모욕수준.

카쿠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아녜스가 모종의 행동을 취하기 전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 하지만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결국 회장님은 궁에 대한 정보를 얻으실  있을 테니까요. 어쩌면 궁의 극비에까지 닿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

아녜스는 말없이 그를 노려봤다.
카쿠가 그저 그런 놈팽이에 그녀와 줄을 대고자 이런짓을 하는 거라면 실시간으로 상당한 시간낭비를 하는 중이다.


하지만 '극비'라는 말까지 나온 이상, 이왕 시간낭비 하는 거 조금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또 쓸데없는 소리라면 그때야말로 응징을 해주겠지만.


카쿠는 아무 말없이 응시하는 그녀의 모습에 침을 꿀꺽 삼켰다.
뭘 잘못 먹은 것도 아니고 감기에 걸린 것도 아닌데 괜히 목에 뭔가가 걸리는  같았다.


"일단 제 얘기를 끝까지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녀가 더 말해보라는 고개를 살짝 들고는 수행원이 가져다 준 찻잔을 들어 마셨다.

카쿠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가며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2개월 쯤 전, 카쿠와 파티원들은 던전에서 사냥을 하다 '임하얀'이라는 시녀가 3명의 여자 모험가를 죽이려던 모습을 포착했다. 아오키는 그녀들을 살리고자 했지만 나머지 팀원들은 나서지 않기를 원했고, 그저 조용히 숨어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당시 죽을 위기에 처해 있었던 여자 모험가들이 스킬을 사용했는지 숨어있는 그들을 발견, 동시에 '임하얀'이라는 시녀 역시 그들을 발견하게 된다.


카쿠가 임기응변을 발휘하여 상황을 잘 모면하는가 싶었지만, (쓸데없는)정의감에 불타는 아오키로 인해 일이 틀어졌고, 시녀 임하얀은 3명의 여자 중 한 명의 목을 꺾어 살해한 뒤 카쿠들마저 처리하려 했다.

천운인지 그때 마침 유은이 이세계에서 돌아오는 바람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고,  길로 카쿠와 파티원들은 살아남은 2명의 여자 모험가와 함께 새로운 팀을 꾸려 외국으로 건너왔다.



여기까지가간략한 사정.

카쿠는 중간중간 임하얀의 섬뜩한 모습을 떠올렸는지 몸을 떨었지만, 듣고있는 아녜스는 시종일관 시큰둥했다.

한 마디로, 하렘궁의 시녀에게 잘못 찍혀서 도망다니고 있다는  아닌가. 이 영양가 없는 걸 가지고 이렇게 시간을 잡아먹다니.
그녀의 불쾌지수가  층  상승했다.


하지만 표정관리 덕분인지, 카쿠는 아직 알지 못했다.


"지금은 드릴 정보가 마땅히 없습니다. 하지만 하렘궁의 시녀가 우릴 쫓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만약 D10에서 우릴 보호해준다면 추후 시녀가 우릴 공격해 왔을때 그녀를 사로잡을  있는 명분이 서게됩니다. 최소한 정보 정도는 빼낼  있겠죠."

그는 거기까지 얘기하고 아녜스의 표정을 살폈다.

일단 그가 꺼낼  있는 카드는 이것이 전부.
애초에 실낱 같은 희망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래도 전혀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그의 얼굴에는 미약하나마 자신감이 깃들이 있었다.

"후."


차를 다 마신 아녜스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하나."
"?"
"지금 이건 정보가 아니라 '제보'라고 하는 거예요."
"아...."
"즉, 여전히 당신은 제게 정보를 주지 않았고, 여전히 거짓말을 한 상태라는 거죠."
"그건...."

뭔가 대꾸하려 했지만 아녜스는 듣지 않았다.

"그리고둘. 고작 '정보'때문에 하렘궁과 전면전을 치를 집단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어요. 우리 역시 마찬가지죠. 그것도 어떤 정보인지, 심지어 진짜 얻을 수 있는지조차 모르는데말이죠."
"그래서 우릴 활용해 명분을 얻어야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셋. 당신이 그 인간을 몰라서 이런 말을 하는  같은데, 그 인간에게 '여자'에 한해서 명분 같은 건 통하지 않아요."
"그게 무슨...."
"어떤 형식으로든  인간의 여자를 털끝이라도 건드리는 순간 바로 전면전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들에겐 '명분'의 가치가 없는 거죠."
"...."
"넷. 당신들은 명분의 가치조차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입장에서도 아무 가치가 없어요."

차갑다.
비수가 날아와 꽂히는 것 같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가슴에선 커다란 불이 일어났다.

"가치가...없다고요?"

아무리 그래도 가치가 없다니.
그래도 목숨을 걸고 던전을 탐험하여 회비 명분으로 꼬박꼬박 돈을 지불했던 그들이다.
D10이 전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건 다 이런 돈들이 모여서 가능해진 일이다.

그런데 가치가 없다니?

"다섯. 그런 주제에 거짓말까지 해가며 내 시간을 빼앗은 거죠."

아녜스의얼굴에 분노가 서렸다.
고작 이따위 일 때문에 천금과 같은 시간을 할애했다니.
카쿠 따위에게 혹한 본인에게도 화가 났다.


카쿠는 그녀의 말에부들부들 떨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가치가 없다는 말까지 내뱉은 여인과 무슨 말을 하겠는가.
더 이상 D10에는 희망을 가질  없다. 각자도생이 답이다.

그렇게 생각한 그가 씩씩거리며 그녀를 노려봤다.

"사람 잘못 본 것 같군요. 당신 같은 사람이 회장이라니!"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 해보지만, 그 전에 문이 열리며 검은 정장의 여인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장관』님."





+++



"언제 오는 거야...?"
"설마 가다가 걸렸다던가?"

카쿠를 제외한 팀원 6명은 호텔방 안에서 둥글게 모여 앉아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담판 결과에 따라 앞으로의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에  안에는 엄청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를 보낸지 벌써 5시간.


슬슬 본격적으로 카쿠의 신변에 대해 걱정하며 전화를 걸어볼까 고민하던 즈음, 갑자기 복도에서 부산스런 소리가 들려오더니, 누군가가 쾅쾅 거리며 거친 노크를 했다.

"뭐,뭐야?"

-마지메 카쿠 님의 일행분들 안에 계십니까?


고운 여인의 목소리.
모두가 혹시나 하는 두려운 마음으로 마음을 졸였다.

-아녜스님이 보내셨습니다. 여러분을 보호하기 위해서요.
"보...호...?"
-예. '보호'말입니다.


일행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보호!"

그리고 그 중 성격이 급한 한 여인, 일전에 시녀에게 죽을 뻔했다가 아오키에게 구해졌던 여인이 만면에 화색을 띠고 문을 열기 위해 달려가려 했다.

"잠깐."

하루나의 제지가 없었다면.


"...뭐야?"

그녀의 은인이자 반쯤 사모하고 있는 아오키를 거의 매일같이 갈궈대는 하루나였기에, 그녀는 하루나를 정말 싫어했다.
어쩔 수 없이 뭉쳐있어야 하는 형편이 아니었다면 1초도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하루나 역시 마찬가지.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꼬인 3대 원흉(아오키+2명의 여자)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녀들을 대하는 태도 역시 아오키를 상대하는 만큼이나 날카로웠다.



"당신 바보야? 정말로 '보호'를 위해서 온 거면 카쿠가 먼저 우리한테 전화를 했겠지!"
"...아."


비록 원수 같은 사이였지만, 하루나의 일침은 그녀에게 뭔가를 일깨워 주었다.

그래.
카쿠의 계획대로 되었다면 전화가 먼저 와야 한다.
하지만 전화는 요지부동인데 웬 무리들이 와서 방문을 두들기고 있다?


이건 뭔가 잘못된 것이다.




쾅! 쾅!

-저기요? 문  열어주세요.

꿀꺽 침을 삼키며 문을 바라봤다.
이런 소란인데도 호텔에선 관여하지 않는 것이 상황의 수상함을 더해주었다.
일행은 조용히 각자의 무기를 챙겨 문 앞으로 집결했다.
혹시라도 문을 부수고 들어오면 바로 공격할  있도록.

쾅!


10분간의 농성(?)때문에 열받은 걸까.
지금까지보다 2배 정도 강한 강도로 세게 문을 두들기더니 섬뜩한 말을 흘렸다.


-씨발년들 눈치 한 번 겁나 빠르네.


"!!"

욕설!

정말 보호를 위한 거라면 끝까지 잘 달래줬겠지.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눈치'운운하면서 욕설을 내뱉는다.

최소 좋은 목적은 아닌 것이다.


일행들이   더 긴장하여 무기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때,

파각! 끼기깅!


굳게 잠겨있던 문에 팍 하고 뚫리며 고운 손 두 개가 안으로 들어오더니 좌우로 벌어지며 문을 통째로 찢어내기 시작했다.

"무,무슨...!"


어지간한 고위 모험가라면 할 수 있는 일이었겠지만, 장면이 주는 충격 자체는 엄청났다.

"안녕 아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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