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8화 〉35.우주원년
큰 목소리로 말한 것도 아니었고, 마이크의 볼륨이 엄청난 것도 아니었기에 당연히 그녀의 말을 들은 사람은 단상에 올라 있는 극히 일부의 내빈 뿐이었다.
나머지 광장에 있는 일본인들이나 심지어 시녀들도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다.
중요한 건 유은에게 인정받은 '총독'인 자신의 말을 저들이 따르지 않고 여전히 일본어로 지껄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다시말해 그녀의 권위와 나아가 유은의 권위마저 무시하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애초에 유은이 있는 곳에서, 총독으로서의 첫 행보를 걸어야 할 오늘 이따위 짓거리를 한다는 점에서 이미 깊이 빡쳐있는 상황이었으니 추후 행할 행동에 어떠한 거리낌도 없었다.
서현이 사회자에게 눈빛을 보내자, 그녀가 폰을 통해 광장에 있는 시녀와 보지니아들, 그리고 혹시나 하는 사태를 위해 고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시녀들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스릉!
일본에 파견된 시녀들에게 기본 지급되는 검.
왜 검이냐면 '폼나잖아.'라는 유은의 말 때문이다.
아무튼 여기저기서 호쾌한 소리와 함께 검이 뽑혔고, 번쩍거리는 검신이 햇빛을 난반사시켰다.
누구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경고.
사람들은 잠시 주춤했지만, 여전히반자이를 외쳐대는 우국부흥회의 일원들에 의해 분위기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오히려 검을 뽑은 시녀들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찍어대는 드론이나 기자들을 보며 의기양양해졌다.
"저년들이 검을 뽑았다!!"
"우릴 죽일 셈인가?!"
"죽여라!"
"죽여봐!!"
여기저기서 도발이 일어났다.
이미 '총독취임식'이라는 행사는 파국을 맞이했고 광장은 난장판이 되어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쳐봐! 쳐보라고오오!!!"
한 청년은 과도하게 감정에 부풀어 시녀의 코앞까지 다가와 주접을 떨었고, 목을 쳐보라며 얼굴을 내밀기도 했다.
"못하지? 못하지이??"
무슨 자신감인지 시녀를 자극하는 그.
주변 사람들도 그에 동조하며 여인들을 조롱하고 반자이를 외쳐댔다.
"못하면 물러가라고!! 여긴 우리ㅡ,"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시녀가 들고 있던 검이 번뜩이며 붉은 액체가 푸확 하고 터졌다.
연신 도발하던 청년의 목이 잘려나간 것이다.
툭.
"...?"
"...에?"
주변이 순간 조용해졌다.
물론 광장 전체적으로는 아직도 매우 시끄럽다.
상황파악 못하고 욱일기를 휘날리는 인간도 있었고,
발가벗은채로 반자이를 외쳐대는 병신도 있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언제까지 지속될까.
벙쪄있는 일본인들을 향해 시녀들의 검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목이나 팔 따위가 잘려나가고 더러는 배가 갈려 내장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꺄아아아아악!!!!"
소름끼치는 비명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상황을 감지한 일본인들이 어? 어?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고, 그때, 사방에 퍼져있던 시녀들과 보지니아들이 일제히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이 개년들이...!!"
"저리가!!"
아비규환.
엄청난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피가 흩뿌려지고 신체부위가 하늘로 날려졌다.
"와우."
역시나 서현이랄까.
유은은 이 참혹하고도 황당한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서현은 잠시 그를 돌아봤다가 다시 학살의 현장을 바라보며 마이크를 톡톡 두드렸다.
"아,아, 후지산 자치령의 1대 총독으로 부임한 임서현입니다. 지금부터 자치령 전역에 첫 총독명령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주 중요한 것이니 전 신민은 한 명도 빠짐없이 새겨듣기 바랍니다. 광장에 있는 신민은 너무나 혼잡스러운 상황으로 인해 듣지 못하겠지만 상관 없습니다. 어차피 죽을 테니까."
그렇게 끔찍한 운을 뗀 그녀는 점점 피로 채워지는 광장을 내려다보며 고아한 손짓으로 옆머리를 쓸어 넘겼다.
"오늘부로 일본어 사용을 전격 금지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용언어는일본어를 제외한 언어로 제한되며, 공식언어는 한국어입니다.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일본어의 사용이 필수불가결할 수 있으니, 특례조치로서 한국어를 익히는 시간에는 일본어 사용이 제한적으로 허용됩니다. 그 외에 일본어를 사용하다 적발될 시 사지를 하나씩 자르도록 하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명령이다.
유예기간도 없이 갑자기 일본어를 쓰지 말라니?
아니 그보다 광장에서는 지금 피바람이 불고 있는데 저토록 태연하게 말을 이어가다니? 피가 없는 인간이기라도 한단 말인가.
"...Oh my god..."
이 상황을 모두 지켜보고 있는 세계의 기자들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경악했다.
심지어 전 세계로 이 참혹한 상황이 생중계 되고 있는데도 누구 하나 막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야이이이아아으으윽!!!"
학살의 가운데, 무리 중앙에 있는 누군가가 악을 쓰며 품에서 권총을 꺼내더니, 서현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시네(죽어)!!!"
사람들의 고막을 울리며 날아간 총알.
순식간에 서현의 미간 앞에 도달했지만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저 인간의 신체일 뿐인데, 그 얇은 피부막을 뚫지 못하고 허무하게 튕겨나갔다.
"덴노 헤이카 반자이!!!"
그를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무기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대체 어디서 반입해 온 건지, 아무리 수만 명이 모인 광장이라지만 조금 보안이 너무 허술했던 모양이다.
아니, 정확히는 하지 않은 거라고 할 수 있을까.
어차피 위협이 될 요소가 없으니 무시한 셈이다.
아무튼 무기를 가져온 우국부흥회의 일원들이 품에서 각종 무기를 꺼내 더러는 시녀들을 상대하고 더러는 내빈들이 있는 단상으로 돌진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너무나 쉽게 모두 차단. 단상에까지 닿는 건 없었다.
톡톡.
어느새 서현의 뒤에 선 유은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마치 '난 널 믿어'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먼저 들어가 있을 테니까 살살해."
"네. 주인님. 깔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
그렇게 유은이 비서들의 안내를 받아 관저 내부로 들어가자, 서현이 광장쪽을 쳐다보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지극히 무표정한 얼굴로 어떤 명령을 내리는 그녀.
그러자 무슨 전달을 받은 건지 광장에서 도륙하고 있던 시녀들과 보지니아들이 순식간에 외각으로 빠져나왔다.
"크윽...."
잠시동안 찾아온 평화(?)는 참혹한 현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여기저기에 시체가 널려있고, 피가 강이 되어 줄줄 흘렀다.
신음하는 사람들은 셀 수도 없다.
그런 와중에 고쿄 내부에서 퍼버벙하는 대포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2차 세계대전에서 쓰인 함포와도 같은 소리.
모두가 '설마?' 하는 표정을 내보였다.
그리고 그건 현실이 되었다.
투쾅!
광장 한복판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화염이 족히 30m는 솟았고, 이후 버섯구름이 형성되어 수백미터까지 피어올랐다.
"무ㅡ,"
그리고 그게 끝이 아니었다.
무차별적으로 퍼부어지는 포격.
사람들은 절망과 공포를 표출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듣기에 흡사 반자이 함성과 같았지만, 그 성격은 전혀 달랐다.
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는 용자는 없었다.
그저 살기위한 비명만을 지를 뿐.
그렇게 5분 정도를 포격하고 나니, 대충 상황이 정리되었다.
광장은 달 표면처럼 크레이터가 뻥뻥 뚫려 있었고, 그 구덩이마다 시체 수십구가 널브러져 있었다.
이 와중에도 살아남은 자들이 있긴 했지만 하나같이 멀쩡하지 않았다.
또각 또각.
서현이 단상을 내려와 광장으로 걸어나왔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카메라 드론이 조심스레 따라붙었다.
"왜...왜...너무...하잖아...."
하반신이 날아가 말도 제대로 못하는 한 사람이 붉게 터져버린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외쳤다.
"이렇게까지...할 필욘...없었잖아...!"
인간이라면 누구나 측은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서현에겐 없다.
애초에 인간이 아니게 된 지 오래였으니까.
그렇기에 그의 얼굴에도 감흥 따윈 없었다.
그저 비웃음만이 입가에 걸릴 뿐.
"너무하다고?"
피식.
"이거 다 너네가 했던 거잖아."
"...."
"아냐? 이거 다 너네가 했던 거잖아."
그녀는 그렇게 비웃어주고는 그의 머리를 발로 살짝 밀었다.
어차피 이대로 놔두면 죽을 인간.
하다못해 끝까지 고통이라도 받으라는 아주 사악한 속셈이었다.
+++
"이,이게...!!"
부들부들.
결과를 보고받은 무타구치 야렌 중장은 분노에 떨었다.
감히 버러지 같은 것들이 위대한 천황폐하의 거처를 훼손한 것도 모자라 황국신민들을 학살하다니!
이 대죄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고 사함받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참혹한...!"
다른 간부들도 분노한 건 마찬가지였다.
광장의 상황은 전세계로 생중계 되었기 때문에 쉽게 당시 영상을 구할 수 있었고, 이는 분노를 터뜨리기에 충분했다.
실제로현재 자치령 전역은 이 사건으로 인해 활활 타올랐고, 여기저기서 국권회복을 위한 운동이 일어났다.
물론, 그럴 때마다 모조리 잡혀가거나 사살.
그야말로 자치령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가 도래한 것이었다.
"그러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자살행위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일로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분노해버린 쿄자키가 탁자를 쾅 내려쳤다.
"그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수만 명을 죽인다 한들 눈 하나 깜짝이라도 할 것 같았습니까?!!"
"뭐라?!! 이게 지금 내 잘못이라는 건가!!!"
"그럼 아닙니까? 아직 준비도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쓸데없이 저들을 자극하여 전국적인 대학살을 유발했습니다. 이게 당신 탓이 아니면 대체 누구 탓이란 말입니까!!!"
"학살을 내가 했는가!! 저들이 한 학살을 두고 나에게 그 원인을 찾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물론 당연히 야렌 중장 보단 제국측, 특히 서현의 죄가 크다.
하지만 그네들은 어차피 악의 축이다. 이제와서 새삼 언급할 가치도 없는 것이다.
"애초에, 광장에 있던 자들이 더욱 크게, 목숨을 걸고 외쳤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뭐요??"
"그들의 목소리가 도쿄에 있는 신민에게까지 닿았더라면, 그들역시 우리에게 동조했을 것이고! 그럼 아무리 제국이라 해도 차마 학살을 벌일 순 없었을 터!! 내 작전은 완벽했다!!!"
"이런 병신 같은!!!"
더 이상 분노를 참지 못한 쿄자키가 주먹을 들어 야렌중장의뺨을 날려버렸다.
"꾸웨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