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6화 〉37.검후(劍后)
37.검후(劍后)
검후는 유이들을 부려먹으며 공동 이곳저곳을 탐색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상하구나. 천하를 집어삼키려던 것들일진데, 그 본거지에 진법하나 없다니.”
그녀의 의문에는 유이역시 공감했다.
아니, 혈교의 총교단이 아닌 단순한 지부라 해도 이렇게 허술한 건 말이 안 된다.
일개 세가인(일개 세가라 하기엔 지나치게 크긴 하지만) 남궁세가(南宮世家)만 하더라도 진법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천하를 뒤져 모셔와 본가와 분가의 방비를 단단히 했다. 세가와 문파들이 결집돼 있는 ‘맹’쯤 되면 이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철저하다.
그런데 천하무림을 뒤집어 놓으려 했던 혈교의 총교단에 아무런 진법이 없다?
이상한 정도가 아니다.
그렇게 모두 실망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던 그때, 검후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평범한 암벽.
그 어떤특징도 없어보이고,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그저 그런 벽.
보통 사람이라면 존재조차 의식하지 않은 채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검후조차 그럴 뻔했으니까.
“후후.”
검후가 소매로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역시 이럴 줄 알았다. 없을 리가 없지.”
그녀 스스로가 창안하여 가장 애용하고 있는 화화공(花化功)은 수십 자루의 작은 검(손가락 하나정도 크기)을 동시에 다루는 일종의 이기어검(以氣馭劍)이다.
비록 각각의 크기는 작다지만, 수십 자루의 검에 하나하나 검강(劍罡)을 씌워 자유자재로 다루기까지 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내공을 세밀하게 다뤄야 하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때문에 다른 건 몰라도 내공을 다루는 기술 하나만큼은 천하십대고수(天下十代高手)를 포함한 전 무림인 중에서 하나같이 입을 모아 여세린(余勢躪)을 꼽는다.
“본녀가 아니라면 지나칠 뻔 했구나.”
그녀는 여전히 소매로 입을 가린 채 표표하게 웃었는데, 허리춤에 패용하고 있던 검이 알아서 검집에서 나와 암벽의 특정한 점을 향해 돌진했다.
키이이잉!!
그제서야 모습을 드러내는 결계.
외부의 침입을 절대적으로 저지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였지만, 이어서 그녀의 오른쪽 허리춤에 있는 작은 가방이 열리고 수십 자루의 작은 검이 떠올라 때려박히자, 결국 견디지 못하고 파쇄되었다.
“결계를 힘으로…?”
본디 진법에 의한 결계는 해당진을 역산하여 파쇄하는 것이 기본이다.
힘으로도 못할 건 없겠지만, 말도 안 되는 물량의 내공이 필요했기에 어지간한 강자가 아니고서야 얌전히 진법 전문가를 데려오는 게 보통.
하지만 검후는 힘으로 찍어 누를 뿐만 아니라 별 다른 소모도 없이 쉽게 해버렸다.
‘이것이 바로 무림최고수의 힘인가?’
유이는 남몰래 전율하면서도 두려움을 느꼈다.
분명 무림에 떠도는 이야기로는 무림최악의 살인마 중 한 명이라 하였는데, 과연 검후에게서 살아나갈 수 있을까?
무인으로서 죽는 것이 두려운 건 아니다. 하지만 의미 없이 죽고 싶지 않은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생각이다.
‘그래도 여류 무인은 잘 안 죽인다는 소문도 있으니…일단은 그걸 믿어야 하나?’
쿠구구구구구.
숨겨져 있던 진이 파쇄되고 하나의 암벽으로 여겨졌던 것이 문이 되어 좌우로 갈라졌다.
그 안에는 어딘가로 이어지는 통로.
엄청난 기운이 느껴지는 걸로 봐서, 범상치 않은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검후가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자, 들어가자꾸나.”
“저희도…들어갑니까?”
스윽.
검후가 돌아봤다.
소매에 가려진 입꼬리가 과연 올라가 있는지 내려가 있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일단 눈은 웃고 있었다. 살벌하게.
“당연한 걸 물어보는구나. 너희들이 돌아가 잡것들을 데려오면 골치아파지지 않느냐. 얌전히 따라오거라.”
“….”
검후는 그 말을 남기고 또 다른 공동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도망은 칠 수 없다.
고작 일류 남짓의 실력으로 바라보는 것 조차 아득한 최고수에게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니까.
대신 유이는 재빠르게 암호문을 휘갈겨 쓴 종이를 잘 보이는 곳에 떨구었다.
비록 소홍에게 유은을 쫓으라는명령을 내려두긴 했지만, 단원들이 늦은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때를 위한 안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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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장까지 했지만 세이코에게 막혀 화월루에 들어가지 못한 유소홍.
그녀는 나머지 단원들도 데려와 부딪혀볼까 생각해봤지만, 자신보다 약한 단원들을 데려와봐야 의미 없다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대신 그녀는 주루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했다.
그결과는 놀라운 것.
한 악한 무리에게 루주와 기녀들이 사로잡히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나선 무인들은 모두 처참하게 도륙되었다는 것이었다.
정황상 그 악한 무리가 누구인지는 명확.
분명 어제 처음 만났을 땐 친절하게 서로 인사도 하는 사이였는데, 뭔가 자신이 아는 그들의 인식과 합치되질 않았다.
하지만 그래봤자 하루 남짓한 인연.
그녀는 생각을 수정했다.
‘그래…꼭 정파의 인물이란 법은 없지. 고려에서 왔다면 기본적으로 약탈을 좋아할 테니까.’
일종의 편견이었지만, 중원에선 거의 정설에 가까웠기에 소홍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객잔으로 돌아가 단원들을 화월루에 파견하고는 자신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단주를 만나기 위해 혈교공동으로 향했다.
그런데 중간즈음마주할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공동에 도착해버렸고, 을씨년스런 공동 안에서 소홍은 불길함을 느꼈다.
본디 규모만 크고 아무도 없으면 묘한 공포감이 느껴지기마련이지만, 그것과 별개로 감이 좋지 않다고나 할까.
무슨 일이 일어난 것만 같았다.
“단주님? 어디 계십니까!”
소홍은 검을 뽑은 채 주변을 탐색했다.
이곳으로 오는 길목이 여러갈레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중간에 만나지 못했다면 여기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아무도 없다는 것은?
분명 뭔가가 있는 것이다.
그녀는 긴장한 채 둘러보다가 열려있는 문과 그 안의 통로를 발견했다.
“저건?”
어제까지만 해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단장과 단원들은 저 안으로 들어간 것일까. 뭔가 강렬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렇게 생각하며 가던 와중, 바닥에 떨어져 있는 종이가 보였다.
수색대에서 유사시 안배용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 검후와 수색중 통로발견. 지원요망.
급했는지, 상당히 날려쓴 암호문은 짧았지만 굉장한 충격을 주었다.
“검후?”
뜬금없이 검후가 왜 튀어나오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공동 밖으로 나왔다.
검후정도의 고수라면 아주 멀리 있는 게 아닌이상 그녀의 존재를 눈치챌 수도 있으니 오래 있을 수 없다.
“검후가 왜…?”
검후라면 일개 문파를 이끄는 궁주인 주제에 혼자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온갖 패악질을 하고다니는 여인이 아닌가. 행실은 삼류 악한과 비슷하지만 그 무공은 잡것들과 궤를 달리하는 절정무공이었다. 괜히 잔살마(殘殺魔)라는 이명이 생겼겠는가.마교의 무리가 아니라면 어지간하면 ‘마(魔)’라는 명을 붙이지 않는다. 실력적으로나, 성격적으로나 마인의 그것과 같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이유야 어쨌든 지원요청까지 했을 정도면….”
아무튼 검후가 이곳에 있다는 게 쉽게 믿기진 않았지만 단장이 한 말이다. 단원인 그녀로선 따를 수밖에.
소홍은 즉시 도시로 달렸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이 직접 도와주고 싶었지만 검후 씩이나 있는데 고작 일류 무사인 자신 하나 추가된다고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일단 도시로 돌아간 후 전서구를 활용하든 전령을 활용하든 맹에 이 사실을 전달하는 게 중요했다.
‘잠깐…아까 그 사람도 꽤나 강자였던 거 같은데?’
그때 문득 떠오른 세이코.
일류 무사인 자신이 감조차 잡지 못할 정도의 강자.
만약에라도 검후급은 아니겠지만 최소한 이 근방에 있는 떨거지보다야 훨씬 나을 것이다.
소홍의 머리가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하렘궁의 다른 이들도 그 여인만큼의 실력이라 가정한다면 적어도 시간정도는 벌 수 있을지도 몰라.’
그래도 일면식이 있는 사이다.
일단 돌아가서 지원을 요청한 다음에 혹시라도 지원을 해주겠다 하면 곧바로 공동으로 유은들을 보낸다.
그 사이 소홍은 무림맹과 근방 문파에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다.
어떻게보면 버림패라고도 할 수 있었지만, 이미 그녀는 하렘궁을 악의 세력이라 규정한 뒤였기에 거침없었다.
‘그래. 차라리 잘 된 거야. 고려의 첨병이든, 아니면 사파의 무리이든, 검후를 이기진 못할 테니 여기서 사라지면 그걸로 끝이야. 더불어 적절한 시기에 지원이 온다면 어쩌면 검후까지…!’
같은 여무사로서의 존경은 하고 있지만, 워낙 행실이 좋지 못한데다 사파의 인물이다보니 좋은 평가는 내리지 않았다. 검후 같은 사람은 차라리 없어지는 편이 무림을 위해 이익이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