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1화 〉38. 절세미공자(絶世美公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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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세린(余勢躪)이 떠났다.
흑천맹(黑天盟)의 소환조사에 응하기 위해 만 리 길을 나선 것이다.
그녀는 장로 몇 명과함께 가라는 군사들의 의견을 거부하고, 시녀들과 수행무사 몇 명만을 대동한 채 이화궁 대문을 나섰다.
만에 하나라도 함정일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힘을 믿었기에 자기보단 이화궁에 전력을 집중해 두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세린이 떠나고 나니, 한동안 이화궁은 떠들썩해졌다.
바로 절세미공자(絶世美公子) 유은 때문이었다.
장로들이 그를 노리고 있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
궁주가 있었어도 숱한 납치(?)사건이 벌어졌었는데, 그녀마저 없는 상황이라면 장로들을말릴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수현도 이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고민했다.
“분명 궁주께선 그 남자를 사랑하고 계신 거야.”
이화궁 대부분의 무인들은 사랑을 모른다. 안다 하더라도 여인끼리의 사랑이며, 남자는 그저 욕정을 해소하는 도구, 혹은 아이를 낳기 위한 필요재 정도로 여기고있었다.
하지만 외부에서 온 이들은 사랑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 김수현 역시 그 감정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런 커다란 오해를 하게 된 것.
사실은 유은이 더 큰 쾌락을 얻기 위해 세린에게 강간당하는 연기를 했고, 나중에는 그것이 역전되어 그녀가 유은의 노예가 된 것이지만, 수현이 이해한 상황은, 세린이 유은을 납치하고 강간했지만, 막상 그와 연을 맺고보니 사랑에 빠져서 모든 것, 심지어는 이화궁 자체를 바칠 정도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해.
아무튼 그녀는 자신의 주군이 사랑에 빠진 것으로 이해했고, 그렇기에 더더욱 유은의 정조를 지켜야만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이대로는 안 되지. 분명 그 철없는 장로들이 들이닥칠 거야.”
세린이 있었을 때도 매일같이 찾아와서 칭얼대던 것들인데, 이젠 더 심해질 것이고, 어쩌면 아예 이화칠궁에 침입하여 강제로 그를 납치해버릴 수도 있었다.
결국 그녀는 생각을 거듭하다 ‘동거’라는 초강수를 두었다.
그녀가 깨어 있을 때는 유은을 지켜보고 있을 테니 안전하지만, 자고 있을 때는 분명 위험하다. 그렇다면 바로 옆에서 자면 문제가 해결된다.
아무리 장로들이 막나간다 해도 일장로가 자고있는 침실까지 침입해 들어오진 못할 테니까.
게다가 김수현은 궁주가 가장 아끼는 군사다. 자칫하면 궁주에게 찍혀버리는 수가 있다.
“헉…동…거?”
그녀의 제안을 들은 유은은 짐짓 겁먹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세린의 앞에서는 한없이 당당한 남자로 보였는데, 아무래도 그녀가 없으면 이런 얼굴이 되는 모양이다.
수현은 그의 색다른 모습에 놀람과 측은함을 느끼면서 살살 타일렀다.
“오해하지 마세요. 공자님을 지키기 위함이니까요.”
“정말인가요?”
불안과 불신으로 흔들리는 눈동자.
그럴만도 하다. 여기서 만난 여자, 심지어는 여세린조차 그를 강간했으니까.
쉽게 믿는 편이 더 이상하지.
그의 상황을이해했기에 수현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설득했다.
일군사인 만큼 그냥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도 충분했지만, 그러고 싶었다.
“예. 궁주님께서 명하신대로, 제가 공자님을지켜드릴겁니다. 제 아무리 장로라 해도 제가 곁에서 보호해드리면 쉽게 건드릴 수 없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군사님을 믿는 게 아니라 세린을 믿는 겁니다.”
“네.”
가까스로 설득에 성공.
작은 성공에 그녀는 속으로 미소지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 당분간은 이 궁에서 벗어나지 마세요. 위험합니다.”
“하,하지만 지금도 이미 한 달 가까이 못 나갔는데요?”
“그건….”
“군사님과 함께 나가는 건 안되는 건가요?”
“….”
방금 전 까지 못믿겠다더니, 그래도 진심이 통하긴 한 모양이다.
그녀는 잠시동안 생각하더니 큰 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앞으로 나가실 땐 저와 함께 다니도록 해요.”
유은이 크게 화색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악.
그것이 순간 심히 아름답게 보여, 수현의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아,안 돼…! 내겐 정인이! 게다가 이 사람은 궁주께서 사랑하는 사람이야.’
그녀는 애써 유은의 얼굴을 외면했다.
앞으로 같은 방에서 자야 하는데 벌써부터 걱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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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군사 김수현과 절세미공자 유은의 동거.
이 소식은 순식간에 이화궁 전역으로 퍼졌다.
대부분 부정적인 반응.
궁주가 나가자마자 유은의 처소를 자신의 침실로 옮겼다는 것이 사람들의 비판을샀다.
“와…일군사님도 결국은 여자였구만.”
“내가 뭐랬냐. 안 홀릴 수가 없다니까. 이제 매일같이 폭풍정사 하겠지? 우리 공자님 자지가 남아나지 않을거야. 아아. 불쌍한 공자님.”
“미친년. 니가 언제부터 남자들을 그렇게 걱정해줬다고?”
“어허! 어디 쓰잘데기없는 남정네들이랑 우리 공자님을 비교하는 게냐! 공자님은 말 그대로 공자라고. 남자가 아니야.”
“지랄한다.”
최말단 시녀들부터,
“스읍. 김군사님이 결국 일을 저질렀네.”
“고려인이잖아. 음탕한 속내를 숨기고 있다가 이제 막 드러낸 거지.”
“아냐. 내가 볼 때, 목장도 꾸준히 다녔을 거야. 몰래 했던거지.”
“바보야. 군사씩이나 돼서 목장을 다니겠냐? 따로 지목해서 불러들였겠지.”
“아!”
“아무튼…잘생기긴 엄청 잘생겼던데…이래서 출세하고 볼 일이라니까.”
훈련하는 무사들, 그리고….
콰앙!
“와 진짜 얼탱이 없네 그 개같은 년!!”
장로들까지….
하나같이 좋지 못한 반응들 뿐이었다.
몇몇은 아예 쫓아가 따지기도 했다.
“일군사!!”
“….”
피곤한 얼굴의 김수현.
이미 오늘만 해도 열 번은 되는 것 같았다.
“내가 오늘 아주 기이한 소문을 들었네만!! 사실인가!!!”
“하아…아마도요.”
“이익!”
깊은 한숨과 지친 얼굴.
그러나 장로는 개의치 않았다.
“전통을 깨고 남자를 이화칠궁에 들이더니, 이젠 궁주께서 멀리 나가신 틈을 타 자기 침실에 먹고 재우네? 그렇게도 남자가 탐났으면 진작에 아무나 잡아서 먹을 것이지 왜 이제와서 이 난리야!!”
“진정하시죠.”
“진정은 얼어죽을! 내가 아주 사람을 잘못 봤구만!”
“이게 다 장로님들 때문이거든요.”
“뭐야?!”
수현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은 했지만 반발이 매우 거세니, 결국 속에 있는 말을 해버렸다.
“툭하면 궁주께서 데려온 남자들을 납치해 범하시잖아요. 그게 하도 반복되니 나중엔 궁주께서도 결국 포기하셨죠?”
“하! 그래서 그걸 빌미로 자기방에 재운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이번엔 달라요. 궁주께서 제게 단단히 일러두고 가셨습니다. 무슨일이 있어도 유은공자의 정절을 지키라고 말이죠.”
“정절은 무슨 개소리야. 지금껏 실컷 따먹었겠구만. 그게 무슨 정절이야! 뭐 동정이라도 되면 내가 이해라도 하지. 그건 아닐 거 아냐?”
“….”
“그리고 막말로, 결국 궁주도 멋대로 납치해서강간하고 있는게 아닌가! 우리가 하는 것만 납치고 궁주가 하는 건 뭐 사랑의 도피라도 되는 건가? 대체 뭐가 다르길래 우리에게만 일방적으로 뭐라 하는 거지?”
“….”
딱히할말이 없었다.
여세린도 결국 납치강간범이니까.
아무리 그녀가 여세린을 주군으로 여기고 따른다지만, 그녀의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개인적인 은혜가 없었다면 아마 그녀도 여세린을 악적으로 여기고 혐오했을 터.
“아무튼, 궁주님의 지엄한 명령입니다. 당신이 없는 동안 유은공자에 대한 접근은 철저하게 금지하셨어요. 특히 장로분들에겐 더더욱.”
“흥. 안 믿어. 네 말 따윈.”
“그러실 줄 알고 친히 명령서까지 작성하고 가셨어요. 자요.”
수현은 지난밤 세린이 작성한 문서를 스윽 내밀었다.
여세린의 필체로 작성된 글과 그녀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필체야 흉내내면 되는것이고, 도장은 훔치면 그만이지. 어차피 이화칠궁에서 일군사를 막을 사람은 없잖아?”
“…불쾌하군요. 저를 그렇게까지 못 믿으시는 거예요?”
“흥. 군사께서 그렇게도 우리 장로들을 못 믿으시는데, 그건 괜찮은 것이고, 내가 군사를 못 믿는 건 불쾌한 일인가?”
“그만한 행동들을 하셨잖아요. 지금까지. 합리적인 의심이죠.”
“나도 같은 말을 해주지. 일군사는 지금 충분히, 아주, 심각하게 의심갈만한 행동을 하고 있어. 그래서 우리가 불쾌한 거고. 알겠나?”
“….”
잔뜩 분을 표하며 나가는 장로.
아무래도 그녀들을 진정시키려면 힘을 좀 많이 빼야 할 것 같았다.
“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