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3화 〉38. 절세미공자(絶世美公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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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칠궁(梨花七宮)에 들어온 지도 어언 한 달.
유은은 이화칠궁(梨花七宮)에 들어오고 처음으로 밖에 나갈 수 있었다.
그 동안 사실상 감금(監禁)돼 왔던 걸 생각하면 고무적인 일!
아직은 근처의 정원 정도일 뿐이었지만, 이화궁(梨花宮)은 매우 넓다. 이것만해도 산책에는 무리가 없는 정도. 게다가 이를 위해 몇 명의 시녀와 수현까지 대동한 상태인지라 나름배려해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미안해요. 좀 더 일찍 이렇게 해드렸어야 하는데.”
수현은 대놓고좋아하는 유은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한 명의 순진하고(?) 착한(?) 청년이 자신들 때문에 고생한다 생각하니 그 미안함이 이루 표현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주군(主君)인 여세린(余勢躪)을 배신할 수도 없는 노릇. 아마 앞으로도 이 미청년은 기구한 운명을 짊어지고 가리라.
‘나도 지옥에 가겠지.’
종교(宗敎)에 심취한 건 아니지만,지난날 자신이 해온 일들을 생각하면 여지없다 생각했다. 방관 역시 행동. 비록 적극적으로 납치나 강간 살해 등의 일을 하진 않았지만, 이를 주로 행하는 단체에 속해 있다는 것 만으로 같은 죄.
“아닙니다. 이렇게 함께해 주시고 신경 써 주시는 것만 해도 감사해요. 그…군사(軍師)님.”
순진한(?) 웃음에 수현은 심장이 철렁함과 동시에 눈물이 핑 돌았다.
오늘만큼 자신들의 악행이 크게 사무치는 일은 또 있었을까.
문득 그만 은퇴하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 들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지.’
마음 같아서는 한양으로 돌아가 쉬고 싶었지만, 평생을 여세린(余勢躪)에게 은혜(恩惠)를 갚으며 살겠다고 맹세했다. 이를 저버릴 순 없다.
“공자(公子)까지 저를 군사(軍師)라고 하실 필욘 없어요. 그렇게 어려워할 필요도 없고.”
“예? 그럼….”
“수현이라고 불러주세요. 제 이름은 김수현(金需賢)이니까요.”
“김수현…그럼 수현씨라고 부를게요. 대신 저도 유은이라고 불러주세요.”
“…알겠어요. 유은씨.”
본래는 ‘일궁의 궁주(宮主)인 당신에겐 예를 갖추어야 한다.’라고 하려 했지만, 이내 자신(일군사)역시 마찬가지 상황이라 생각하며 결국 유은이라 부르기로 했다.
그렇게 궁 내부의 정원을 거닐며 담소를 나누다가, 수현이 슬쩍 운을 띄웠다.
“조만간 이화궁(梨花宮) 밖으로도 나갈 예정이에요.”
“어. 정말이요?”
“네. 이곳 절강에는 아주 아름다운 항구가 있거든요.”
항주(임안)에 있는 항주만은 유명한 명소. 절강성(浙江省) 최고의 도시인 이곳이라면 나름 즐길 것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갇혀 지내는 유은에게 그 정도의 유희(遊戱)는 허락해 주고 싶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보타문(普陀門)이 위치해 있는 보타산(普陀山)으로 가는 일종의 관문이라는 것일까.
물론 보타산(普陀山)은 섬에 있는만큼 다른 곳에서도 접근할 수 있는데다 특히 항주만의 경우 꽤 멀리 떨어진 경우였지만 그래도 절강성의 성도인 만큼 유동인구나 물류가 가장 많아서 보타문(普陀門)은 이곳을 이용해 세상과 교류하곤 했다.
수현 역시 보타문(普陀門)에 심어둔 첩자들을 통해 익히 알고 있는 사실.
“대신 거기선 우리가 이화궁(梨花宮)의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면 안 돼요. 공자도 면사(面紗)를 착용해주셔야 해요.”
“에…남자가 면사(面紗)라니 뭔가…느낌이 이상하네요.”
“공…아니 유은씨의 안전을 위해서에요.”
그녀는 말하는 와중에도 뜨끔했지만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어차피 그곳에는 신비문파도 많은 편이고…덕분에 면사(面紗)를 두른 이들도 흔하게 볼 수 있으니 튈 염려는 없답니다. 그리고 저도 동행할 거고요.”
“수현씨가 그리 말씀하신다면…쓰겠습니다.”
수현은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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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뒤.
수현은 약속대로 유은을 위한 일정을 짰다.
군사(軍師)로서 처리해야 할 일들을 모두 해두고 일주일 남짓의 여행계획을 짠 것이다.
동행은 유은과 그녀 자신, 그리고 이화검수(梨花劍手) 10명과 시녀 5명이었다.
말 그대로 유은과 놀러간다고 하면 장로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이었기에 대외적으로는 산하 상단 및 문파 관리 정도로 명분을 붙였다.
그리하여 고대하던 무림행.
유은은 저번처럼 들떠 있었고, 수현 역시 오랜만의 휴가에 남다른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장로들이 말썽만 안 피웠으면 좋으련만.’
중요한일은 모두 처리한 뒤 나머지를 이군사와 삼군사에게 맡겨두고 왔다. 자신이 없더라도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터.
그녀는 애써 걱정을 덜어내고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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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걔 없으니까 편하고 좋긴 한데, 슬슬 찾아야 되지 않냐? 이러다 부인들 쳐들어오면 어쩌려고.”
유은이 납치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그의 부인들도 들어 알고 있다. 아마 상당히 열받았겠지.
분명 2주에 한 번은 얼굴을 비추라 했는데도 이렇게 뺀질대고 있으니 돌아가면 고생 깨나 할 것이다.
“고따위로 누워서 컵라면이나 먹는 주제에 할 말이라고 생각해?”
서현은 가장 태평하게 빈둥대는 은소령을 보며 그녀 주변에 굴러다니는 컵라면을 걷어찼다.
“어이. 그거 환경파괴다? 지구가 아야한다고.”
돗자리 위에서 배를 긁어대며 서현의 신경마저 긁어주는 우리의 은소령.
그녀는 유은이 사라진 뒤로는 거의 야인행세를 하며 녹림(綠林)이라도 된 것 마냥 상단들을 상대로 삥뜯기까지했다.
서현은 화산파(華山派) 장로를 상대로 건방지게 굴었고, 소령은 대놓고 사파짓을 하고 있다.
덕분에 무림맹(武林盟)내에서 하렘궁의 인식이 점점 안 좋아지는 상황.
물론 무림맹(武林盟)수뇌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도시 하나가 작살나기 전 이미 하렘궁과 그궁주인 유은이 엄청난 악행을 저질렀다는 걸.
다만 사파무림(邪派武林)의 세력을 축소시키고 나아가 사파최고수(邪派崔高手) 중 하나인 여세린(余勢躪)을 처단하기 위해 무림맹(武林盟)차원에서 끌어안았을 뿐이다.
“시녀면 시녀답게 굴어. 주인님이 좀 이뻐하신다고 죄다 자기 맘대로 해도 될 거 같아?”
“그건 너한테 해주고 싶은 말인데. 나이도 어린 년이 사사건건 시비네. 니 주제를 좀 아세요. 님아. 어디 서른도 안 된 년이 가오를 잡아.”
“너 언젠간 내가 죽인다.”
“네. 꿈 깨세요.”
서현이 소령의 배 위에 올라타 멱살을 잡았다.
“주인님께 버림받는 그순간이 니 인생의 종말이야. 알겠어?”
“존나 유치하네. 중2병있냐? 말투봐라.”
소령은 그 순간에도 태평하게 담배를 꺼내 물었다.
서현으로서는 그야말로 열받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실장님, 위치파악 됐습니다.”
“…어디에요?”
“저장성에 있는 항주라는 도시에계신 것 같아요. 아, 현대식으로는 항저우입니다.”
“항저우….”
“항저우? 거긴 어디쯤이지.”
“상하이 옆에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와. 그럼 엄청 먼 거잖아. 언제 거기까지 갔냐.”
현재 서현들이 있는 곳은 무림맹(武林盟)의 총단이 있는 개봉(카이펑)시.
서현은 무림맹에서 잡아준 여관에 묵고 있고, 나머지는 근처 녹림의 산채를 점령해 머무는 상황이다.
항주시까지 가려면 서안에서 가는 것 보다는 훨씬 가깝지만 그렇다곤 해도 수천리를 가야 한다.
“어떡할 거야? 갈 거야?”
서현의 멱살을 풀고 일어나 옷을 툭툭 터는 소령.
그녀는 여전히 뚱한얼굴로 담배 몇 갑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갈거라면 특별히 같이 가주지. 우리 약해빠진 서현짱 혼자서는 못 이기잖아? 검후(劍后)라고 했던가?”
“하.”
어이없어 웃음만 흘리는 서현.
서현이 비록 검후(劍后)에게 졌다지만 소령은 그런 서현보다도 몇 수는 더 약하다.
그런 주제에 저런 허세를 부리며 같이 가준다니.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유은의 시녀라는 걸까.
“지금은 잔살마(殘殺魔)라고 불리지.”
“아무튼.”
“당연히 간다. 다만 희생양들도 좀 데려가야 하지 않겠어?”
“우리 서현씨 겁쟁이 다 됐네?”
서현 혼자서는 여세린(余勢躪)을 잡을 수 없으니, 정파의 고수들을 대동할 생각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유은의 위치를 어떻게 알았는지 납득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항주시가 있는 절강성은 이화궁(梨花宮)과 보타문(普陀門)이 있는 곳이래요.”
“이화궁!”
“그리고 가까운 안휘성 끝자락에 남궁세가(南宮世家)가 있죠. 그쪽 인물들이랑 접촉해보시면 어떨까요?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몰라요.”
비서에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서현.
확실히 남궁세가(南宮世家)정도 되는 거대문파(巨大門派)가 가깝기까지 하다면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남궁세가(南宮世家)의 장로는 화산파(華山派) 장로와 마찰이 있었을 때 적극적으로 말렸던 사람이기도 했다. 나름 인성이 좋아보였던 인물.
어쩌면 서현에게 반했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정보만 뽑아올 수 있다면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좋아요. 무림맹(武林盟)에 한 번 가보죠.”
“안녕. 잘 가. 올 때 컵라면 사오고.”
실없는 소리하는 소령에게 돌덩이 하나를 던진 서현이 산채를 벗어나 무림맹(武林盟)으로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