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5화 〉38. 절세미공자(絶世美公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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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궁(梨花宮) 밖으로 나온 유은과 김수현 일행.
일주일이라는 짧은 일정이었지만, 그래도 둘에게는 소중한 휴가였다.
특히 김수현은 이화궁의 일군사로서 가장 바쁜 사람 중 한 명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일까, 널찍한 바다를 보며 해방감을 느낀 것은 유은보단 수현이었다.
탁 트인 전망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묵은 응어리들이 모두 풀리는 듯한 느낌과 함께 기분이 좋아졌다.
둘을 따라나온 이화검수(梨花劍手)와 시녀들 역시 마찬가지.
화려하지만 갑갑한 궁에서 나와 휴가를 만끽하고 있으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아~ 여기에 남자까지 있으면 딱인데~.”
항주만 근처에 자리잡은 풍류도원이라는 주루에서 무사들이 힐끔힐끔 유은을 바라봤다.
4층을 통째로 빌렸기에 면사를 벗은 탓이다.
“아서라. 괜히 군사님 귀에 들어가면 혼날지도 몰라.”
“합석이라도 안 되나? 아니 너무한 거 아니냐고!”
당연하지만 유은과 수현은 가장 전망이 좋은 창가자리에서 단 둘이 앉아있는 상태다.
딱히 수현이 그를 좋아한다던가 하는 건 아니고 그를 음란한 여자들에게서 조금이나마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외적으로 전혀 그렇게 비춰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만….
“군사님 그렇게 안 봤는데. 15년간 지조를지켰다 해서 나름 응원하고 있었다고. 근데 이게 뭐야.”
“솔직히 그만큼 잘생기긴 했잖아?”
“…그건 그래.”
“아무튼 군사님만 살판났네. 방도 같이 잡았잖아.”
“애초에 이화칠궁(梨花七宮) 안에서도 같은 침실에서 잔다잖아.”
“그랬었지….”
모두가 부러운 눈으로 수현을 쳐다봤다.
정작 시선의 당사자가 된 수현은 창가쪽을 바라보고 있어 눈치채지 못했지만.
-전세? 풍류도원 4층을요?
-예…이미 손님이….
-일단 올라가 볼게요.
-아니 그러니까…이미 손님이ㅡ,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는 아래층.
이화궁의 여인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대충 ‘나다 싶으면 내려가라’라는 시선을 교환하더니 몇몇 검수가 일어나 아래층으로 향했다.
-4층은 우리 유령상단이 빌렸습니다. 정당한 대가를 치렀으니 이만 물러가세요.
-유령상단? 들어본 적 없는 곳인데요.
-…그게 무슨 문제가 되나요?
-문제가 되죠. 이곳 4층 전체를 전세 낸다는 건 한 두 푼으로 할 수 있는일이 아닌데 듣도보도 못한 상단이 그리했다 하면 당연히 의심이 들지 않겠어요?
-그래서요?
-확인해 봐야겠어요.
아무래도 조용해지질 않는다.
이화궁(梨花宮)이라는 걸 밝힌다면 일이 쉽게 풀릴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사파(邪派)무림이다보니 쉽게 밝힐 수가 없다. 게다가 유은도 있고.
실랑이는 계속되었고, 결국 한숨을 내쉰 김수현이 일어났다.
마음편히 절경을 감상하고 싶었는데 이리도 방해하다니.
그녀가 일어난 순간,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봐요!
아무래도 막무가내로 올라오는 모양.
곧 모습을 비친 무리는 젊은 여인들로 이루어진 집단이었다.
모두 같은 모양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승복처럼 보이기도 했으며,허리춤에 패용한 검은 그녀들이 무림인(武林人) 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다만 전체적으로 풍기는 분위기는 부드럽다고나할까. 무림인에게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풍경이다.
“….”
“흐음.”
대장격으로 보이는 여인이 험악하게 일어나는 이화검수(梨花劍手)와, 아미를 일그러뜨린 김수현을 살펴봤다.
“뭐 고귀하신 분들 같긴 한데. 어째 냄새가 좀 그렇다. 그렇지 않습니까?”
“악마의 냄새가 나네요.”
“일개 상단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강한 분들이고 말이죠.”
그녀는 그렇게 주변을 살피다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유은을 쳐다봤다.
절대적인 미모.
오래도록 자신을 연마해온 승(僧)조차 홀릴 만큼 마성의 매력을 지니고 있는 남자.
지금껏 이런 남자는 본 적이 없었지만, 최근 항간에 떠도는 소문 정도는 들은 바가 있다.
“…제가 가설을 하나 띄웠는데, 한 번 들어보시겠어요? 유총관.”
“저도 마침 한 가지 떠올랐는데, 말씀해보시죠.”
“최근 이화궁의일군사 김수현이 궁주가 없는 틈을 타 절세미공자를 끼고 돈다더군요.”
“저도 들었어요.”
“그리고 얼마 전 소풍을 떠났다 했고요.”
“맞습니다.”
“그런데 마침 이화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이곳에 여인들로 이루어진 무력집단이 무려 풍류도원의 4층을 전세냈다네요? 듣도보도 못한 상단의 이름을 대면서.”
“그리고 마침 거기에는 절세미남이 있고요.”
“그래요.”
말을 끝낸 여인들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했다.
“이화궁(梨花宮) 일군사(一軍師) 김수현. 참으로 뻔뻔하군요. 그리도 절개를 지킨다 하면서 결국은 불쌍한 공자를 데려다 놀음인가요?”
“각주님, 어차피 그녀도 이화궁의 사람일 뿐입니다.”
“…그렇죠. 그래도 좀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
김수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려했던 상황이랄까.
어쩌면 최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상황.
‘이 넓은 항주에서 하필이면….’
“공자, 두려워 마세요. 저 검각(劍閣)의 우수린(友輸隣)이 구하러 왔습니다.”
“에…?”
스르릉!
각주 우수린과 여인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들자, 거의 동시에 이화검수들 역시 검을 뽑았다.
살벌한 광경에 주루 주인은 머리를 감싸쥐고 절망.
“이화검수들의 실력이 좋다 하나 우리 검각대원 역시 뒤지지 않아요. 게다가 지금은 이화궁의 자랑인 이화십칠장로도 없죠.”
절체절명의 상황.
일반적으로 이화궁과 보타문이 붙는다면 거의 무조건 이화궁이 이기겠지만, 지금은 장로급 무인이 없는데다 데려온 이화검수도 고작 10명이 전부였다.
그에 비하면 보타문측은 검각의 각주가 직접 나섰을 뿐만 아니라 각원들도 십여명 가량이 동원되어 있다.
‘기색을 보니 미리 알고 있었던 거 같은데…그럼 병력이 더 있는 건가?’
슬쩍 기를 흘려보내자, 1층과 2층에서 다수의 기운이 느껴졌다.
영단을 복용한 수현보다는 약하지만 이화검수 개개인과는 맞먹을 정도의 강자였다.
“…그냥 모른 척 해달라고 해도…안 들어주겠죠?”
“당연한 말씀을. 아, 그래. 수현씨. 난 그래도 당신을 어느정도 높게 평가하고 있었어요. 그 악의소굴에서 15년간 양심과 절개를 지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죠. 거짓이라고 하는사람들도 있었지만, 전 믿고 있었답니다.”
“….”
“그러니 여기서 증명해주신다면 보내드릴 수도 있어요.”
“각주님?”
“절세미공자(絶世美公子)를 이만 놓아주세요. 그럼 유혈(流血)없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런. 각주님! 절대 안 됩니다! 일군사는 이화궁의 중요한 전력이에요!”
총관은 절대적으로 안 된다며 아우성이었지만, 우수린은 수현만을 바라봤다.
수현은 순간 흔들렸다.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유은의 인생을 생각하면 보내주는 편이 억배는 낮기 때문이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유은이 이화궁에서 행복하기란 불가능하니까.
제아무리 궁주인 여세린이 그를 좋아하고 편의를 봐주려 한다 해도, 항상 호시탐탐 그의 몸을 노리는 장로들이 있는데다 소중한 사람들과 영영 이별이다.
그리고 수틀리면 목장으로 가게 될 수도 있으니,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 유은을 보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최후의 최후, 결국의 결국 그녀는 고개를저었다.
유은이 불쌍하긴 하지만 그녀가 충성을 바치는 존재는 어디까지나 여세린.
그녀는 유은을 사랑하고 있다. 유은을 가지고 싶어한다.
그러니 놓아줄 수 없다.
절대적으로.
“그럴 수 없어요.”
“……안타깝네요. 진심으로. 결국 당신도 이화인이었군요.”
“제가 처음부터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녀도 이화궁의사람일 뿐이라고.”
“예.”
우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까움이 묻어나왔다.
“어쩔 수 없군요. 힘을 사용하는 수밖에.”
그녀의 말이 끝나자, 뒤에 있던 검각의 여인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십여명의 검각수와 이화검수 열 명의 격돌.
순식간에 주변이 난장판이 되며 음식이나 나무조각 따위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이야아앗!!”
난무하는 칼춤속에서, 머지않아 피비린내가 진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베여지는 뽀얀 살결.
시뻘겋게 그어지는 실선과 뿌려지는 뜨거운 액체가 전투의 흥분을 고조시켰다.
김수현은 유은을 뒤로 보호하며, 달려드는 우수린을 상대했다.
“크읏!”
여세린이 아니었다면 검후(劍后)의 강호명은 우수린이 가져갔을 것이다.
그만큼 여류무사 중에서는 그녀만한 고수를 찾기란 힘들었다.
김수현이 아무리 영단을 복용하여 내공을 늘렸다지만, 기본적인 실력이라는 게 있는 법.
우수린을 이기는 건 고사하고 떨쳐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게다가 유은을 끼고 있는 상황.
설마하니 우수린이 그를 다치게 하진 않겠지만 지켜야 하는 상황이라는 건 매한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