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6화 〉38. 절세미공자(絶世美公子).
‘음…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
유은을 따먹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장로들도 아니고, 공명정대(公明正大)한정파의 무리다.
물론 전원 여인이고 특히 각주 우수린(友輸隣)이라는 사람은 매우 아름다운 미인이었지만, 단순히 미인을 원했으면 진작에 뽕을 뽑았을 것이다.
‘쩝. 역시 세상일은 맘대로 안 되는 건가?’
유은이야 워낙 천외천의 인간이다 보니 우수린이나김수현이나 하는 사람들의 강함을 잘 파악하지 못한다. 하지만 분위기를 보면 이화쪽이 크게 밀리는 상황.
만약 여기서 지기라도 하면 김수현을 비롯한 이화의 여인들은 큰 고초를 겪을 것이고, 최악의 경우 죽을지도 모른다.
‘그건 안 되지.’
김수현이 죽으면 거의 두 달 가까운 시간동안 금욕을 해온 게 아무 의미 없어진다.
어떻게 참아온 건데, 그것 만큼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푸확!
“끄윽..!”
생각하고 있자니, 싸움이 꽤 진행되었다.
열 명의 이화검수(梨花劍手)들은 분투했으나 하나 둘씩 쓰러졌고, 김수현의 몸 이곳저곳에 상처가 생기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계단을 통해 보타문(普陀門)의 무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올라왔다.
완전히 기울어버린 전세.
유은은 어쩔 수 없이 나서려 했다.
의심은 좀 받겠지만 그래도 김수현이 죽는 것 보다는 나으니까.
그런데 그때!
-흥. 혼자서만 끼고 돌더니 꼴이 말이 아니군 그래.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목소리가 크게 울리더니, 전망대쪽의 벽이 거칠게 부숴지며 몇몇 인영이 안으로 들어왔다.
“일군사, 그대가 살던 고려에 무슨 속담이 있는지 아셔요?”
세 명의 여인.
하나같이 늘씬한 자태와 미모를 자랑하며 색기와 요염함, 그리고 사악함이 깃든 표정으로 좌중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 중 가장 앞에 있는 여인이 대뜸 유은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헉!”
그리고는 오른손을 뻗어 그의 중요부위를 거칠게 주물럭거렸다.
“히익!”
갑작스런 상황에 유은은 황당해 하면서도 이상한 쾌감과 기쁨을 느꼈다.
“콩 한쪽도 나눠 먹으라는 말이 있지. 그런데 정작 고려인이 동향의 속담을 무시하면 쓰나.”
그녀는 괴로워하는(연기지만) 유은을 희롱하며 귀에 혀를 집어넣었다.
그러자 그녀의 양쪽에 선 여인들이 눈을 흘겼다.
“으읏….”
“팔장로, 너무 혼자만 즐기는 거 아닌가요?”
“으응? 장유유서(長幼有序)를 모르시나? 당연히 이몸이 먼저 즐겨야죠. 후후.”
“독점(獨占)은 안 돼요.”
“물론. 내가 그런 좀생이로 보이던가.”
그래. 이 여인들이 바로 이화궁(梨花宮)의 자랑이자 최고전력(崔高戰力)인 이화십칠장로(梨花十七長老).
한 명 한 명이 절대고수로 이루어져, 이들이 출동하면 어지간한 중규모 문파(門派)는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한다.
당연하지만 이화궁(梨花宮)인 만큼 그 행적은 화려하다 할 정도로 퇴폐적이며 악명이 자자한 편.
그래도 궁주인 여세린과 강호공인색녀인 궁문혜 등으로 인해 조금은 묻힌(?) 여인들이었다.
“…당신들!”
장로들의 등장에 기겁하는 우수린.
다 된 밥에 재를 뿌려도 정도가있지, 아무리 그녀가 검각의 각주라 해도 장로가 세 명이나 출현했다면 쉽게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
“계속 이런 식으로 가서 괜찮을까요?”
“….”
“그냥 흐지부지 되는 거 아닐지….”
별다른 소득없이 산채로 돌아온 서현.
무림맹(武林盟) 회의는 거의 매일 참여하고 있었지만 도무지 진전되질 않았다.
말로는 당장이라도 이화궁과 흑천맹을 정벌할 것처럼 굴고 있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어느 문파가 앞장서고, 또 얼마나 많은 무사들을 차출할 지 등을 치열하게 따져가면서 시간을 소모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예 할 생각이 없어서 그러느냐? 그건또 아니다. 다들 사파무림(邪派武林)을 정벌할 생각에 엄청난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다만 그 속에서 자문파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싸워댈 뿐.
게다가 남궁혁(南宮弈)과의 접촉은 별 소득도 없는데 이상한 시선만 하나 늘린 것 같아 불쾌하기까지 했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시간을 지체하다가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날려버릴 지 알 수가 없다.
“근데 뭐 어쩌겠어~. 요녀석이 약해빠진 걸.”
“….”
여전히 빈둥거리며 놀려대는 은소령을 노려본 서현이 결심한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두 달 동안이나 주인님과 소식이 끊어진 상태예요. 충분히 벗어날 수 있는데도 그리하시는 걸 보면 분명 주인님의 의도이시겠지만….”
“의도겠지만?”
“그래도 시녀된 자로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선 주인님을 찾아야겠죠. 무림맹 저 겁쟁이들과는 별도로 일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근데 너 졌다며. 검후인지 뭔지하는 여자한테. 이길 수 있겠어?”
“……본국에 지원을 요청할겁니다.”
서현은 마뜩찮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선택권이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부인들 불러오게?”
“그분들은 너님과 다르게 매우 바쁘시거든요. 오시고 싶어하시겠지만 힘들 겁니다.”
“나도 나름 바쁜데.”
소령의 되도않는 소릴 무시해버린 그녀가 곧바로 본국에 연락을 넣었다.
“근데 너가 시녀들 중에선 제일 강한 거 아냐? 너가 못 이겼는데 다른 애들 불러오는 게 의미가 있나.”
“흥. 멍청하긴. 나는 비서실장이에요. 사무직이라고요. 아시겠어요?”
“지랄.”
“전투직은 따로 있죠. 괜히 친위대를 만들어 둔 게 아니랍니다.”
“아 그러셔?”
서현은 본국에 현재 상황을 전달한 뒤 상세한 명단을 지시하여 지원을 불렀다.
그리고 약 한 시간 뒤.
산 전체를 울리는 커다란 지진과 함께 산채 마당에 등장하는 이들.
은하제국이 하렘궁으로 불리던 옛날(?), 이미 유은을 위한 친위대가 조직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선 유은 본인이 직접 날뛰기도 하고, 또 서현을 비롯한 비서들이 깽판을 부리는 통에 잘 부각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시녀들 중 최고수가 서현이라는 인식이 알게모르게 퍼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말 대로, 서현은 사무직. 본격적으로 스탯 카지노가 운영되고 난 이후로는 전투직에 비할 수 없었다.
“어. 나 저사람 본 적 있는데. 티비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속에서나타나는 여인들.
그 중 한 명이 은소령의 눈에 띄었다.
예전 도쿄에서 처음으로 B급 던전이 발생했을 때, 유은을 제외하면 제대로 활약했던 이가 없었지만 그나마 꼽자면 몇몇 있기는 하다.
루크레시아.
미국 맨하탄 던전에서 활약하던 여인으로, B급 던전이 발생했을 때 도쿄로 건너왔다. 그 와중에 호기롭게 유은에게 내기를 걸어보지만 안쓰럽게 패배. 결국 유은의 육노예가 되어 지금은 그의 친위대장으로서 일하는 중이다.
“정의13대 총대장이자 1번대 대장. 루크레시아. 정의(正義)를 위해 이곳에 등장.”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등장하자마자 친절하게 자기소개를 해주는 그녀.
은발의 긴 포니테일이 바람에 휘날렸다.
그녀에게 옮은 걸까, 옆에 있는 여인도 자기소개를 했다.
“…2번대 대장 구예나. 아니 씨발 근데 이걸 왜 하는 거야?”
“흥. 우문이로군. 정의를 수호하는 입장이라면 본인이 누구인지부터 밝히는 것이다.”
“뭐라는 거야 이 오타쿠년이.”
“또…또 싸우십니까? 적당히 좀 하세요. 꼴불견이니까. 아, 참고로 저는 3번대 대장 키라라 사토미라고 해요. 잘부탁드려요.”
“….”
“….”
“….”
“….”
“왜 아무 말이 없지? 우릴 부른 게 아닌가?”
“왜 저런 애들을 불러온 거야?”
“…성격은 저래도 실력은 괜찮아요. 스탯은 배신하지 않으니까.”
“차라리 그 뭐냐 앙리에타? 걔가 그나마 낫다고 생각되지 않나?”
“그 아이는 스탯카우이기 때문에 은하제국이 원활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강남에 있어야 해요. 바보님아.”
“사람을 앞에두고 실례되는 말을 하고 있군.”
“…아무튼 잘 왔어요. 상황은 다 들었죠?”
“그래.”
“근데 3명이 다야? 지원을 부른다길래 막 엄청나게 불러올 줄 알았더니.”
소령의 의문에 서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데려와서 뭐해. 어차피 위치도 알고 있겠다, 잔살마 그년만 잡으면 되는건데. 이화궁이랑.”
“아무래도 믿기지가 않네.”
영 못마땅한 얼굴로 루크레시아들을 바라보는 소령.
서현을 거의 가지고 놀다시피 했던 여자를 상대로 저 여자들이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잘 들지 않았다. 심지어 한 명은 방구석 히키코모리 같지 않은가.
“흩날려라. 만본앵(萬本櫻).”
그런 분위기 속에서, 갑자기 검을 뽑은 루크레시아가 기술명을 외쳤다.
그녀가 뽑아든 검신이 샤르르 흩어지며 무수한 가닥의 꽃잎으로 화했다.
“또 시작이네 오타쿠.”
질리도록 이런 광경을 봐온 구예나는 한숨을 내쉬고, 키라라는 멋쩍게 웃었다.
“만본앵변형(萬本櫻變形) : 섬(殲).”
그러거나 말거나, 꽃잎으로 화한 칼날은 순식간에 산채건물을 지워버리고는 다시 돌아와 검신의 모양을 갖추었다.
“….”
“대답은 이걸로 대신하도록 하지.”
“…저기 우리집이야 병신아.”
물론 소령은 더 어이없어 할 뿐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