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3화 〉39.춘추무림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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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궁이 불타고 있다고?”
“예,예….”
“설마.”
“아니…정말입니다.”
“….”
갑작스럽게 들려온 소식에, 여세린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절강에서 출발하여 일주일만에 흑천맹의 본단이 있는 사천성에 도착, 여러가지 실없는 회의와 검증 등등에 참석했던 그녀는 심히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흑천맹에서 이화궁이나 그녀에 대해 제제를 가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주의를 좀 주었을 뿐. 그녀를 이곳까지 친히 발걸음하게 만든 것도 사안의 심각성을 조금이라도 인식시키기 위함일 뿐, 제제의 목적은 없었다.
그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일단 이 먼곳까지 온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기분이 좋지 않다.
“대 이화궁이 어떤 곳인지 알고서 하는 말이냐?”
“무,물론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단지…보고가 올라온 대로 말씀드릴 뿐인지라….”
여세린의 성정을 알고 있는 흑천맹에서 그녀에게 붙인 미동.
상당한 미색을 자랑하는 남자였지만, 이미 유은맛을 본 세린은 별다른 흥미가 없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가져온 소식.
별안간 이화궁이 불타버렸다지 않은가? 이 말도 안 되는 말을 듣고 있으니 괜히 골이 당겨왔다.
안 그래도 유은과 떨어져 기분이 좋지 않은데 이딴 헛소문이라니.
“확인해보신다면 분명ㅡ,”
푸확!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의 목이 달아났다.
댕강 잘려버려 채 자신의 말을 전하지 못한 한스런 얼굴.
잔뜩 일그러진 표정이 떼굴떼굴 굴러 방문을 넘어갔다.
“꺄아악!!”
저편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
그와 거의 동시에 목없는 시체가 쓰러졌다.
“밖에 아무나 들어와 이것좀 치우거라.”
잠시 복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다가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후…검후님, 자꾸 이러시면 안 됩니다.”
무림맹에 의해 ‘검후’에서 파면된 지 오래였지만, 아직도 많은 사파무인들은 그녀를 검후라 불렀다.
지금 이 여인도 동일.
사파의 자랑이자 뭇 여인들의 이상향이라 할 수 있는 여세린을 마음 깊이 존경했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 그녀가 하는 짓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파랗게 질린 시녀들을 부려 시체를 치우게 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입니다.”
“무엇이 말이냐?”
“이화궁이 불탔다는 것 말입니다.”
“….”
“뿐만아니라 닝보현과 해당관아 역시 점령되어 봉화가 올랐다고 합니다. 아마도 현령역시…현재는 관군이 현의 경계를 둘러싸고 있는 형국입니다.”
“…정말로 이화궁이 불탔단 말이더냐?”
“예.”
“….”
자못 심각하게 얼굴을 굳히는 세린.
그녀가 궁주라서 하는 생각이 아니라, 정말로 이화궁은 정파무림으로 따지자면 구파일방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인 거대문파였다. 인근 거대문파인 남궁세가가 천하제일가라면, 이화궁은 천하제일궁. 그런 이화궁이 불탔다면 이건 혈교의 준동보다도 더한 사건이다.
‘설마 그녀석의 부하들이?’
그때 문득 떠오르는 것.
최초 유은과의 관계는 그녀의 강간이었지만, 사실은 그녀보다 월등히 강한 유은이 유희를 즐기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의 호위라는 서현이라는 여자도 꽤나 막강한 공력을 지니고 있었다. 분명 세린 자신에게는 한참이나 못 미치지만,
“일개 장로들이 상대라면 못이길 것도 없겠지.”
세린과 장로들의 격차는 하늘과 땅.
그 계집의 실력이라면 능히 장로들을 무찌르고 이화궁을 불태울 수 있을 터.
게다가 그녀만한 강자가 더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예?”
“아무것도 아니다. 그보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만 돌아가 봐야겠군.”
“…맹에서도 무사를 붙이겠습니다.”
“필요없다. 본녀 혼자로 충분하니라.”
만약정말로 유은의 부하들이 쳐들어온 것이라면, 그래서 이화궁과 마을이 불탄 것이라면 흑천맹의 무사들을 데려갈 필요가 없다.
“하지만….”
“본녀야말로 이 무림의 최강자. 네녀석의 걱정을 받을 위치는 아니니라.”
“…알겠습니다. 모쪼록 조심하십시오. 맹에서는 절대 이화궁과 검후님께 척지지않을 것입니다.”
“그래.”
세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왔다.
은색에 가까운 백발을 찰랑이며 걷기를 수 분.
일단의 무리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가장 앞에서 무리를 이끌던 청년이 그녀의 앞에서 포권을 취했다.
“…사마홍.”
“누님, 소식은 들었습니다.”
패황 사마홍.
사마세가의 가주로서, 흑천맹의 맹주도 겸하고 있는 그는 정파무리에선 천하이인자로 여겨졌고, 사파무림에선 천하일인자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진정한 천하제일인, 천하제일검은 바로 눈 앞에 있는 여세린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맹주라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항상 그녀에게 깍듯했다.
“그래. 지금 출발하는 참이다.”
“혹 도와드릴 일은 없겠습니까?”
“아직 네 도움을 빌릴 정도는 아니니라.”
“상황이 꽤 심각하다 들었습니다만.”
“괜찮다.”
“그리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혹 관의 압박이 있더라도 너무 과히 물러서진 마십시오.”
“흥. 본녀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더냐.”
“……그렇다고 너무 나대지도 마시고요.”
“나댄다니.”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마교와 정파놈들이 있는 이상 관과 척을 지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본녀도 안다.”
그녀는 그만 말하라는 듯이 고개를 젓고는 인사도 없이 몸을 돌렸다.
무례한 태도였지만 개의치 않는 맹주.
그저 멀어져가는 세린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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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사실은 유은씨가 엄청난 강자이고, 심지어 궁주님보다 더 강하고요. 지금까지 강제로 당한 건 전부 다 연기였고, 이제는 목표를 대충 이뤘으니 그 힘을 일으켜 무림을 통일하겠다?”
“정확하네요. 역시 일군사. 머리가 비상하십니다.”
짝짝짝.
유은이 밝은 얼굴로 박수를 쳐 주었지만, 수현은 놀림받는 것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을 가지고놀아도 유분수지. 어떻게 이따위로 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그가 처한 환경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민과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왔는데, 알고보니 그게 전부 다 연기였다? 심지어 그와 관계를 맺은 것에도 그런 심리적 요인이 꽤 크게 작용했는데?
‘뭐 이런…!’
겉으로는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었지만,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화내기에도 뭐한 것이, 유은이 남을 속였든 어쨌든 기본적으로 이화궁의 궁주인 여세린이 그를 납치한 것이모든 일의 시작이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장로들과 이화검수들은 불타버린 이화궁의 모습에 길길이 날뛰었지만, 아직까지 정상인의 범주에 속하는 수현으로서는 마냥 그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단지 이런식으로 사람을 속여 살을 섞게 한 그가 야속할 뿐.
“아무튼 지금부터 무림통일을 위한 회의를 할 겁니다. 수현씨도 잘 들어두세요.”
“….”
아무렇지도 않게 무림통일을 언급하는 유은.
수현은 차마 뭐라 말할 기운이 없었다.
뭔가 죄다 하기싫어지는 느낌.
거의 반강제로 이곳에 불려왔지만 입을 열고 싶지가 않았다.
“우선 지금까지 내가 대충 파악한 구도를 보면, 베이징 근처를 중심으로 중국 북동쪽을 정파무림이 잡고 있어. 그리고 사천을 중심으로 서쪽과 여기 절강까지를 사파무림이 잡고 있고. 물론 오늘부턴 이곳이 우리 은하제국의 영토가 되겠지만.”
“요동쪽으론 대고려도 있습니다. 지금이야 중원이 명의 땅이지만, 사실 이쪽 역사를 보면 대고려가 중원을 차지했던 시간이적어도 명 보다는 길더군요.”
“그렇다더라. 북쪽에 흉노도 있다던데. 아무튼통틀어서 대충 새외라고 하자고. 북서쪽으로 청해성을 넘어가면 십만대산이라는 곳에 일월신교인가하는 애들이 있는데 얘들이 무력으로는 제일 강하대.”
알기 쉽게 삼국지를 들어 설명하자면, 무림맹은 조조의 위와 동오의 북부, 흑천맹이 유비의 촉과 동탁세력+동오의 남부. 그리고 마교가 마등의 세력을 차지하고 있다.
대고려는 원소세력의 일부와 공손찬의 세력권, 그리고 한반도 전역과 연해주 일부를 차지하고있으며, 북쪽의 흉노는 시베리아 일부와 몽골, 중앙아시아쪽을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 유은의 은하제국이 이화궁이 있던 항주, 그 중에서도 닝보현을 점령한 것이다.
“남궁세가가 움직일 가능성이 있겠어요. 지금쯤이면 이화궁이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테니까요. 절강이 사파무림의 세력권에 있을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이화궁 덕분. 그 이화궁이 무너졌으니 분명정파쪽에서 움직일 겁니다.”
“그렇겠지? 내가 생각해봐도 그럴 거 같애.”
유은이 대충 그려진 지도 한쪽을 콕 집었다.
“여기 강서성이랑 광동성으로 치고내려오면 절강성이랑 복건성이 단절돼버리니까 순식간에 네 개의 성이 넘어가버려. 게다가 그쪽엔 거대문파도 없으니 쑥쑥 내려올 수 있겠지. 나라면 여길 칠 거 같은데.”
“네.하지만 시간은 꽤 걸릴 거예요. 아무래도 이화궁만한 문파가 무너졌다는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을 테니까요. 시간적 여유가 좀 있을 겁니다.”
“그러네. 그럼 우리가 먼저 강서쪽으로 나가야 하나?”
“아니요. 우린 사파가 아니니까 오히려 정파쪽에서 절단해주는 편이 좋다고 봐요.”
서현이 파란색 펜으로 안휘성부터 강서성, 광동성까지를 직선으로 쭈욱 그어버렸다.
“이렇게 되면 바로 정사대전이 발발해서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우겠죠.”
“아하.”
“그럼 그 사이에 정파의 뒤를 털든 하면 될 거 같아요.”
“그렇구나. 역시 음흉한 서현 다워.”
“….”
제멋대로 여러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유은과 서현.
잠시 관전하던 수현이 보다못해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다 틀렸어요. 본궁이 무너졌다는 걸 확인한다 해도 남궁세가는 내려오지 않을 겁니다.”
“응? 왜요?”
수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대고려가 있으니까요. 무림맹은 고려를 막아내는데에 아주 중요한 전력이에요. 그런데 언제 고려가 준동할지 알 수 없는 이 상황에 정사대전이 일어나는 걸 황실에서 두고 볼 것 같으세요?”
“아니…나라는 나라가 막아야지;”
“명은 무림의 도움 없이 고려를 막아낼 힘이 없어요.”
“….”
“심지어 흉노도 있죠. 괜히 무림이라는 사설무력집단이 설치는 게 아니랍니다. 용인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뭐야. 중국 개찐따잖아.”
“? 아무튼, 남궁세가든 정파무림이든 분명 내려오려는 동작은 취하겠지만 결정적인 행동은 하지 않을 거예요. ‘우린 언제든지 내려갈 수 있다.’라는 의사표현만을 황실에 전달하는 거죠. 그럼 하나의 전력도 아쉬운 황실에서 그들이 원하는 걸 내어줄 수밖에 없어요.”
“뭐 무림맹주한테 공주라도 시집보내려나?”
“그럴지도 몰라요.”
“엑? 진짜로요?”
“할 수만 있다면 말이죠. 남은 황녀라고는 한 분 뿐인데, 사사로이 시집보낼 수는 없죠. 대고려가 있으니까.”
“또 고려에요? 뭔 다 고려야.”
“도저히 막아낼 수 없다고 여겨질 때마지막으로 쓰이는 방법이 고려의 황제나 태자에게 황녀를 보내는 겁니다.”
“….”
“명은 그랬던 적이 없지만, 여태 중화왕조에선 더러 그래왔었죠.”
“…진짜 개찐따네.”
유은이 느낀대로, 그가 있던 세계에 비하면 이쪽의 중국은 정말 말 그대로 개찐따.
물론 강한 제국이라는 건 변치 않았지만, 워낙 사방에 적이 많고 혼란했다.
게다가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대고려는 전 세계가 원나라로 인해 박살이 나고 있을 때에도 혼자서 몽골을 뒤지게 패버리는 깡패국가였기에 이웃해있는 중국은 대대로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원나라가 아시아와 유럽을 거의 제패하다시피 했을 때에도, 하필이면 고려에 내분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유럽은 몰라도 결코 아시아를 정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고려의 내분이 끝났을 즈음, 원나라는 예정대로 박살나며 중원에서 쫓겨났다. 세계를 제패한지 고작 백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원나라가 중원에서 쫓겨난 것도,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운 것도, 모두 대고려의 영향이에요. 고려가 원나라를 물리쳤고, 그 고려가 내분으로 불안정할 때 주원장이 명을 일으킨 거니까요.”
“혼란하다 혼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