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177)화 (177/366)



〈 177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동생의 연애질을 지켜본다는  언니 입장에서 상당히 고역스러운 일임이 틀림없었다. 하물며 동생이 본모습과는 다르게 이미지 관리를 하고 있는 중이라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바이올렛은 답지 않게 표정관리에 실패하고 말았다.


덕분에 그녀로부터 차게 식은 시선이 날아와 꽂혔지만, 바이올라는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나 보다.

어처구니 없다는 듯 바라보는 언니의 시선을 받고 잠깐 움찔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내게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물론, 내 몸을 휘감고 있던 꼬리를 풀어준 것은 덤이었다.


그렇게 바이올라의 권유에 따라 그녀가 권한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드르륵하고 의자 다리 끌리는 소리가 울려퍼지더니 어느새 바이올라가 내 옆에 앉아있었다. 그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내 옆으로 바짝 당겨앉은 그녀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살랑살랑 흔들리던 꼬리를 움직여 그것으로 내 몸을 감싸는 것이었다.

'어쩐지 순순히 놓아주더라니만..'


의자 옆쪽에 난 틈으로 쑤욱하고 파고들어온 그것이 나무를 기어오르는 뱀마냥 내 허리를 칭칭 휘감았다. 덕분에 멀쩡하던 몰골이 모피코트에 포옥 감싸인 듯한 모양새가 되어버린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뭐라 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내심 쓴웃음을 짓고 있자니 귓속으로 흘러들어온 것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변명이었다.

"추, 추우면  되니까.."

아까야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지만 지금은 자리에 앉았으니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없이 그냥 시녀를 불러다가 담요라도 하나 가져다 달라고 하면 될 텐데 말이다.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나와 스킨십을 하고야 말겠다는 갸륵하기 짝이 없는 바이올라의 선택에 뭐라고 하는 대신 살짝 어색해하는 표정을 얼굴 위에 띄워올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뒤로 따라붙은 건 어색하기 짝이 없는 침묵이었다.

다만 그게 불편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살짝 풋풋한 느낌마저 드는 것이 가슴 안쪽을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달까.


그게 꼭 나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민망한듯 흠하고 짧게 헛기침을 한 바이올라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다. 빨갛게 변한 얼굴을 숨기고 싶었던 걸까. 아무래도 그랬던 모양인데 별로 효과는 없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림으로써 얼굴은 숨겨졌지만 대신 자꾸만 쫑긋대는 귀가 훤히 드러나게 되었으니까.


다만 그 분위기 자체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우리에게는 풋풋하게 느껴졌던 그 침묵이 그것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3자에게는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지기라도 했는지 아까 전부터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바이올라 쪽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의 언니가 헛기침과 함께 그것을 깨뜨려버렸으니까.

그렇게 나를 포함해 자리에 앉아있는 이들의 시선을 단 한 순간에 제쪽으로 끌어당긴 바이올렛이  옆쪽에 놓여져있던 찻주전자를 집어들어 그 안을 채우고 있던 것을 빈 찻잔에 대고 따라냈다.


쪼르르륵-


왠지 화장실이 생각나게 하는 소리를 내며 주둥이 부분에서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살짝 끈적해보이는 질감의 액체가 척봐도 뜨끈해보이는 김을 찻잔 안쪽에서부터 피워올렸다. 그와 함께 주변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건 저번에 이곳에 방문했을 때 맡아본 적 있는 향기였다.


일전에 방문했을 때 내가 그걸 거리낌없이 잘 마셨던 걸 잊지 않고 이번에도 같은 걸로 준비한 모양.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데 도움이 될 거에요."

저번보다 색이 확실히 연한 걸 보면 이미 우유는 들어가있는 것 같았다.


우유만으로는 살짝 쓸 수도 있다고 생각한 걸까. 찻주전자 옆에 자리하고 있던 자그마한 그릇 안에서 각설탕 한 개를 집어든 바이올렛이 그것을 그대로 검지와 엄지 사이에 끼워넣었다.

또 뭘 하려고..

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바이올렛의 손등 위로 핏줄이 살짝 솟아오르더니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끼어있던 각설탕이 파삭- 소리를 내며 부숴졌다. 그러니까 가루가 됐다는 소리다.

어쩜 저렇게 곱게  부숴졌는지 가루는 찻잔 안으로 떨어지는 즉시 그 안으로 녹아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이건..'


경고인가?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왠지 그렇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바이올렛 입장에서는 내가 바이올라를 이용해 헛짓거리를 시도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됐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옆에 보란듯이 자리한 도구를 두고 직접 손으로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


바이올라또한 언니의 행동에서 나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것인지 그저 좋다는  헤실헤실 웃고 있던 얼굴을 순간적으로 찡그리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녀는 그걸 가지고 언니에게 항의를 한다거나 그러지 않았다. 그건 아무리 자신이라도 선을 넘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식으로 살짝 흠칫할 수밖에 없었던 순간이 있기도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잠깐에 불과했다. 경고는  번만으로 족하다고 여긴 건지 그 다음부터 바이올렛은 딱히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입을 꾹 다물어버린 언니를 대신해서 자리의 분위기를 주도해나가기 시작한 건 다름아닌 이 자리의 진짜 호스트라 할 수 있는 바이올라였다.


아까 자리에 앉을 때부터 묘하게 입이 간지러워 보이더니만 나랑 하고 싶은 이야기가 참 많았나 보다.  번 뚫린 그녀의 말문은 시간이 지나도 닫힐 줄을 몰랐다.

덕분에 굉장히 편했다. 특별히 주도적으로 나갈 필요 없이 그저 귓가로 울려퍼지는 말에 맞장구를 치기만 하면 됐으니까. 그렇다고 기계적으로, 의무적으로 그러지는 않았다. 은근히 눈치가 좋아보이는 이를 상대로 그렇게 행동해봐야 금방 눈치채고 마음 상해할게 뻔하니까.


바이올라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집중했던 것은 단지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야기 자체가 흥미롭기도 했으니까.

이 순간만을 위해서 따로 연습이라도 한 걸까. 말이 막힘없이 술술 흘러나오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그렇게 바이올라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듣다보니 자연스럽게 알게된 것은 그녀가 식도락과 여행을 꽤나 즐기는 타입이라는 점이었다. 보통 황녀쯤 되는 위치에 있다보면 어떤 이유로든 움직임에 제약이 생기기 마련이라 갈  있는 곳도 한정되기 마련인데 그런 것치고 바이올라는 꽤나 자유롭게 여기저기를 돌아다닌 것 같았다. 적어도 지금 말하는 것만 들어보면은 그렇게 느껴졌다.

내가 그 주제에 관심을 보이니 그 사실을 알아차린 바이올라가 계속 그쪽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생각은..

'설마 저게 다 신혼여행지 후보인건..'


바로 그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정식으로 만나는  이번이 두 번째인데 설마 거기까지 상상했겠냐만은 그 가능성을 차마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특정 여행지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때마다 은근히 '너도 체험해보면 참 좋을텐데..'라는 식으로 희망을 덧붙일 이유가 없으니까.


확실히 평범한 사람들에 비해 후각이 압도적으로 뛰어나다보니 그만큼 페로몬빨도 잘 받는 것 같았다. 고작 며칠만에 거기까지 상상하게 된 걸 보면.

이 와중에 살짝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면 동생한테는 이토록 뛰어난 효과를 보이는 것이 왜 언니를 상대로는 효과가 없냐는 것이었다.

지금도 봐라.

동생인 바이올라는 내게서 단 한시도 시선을 못 떼고 있는 반면에 언니인 바이올렛 쪽은 아까 찻잔을 건네주고 나서부터는 내게 일절 시선을 주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그저 아주 가끔 손에 들고 있는 책쪽에 고정하고 있는 시선을 떼어내어 그것을 동생을 향해 던지는 게 바이올렛이 보이는 움직임의 전부였다.


굉장히 규칙적인 그 움직임 덕분에 다른 건 몰라도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굳이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을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바이올렛이 계속 이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이유를 말이다.

그녀는 혹시라도 동생이 내 유혹아닌 유혹에 이성을 잃고 폭주하게 되지는 않을지, 그로인해 사태가 파국으로 치닫게 되지는 않을지를 걱정하고 있었다.

아슬아슬할 때까지 지켜보다가 더는 안 되겠다 싶을 때 저번처럼 우리 둘 사이로 끼어들어서 갈라놓을 생각인가 본데..


'그러면 슬슬..'


행동에 들어가는  좋을  같다고 생각한 찰나였을 것이다.

"그런데.."


제국 최대의 미항이라 불리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그곳에서 먹었던 해산물들이 얼마나 맛있었는지를 열심히 설파하며 은근히 날 유혹해대던 바이올라가 갑자기 태세를 전환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 위에는 어느새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표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또한 그 표정과 어울리는 것으로 변해있었고.

대체 무슨 말을 꺼내려고 저렇게 신중하게 각을 재는 것일까.


궁금한 마음에 바이올라를 향해 물끄러미 시선을 던지니 순간 움찔했던 그녀가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갔다.


"주머니 안에 있는  말이야.."

뭐가 그리도 궁금한가 했더니만 내 주머니 안에 들어있던 물건의 정체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하긴, 아까전부터 그게 꼬리를 계속 쿡쿡 찔러대고 있었을테니 그녀 입장에서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겠지. 털로 덥수룩하게 덮여있어서 얼핏 보기엔 둔감해보이는 꼬리지만 사실 내 자그마한 움직임 하나하나에도 반응할 정도로 민감한 곳이 바로 그곳이니까.

헌데 딱딱하고 굵직한 것이 자리에 앉은 순간부터 그런 곳을 쿡쿡 찔러댔을테니 바이올라 입장에서는 아까 욕실에 들렸을 때 실루엣으로나마 목격했던 것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수밖에 없었을 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바이올라는 본인이 직접 던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질문 때문에 민망해서 죽으려고 했다.


"아, 그게.."


그러한 그녀의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한 척, 그저 그녀의 질문을 받고서 아주 잠깐 잊고 있었던 것의 존재를 그제서야 떠올린 척을 하며 잽싸게 주머니 쪽으로 손을 쑤셔넣었다.


손을 쑤셔넣었다고 표현한 것은 바이올라의 꼬리가 여전히  몸을 휘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짝 흥분한 상황에서 민감하기 그지없는 곳을 거칠게 스치고 지나가는 내 손길이 바이올라에게는 어떻게 느껴졌을까. 모르긴 몰라도 상당한 자극이었음은 틀림없어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손이 그녀의 꼬리를 스치며  안으로 파고든 순간, 그녀의 입에서 '흐힛..!'같은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소리가 터져나오며 그녀의 꼬리털이 일제히 솟구칠 이유가 없으니까.


입을 그대로 방치해두면 거기서 또 무슨 소리가 흘러나올지 몰라 두렵기라도 했던 것일까.

사레라도 들린 것처럼 바이올라가 콜록콜록하는 소리를 내며 황급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동시에 위로 올라온 그녀의 손이 다급하게 입술 쪽을 틀어막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몸을 감싸고 있던 꼬리 사이로 밀어넣은 손을 계속해서 전진시켰다.


보드라운 털 사이로 파고들어간 손이 그것들을 사악하고 가르며 밑을 향해 내려가는 느낌은 상당히 좋았다. 엄청나게 부드러운 카펫을 손가락을 세워서 쓰다듬는 듯한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너무 좋아서 중독이 되어버릴 것 같은  감촉을 만끽하며 어느새 주머니 앞까지 도달한 손을 움직여 그 위로 뽈록하게 튀어나와 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던 것을 조심스레 꺼내들었다. 그렇게 꺼내든 모발용 영양제가 든 병을 테이블 위에다가 올려놓으니 관심없는 척 해도 은근히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반대쪽에서 그게 뭐냐고 묻는 듯한 시선이 얼굴로 날아와서 꽂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거기에 반응을 하지는 않았다.

아직 꺼내야할게  개는  남아있는 상태였으니까.

병과 마찬가지로 숙소에서 챙겨온 빗들은 반대쪽 주머니에 들어있었다. 주머니는 원래 입고 있었던 바지에 달려있던 것보다 한결 작아진 반면에 병의 부피가 은근히 크다보니 어쩔  없이 나눠담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는데..


"흐으으.."


덕분에 저렇게 움찔대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반대쪽 주머니 안에 들어있던 것마저 테이블 위로 꺼내들고 나서야 그것들의 용도에 대해 설명할 수 있었다.

"저번에 보니까 살짝 푸석한게 좀 신경이 쓰여서요.."

내게 그럴 자격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자꾸만 신경이 쓰여서 이런 것들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고 말을 하니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릴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감각이 이제  잦아든 것인지 다시금 내쪽으로 돌아와있던 바이올라의 얼굴 위로 감격한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잽싸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내가  꼬리를 좀 관리해줘도 괜찮겠느냐.


그런 뉘앙스가 담긴 질문을 바이올라를 향해 던지니 그에 대한 대답은 바로 돌아왔다.

혹시라도 언니가 개입하지는 않을까 걱정이라도 됐던 걸까.

"그럼, 나야 고맙지."


깊게 생각해볼 필요조차 없다는 듯 바이올라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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