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음양의 조화-한나 누나
다음 날.
눈을 뜨니까 벌써중천이었다.
‘어째 모닝콜이 없다 했더니 아침 일정이 없는 날인가?’
이곳에서 펠라는 특별한 게 아니다. 즉, 일정도 없는데 펠라를 한답시고 잠을 깨우는 하녀는 처벌받는단 거다.
부스스한 눈으로 둘러보자 내 담당 하녀가 있었다.
“이봐, 오늘은 아예 할 일이 없나?”
“점심 이후에 엘리스님과 수련이 잡혀 있습니다.”
“또?”
제기랄, 그놈의수련 진짜.....
난 불평하다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 안에서야 어화둥둥 떠받들어주지만, 오크 제국과의 전쟁터에서도 그러진 않을 것이다.
믿을 건 앨리스와 가문의 백합 기사단뿐. 굳이 추가하자면 내 방패술까지.....
난 주먹을 쥐었다 피면서 힘을 가늠해봤다.
‘조금 늘었나? 어제 음기(陰氣)를 보충하긴 했는데....’
잘 모르겠다. 해봐야 ‘받침대’와 ‘식사 보조’에게 갈취했으니 많은 양은 아닐 것이다.
난 전속 하녀, 에델을 바라봤다.
하녀와 노예는 다르다. 노예가 식사 보조, 회의 보조, 받침대, 샤워 보조, 밤노예 따위의 부속품을 칭한다면, 하녀는 가문에 고용된 사람이었다.
사람, 최소한 노예 신분은 아니라는 거다.
그런 만큼 노예와는 확실한 차별점이 있었다. 예를 들면 지닌 무력이나 지력에서.
내 전속 하녀 에델은 밥값쯤은 하는 마법사였다.
‘물론 아침에 펠라로 모닝콜 해줘야 하는 신세지만 말이야.’
난 에델을 보며 물었다.
“에델. 내가 전쟁터로 가면 너도 따라올 거야?”
“제게 선택지가 있습니까?”
없었던가. 하녀의 대체적인 사정은 알아도, 개개의 사정까지는 몰랐다.
“넌 최소한 돈 받고 일하잖아. 노예가 아니니까 자유도 있지 않나?”
“일반적으로는 있습니다만..... 전 원래 노예 출신입니다. 아시잖습니까?”
“아!! 그랬지.”
난고개를 끄덕였다. 에델은 소위 밤노예 출신이었다.
밤노예 인생이야 평생 섹스만 하다가 끝나는 게 다반사지만, 에델은 달랐다. 타고난 마력량이 하도 대단한 탓에 재능을 인정받아 하녀로 뽑힌 것이다.
에델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스님을 10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모시는 것. 그게 제 자유의 조건입니다. 지난 8년 동안 말씀드렸구요.”
“크흠, 그건 알고 있었어. 전쟁터에도 따라오는지 궁금했던 거야.”
“당연히 그래야만 합니다. 제스님이 어딜 가든 모셔야죠.”
어째 하녀치고는 말투가 좀 공손하지는 않다. 난 에델이 원래 저랬나 하며 갸웃거렸다.
“오늘 좀 예민한데?”
“전혀 아닙니다!! 다만 수련해야 할 제스님이 밤에 못 주무셨으니 걱정인 겁니다.”
“아아..... 노예들 가지고 논 거 말이지.”
어젯밤재밌게 놀긴 했다. 그런데그게 순전히 성욕이나 지배욕을 채우기 위함은 아니었다.
“알잖아? 노예들한테 음기를 착취했지. 내 양기는 하나도 내뿜지 않고 말이야.”
“사정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다행이군요.”
눈에 띄게 안도하는 에델. 난 피식 웃었다.
‘역시 내 안전은 철저히 챙긴단 말이지. 양기를 빼앗길까 봐 걱정하다니.....’
“그나저나 에델. 오랜만에 할까?”
“잠자리.... 말입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에델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너무 딱딱해서 어찌 보면 긴장한 것도 같고, 어찌 보면 화난 것도 같았는데 난 화난 쪽이라 생각했다.
‘하긴.... 내가 씹이득 보는 섹스니까 화났나?’
이쪽 세계에서 섹스는 단순히 성욕을 푸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서로의 힘을 키워주는 행위이기도 했는데, 그건 섹스를 통해 음기(蔭氣)와 양기(陽氣)를 교환했기 때문이었다.
음양,그니까 흔히들 생각하는 그거다.
남자는 양기를 타고났고, 여자는 음기를 타고났으며 음양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이론.
다만 지구와의 차이점은 있었다. 바로 이 세계는 성비가 5 대 95라는 점.
인구의 95%가 여자인 것처럼, 이쪽 세계엔 양기보다 음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성비처럼 대략 20배 정도.
여기서 바로 남녀의 차이가 발생했다.
체내의 음기와 양기가 조화를 이룰수록 강해진다. 그런데 세계엔 음기가 차고 넘치며, 남자는 양기를 타고났다.
한 마디로, 남자는 수련만 해도 음기가 모여서 저절로 조화를 이룬다는 뜻이다.
반대로 여자는 5%도 안 되는 양기를 찾아내 어떻게든 몸에 축적시켜야 했고.
수련 외에 음양의 조화를 맞추는 방법도 있긴 했다.
그게 바로 처음에 말한 섹스.
섹스를 하면, 남자는 정액으로 양기를 내뿜고, 여자도 절정할 때마다 음기를 뿌린다. 서로 교환하면 확실한 이득이었다.
‘중요한 건 힘의 차이가 있다는 거지. 고수의 정액이 하수의 정액보다 기운이 많은 건 당연하잖아?’
난 다시 에델을 쳐다봤다.
에델은 밥값 할 수 있는 마법사고, 나는 한 달에 한 번 수련이 최고기록인 망나니다.
서로 섹스하면 내가 얻는 음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게다가 여자에게 넘치는 음기라고 해도, 기운은 기운이다. 이왕이면 자신의 기운은 아끼면서 상대의 양기, 음기만 착취하는 게 더 좋았다.
그런데 당당하게 섹스하자고 했으니, 심기가 불편할 수도 있다. 뭣보다 노예가 아니고 하녀니까.
“뭐 싫으면 됐고, 나도 음기 보충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제스님은 아직 조화를 이루시지 못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엇....? 내가 그걸 말했었나?”
에델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더니 다 안다는 얼굴로 내뱉는다.
“수련을 안 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성교만 해서 조화를 이루려면..... 노예로는 부족하지요.”
에델의 말이 맞았다.
남자는 태어날 때, 양기 9, 음기 1의 비율로 태어난다. 몸에서 자연적으로 생성되는 기운도 같은 비율이었고.
이 기울어진 음양의 비율을, 외부 기운을 끌고 와서 맞추는 것이다.
물론 세계 전체가 음기로 가득 차 있으니, 남자가 조화를 이루는 건 꽤 쉬웠지만, 난 못했다.
‘지금 내 비율이 대충.... 7대3이던가? 섹스를 그렇게 했는데도 음기가 3밖에 안 된단 말이야.’
이상적인 비율은 5대5.
같은 수준이라고 쳐도, 7대3과 5대5는 낼 수 있는 힘에서 몇 배나 차이 났다.
에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얼굴이 붉어지고, 목소리마저 살짝 떨리는 게 아까보다도 심각해 보였다.
뭔가 잔소리가 한바탕 쏟아질 기세.
“후우우, 제스님. 마침 저도.....”
“아니야!! 됐다고. 난 알아서 조화를 맞춰볼 테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너무 딱딱한 표정 아닌가.
내가 툴툴거리며 손을 내젓자 에델의 안색이 급속도로 돌아왔다. 붉어지고, 굳었던 얼굴이 평소처럼 변했다는 말이다.
“그.... 알겠습니다, 제스님. 어릴 적인 자주 시중을 들어 드렸는데......”
“지금은 싫다는 거지? 밥이나 가져와.”
에델은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따랐다.
침착하기 그지없는 모습. 이게 평소의 에델이다.
‘겨우 수습했네.’
“오늘도 식사 보조를 부르겠습니다.”
“좋지.”
난 들어온 식사 보조를 적당히 희롱하며 식사를 마쳤다.
오늘도 지옥의 수련은 계속되었으며, 밤에는 노예를 불러다 희롱하며 놀았다.
적절히 개발된 노예들은 사소한 자극에도 절정을 겪었으며, 자신의 음기를 아낌없이 내뿜었다.
그렇게 출발 전 5일이 빠르게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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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로 떠나기 전날.
날 찾아온사람이 있었다. 당연히 여자였는데, 이유가 꽤 특이했다.
“그니까 오크 제국과의 전쟁에 참전하고 싶어서 왔다는 건가?”
“......예.”
그녀는 말끝을 흐렸는데, 자신의 정보를 최대한 감추고 싶은 듯 보였다.
두툼한 로브로 전신을 가려서 몸매와 얼굴도 잘보이지 않는다.
난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뭐 하는 새끼지? 전쟁터에 참가하려면 직접 가면 되지. 하필 우리 가문에 껴서 간다고.....?’
애초에 이런 뜨내기를 왜 들여보냈는지도 모르겠다. 난 용병을 데려온 앨리스에게 물었다.
“앨리스경, 언제부터 백작가에서 뜨내기 용병을 받아줬지?”
그러자 당황하며 답하는 앨리스.
“그.... 도련님. 뜨내기는 아니고, A급 용병입니다. A급 중에서도 실력이 출중한.....”
“그래? 신분은 어떻고? 백작가의 이름으로 고용하는 용병이면 신분도 확실해야 해.”
앨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타당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A급 용병이 참전한다는 건, 가문 입장에서나 나라 입장에서나 전부환영이었지만 그만큼 위험도 뒤따랐다.
배신의 위험.
A급이면 어지간한 기사보다 강한 만큼, 배신할 때의타격도 큰 셈이다.
“제가 직접 신분패를 봤는데.....”
앨리스가 설명하려는데 용병이 불쑥 나섰다.
“내가 말할게요.”
아주 쾌활한 목소리. 순간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익숙? 난 가문 밖의 사람들은 거의 모르는데. 해봐야....’
휙-. 두터운 로브를 제낀다. 그 안에서 튀어나온 얼굴은 너무나 뜻밖의 것이었다.
“제스!! 이게 얼마 만이야!!”
두 팔을 활짝 벌리는 그녀. 나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열...... 열셋째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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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내 이름 기억 못 하니....?”
로브를 쓴 A급 용병은 알고 보니 가족이었다. 정확히는 열셋째 누나.
언젠가 설명했듯이 귀족가의 모든 여자는 성인이 되는 순간, 가문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으로 살아가게 되는데, 열셋째 누나는 A급 용병이 되어 날 찾아온 것이다.
‘오, 집안을 나간 여자들은 보통 평범하게 산다고 들었는 데 성공하는 경우도 있구나. 게다가 열셋째 누나는 성인도 되기 전에 나갔는데.....’
이렇게 당당하게 돌아온 건 처음 봤다. 또 아주아주 반갑기도 했다. 서른 명쯤 되는 누나 중, 가장 친했던 게 열셋째 누나였기 때문이다.
다만 10년만에 보는 거라 이름이 조금 가물가물했다.
“어어..... 한나 누나 맞지? 기억났어!!”
“하, 이름도 겨우겨우 말하다니. 좀 심한 거 아니야?”
말 자체는 꽤 섭섭한 투였지만, 얼굴은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누나도 확실히 반가운 모양.
난 용건부터 물었다.
“누나랑 놀았던 건 다 기억하지. 근데 전쟁에 참여해도 괜찮겠어?”
“응?”
“그야 A급 용병은 다른 만만한 일을 하면서도 충분히 떵떵거리며 살잖아.”
“뭐 떵떵거리는 정도는 아니지만...... 확실히 결혼이 가능한 수준이긴 해.”
“결혼을....? 제대로 출세했네.”
“크크큭, 이 정도라는 거지.”
한나 누나는 활짝 웃었다.
결혼이 가능하다. 라는 말은 여자들에게 엄청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이 세계의 남자들은 희소할 뿐만 아니라, 음양의 조화 때문에 대체로 강했다. 평균치가 여자보다 훨씬 높다는 거다.
그런 세계에서 ‘결혼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여자는 실력자나 권력자, 재력가뿐이었다.
‘누나는 실력자인 모양이야. 하긴 20대에 A급 용병이면 그럴 만도 하지.’
아무튼 중요한 건 존나게 반갑다는 사실이었다.
10년 만에 상봉한 가족! 그것도 가장 친했던 누나!
당장이라도 껴안고 싶을 정도다. 마침 누나도 그걸 부추겼다.
“제스, 오랜만에 좀 안아보자!”
“좋지”
내가 한나 누나와 포옹하려고 하는 순간, 두 사람이 날 막아섰다.
“안 됩니다, 도련님!!”
“제스니임!”
각각 앨리스와에델. 내가 당황해서 쳐다보자 에델은 뒤로빠졌는데, 앨리스는 요지부동이었다.
‘가족이라도 용병은 용병이니까..... 외부인 취급이라는 건가?’
난 앨리스를 관찰했다. 잔뜩 긴장한 상태.
신분은 확실해서 데려왔어도, 누나가 언제 날 덮칠지 모른다는 거다.
“도련님, 접촉은 안 됩니다.”
“가족인데.....?”
“예.”
당황스럽다.
한나 누나도 마찬가지였는지, 창끝으로 땅을 툭툭 건드렸다. 시원시원한 눈빛이 앨리스를 찌른다.
“어이가 없어서 말이야. 내가 지금은 용병짓하고 있어도, 원래는 홀란트 가문 출신이라고!! 내 동생한테 해코지할 리가......”
“한나. 그대는 용병이고, 난 백합기사단의 단장입니다. 예의를 지키시길.”
“하!”
“또 귀족가의 기사단장이 용병을 경계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대의 실력과 신분이 확실하지 않았다면 도련님 앞에 데려오는 일도 없었습니다.”
“이게.....!!”
한나 누나는 어이없다는 듯 앨리스를 노려봤다. 그러더니 날 향해 빼액 소리 지른다.
“제스, 넌 여기 삼남이잖아. 기사단장 따위한테 휘둘리는 거야? 얼른 치우라고!!”
“도련님, 전 정당한 대응을 할 뿐입니다.”
왜 내가 시달리는 거지?
“하아아.....”
난 한숨을 내쉬었다. 한나 누나가 날 해코지할 리는 없다. 내가 15살이던 때까지 그토록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다.
‘진짜 많이 놀았지. 지금보다는 살짝 순수했던 시절인데.....’
“으음.”
한나 누나를 믿었지만, 편을 들어주긴 애매했다. 무엇보다 앨리스는 원칙을 지키는 중이다.
‘씨발, 앨리스가 하는 말 중에 틀린 게 없잖아. 뭐 꼬투리를 잡을래도......’
불가능하다. 내가 머뭇거리자 두 여자의 시선이 점점 차가워졌다.
한나 누나는통짜 쇠로 이루어진 창을 흔들며 말했다.
“제스...... 나 10년 만에 널 생각해서 찾아온 거야. 아까 왜전쟁이 참여하냐고 물었지? 그거 홀란트 가문의 삼남이 끌려갈 예정이라길래 바로 온 거야. 순전히 널 호위해주려고!”
“지, 진짜?”
“출발이 내일이라길래 원래 맡았던 의뢰도 취소했어. 그거 위약금 물어주느라 돈도 다 날아갔고. 너 때문에 지금 개털이란 말이지.”
“으음.....”
이건 좀 감동이었다. 가문을 떠나 성공한 사람이 옛정을 생각해 다시 찾아오다니.
듣자 하니 손해를 감수하면서 왔다는 모양. 사실이라면 100% 내 편인 것이다.
한나 누나의 시원시원한 얼굴이 자꾸 눈에 걸린다. 아무래도 가족 편을 드는 게.......
그리 생각한 순간, 앨리스가 다가왔다.
“도련님, 어깨에 힘이 들어가셨군요.”
그리 말하며 갑자기 등과 어깨를 주무르는 앨리스. 평소라면 웬 떡이냐며 감촉을 즐겼을 텐데, 지금은 도리어 서늘했다.
“오크 제국과의 전선은멀다고 들었습니다. 가는 길에도 수련은 할 수 있겠지요.”
“그..... 수련 강도를 높인다는 거야?”
“어찌 도련님에게 그런 망발을 하겠습니까. 다만 A급 용병에게 기습당하지 않으려면 많이 강해야겠지요. 어쩌면 더 힘든 훈련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좆같네.”
“예?”
“아니, 아니야.”
한쪽은 추억을 들먹이며 날 압박하고, 다른 쪽은 수련을 언급하며 날 협박한다.
난 일단 앨리스부터떼어냈다.
“앨리스경? 지금 소름이 돋아서 추울 지경이거든? 일단 손 좀 치우지.”
“실례했습니다.”
난 어깨를 으쓱거리다 결정했다. 지금보다 빡세게 수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뭣보다 따먹을 수가 없는 핏줄이잖아.’
조금 떨어진 누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한나 누나.”
“역시 내 편.....”
“일단 신뢰를 쌓자.”
“뭐?”
매섭게 노려보는 누나. 난 겨우겨우 받아내며 설명했다.
“10년 만에 와준 건 진짜로 고마워. 하지만 10년을 떨어져 지낸 만큼, 누나가 뭘 했는지 모르잖아?”
“그건..... 밑바닥부터 용병 생활로!!”
“용병인 게 문제야. 일단 가문 차원에서 누나를 고용하라고 건의할게. 그리고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신뢰를 쌓는 거야.”
한나 누나는 조금 누그러든 얼굴이었다.
“또 쫓겨나는 줄 알았네.....”
“누난 앞날도 창창하니까, 다시 기사로 들어올 수도 있어.”
내 말에 한나 누나는 가볍게 웃었다.
“그건 내가 사양이야. 용병이 훨씬 편하다고. 특히 A급쯤 되면 돈도 벌고, 몸도 편해.”
“그런가..... 아무튼 내일 출발할 일행에는 넣을게. 그때 보자.”
한나 누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물러났다. 내일이 되고야 다시 얼굴을 볼 것이다.
A급 용병인 그녀가 꽤 떨어지고 나서야 앨리스는 긴장을 풀었다.
날 향해 조금 대견하다는 눈빛을 보내는 앨리스.
“도련님, 전 오랜만이라고 키스부터 하실 줄 알았습니다.”
“키스? 에이, 핏줄끼리 그건 못 하지.”
내 말에 앨리스의 표정이 기묘해진다. 옆에 있던 전속 하녀 에델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녀는 입을 열다가 말았다.
“그..... 아닙니다.”
“뭔데 그래?”
“크흠, 도련님. 오늘도 수련할 시간입니다.”
벌써 정오를 넘겼나? 창문 너머의 태양을 봐선 대강 그런 듯했다.
난 어떻게든 변명을 짜냈다.
“아..... 아니 추워서 못 하겠어.”
“예?”
“난 원래 추위를 잘 타잖아. 특히 앨리스경이 어깨를 주무를때 너무 서늘했다고.”
앨리스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바로 에델에게 부탁한다.
“옷걸이를 좀 불러주십시오. 도련님이 춥다고 하십니다.”
“예.”
“아니, 잠깐......!”
어떻게든 수련은 시킨다는 건가. 난 짜증 내려다가 참았다.
‘그래도 옷걸이는 나쁘지 않지. 특유의 맛이 있단 말이야.’
식사 보조나 받침대처럼, 옷걸이도 노예의 역할을 뜻하는 용어였다.
아주 큰 옷을 들고 다니며 따뜻하게 해주는 역할이다.
뿔뿔뿔-
마침 명령을 받은 옷걸이가 망토 같은 털옷을 들고 다가왔다. 마른 몸에 조금 밋밋한 체형이다.
하지만 확실히 성인이 연상되는 분위기였다.
“몸을 데워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럼그럼.”
“하겠습니다.”
옷걸이는 망토 같은 털옷을 내게 둘러줬다. 그러고는 옷 안으로 같이 들어온다.
털망토를 둘이서 같이 두른 형태.
옷걸이의 역할은 이제부터였다. 자그만 몸을 내게 찰싹 밀착시키며 자신의 체온을 전달해준다.
체구가 작아 망토 내부에서도 잘 움직였고, 선천적으로 열이 많아서 꽤 따뜻했다.
“등이 차갑습니다.”
그리 말하며 뒤에서 껴안는 옷걸이. 그녀의 체온이 옷 너머로 선명히 느껴졌다.
‘이래서 체형이 밋밋해야 해. 가슴이 너무 크면, 가슴 때문에 밀착을 못 하잖아.’
옷걸이는 내 몸 이곳저곳을 껴안았다. 등부터 시작해 팔, 가슴 등 앞뒤 양옆을 전부 따듯하게 해준다.
풍만한 맛은 없지만, 면적이 작아 전신을 느낄 수 있었다.
난 눈을 감고 따뜻한 살결의 감촉을 음미했다.
‘귀족 남자가 최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