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주인공이 지능은 숨김
"앨리스 경은 데려가도 되겠지?"
최후의 보루다. 솔직히 혼자서 총사령관이니 뭐니를 만나긴 싫단 말이다.
하지만 기사는 미묘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일단은 같이 오시지요. 너무 경계하지 마시길, 저희는 같은 제국민입니다."
"그래......."
"징집되어 오신 거니, 사령관님을 뵙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믿어주십시오."
"하아."
정말 믿음이 안 가는 말이다. 같은 제국민 상대로 마약을 푼 주제에.
나도 가면 뭔가 당하는 거 아닐까? 육체적으로 상해를 입히면 가문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정신 계열이지. 팬던트가 어디까지 막아주려나......'
생명줄인 것마냥 팬던트를 만지작거렸다. 정 안 되면 아버지의 양기를 마시는 방법도 있었다.
마법도 결국은 외부의 기운. 십존급 강자인 아버지의 양기엔 잡다한 기운을 몰아내는 효과가 있다.
난 품에 손을 넣은 채,조심스레 기사의 뒤를 따라갔다.
앨리스도 평소보다 경계를 높였다. 본래 잘 갈무리되었던 기운이 한올한올 풀려서 은근히 기사들을 압박한다.
무언의 경고.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의미다.
'고맙다, 앨리스. 난 널 따먹을 생각밖에 안 했는데.....'
조금 더 잘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오래 지나지 않아서 평범한 크기의 천막에 눈에 들어왔다. 겉으로는 병사 몇 명이 호위하고 있는 듯했는데, 앨리스가 돌연 검을 잡는다.
"왜, 왜 그래?"
"숨은 놈들이 많습니다."
눈에는 안 보여도 여기저기 실력자가 잠복한 건가?
우리 대화를 들은 기사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총사령관님의 호위입니다. 언제 암살당할지 몰라서 필요한 일입니다."
"흐음, 독대라며?"
"모든 호위는 천막 바깥에 있습니다. 앨리스 경도 여기까진 따라오시지 않았습니까?"
하기야 맞는 말이다. 아군을 더 의심할 수도 없어서 난 적당히 납득했다.
기사는 천막의 문을 가볍게 치우며 안내했다.
"들어가시지요. 총사령관님이 기다리십니다."
"으음."
내 방패파비스를 슬쩍 앞으로 맨다. 등 뒤에 두는 것보다는 마음이 안정되었다.
천막 안으로 들어가자 안에는 다시 자그만 천막이 있었다. 거기도 젖히자 사무실 같은 공간이 나타난다.
킁킁-. 냄새가 나길래 맡아봤는데 마약은 아니었다. 그냥 집중력이 좋아진다는 약초 종류.
고풍스러운 책상과 집기 너머로 아까 봤던 총사령관이 업무를 보는 중이다.
그는 펜을 멈추고 날 힐끗 확인했다.
"자리에 앉게나."
드륵-. 맞은편 의자에 앉는다. 그제야 총사령관은 펜을 놓았다.
"그간 연기하느라힘들었겠군."
"......?"
이건 뭔 개소리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는 피식 웃었다.
"아직도 연기 중인가? 뭐 나쁘지는 않네. 항상 철저하면 안전하니까 말이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소문은 믿을 게 못 된다더니, 홀란트 백작가의 삼남이 이런 사내였을 줄이야."
총사령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더니 서류를 하나 집어 든다.
제목만 확인했다.
<무역도시 올톰의 반역건>
올톰? 그 리리나가 있던 거기?
얼굴이 살짝 굳자 총사령관은 그제야 만족했다는 듯 끄덕였다.
"그래, 슬슬 날개를 펴려고 하는 겐가? 첫 데뷔로 반역도 소탕이면 확실히 괜찮지."
"그......."
그냥 소 뒷걸음질 치다가 잡아버린 건데요?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총사령관의 분위기가 너무 진지했기 때문이다.
"이번 전쟁으로 홀란트 가문에서 얻으려는 건 뭐지? 아니, 순전히 자네 혼자 짠 계획인가?"
"......"
총사령관은안경을 벗더니 마른세수를 했다.
"하아, 알려줄 리가 없지. 내가 신경 쓸 게 너무 많아서 그런 거니 이해하게나."
"확실히 그렇겠지요. 노예 관리하기도 힘들 거고."
"노예.....?"
총사령관의 미간이 꿈틀거린다. 손을 치운 그의 눈빛은 한층 깊어졌다.
"크큭, 대단하군."
씨발, 무슨 말을 못 하겠네.
도망치고 싶다. 자꾸 이 생각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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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군 총사령관, 넬독.
거창하게 총사령관이라는 직함을 달았지만, 진짜로 모든 제국군을 지휘하는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전선에서 싸우는 인원만을 관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귀족들을 징집한 건 그에게 있어 엄청난 이벤트였다.
비록 통일되지는 않아도, 실력 하나는 확실한 귀족의 사병들.
자신이 모든 지휘권을 가지고, 짧게라도 훈련시키면 승기를 잡을 수 있으리라.
그리 생각하고 귀족 자제를 구슬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거슬리는 놈이 나타났다.
'홀란트 백작가의 삼남이라고 했던가..... 어쩌다 이런 놈이 튀어나와서는.'
호랑이 밑에서 하룻강아지가 태어나진 않는다. 그 말을 믿었어야 했다.
그는 방금 무역도시 올톰에 대한 보고서를 읽었다.
얼마나 완벽한 유인이었던가. 자신이 만들어낸 이미지.
백작가의 꼴통이라는 그 이미지를 이용한 작전은 소름끼칠 정도였다.
올톰 시의 전력을 분산시켜서, 0군단이 활약하기 좋은 최적의 조건을 만들었다. 최대한 돋보이지 않는 일처리였지만, 넬독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계산하지 않은 행동이라면, 멍청이일 거다.
그리고 백작가의 삼남은 확실히 멍청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지. 여기서 노예를 언급한다고.....? 하.'
신경 쓸 게 많다고 불평했더니 바로 노예가 나왔다. 평범한 노예를 수급하는 게 어려울 리는 만무.
결국 넬독이 부리던 노예의 정체를 깨달았다는 쪽이 정확하리라.
'미혹의 신을 모시는 신도들..... 겉으로는 전혀 티가 나지 않을 텐데, 어떻게?'
혹시 우연일 수도 있다. 정말 말이 안 되지만, 이 녀석 머리에 섹스밖에 없어서 노예를 언급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 아닌가?
넬독은 아까보다 훨씬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회의장에서 노예에게 퇴짜를 놓았다고 들었네. 왜 그랬나?"
"그야 즐기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요. 딱 보면 알지."
"나중에 간 노예는 마음에 들었고?"
"남자를 잘 모르더라고요."
넬독은 벌떡 일어날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미혹의 신은 남자를 꼬시는 걸 행복으로 삼는다. 나중에 갔던 노예는 아직 신도가 되지 못 한 아이였고.
그 차이를 넌지시 언급하는 대답.
'이 자식, 어디까지 파악한 거냐.....!!'
저 순진무구한 얼굴. 대가리가 텅 비어있을 것만 같은 얼굴이 가증스럽다.
인생 자체를 연기하는 놈인가. 황제의 자식에게나 필요한 일일 텐데.....
간신히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 있는데, 이번엔 녀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참, 저는 안전한 게 좋아요."
"안전......?"
"그회의장의 멍청이들처럼 되기는 싫지만, 너무 위험한 자리도 싫다는 거죠."
넬독이 그 의미를 해석하고 있을 때, 녀석이 말을 덧붙였다.
"앨리스 경 알죠? 제국의 장미.... 아니 백합! 게다가 백합 기사단 절반을 끌고 왔으니까 어디 화살받이로 쓰이진 않았으면 하는데요."
"하하, 이번엔 꽤 직접적으로 말하는군."
휴우, 이제 이해가 되었다.
공적. 전쟁터에서 크나큰 공적을 세우길 원하는 거였나?
그게 아니라면 저토록 많은 기사를 데려온 게 이해되지 않았다.
'백합 기사단 절반과 그 단장이라...... 전쟁 영웅이라도 되고 싶은 거냐?'
데뷔전은 반역도 퇴치로, 제대로 된 공적은 전쟁터에서 세우겠다.
그림이 그려졌다.
특히 백작가의 핵심을 데려왔다는 점에서 더더욱.
넬독은 비뚜름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멜 홀란트의 지시인가? 어렸을 때부터 힘들었겠군."
"네? 아....... 맞기는 한데."
어리둥절하게 인정하는 대답. 이 정도는 밝혀져도 괜찮다는 건가?
넬독은 홀란트 가의 삼남이 끌고 온 병력에 대한 보고를 다시 훑어봤다. 기사와 사병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어디 배치할까 고민했는데, 다른 게 눈에 들어온다.
[한나 홀란트- A급 용병, 창술사(주의 요망)]
아래쪽에 적힌 건 기밀이었다. 어지간한 지휘관은 접근도 못 하는 정보. 넬독은 천천히 읽다가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쪽 세력까지 얽혀있단 말이지? 10년 전에 나간 가족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로 합류시키다니......'
확실하다. 삼남이라는 이 자식은몸을 한껏 웅크렸던 사자였다.
어디까지 성장할지 모르지만, 미래를 위해서라도 그에게 호의를 베푸는 게 좋으리라.
넬독은 백작가의 삼남을 향해 선언했다.
"시작은, 천인장부터 하게나."
"네에에?"
"너무 실망하지 말게. 그대의 공적에 따라 어쩌면..... 군단을 지휘할 수도 있으니까."
삼남은, 특유의 멍한 표정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