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삼남 상품화
미쳤다.
여기 총사령관이란 작자는 확실히 미쳤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한테 천인장이라는지위를 줄 리가 없다.
총사령관의 천막을 나오면서도 난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마침 앨리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온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너무 불안해......"
"예? 뭐가 문제입니까? 이 자식들을 당장!!"
와락-. 난 앨리스를 껴안았다. 완전 무장 상태는 아니라서 몸의 굴곡이 좀 느껴진다.
더불어 딱딱히 굳은 앨리스의 반응도.
'하아아, 마음이 편해진단 말이야.'
"도, 도련님......?"
"조금만 있자. 조금만."
내 말투가 너무 무거워서 그럴까. 앨리스는 차마 날 밀어내지 못했다. 그렇게 가슴과 가슴을 살짝씩 비비는 와중, 멀리서 한나 누나가 달려왔다.
"야아아아!! 뭐하냐아아!!"
"으음."
온기를 더 느끼고 싶은데.... 오늘은 이걸로 끝인 모양이다. 난 앨리스에게서 떨어진 후,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도련님, 수모라도 당하신 겁니까?"
"수모는 아니야. 그 반대라서 문제지."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는 앨리스. 난 허탈하게 웃으며 천막에서의 일을 설명했다.
마침 한나 누나도 근처에 도착해서 같이 들었다.
설명을 들은 둘의반응은 아주 똑같았다.
"뭐어? 무조건 거절했어야지!!"
"안 됩니다, 도련님......"
난 터덜터덜 걸어가며 인정했다.
"맞아, 거절했어야지. 실제로도 항의했어."
당시 뭐라고 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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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천인장을 맡다니, 말도 안 됩니다!! 저는 그런 자리를 원한 게......'
'그만!! 항의는 듣지 않겠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아니, 도와주고 자시고 제 그릇이......'
'자네의 그릇은 잘 알겠어. 그래서 더더욱 천인장으로 증명하라는 걸세.'
'끄아아아!! 지금 같은 언어로 말하는 것 맞습니까?'
'호오, 언어까지 능력자였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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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진행이었다.
그놈의 사령관은 무슨 말을 해도 들어 먹질 않았다. 진짜 말이 안 통하는 녀석이다.
항의했다는 이야기까지 듣자 둘은 미궁에 빠졌다. 한나 누나가 고심 끝에 답을 내놓는다.
"역시 총사령관이 미친 걸까?"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니면 사실 제스한테 엄청난 능력이 있었던 걸까?"
"아주 희박한 가능성이군요."
씨발, 둘이서 뭐 하는 거야. 난 무거운 발을 이끌다가 문득 생각했다.
'천인장이면 천 명을 이끄는 거네. 여자가 800명은 되겠지? 여자 팔백이라......'
팔백 명의 노예. 벌써 군침이 도는 단어다. 그에 비해 팔백 명의 병사는? 골이 아팠다.
노예를 대한다고 생각할까? 그걸로 군기가 잡히려나?
일단 앨리스한테 물어봐야 한다. 그런데 머리가 너무 복잡하다 보니 엉뚱한 문장이 완성되었다.
"앨리스 경, 여자 병사의 노예화는 어때?"
"......"
이번에 둘 모두 할말을 잃은 반응. 난 해명할 의지도 잃고 머리를 수그렸다.
제기랄, 이제부터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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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인장으로 임명된 이후, 우리는 다시금 천막을 옮겼다.
조금 외곽쯤에 위치한 곳이었는데, 내가 배정받은 부대라고 한다.
나는 안내를 담당한 기사에게 다시 확인했다.
"그러니까 귀족 사병들이 모인 부대를 내가 맡으란 거지?"
"맞습니다."
"천 명이잖아. 그러면 수십 개 귀족 가문에서 온 병력일 텐데?"
"전부 지휘권을 사령관님께 넘긴 부대입니다."
아, 지휘권을 넘겨준 머저리 귀족들. 그들이 끌고 온 사병으로 이루어진 부대인 모양이다.
일단 지휘권으로 아옹다옹할 필요는 없다는 게 다행이다.
하지만 조직력은 여전히 엉망이잖아?
"혹시 따로 훈련받은 부대야? 다들 절도있게 움직인다던가."
"각기 실력은 뛰어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진형은? 일사불란함은?"
"......"
기사는 내 눈을 피했다. 실력이 뛰어난 오합지졸이라는 소리다.
'제기랄, 뭐 이딴 부대를 넘겨줘? 지금 잘 훈련된 부대를 받아도 장악하지 못할 판에......'
기사는 마침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참, 필요한 게 있으면 제공해주신다고 합니다. 전방으로 가는 날짜는...... 두 달 뒤이니 잘 부탁드립니다."
"고작 두 달 만에 저 오합지졸을 부대로 만들라는....."
"그럼 이만."
"야!! 어디가!!"
기사는 거의 도망치듯 사라졌다. 버릇없는 새끼.
난 배정받은 부대를 살펴봤다. 천막의 크기도 가지가지, 각기 꽂은 깃발로 가지가지다.
제국의 깃발로 통일해도 모자랄 마당에 다들 가문의 깃발을 꽂고 있었다.
'잘하는 짓이다.'
"하아아."
한숨을 내쉬자 앨리스가 나를 격려해준다.
"걱정 마십시오, 도련님."
"응? 방법이 있는 거야?"
"아마 첫 전투가 끝나면 총사령관도 본인의 잘못을 깨달을 겁니다."
"그니까 첫 전투에서 지면 된다는 거지?"
"정확합니다."
"제길.... 그러면 여기 놈들이 다 죽을 거 아니야!!"
"......"
내가 암만 폐급이라도 사람 목숨을 쓰레기 취급하지는 않는다. 해봤자 여자 따먹기를 취미이자 주식으로 삼는 것뿐이다.
난 인상을 잔뜩 찌푸리다가 결정했다.
"노력은 해보자."
"도련님께 가능한 단어입니까?"
"날 위해서 노력한 적은 없지만, 남을 위해서 노력한 적은 있어."
"......!!"
앨리스의 의외라는 눈빛이 돌아온다. 물론 남을 위해서 노력한다는 건, 여자에게 쾌락을 선사했다는 의미였다.
'상대가 즐겼으니까 남을 위한 거 맞잖아?'
난 일단 천막에 꽂힌 깃발을 가리켰다.
"저게 무슨 가문인지 알아? 고만고만한 깃발이 50개도 넘네."
"으음,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가. 하기야 초반에 지휘권을 넘긴 놈들인데 뭐 대단한 가문이겠어."
보잘것없는 가문. 평소에 권력을 잘 누리지 못했을수록 유혹에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
내게 배정된 부대는 작은 가문의 집합체였던 것이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하는데..... 에델?"
마법사인 에델이라면 좀 박식하지 않을까. 뻔한고정관념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내 예상은 들어맞았다.
"예, 제스님. 깃발이 상징하는 가문을 말하면 됩니까?"
"오오!! 이왕이면 가문의 정보까지도."
"일단 가리키신 깃발은 미튼 남작가입니다. 제국의 변방이 위치한 곳으로 몬스터가 많이......"
에델의 설명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당연히 한 번에 기억할 수는 없었고, 중간에 까먹은 내용을 몇 번이고 다시 물으면서 메모했다.
정리한 내용을 가볍게 훑어본 결론은 이랬다.
"대부분 어디 변방 영지네? 노른자 땅은 아예 없고."
"예. 체계적인 훈련은 못 받았어도 몬스터와의 실전 경험은 많을 겁니다."
"실전 경험...... 아무튼 중요한건 통일되게 움직이는 건데 말이야."
한 가문씩 방문해보자. 그리 결정했다.
부하들도 별로 반대하지 않았고.
난 가장 가까운 미튼 남작가의 천막을 찾아갔다.
문을 열자, 경계심 가득한 음성이 들린다.
"누구십니까?"
천막 안에는 기사로 보이는 여자 한 명과 사병 스물 남짓이 있었다. 원래 이끌어야 하는 귀족 자제는 어디서 질펀하게 섹스하고 있을 거다.
"제스 홀란트라고 한다. 가문 이름은 들어봤겠지?"
"아..... 예. 그 유명하신 삼남...... 얼굴은 확실히....."
"그리고 이번에 너희들 지휘를 맡은 천인장이지."
남작가의 기사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째 항상 이런 반응이다.
'슬슬 그만해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밖으로 나오니까 내 소문을 실감하게 되네.'
조심스레 묻는 남작가의 기사.
"혹시 따로 책사를 두신 겁니까?"
"기사는 있어도 책사는 없는데."
"......"
황당하다는 눈빛.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나중에 참모 두셋은 붙여달라고 해야겠다.'
기본 전략은 짜야 할 것 아닌가. 난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묻고 싶은 게있는데 말이야. 혹시 다른 가문과 손발을 맞춰본 적이 있나?"
"딱히 없습니다."
"그럼 내가명령을 내리면 들을 생각은?"
"......듣기야 들어야지요."
듣기는 듣는다. 정말 어정쩡한 태도였다. 그냥 시늉만 하겠다는 뜻 아닐까.
"제식 훈련을 시작할 거다. 참여할 생각 있어?"
"으음."
뜸을 들이는 기사.
조졌다. 이 새끼들은 충성심이란 게 하나도 없었다. 훈련에 참여하라고 해도 망설이는 수준이라니.
난 몇 마디를 더 나눈 후, 천막 바깥으로 나왔다.
"제기랄. 다른 곳도 이런 태도는 아니겠지?"
"잘모르겠습니다. 애초에 징집되어 왔으니, 그리 적극적인 태도는 아닐 겁니다."
"미치겠네."
약간의 희망을 품고 50여 개의 천막을 전부 확인했다. 평균적으로 20명쯤 있었으며, 천막당 기사는 하나에서 둘뿐이었다.
사병들의 실력은 정규병보다는 나아 보였고.
이들과 짧게 5분씩 대화를 했는데 결과는 거의 비슷했다. 그러니까 대화 양상이라는 게.
"너희를 맡은 천인장, 제스 홀란트다."
"그렇습니까?"
"훈련을 할 거다."
"저희는 몸이 좀 안 좋습니다."
"그래서 안 하겠다고?"
"글쎄요."
이런 식이다.
"씨발, 적극성이라고는 하나도 없잖아!!"
전황이 조금만 불리해지면 뿔뿔이 흩어질 놈들. 그런 오합지졸이 내 부대였다.
아니, 그전에 단체전을 할 수나 있을지 궁금할 지경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 무언가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데......
"두 달 후에 투입된다고 그랬지?"
"예, 맞습니다."
그동안 귀족의 사병들을 장악할 방법. 대체 뭐가 있을까?
문득 총사령관이 스친다. 그 녀석이 어떻게 귀족 자제를 장악했더라?
"쾌락."
"예?"
답은 쾌락이다. 충성심까지는 잘 모르겠는데, 일단 훈련에 참여시킬 방법은 찾은 것 같았다.
난앨리스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앨리스 경, 내 얼굴을 봐봐, 잘생겼지?"
"그렇습니다!!"
자신 있게 대답하는 앨리스. 이건 거의 유일한 내 장점이었다.
"날 보면 어때? 막 끌리나?"
"예, 예?"
앨리스는 얼굴을 붉히다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보통 그렇습니다....."
"그치? 그러니까."
주먹을 불끈 쥐며 외친다.
"나를 상품으로 내거는 거야!!"
제스 홀란트, 백작가 삼남. 상품으로 내걸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