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천인장님 침은 성수
어, 어쩌지? 장난이었다고 할까?
침으로 성수를 만든다. 그냥 불가능한 일이었다.
누구라도 믿지 않을 거고, 그러니까 실바의 주장을 부대원이 신뢰하지 못한 거다.
'하지만 다들 기대하고 있잖아. 혹시나 하고 말이야.....'
이걸 성공한다면? 난 신격화될 수도 있었다. 침으로 사람을 치료하는 사람이라니, 어찌나 성스러운가.
마지막으로 마음에 걸리는 건 실바의 체면.
내가 장난이었다는 식으로 말해버리면, 실바는 장난을 진지하게 믿은 여자가 돼버렸다. 나중에 백인장이나 선봉대장을 맡길 생각인데, 멍청한 이미지가 박히면 곤란하다.
'가장 이상적인 건 내가 성공하는 거야. 성수.... 그때처럼 포션으로 속일 수 있을까?'
생각나는 방법이 그거뿐이었다. 침과 포션을 섞는 것.
품에는 당연히 포션이 있다. 나는 긴장을 최대한 숨기며 말했다.
"그...... 다친 사람이라도 있나?"
"여기 있습니다!! 제가 너무 의욕이 넘쳐서....."
실바가 한 병사를 번쩍 들고 다가왔다. 척 보니 큰 상처는 아니다. 살이 까져서 피가 좀 흐르는 수준. 미량의 포션으로도 가능할 텐데.....
문제는 천 명을 시선 속에서 어떻게 포션을 몰래 삼키냐는 것.
저벅-저벅-
실바는 당당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내가 침으로 병사를 치료해줄 것이라고 믿으며.
올곧은 눈빛과 망설임 없는 걸음. 저걸 저버린다는 건..... 거의 배신이었다.
'해야만 한다!! 하지만 어떻게....?'
초조하다. 방법을 생각해야만 했다. 그것도 30초도 안 되는 시간 안에 말이다.
간절함이 영혼에 닿았을까, 순간 머리가 번뜩였다.
'포션병을 통째로 꺼낼 필요는 없지!! 미량, 조금의 포션만 머금어도 되는 상처야!!'
특히 나한텐 최상급 포션까지 있다. 양은 적어도 괜찮았다.
난 연기를 시작했다.
"어우, 방패가 워낙 무거워서 그런지 어깨가 뻐근하네."
다행히 옆에 있던 한나 누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오늘 아침에 너 수련했더라. 너한테는 힘들었겠어."
"마, 맞아!! 수련도 해가지고 말이야."
몸이 뻐근하다. 그런 핑계를 대며, 파비스를 크게 돌려 앞에 내려놓았다. 마나메탈을 몇 번이고 압축하고, 내부는 합금으로 만들어진방패다.
무게는 무려 50kg. 일부러 힘차게 내려놓자, 묵직한 소리가 훈련장을 채웠다.
쿠우웅-
그걸 보고 눈을 빛내는 부대원들.
"오오, 천인장님이 들고 다니시던 방패.... 저렇게 무거운 거였어?"
"능력도 있으셔...."
"크으, 아까 휘두를 때 봤어?"
난 방패를 앞에 뒀다. 내 방패는 아주 큼직해서 몸을 가리기 충분했고.
즉, 품속에 손을 넣고 꼼지락거려도 안 보인다는 거다.
옷을 작게 찢었다. 그러고는 품에서 최상급 포션을 찾는다.
포션의 뚜껑을 열고 찢은 천 조각에 적신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찰나였다.
'내가 이렇게 집중할 수 있었단 말이지?'
나조차도 내 손놀림이 놀랍다. 이제 남은 건 최상급 포션을 머금은 천 조각을 입에 넣는 것.
난 반대 손에 천 조각을 숨겼다.
타이밍 맞춰 실바가 도착한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천인장님의 침 몇 방울이면 금방 나을 겁니다!!"
"그래그래.... 맞는 말이지."
정작 다친 병사는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정말 가능....합니까?"
"되고말고."
난 일부러 큰 동작으로 내 옷을 찢었다. 그러자 포션이 묻은 조각은 방금 찢은 천 속에 묻혀서 보이지도 않았다.
찌이익-
"처, 천인장님?"
깜짝 놀라는 실바. 아주 태연하게 대답했다.
"내가 핥아줄 수는 없잖나."
"아, 맞습니다!! 실례했습니다!!"
"대신 침을 여기 묻혀주지."
"감사합니다!!"
모두의 시선이 쏠린 가운데, 큼직한 천을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는다.
내가 신경 쓰는 건 단 한 가지였다.
'포션이 티나지 않게!! 최대한 골고루 퍼져라.'
옅어져서 효과가 좀 약해도 괜찮다. 어차피 상처는 작고, 포션은 최상급이니까.
대신 포션이라는 걸 들키면 대망신이었다.
정말 잘근잘근 씹어서, 천의 전체에 퍼졌을 무렵. 난 씹던 천을 뱉었다.
퉤-. 조금 지루한 표정을 짓던 병사들이 다시 눈을 반짝인다. 난 침이 잔뜩, 포션은 조금 묻은 천조각을 들고 엄숙하게 말했다.
"더럽게 생각하지 말거라. 내가 자네를 치료하는 거니까."
"아, 아닙니다. 오히려 영광입니다!!"
"훌륭한자세야."
그리 말하며 병사의 무릎을 천으로 닦는다. 일부러 천을 돌려가며 열심히 묻혔다.
병사는 싫은 건지, 즐기는 건지, 움찔거렸는데 굳이 표정을 확인하진 않았다.
나는 동시에 슬쩍 상처를 확인했다. 포션이 희석되긴 했어도 효과는 확실했다. 눈에 보일 정도의 속도로 상처가 회복되었던 것이다.
'됐어!! 이대로 조금만 더하면.....!!'
재차 손을 놀린다. 실바는 옆에서 갸우뚱거렸다.
"천인장님, 어제는 훨씬 빨랐던 것 같은데 오늘은 오래 걸리는 것 같습니다?"
눈치 없는 년, 애초에 니가 말만 안 꺼냈어도 이 지랄은 안 하는데.....
내가 이토록 똥빠지게 애쓰는 건 실바의 체면을 위하는 것도 있었다. 그런데 눈치 없이 방해하는 것이다.
난 이빨을 앙다물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어제는 침을 직접 묻혀준 거고, 지금은 천으로 간접적으로 주는 것 아니냐. 속도에 차이가 있는 건 어쩔 수 없다."
"아, 앗!! 생각이 짧았습니다!!"
재빨리 사과하는 실바. 덕분에 시간은 벌었다. 아까 확인한속도로 보아 슬슬 멀끔해졌을 시간.
나는 마지막으로 천을 꾸욱 누른 후, 상처 입은 병사에게 물었다.
"아직도 아픈가?"
"어......? 토, 통증은 없습니다."
"직접 확인해라."
그리 말하며 천조각을 뗀다. 그러자 아주 깔끔해진 무릎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무릎을 더듬거리는 병사. 그래 봐야 포션은 흡수되었고 미량의 침만 묻을 뿐이다.
"지, 진짜로..... 진짜 상처가 사라졌습니다!!"
이쯤 되자, 부대도 술렁였다. 다들 대열을 이탈해서 앞으로 나온다. 더 자세히 보려고 펄쩍펄쩍 뛰는 놈도 있었다.
"뭐야? 진짜로?"
"아니, 남자 침이 맛있다는 건 들어봤어도 성수였어?"
"귀족이라 그런 건가....."
"헛소리!! 귀족이 다 그랬으면 우리 도련님이 병신은 아니었겠지."
"꺄아앗!! 난 처음부터 천인장님을 믿었어!!"
가지각색의 반응. 그래도 공통된 감정은 놀라움이었다.
정말 깔끔하게 병사들을 속여 넘긴 셈이다. 나는 몇 발짝 물러나며 속으로 안도했다.
'휴우, 다행이야. 내가 먼저 선동한 게 아니라는 점도 컸어.'
만약에 나 스스로 내 침이 성수라고 했다면? 일단 의심의 눈초리로 봤을 거다. 그야 말이 안 되니까 당연하다.
하지만 방금은 실바가 먼저 겪고, 경험자가 주장하는 상황이었다. 다른 이들은 반신반의. 그 상태에서 깔끔하게 증명했으니, 신뢰의 크기가 달랐다.
그런데 엉뚱한 소리가 들린다.
"그럼 천인장님이랑 키스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축복..... 천인장님과의 키스는 축복이다!!"
"축복!! 축복!! 축복!!"
대체 무슨 흐름인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이놈들이 미친 것 같다는 점이다.
나는 멍하니 있다가 문득 생각했다.
'씨발, 이제 병사랑 키스할 때는 양기 듬뿍 넣어야겠네? 너무 평범하면 들킬 거 아니야?'
양기로 몸보신이라도 시켜줘야 돌아가서 성수라고 떠들 거다. 조금 정신이 아찔해졌다.
"키스!! 키스!!"
"축복!! 키스는 축복!!"
"우리는 입술을 원한다아아!!"
몇 분 전까지 느껴졌던 존경이 사라진 기분이다. 다시 성욕의 대상이던 시절로 돌아갔나?
그렇게 느낄 때였다. 병사 몇몇이 유려한 발놀림으로 내게 다가왔다. 습격으로 느껴질만큼 갑작스러운 움직임이다.
타다닥-
즉시 앞을 막아서는 앨리스와 한나 누나.
그들은 속도를 죽이며 손을 들었다. 멈춘 인원은 총 5명. 그러고는 내게 말을 건넨다.
"천인장님, 실바를 거두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랬지."
"저희도 천인장님을 모실 수 있겠습니까?"
"다섯 명 전부?"
"예!!"
난 고개를 기울였다. 아까의 움직임으로 보아 사병은 절대 아니었다. 기사에 턱걸이쯤은 할 법한 실력.
"기사처럼 보이는데, 서약의 대상이 없나?"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희는 자유기사입니다. 단기 계약을 맺고 호위로 따라 온 겁니다."
"오.... 그렇다면 후환도 없네."
자유기사. 돈 받고 일시적인 충성을 바치는 부류였다.
솔직히 용병이랑 다른 게 뭔지는 모르겠다. 따지자면 신뢰도가 아주 높고, 조금 배운 용병?
단기 계약이니 실바 때처럼 후환을 남길 염려도 없다.
'문제는 나랑도 단기 계약을 맺으면 의미가 없다는 거지. 아예 우리 가문에 정착시켜야 의미가 있는데.....'
내가 조금 고민하자. 녀석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희는 정착할 가문을 찾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용병 같은 생활은 질렸던 터라....."
"홀란트 가문에 투신하겠다?"
"정확히는 천인장님께 충성하고 싶습니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간신히 참았다. 내가 이런 대우를 받아본 게 얼마 만이던가?
'얼마만도 아니네..... 태어나서 처음이구나.'
난 혹시나 싶어서 확인했다.
"나는 가문에서 입지가 좁다. 나를 모시면 장원을 받는 게 아니라, 봉급만 받을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습니다!! 실바에게이야기를 전부 들었습니다."
"나에 대해?"
"예, 천인장님 같은 분을 모시고 싶습니다!!"
자유기사 다섯은 동시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렘으로 호령할, 제스 기사단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