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고급 회의장(2)
상식적으로 돈을 귀족이 관리하지, 그 밑에 사병이나 기사가 관리하지는 않는다.
급전이 필요하다는 건, 곧 자신이 지닌 돈을 전부 탕진했다는 뜻.
난 거의 확신을 담아서 말했다.
"꽤 잃은 모양이야?"
"어, 엇..... 어떻게 알았죠?"
"그거야 척하면 척이지."
나라고 도박을 안 해봤겠나. 다 겪은 과정이었다. 다행히 환생의 기억이 있어서 깊게 빠지지는 않았다.
'확률을 계산하니까 말도 안 되더라고.....'
아무튼 감이 없는 놈이라면 충분히 도박에 빠져들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누가 관리하는 도박이냐는 거다.
"흐음, 불법 도박장이라면 그냥 넘어가기는 곤란한데....."
"아, 아닙니다!!"
디펜 옥시는 화들짝 놀라며 변명했다.
"불법이 아니라, 총사령관이직접 관리하는 곳입니다. 스트립쇼가 지겹다고 했더니, 바로 도박판을 벌여 주셔서....."
"대단한 양반이군."
진심이다. 망나니 도련님들의 취향을 정확히 알지 않나. 섹스보다 큰 쾌락을 주는 게 도박이다.
게다가 수익 측면에서도 뛰어났다.
'크게 딴 사람은 팁을 많이 뿌리기 마련이지.'
이 녀석처럼 잃으면, 돈을 더 가져온다. 그런데 딴다고 저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펑펑 쓸 테니까 총사령관 입장에선 화수분이 따로 없는 셈이었다.
스트립 댄서, 봉사하는 노예 등 돈을 받을 사람은 많았다.
벌써 그림이 그려지는 것만 같다.
난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굳이 돈을 가져가서 다시 도박할 생각인가?"
"이, 이번엔 진짜로 이길 겁니다!! 저번에는 진짜 말도 안 되는 운 때문에....."
"뭐, 알겠다."
무슨 사정인지는 알겠다. 총사령관이 주최한 도박에 빠진 귀족이라는 거다.
딱 좋은 상대였다.
"어차피 부하를 찾아가도 돈은 별로 없을 거다. 그치?"
"뭐.... 맞는 말입니다."
"그럼 내가 돈을 주지."
".....?"
눈을 휘둥그레 뜨는 디펜 옥시. 물론 기부는 아니었다.
"대신에 당신이 데려온 기사의 서약을 파괴하는 건 어떤가?"
"그게 무슨 말도안 되는!!"
아, 이 정도로 나사 빠진 건 아닌가. 잠시 반성했다. 너무 인간 이하로 본 듯하다.
"천천히 생각하자고. 내 부대에 있는 기사 말이야. 엄청 강한가?"
"딱히 그렇지는......"
"그럼 가문에 기사가 한 명밖에 없어?"
"한 명은.... 아닙니다."
"됐네. 돈 좀 받고 서약 파기하면 되는 거지. 참!!"
녀석이 다시 발작하기 전에 난 '물건'을 꺼냈다. 일명 하멜의 양기. 리리나와 그 여기사를 함락시킬 때 유용하게 쓴 물건이다.
"이게 뭔지 느껴져?"
"뭐길래..... 양기 덩어리?"
"그것도 엄청난 농도지. 어딜 가도 구하기 힘들 거야."
꿀꺽-. 디펜 옥시는 동의한다는 듯 시선을 고정시켰다. 십존급 강자의 양기를 응축시킨 덩어리.
당연히 귀한 물건이다. 저런 남작 가문한테는 더더욱.
"그거를 주신다는 겁니까?"
"통째로 줄 수는 없지. 그거는 말도 안 되는 손해고."
"으음...... 그럼 절반?"
이 새끼가 자꾸 헛소리를..... 평소 같았으면 버럭 화냈겠는데, 지금은 구슬려야 하니까 참았다.
'후우, 난 성인군자다. 성인군자야.'
"병에 담긴 양의 5%를 줄게. 어때?"
"그건 안 됩니다. 암만 귀한 물건이라도 너무 적은....."
"잘 생각해봐. 넌 설마 이걸 여기사한테 영약으로 먹일 생각이었나?"
"응축된 양기니까 훌륭한 영약인데, 다른 방법이라면...... 설마?"
존경스럽다는 듯 쳐다보는 디펜 옥시. 난 무겁게 끄덕였다.
"맞아. 영약보다는 '함락'의 용도지. 다시 생각해봐. 함락으로 쓸 거면 5%로도 충분하지 않겠어?"
"그, 맞기는 맞는데....."
"상상해봐. 널 거들떠보지도 안 보던 여자를 이걸로 함락시키는 거야. 짜릿한 경험일걸?"
"허어....."
상당히 얼떨떨한 표정. 거의 다 넘어온 거같았다. 녀석은 정신의 끝자락을붙잡고 항변했다.
"함락도 좋지만 영약으로 쓸 양도....."
"좋아, 6%."
"한참 모자랍니다!!"
"7.5% 잘 생각해. 이런 농도의 양기면 함락과 영약, 전부 쓸모 있다고."
"으으음.... 이걸 가문의 실력 좋은 사병한테 주면....."
"어쩌면 수습 기사까지 갈 수도 있지. 너한테 완전히 함락된 채로."
"마지막으로 올려주면 안 됩니까?"
"8%.이 위로는 조금도 못 올려줘."
그러자 녀석도 거의 넘어온 얼굴이 되었다. 솔직히 이건 나라도 구할 수 없는 물건이다.
'어머니가 아끼고, 아끼다가 내가 전쟁터 갈 때나 준 영약이야. 몇 달이 아니라, 몇 년을 들여서착정한 것일 수도 있어.'
"대신이 돈은 두둑이 주지. 어차피 목적은 그거였잖아?"
"어, 얼마나 주실 겁니까?"
"직접 봐."
그리 말하며 돈주머니를 통째로 던졌다. 최소한 원한을 가지지는 않을 양이다.
돈까지 확인한 디펜 옥시는 끝내 결정했다.
"파기하겠습니다."
"잘 결정했어. 그깟 돈 잡아먹는 기사보다는, 당장 불릴 수 있는 종잣돈이 최고지."
"뭘 좀 아시는군요."
웃기는 놈이다. 녀석의 눈빛에는 여자에 대한 욕망과 도박의 갈망이 가득했다.
귀족 중의 최하위권. 가장 빨리 지휘권을 넘긴 부류다웠다. 나는 방울 단위로 세며 하멜의 양기를 넘겨줬다. 그러곤 작별 인사를 한다.
"잘 가라. 돈 필요한 놈 있으면 또 오라고 그래."
"알겠습니다."
희희낙락하며 떠나는 녀석. 과연몇 시간 만에 돈을 탕진할지 궁금했다.
'운이 좋으면 쓸어 담을 수도 있겠지. 저놈에게 행운이 온다면 말이야.....'
아무튼 꼴을 보아하니, 우리 부대의 기사를 장악하는 건 쉬울 듯했다.
귀족들이 도박까지 손을 댄 이상, 정상으로 돌아가기 힘든 것이다.
'가문에서 열심히 키운 기사. 나한테 값싸게 팔고 가라고.'
오랜만에 '희의장'으로 가볼까? 마약향이 풍기고, 스트립쇼가 벌어졌던 곳. 노예가 다섯씩 달라붙는 그곳은 전선치고는 훌륭한 장소였다.
"에델, 우리 회의장에 다시 가보자."
"그...... 좋지 않은 곳이라 들었습니다."
"내가 즐기려고 가는 게 아니야. 돈 빌려주려고 가는 거지."
도박장에서 대부업을 하는 법? 간단했다. 충분한 자본금만 있으면 되는 거였다.
난 천막에서 돈을 최대한으로 챙겨서 출발했다.회의장,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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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회의장에 금방 도착했다.
근처의 경비를 아무나 잡고 몇 가지를 물었다.
"아, 고급 회의장을 가야 한다고?"
"예. 이곳에서 제공되는 건, 아주 가벼운 도박입니다. 큰 판은 고급 회의장에서 열립니다."
분명 그런 게 있기는 했다. 지휘권을 넘긴 놈들이 가는 곳. 진짜 혜택이 있는 모양이다.
"안내해줄 수 있나?"
"원래는 안 되는데..... 제스 홀란트님의 부탁은 어지간하면 들어주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럼 되겠네!!"
경비는 선선히 승낙했다. 총사령관의 오지랖이 은근히 도움 된다.
고급 회의장은 전쟁과 완전히 동떨어진 곳. 즉, 도시였다.
반프레 시까지 들어가야 하는 셈이다.
나는 경비를 따라가며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진지랑 그럭저럭 가깝다고 쳐도 말이야. 전쟁에 참여한 놈들이 도시에서 놀고 있어도 되는 건가?"
"총사령관님 말씀으로는 진지에서 노는 거나, 도시에서 노는 거나 똑같다고 하셨습니다. 돈은 오히려 이쪽이 덜 듭니다."
유지비 문제인가. 아무튼 황당했다. 고급 회의장이라는 게 도시에있을 줄이야.
난 경비가 으슥한 뒷골목으로 안내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반대였다.
그녀는 아주 큼직한 여관 건물로 들어갔다. 따위가 붙은 건물이다.
"여관을 통째로 빌렸나?"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여기는 고급 회의장 2호점입니다."
2호점? 다른 것보다 무슨 가게를 설명할 때나 쓰는 그 단어가 웃기다.난 헛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몇 호점까지 있길래?"
"이곳으로 넘어오는 귀족 자제가 계속 많아지는 중입니다. 조금 있으면 5호점을 빌려야 할 듯합니다."
"돌았군. 세상이 돌았어."
나도 모르게 꼰대 같은 말이 튀어나온다. 사실 나 정도면 정상 아니었을까? 모르겠다.
"하아아."
2호점의 내부는 깔끔했다. 1층은 평소처럼 음식점, 도박장을 비롯해 섹스와 마약은 위층에서 즐기는 모양이다.
미미한 신음도 들렸고,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도 어렴풋이 감지되었다.
경비는 여기까지 왔으니 할 일 다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이곳 직원한테 부탁하면 될 겁니다. 가도 되겠습니까?"
"어, 고생했어."
내가 승낙하자, 경비는 재빨리 고급 회의장 2호점을 빠져나갔다. 별로 오래 있기는 싫은 모양이다.
에델과 함께 1층을 살피는데,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대체 어떤 녀석들이 고급 회의장을 쓰는 걸까 싶어서 주의를 기울였다.
"으흐으....."
가장 먼저 들리는 건 신음. 그리고 계단 삐걱이는 소리였다.
얼핏 여자와남자 다리가 겹쳐서 보인다. 난 고개를 갸웃거리며 관찰했는데, 녀석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빨리 가봐!"
"네, 네에.... 으흐읏...."
이놈들은 뒤치기를 한 채, 발맞춰 걷고 있었다. 삽입한 자세로 걸어 다닌다는 소리다.
"후우...."
역시, 세상엔 나보다 미친놈들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