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2화 〉드디어 한 걸음 (42/111)



〈 42화 〉드디어 한 걸음

우리는 고급 회의장 4호점을 나왔다.
에델은  의외라는 듯 내게 물었다.


"제스님, 위층은 구경하지 않으십니까? 제스님이 좋아하는 노예가 널렸을 텐데......"
"난 노예가 아니라 여자를 좋아한다고."


에델 정도면 꽤 좋아하는 여자고. 뒷말은 삼켰다.
그나저나, 고급 회의장의 위층을 구경하지 않은 이유라..... 뭐 특별한  아니었다.

"그냥, 뻔하잖아."
"뭐가 말입니까?"
"거기서 도박이나 하겠지. 실제로 슬쩍 엿봤을 때 도박장이 열리고, 노예들이 질펀하게 대주는  말고는 별거 없었고."
"그걸.... 좋아하지 않으십니까?"
"맞긴 해. 근데 이미 사정을 해버려서."


접수원을 따먹었다. 그것도 나름 스릴 있는 플레이로. 훨씬 괜찮은 쾌락이 있다면야 모르지만, 뻔하디뻔한 노예로 성욕을 또 풀 생각은 없었다.

'원래 여자는 꼬실 때가 가장 맛있어.'

접수원은 확실히 맛있었다. 그녀의 극적인 반응 때문인지, 아니면 경험이 있었음에도 전남친을 압도해서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걸음을 옮기는데, 에델이 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제스님, 그런데 여기서는 서약을 협박으로 파괴하지 않으셨습니까?"
"맞아."
"그럼  처음에 가주님의 양기를 8%나 넘긴 건 대체 왜 그런 겁니까? 거기서도 마찬가지로 협박을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

씨발, 똥멍청이 새끼!!
난 머리를 감싸고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협박. 천인장이라는 지위를 이용한 협박이 훨씬 값싸고 편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괜한 협상을 한답시고 소중한 양기를 넘겨주다니.....

퍽-퍽- 머리를 후려친다. 짜증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야야, 그만해. 안 그래도 나쁜 머리 아예 깡통 될라."
"이미 깡통 아닐까......?"
"맞기는 한데 희망을 품으라는 거지."


한나 누나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더니 두피를 문지르며 중얼거린다.

"제발 여기에 뇌를 만들어주세요. 뇌가 원래 있다면 비우고 새로운 뇌를 만들어주세요...... 동생 녀석이지만, 보고 있자면 속이 터집니다....."
"누나!!"
"응?"

뇌가 없다는 말에 벌컥 화내려 했는데, 막상 그러지 못했다.
내가 생각해도 이번 손해는 아쉬웠기 때문이다. 난 한숨을 뱉으며 행복회로를 돌렸다.

"괜찮아, 그래도 한 명만 협상해줬어..... 나머지는 협박했으니까 손해가 크지는 않아."
"그래애애? 뭐 좋은 대로 생각하는 거지."

난 툴툴거리며 도시를 걸었다. 손해를 만회하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방법이  보이질 않았다. 그러던 중, 길거리에서 팔씨름 간판을 내건 테이블이 보였다.


<네크의 팔씨름 대결장>
<팔씨름을 해서 이긴 사람에게는 상품 선택권을 드립니다. 참가비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다. 한나 누나와 나는 동시에 시선을 마주쳤다.


"동생아, 상품을 주겠다는데?"
"그러게. 뭐 상품이면......"


힘이 세봐야 얼마나 세겠나. 난 느긋하게 팔씨름 대결장으로 다가갔다.
테이블에 앉은 사람은 풍채 좋은 중년의 남자였다.


"안녕하쇼."
"오, 귀족이십니까?"
"그런데?"

중년 사내는  웃으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기사 나리나 일정 등급 이상의 용병은 안 받습니다. 수련 기간이 20개월 아래인 사람만 도전할 수 있어요."
"음...... 딱 난데?"


중년 사내는 살짝 당황했다.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사람 좋은 미소로 화답한다.


"귀족이신데, 수련 기간이 2년도 되지 않는 겁니까?"
"그래. 내 전속 하녀가  알지."


에델을 바라보자 그녀는 무표정하게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스님은 수련한 날짜를 전부 합해서 5개월도 되지 않을 겁니다."
"하.... 하하."


식은땀을 흘리는 중년 사내. 눈빛에는 '미친놈 하나 걸렸구나.'라고 쓰여 있었다.


"조건은 만족하는 거지? 설마 뭐 여자만 받는 것도 아닐 테고."
"당연히 아닙니다. 잠시 손을....."

난 별생각 없이 손을 내밀었다. 중년 사내는 손바닥을 살피더니 헛웃음을 흘렸다.

"진짜군요. 수련을 안 했다는 게..... 그럼 참가비만 내십시오."
"좋아."

에델이 알아서 돈을 지불했다. 자격은 완전히 갖춘 셈.
나는 넌지시 중년 사내에게 제안했다.


"근데 말이야. 상품 하나만 가지고 팔씨름하기는  아쉽지 않나?"
"뭘.... 원하십니까?"
"네 피."

피는 기본적으로 기운을 지녔다. 남자의 피면 당연히 양기가 있었고.
아마 헤르파한테 먹이면 싫어하진 않을 거다. 적어도 병사의 양기보다는 질이 좋을 듯하니.
중년 사내는 잠시 고민하더니 승낙했다.


"좋군요. 어차피 패배할 리는 없고. 대신에 참가비를 3배로 내야 합니다."
"그 정도야 뭐."

에델이 돈을 더 지불했다. 어차피 이걸 거니까 괜찮은 지출이다. 중년 사내와 내가 손을 맞잡는다.
두툼한 손이 만져졌다. 수련을 어마어마하게 하지는 않았어도 힘은 좋은 듯하다.


"시작은 누가?"
"아무나 해주십시오."
"에델."


에델은 테이블 근처에 서더니 작게 말했다.


"3, 2, 1..... 시작입니다."

맥없는 말과 함께 힘겨루기가 시작된다. 일단 느껴지는 묵직함에 살짝 놀랐다.

'오?  아저씨 보통은 아니네.'


신체 능력으로는 기사급이거나, 그 이상인 나다. 그런데도 중년 사내를 압도할 수는 없었다. 어느새 구경꾼이 붙어서 수군거린다.


"이야, 요즘에도 네크한테 도전하는 사람이 있구만?"
"쉿, 딱 보면 모르나? 귀하게 크신 도련님이야. 함부로 말하다가 경을 칠라."
"네크가 어떻게 먹고사는가 했더니, 다 방법이 있었군."


내 승리를 예측하는 사람은 단  명도 없었다. 다들 네크라는 중년 사내가 이길 거라 확신했다.
한나 누나만 실실대며 웃을 뿐.

"크큭, 동생아 장난치지 마라."
"으, 응......"


장난은 아니었다. 이미 힘을 꽤 써서 접절을 벌이는 중이다. 손은 테이블 중간에서 어느 쪽으로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씩 웃는 중년의 사내.


"이때까지 장난이었습니까?"
"뭐.... 그런 셈이지."

허장성세도 병법이다. 그런 생각에 허세를 부렸는데, 중년 사내의 표정이 갑자기 급변했다.


"그럼 저도 본실력을 드러내야겠군요!! 끄으읍!!"


갑자기 변한다. 중년 사내의 힘은 아까와 같았는데, 기술이 묘했다.
우선 손목부터 꺾어서 고점을 차지하더니, 어떻게든 자신의 몸과 팔을 붙인다.


이쯤 되자 내 팔이 점점 펴졌다.

"어....?"
"후훗, 숨겼던 힘을 보여주십시오!"


씨발, 그런  어디 있어. 힘을 숨기는 것도 수련한 놈들이나 하는 짓이다. 숨길 실력도 없었다.
단지 힘을 80%에서 100%로 끌어낼 뿐. 그러자 반쯤 펴진 상태에서 균형이 잡혔다.

"오옷, 대단하십니다. 여기서 버티다니!"
"버티는 게 아니라 이길 거다."

호기롭게 말했지만, 위태로웠다. 중년 사내가 지닌 기운, 마력은 고작 병사보다 나은 수준이었지만, 기술이 좋았다.
손목으로 휘감아 위쪽 포지션을 차지하다니.
이대로면 그냥 질 판이다.


"기합 세 번이면 넘어가겠군요. 끄아압!!"
"씨이발!"

팔이 조금씩 펴진다. 망신이다. 기세 좋게 나서서는 고작해야 평민 남자에게 패배할 판이라니.
질 수 없다. 절대로 질 수 없다.


"끄아압!!"


다시 터지는 중년 사내의 기합. 손등이 바닥에 닿기 직전이었다.
 머리는 바쁘게 굴러갔다.


'앨리스는 어떻게 하더라? 다른 기사들은? 기운으로 신체를 강화하는 방법이 대체......'

지금 나는 기운을 전신에 퍼트린 상태다. 만약에 한곳에 모을  있다면 팔씨름을 역전하리라.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평민한테 망신당하기는 싫어요..... 뭣보다 에델이랑 한나 누나도 보는데!!'


기운을 모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 평소보다 뛰어난 육체 강화가 이루어진다.
머리는 계속 굴러갔다. 기억을 떠올린다. 내가 기운을 모았던 기억.


'씨발, 여자를 꼬실 때만 썼지. 양기 응축해서 쾌락을 선사하지.'

그것과는 달랐다. 지금 필요한 건 신체 강화. 그냥 피부 위에 양기를 응축시키는 것과는 다르다. 신체 안에 양기가 모이는 거라면.....
순간 머리가 번뜩인다.

"정액!!"
"가, 갑자기?"

당황한 중년 사내. 덕분에 몇 초라도 시간을 벌었다.


'정액은 양기의 집합체. 정액을 떠올리면서 육체 내부에 기운을 집중시키면......!!'

평생  하던 노력을 해서 그런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몸속의 기운들이 조금씩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 하체에 있던 기운이 상체로 몰려오며 근육을 강화시켰다.
결과적으로 느닷없이 힘이 세진 셈.

마침 중년 사내의 마지막 기합이 들렸다.

"이걸로 끝입니다. 끄아압!!"


꿈쩍도 하지 않는다. 중년 사내는 살짝 당황했다.


"어....?  버티시는...... 어? 아, 안 돼!!"


녀석의 비명이 말해준다. 내 팔은 서서히 올라오는 중이었다. 기운의 컨트롤이 완벽하지 않다.
그래도 아까와 확연히 다른 힘으로 착실하게 승리에 다가갔다.

"이, 이거는..... 내가 수련도  한 도련님한테!!"
"크큭, 이미 끝났다."

툭-. 중년 사내의 손등이 테이블에 닿는다. 의심의 여지 없는 승리. 기술의 차이를 순전히 힘으로 극복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기운을 컨트롤하기도 했고.
구경꾼들은 경악했다.


"저 도련님이..... 능력이 있었나?"
"대단하신 분인가 봐...."

뿌듯하다. 혼자 실실거리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물컹한 게 느껴졌다. 냄새로 보아 한나 누나다.


"동새애앵!! 잘했어. 진짜진짜진짜......."
"응?"
"드디어 첫걸음을 뗐구나. 잘했다."

한나 누나는 내 볼을 붙잡으며 물었다. 아주 천진난만한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포상이라도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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