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모의전(3)
아까도 그랬듯, 나는 가장 앞장서서 달렸다.
창칼이 난무하는 곳에 제일 먼저 다가간다. 기분이 묘했다.
가슴은 빨리 뛰는데, 마냥 무섭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믿을 구석은 많다. 내 등을 지켜줄 실바부터 광란의 밤을 함께한 기사들까지.
내 방패도 뚫릴 거 같진 않았다.
두두두-
우리가 반쯤 거리를 좁혔을 때, 히폴리타 측도 돌격을 눈치챘다.
"대비, 대비하라!! 상대의 핵심 전력이다! 저것만 막으면 모의전은완전히 이긴 거야."
"예!!"
이때까지도 남은 방패병이 있었나보다. 그들은 번쩍이는 방패를 자랑하며 단단하게 앞열을 틀어막았다.
방패 사이로는 길쭉한 창이 나온다. 검병도 그 사이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저기에 뛰어들었다가는 곧바로 꿰뚫릴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도망칠 수는 없지. 그냥 믿는 거야. 다들 내가 믿는만큼은 해줄 테니까!!'
점점 거리가 줄어든다. 20m, 15m, 10m.....
한 자릿수가 되었을 때, 난 무릎을 크게 구부렸다. 그러다가 로켓처럼 발사. 난 50kg짜리 방패를 앞세운 육탄 돌격이다.
콰직- 까아앙-!
"어헉!"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 그리고 금속끼리 충동하는 소리. 마지막으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차례대로 장창이 부서졌고, 방패끼리 충돌했으며, 상대측 방패병이 신음을 뱉었다.
가장 앞열을 맡았던 방패병은 뒤로 나동그라졌다. 잘 짜인 대열을무너트린 것이다.
'역시 힘이 최고야!'
이어서 방패를 들고 주변에 휘두른다. 50kg짜리 방패가 휙휙 날아다니자 균열은 더욱 커졌다.
카앙- 깡!
"제기랄, 맞서지 마라!! 물러섰다가 틈을 노려!!"
"예!!"
나를 중심으로 상대의 대열이 움푹 들어간다. 15명의 기사가 침투하기에 아주 좋은 틈이었다. 실바는 곧바로 뒤따라 들어오며 내 옆을 지켰다.
"잘하셨습니다. 소문보다 훨씬 용맹하시군요."
"뭘 또."
방패로 방어하는 건 멈추지 않았다. 나는 다치지 않고, 기사들은 미칠 듯이 날뛴다.
우리는 그저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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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히폴리타는 감탄을 흘리는 중이었다.
"호오오, 실전을 못 겪은 게 맞나요? 그런 것 치고는 너무 망설임이 없네요."
분명 처음 대처는 완벽했다. 상대의 수를 읽고, 시간을낭비시켜 나머지를 갉아먹은 것이다.
그런데 제스 홀란트는 아주 우직하게 대응했다.
"기사 스물을 모아서 하나씩 격파한다. 이런 전투에서는 아주 효율적이네요. 상황 판단이나, 용맹이나, 믿음이나..... 천인장을 왜 맡았는지 알겠어요."
"공녀님이 인정하실 정도입니까?"
"네!"
히폴리타는 싱긋 웃으며 끄덕였다. 확실히 괜찮았다. 귀족이 아니라 군인이었어도 꽤 성공하지 않았을까.
동시에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제 위에 있지는 않네요. 저게 끝이라면 그냥.... 졌지만 잘 싸운 장수가 되겠어요."
상대가 얻는 건 눈물겨운 분투라는 결과. 자신은 승리를 얻을 생각이었다.
히폴리타는 가볍게 지시했다.
"궁병 딱 하나만 남기고 근접전에 투입해요."
"알겠습니다."
특별히 실력이 괜찮은 병사로 뽑은 궁병이다. 무장이 좀 부실해도 근접전에서 1인분은 할 터였다.
히폴리타의 지시에 따라 돌격하는 궁병들이 보였다. 향하는 곳은 제스 홀란트가 없는 부대.
질이 낮은 저쪽을 확실히 처단하는 게 좋으리라. 궁병까지 가세하자 상대측 본대는 확실히 무너졌다.
제각기 비명이 들린다.
"끄으으, 천인장님은 언제 오시는 겁니까아!!"
"여기서 이겨야 포상을......"
"제기랄!"
히폴리타의 예상대로 제스 측 본대는 확실히 무너졌다.
남은 건 제스 측 기사 열다섯. 히폴리타의 부대는 절반가량인 칠십여 명이 보존된 상황.
제스 홀란트를 위시한 정예들이 날뛰고 있지만, 다섯 배의 숫자 차이는 어쩔 수 없을 거다.
"게다가, 함정은 또 있으니까요."
히폴리타는 저 멀리에서 합류하지 않고 장궁을 겨누는 궁병 하나를 바라봤다.
궁병이 합류했고, 화살도 더 이상 쏟아지지않는다. 이제 화살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빠지는 순간......
가장 강력한 한 방이 날아갈 것이다.
히폴리타는,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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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다. 진다. 진다. 진다!!
"씨발!!"
"정신 차리십시오!"
실바의 호통에 간신히 평정을 되찾았다. 가까스로 검격을 튕기고 방패를 휘두른다.
휘청이는 상대편 병사. 하지만 유리한 게 아니었다. 그사이에 다른 공격이두 개나 덮쳤기 때문이다.
까아앙-
방패를 겨우겨우 끌어당겨서 다시금 막았다.
숨 돌릴 틈도 없다. 조금 전에 기사 하나가 퇴장했다. 이제 열네 명이서 몇 배나 되는 적을......
"끄흐윽!! 천인장님한테는 못 보낸......"
털썩-
누군가 주저앉는 소리. 보지 않아도 아군이었다.
열셋. 아군은 착실히 줄고 있었다. 당연히 상대도 꾸준히 퇴장당했으나,교환비가 적절한지는 의문이다.
방패로 검 두 개를 튕겨내고, 한 발짝이라도 전진하려고 애썼다. 동시에 안타까움이 들었다.
'내가 수련했더라면!! 25년 동안 펑펑 놀지 말고 노력했더라면!!'
그랬다면 상위권 기사 수준은 분명히 됐을 거다. 핏줄도 좋고, 지원도 빵빵하다. 앨리스급까지 오를지는 모르지만, 평범한 기사는 확실히 뛰어넘었으리라.
카아앙-
할버드가 방패를 때린다. 가문에서 준비해준 방패는 여전히 멀쩡했다. 5번이나 압축한 마나 메탈. 나에겐 과분한 무기다.
그 증거는 손에서 나타났다.
뚝뚝. 방패 손잡이를 잡은 손가락에 피가 맺힌다. 쓰라리다.
방패가 너무 좋은 탓에 무구보다 내 몸이 먼저 닳았다. 실은 마음이 더 쓰라렸다.
"천인장님, 왼쪽!! 긴장하십시오!!"
"긴장.....?"
왼쪽을 보자 번쩍거리는 반사광이 눈을 덮쳤다. 갑옷을 입은 기사.
맞서면 이길 수 없다. 다급히 방패를 내밀었다. 눈은 쇄도하는 검을 따라간다.
"하아앗!!"
묵직한 목소리. 사선으로 내리찍는 검격. 방패의 곡면을 떠올리며 각도를 조절했다.
하지만 내 기술은 역부족. 기사의 세심한 컨트롤 때문에 흘려내지 못했다. 난폭한 힘이 방패를 타고 전달된다.
찌르르. 팔 전체가 떨렸다.
"크흐으....."
후회는 끝나지 않았다. 노력했더라면..... 조건을 탓할 수도 없는데......
뒤쪽에서 여자의 비명이 또 들렸다. 한 명 퇴장.
남은 기사는 열둘.
그런데 내 특유의 쓰레기같은 성품이 발동된 걸까. 느닷없이 화가 났다.
"씨바아아알!! 재능이 넘치면 되잖아!! 노력 따위 하나도 하지 않아도 강해지는 재능이 있었으면 되는데, 왜 나는 어정쩡해서어어어!!"
울컥했다. 노력도 재능이다.
하루가 24시간이라도, 그걸 알차게 쓸 수 있는 놈이 있고, 하루가 12시간인 것처럼 쓰는 놈도 있다.
성격 차이, 성실함의 차이. 선천적인 요소였으며 재능이었다.
"노력하는 재능을 안 줬으면 다른 거라도 달라고오오오!!"
가슴에서 뜨거운 감정이 샘솟았다.
후회보다는 억울함. 왜 충분한 재능이 없어서 노력이 필요한 건가. 노력이 필요하다면 노력할 수 있는 성격은 왜 주지 않은 건가.
이 모든 게 억울했다.
"끄아아아!!! 세상을 날로 먹고 싶다고!!"
"처, 천인장님?"
"억울해애애애!!"
답답하면속에 불이 난다고들 한다. 불이란? 일종의 양기다.
한창 싸우는 와중, 내 속은 양기로 들끓고 있었다. 그 양이 평소 다루던 것과는 달랐다.
심하게 넘쳐난다. 양기폭주현상 이후로 기운이 늘어났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토가 왈칵 올라오듯이, 몸 깊숙한 곳에서 양기가 왈칵 치솟았다.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양. 이놈들은 알아서 경맥을 찾아 움직였다.
"끄으으....."
내 양기가 경맥을 타고 흐르는 데도 고통이 느껴질 지경이다. 대신에.
'힘이 넘쳐나!! 진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본래도 기사급의 신체 능력을 지녔다. 그런데 여기서 더 상승하면? 50kg짜리 방패가 장난감처럼 느껴진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적군이 무섭지 않았다. 칼? 할버드? 장창? 전부 느려터지고 가벼운 공격일 뿐이다.
나는, 방패를 크게 휘둘렀다.
와르르르- 쿠당탕! 얻어맞고 사정없이 나가떨어지는 병사들. 그런데도 힘을 쓴 것 같지가 않다.
내친김에 기사한테도 돌격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방패를 앞세우고 무식하게 들이박았다. 당황하는 기사.
"어? 어.....? 끄아악!!""
꽝. 교통사고 소리가 나며 녀석이 날아간다. 삽시간에 내 주변의 적군이 정리된 상황.
난 멍하니 내 몸을 보며 중얼거렸다.
"진짜 재능을 줬네.....?"
제스 홀란트.
인간의 도리를 벗어난 몰염치로 재능을 개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