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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화 〉보물 (52/111)



〈 52화 〉보물

어렴풋이 눈을 떴다. 사방이 어두웠다.
바닥을 보였던 양기는 살짝 차오른 상태.  잔 건 아닌 모양이다.

"으으음."

습관적으로 눈을 비비려고하는데, 손에 뭔가 걸렸다. 사람의 감촉. 나는 어두운 공간을 더듬었다.

"누구......?"

말랑말랑한 살결이 만져진다. 단련한 기사나 병사는 아니다. 그런 사람은 거의 없는데......

"당신 참모죠, 누구겠어요."
"히폴리타?"

의외다. 내가 잠들자마자 나갈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니까 잠들 때 히폴리타가 손을 놓지 않았던  떠올랐다.
난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한테 푹 빠진 모양이야?"
"글쎄요. 그 정도 매력은 없던걸요."

다시 신경을 긁는 건가? 시비 걸기 위해서 굳이 한밤중까지 기다렸나? 조금 짜증 나려는 순간이었다.
히폴리타는 훨씬 작은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손은 나쁘지 않았어요."
"흥, 당연하지. 여자한테는 무조건 통한다고."
"에휴......"

한숨을 내쉬는 히폴리타.그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달빛에 분홍 머리가 반짝인다. 모범생 같은 눈매엔 피로가 쌓여 있었다.

"성감대 개발. 저한테도 하고 싶은 건 알겠어요. 그런데 통하겠냐구요."
"응......?"
"돈이 많은 사람은 어떤 짓이든 할 수 있어요. 체링겐 가문은 그쪽보다도 돈이 많구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히폴리타는 설명을 덧붙였다.

"이를테면, 가문의 창창한 인재를 위해 엘릭서 조금쯤  쓸까요?  신체를 개조하기도 어렵겠지만, 일부를 개조한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잘라내고 엘릭서로 재생시키면 되니까."
"......!!"

생각도  했다. 엘릭서를 고작 그런 용도로 사용하다니......

'우리 가문에서는 목숨이 위험할 때나 쓸  같은데. 공작 가문은  다르구나.'

히폴리타는 자신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입에 미미한 웃음이 걸린다.

"훗, 이런 시도는 좋았어요. 당신의 자존심이 느껴진달까? 제가 먼저 매달리게 하려는 거였죠?"
"그렇지. 결과적으로...... 실패한 것 같지만."

아쉬웠다. 전략을 조금만 더 잘 짰다면, 아니면 힘을 다루는  익숙했다면 성공했을 텐데.

'방비책은 거의 뚫린 거였어. 가문으로 가서 성감대를 잘라낸다고 해도, 당장은 굴복시킬 수 있었는데.'

당장 따먹으면 나중에 성감대가 사라지든 말든 알게 뭔가. 내가 안타까움을 삼키는 사이, 히폴리타는 훅 다가왔다.
그녀의 뽀얀 피부가 어두운 천막을 밝힌다.

"솔직히 말이죠. 졌을 때는 분했어요."

서로의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 묘한 긴장감 속에서 대답했다.

"왜? 정당한 승부였어."
"정당했죠. 하지만 같은 지략으로 진 게 아니라, 순전히 무력으로 졌잖아요. 원하는 패배는 아니었어요."
"원하는 패배...... 고상하기도 하군."
"천성이 그런 걸 어떡해요."

히폴리타는 싱긋 웃었다. 호선을 그리는 입술이 서로 맞닿을  가깝다.
한밤중이라 그런지, 유독 히폴리타의 얼굴만 눈에 들어왔다. 흰 피부에 대조되는 입술......
들이박을까? 망설이는 사이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당신이 마음에 들어요."
"분하다며?"
"처음에나 그랬죠. 지금은 아니에요. 노력..... 당신의 노력으로 점철된삶이 엿보였거든요."
"......?"

이 새끼 대체 무슨 오해를 하는 거지?
경악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이건 내가 재능충이다, 능력자다, 같은 식으로 오해하는 것보다 훨씬 심했다.

'내 인생이 노력으로 점철됐다고? 아버지가 그 말을 들으면 피가 거꾸로 솟아서 얼굴이 터져버릴 텐데......'

히폴리타는 뜻 모를 말을 계속했다.

"당신은 내 몸을 독점할 수 있어요. 나를 개조시키진 못해도, 최소한 가지고 놀 수는 있었죠."
"어......"

솔직히 이번 작전이 실패하면 그냥 따먹을 생각이었다. 공녀를 무너뜨리는 게 어렵다는 걸 깨달았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노력했어요. 자신이 굽히지 않기 위해서. 매달리는 모습이 싫어서."
"......"
"부대를 장악한 것도 똑같죠. '고급 회의장'의 일은 다 들었어요. 다른귀족을 말 몇 마디로 쥐고 흔드는 태도. 그러고도 부대원에게 끝없는 신뢰를 얻는 용병술."

히폴리타는 잠시 입맛을 다셨다. 아주 맛있는 음식을 본다는 듯, 입술을 할짝댄다.

"이 모든 건 재능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 사람에 대한 끝없는 관찰, 후천적인 노력으로 가능한 일이지. 당신......"

히폴리타는 내 뒷목을 잡았다. 그러고는 날숨을 뱉으며 속삭인다.

"부족한 재능을 위해 무던히 노력했죠? 그 삶이 눈부셔서...... 처음으로 남자가 먹고 싶어졌어요."
"응?"

입술이 닿는다. 히폴리타의 뜨거운 숨결이 나와 섞였다.
스륵. 부드러운 혀가 들어온다. 조금 어색하지만, 탐욕이 담긴움직임이었다. 나를 샅샅이 알고 싶다는 듯, 입의 구석구석을 훑는다.
나는 히폴리타의 혀를 받아들이며, 서로의 미뢰를 마찰시켰다. 민감한 점막끼리의 접촉. 자연스러운 쾌감이 뒤따른다.

따뜻한 살덩이를 서로 비비다가, 히폴리타의 혀가 내 볼 안쪽을 핥았다. 볼부터 시작해서 잇몸까지 깔끔히 맛본 그녀가 살짝 멀어진다.
뽀얀 피부는 발그레 달아올라 있었다.

"맛있네요."

방긋 웃는 히폴리타. 두근. 갑자기 심장이 뛰었다. 가슴이 뒤흔들리며, 호흡이 가빠지는 느낌,
여자를 조교할 때나 정복할 때도 그저 욕망에 따라 행동했는데, 지금은  마음이 흔들렸다.

'정신 차리자. 보통 여자가 아니야.'

경험도 없는 처녀 주제에. 일부러 입술을 깨물어서 들뜬 기분을 가라앉혔다.

"너도, 꽤나 맛있었다."
"후훗, 당연하죠. 체링겐 가문의 공녀인걸요."

히폴리타는 그리 말하며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가벼운 접촉이 아니라, 끈적한 손길이다. 내가 개조한 손이었다.
조금 몽롱한 눈빛을 하는 히폴리타.

"당신과 손을 잡을 때 좋았어요."
"양기 때문에?"
"노력했으니까. 끝까지 노력하다가 실력의 한계에 부딪혔으니까. 의지가 손으로 전해졌으니까."

히폴리타는 내가 개발해준 손으로 자꾸 만졌다. 목부터 시작해서 어깨를 쓰다듬고,  팔을 주무른다.
놓기 싫은 보물을 대하는 태도다. 가까이 붙어 있어서, 그녀의 숨결은 자꾸만 코끝을 스쳤다.

"하아아, 좋아요. 한계를 탈피하려고 애쓰는 당신이 좋고, 노력의 결과인 내 손이 좋아요."
"그럼 마음껏 만져라. 나를 더 갈구해."

여타 여자와 다를 거 없다. 너도 결국 나를 탐하게 될 거다.
그런 오만한 눈빛을 보내자, 히폴리타는 히죽 웃었다.

"그래도 당신에게 당하기는 내가 너무 영리한걸요? 어쩔 수 없이 무릎 꿇을 수는 있어도, 자격 없는 사람에게 굴복할 수는 없죠."
"아까는 내가 좋다며?"
"좋으니까 가지고 싶다는 뜻."

히폴리타는 나를 확 껴안았다. 그녀의 도담한 가슴이 느껴진다. 난 잠시 손을 방황시키다가 히폴리타의 허리를 안았다.
 밀착한 상황. 그녀는 내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은내 몸을 독점할 수 있어요. 왜 지금은 안 쓰죠?"

자존심 문제였다.  능력으로 굴복시키지 못하고, 그저 내기의 제약만으로 몸을 취하기 싫으니까.
잠시 대답을 머뭇거리자, 히폴리타는 나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천인장님, 우리사랑스러운 천인장님."
"왜?"
"당신이 좋다고말했잖아요? 재능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게 너무 좋다고.결과물까지 얻었으니 더할 나위 없다고."
"그런데."

히폴리타가 내게 기댄다. 무게를 실어서 미는데, 굳이저항하기도 애매해서 그대로 쓰러졌다.
털썩. 내 위에 올라탄 히폴리타. 그녀는 목덜미를 살금살금 핥았다.

"그래서 당신을 올려보려구요."
"응?"
"체링겐 가문의 신동,그리고 홀란트 가문의 사자가 조합했어요. 어디까지 갈지 궁금하지 않아요?"
"그......"

앞쪽은 동의하는데, 뒤는 영 아니었다. 홀란트 가문의 썩어빠진 망나니 정도가 맞지 않을까.
히폴리타의 손이 내 상의 속으로 들어오다. 그녀는  배와 가슴을 타고 놀았다. 간질이는 감각이 나쁘지 않다.

"남자들은 다 이렇게 단단해요?"
"음...... 보통은."

힘을 쌓기 워낙 좋은 환경이라 비만은 별로 없었다. 있다면 어지간히 게으른 놈일 거다.
히폴리타는 한참을 놀다가 내 가슴에 귀를 가져다 댔다.

콩닥콩닥콩닥-. 꽤 빠르게 뛴다. 그녀는 한동안 심장 소리를 듣다가 입을 열었다.

"긴장했네요?"
"......조금."
"내가 달라붙어서? 아니면 당신을 도와준다고 해서?"

둘 다일 거다. 나는 히폴리타를 끌어내렸다. 올라탔던 그녀가 미끄러져 내리며, 내 옆으로 온다.
그녀를 내 가슴에 안았다. 나름대로 넓은 덕에 쏙 들어온다.

그렇게 가만히 안은 채로, 작게 속삭였다.

"언젠가 네 손으로 옷을 벗게  거다."
"제발, 그 정도로 빠졌으면 좋겠네요."

히폴리타 체링겐의 심정에 무슨 변화가 생겼는지, 그녀의 복잡한 머릿속에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히폴리타는 유능하다는 것. 그리고 날 좋아한다는 사실만 기억했다.

보물을 하나 얻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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