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4화 〉앨리스의 충성 (54/111)



〈 54화 〉앨리스의 충성

앨리스의 오똑한 콧날이 돋보였다. 아니, 사실은 그냥 정신이 멍했다.

"나를...... 싫어한 적이 없다고?"
"예."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
뒤통수가 얼얼하다. 배신감 때문이 아니라 너무 좋아서. 들이마시는 숨이 달콤했다.
사실 나는  속에 살고 있는 거 아닐까. 이럴 때는 쓸데없이 목소리가 떨린다. 조금 더 멋지게 말하면 좋으련만.

"나는...... 능력이 없잖아. 네 이상형은 존경할  있는 남자고."
"이상형'만'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앨리스는 뚜벅뚜벅 걸어왔다.  옷매무새를 정리해주면서 말한다.

"도련님은 사랑스럽습니다."
"대체 어떤 점이......?"
"보호해주고 싶습니다."
"풋."

농담인 줄 알고 웃었는데, 앨리스는웃지 않았다. 그저 진지하게 옷을 매만질 뿐이다.
내 차림이 나름 멀끔해졌을 때, 앨리스는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침대에 앉은 나보다도 눈높이가 조금 낮아진다.
투구 너머로 앨리스의 맑은 눈빛이보였다.

"도련님, 저는 홀란트 가문에 충성합니다."
"알고 있어."
"그리고 제가 충성할 사람은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뭐......?"

기사는 가문에 충성할 수 있다. 동시에 충성하는 가문 안에서도 충성할 대상을 고를 수 있었다.
물론 대다수는 가주에게 충성하기 마련이지만.

'앨리스도 당연히 아버지에게 충성하는  알았는데...... 아직 정하지않았다고? 이때까지도?'

앨리스가 어디 흔해빠진 기사던가.
정예 기사단인 백합 기사단에서도 단장을 맡았다. 이런 전쟁터에 와서도 그녀의 이름이 통용될 정도다. 아마 오크 제국과 싸우기 시작하면, 적들의 악몽으로 기억될 거다.

간단히 말해, 십존급 바로 아래.
십존급 강자가 아니면 그녀를 이길 수 없었다.
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왜, 왜 아직도 정하지 않았어? 아빠한테 충성했으면 봉급이나 장원이 훨씬......"
"가주님께는 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빠가 강해서? 아니야.아무리 강해도 앨리스경 같은 실력자는 항상 환영......"
"홀란트 가문에는 제가 필요합니다. 또한 충성합니다. 하지만 가주님이 저를 필요로 하지는 않습니다."

앨리스는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양기에 취해, 쾌락에 취해, 성욕에 지배되어 나를 갈구하던 여자들과 다르다. 그녀는 순수하게 나를 응시했다.
투명한 눈빛에 마음까지 꿰뚫리는  같다.

두근두근. 자꾸 심박이 빨라지는 가운데, 그녀는  손끝을 잡았다.

"도련님께는 제가 필요합니다. 제가 없으면...... 금방 부서지는 보석입니다."
"내 형들도 있잖아. 첫째 형이나 둘째 형이나 다들 출중한 인간인데?"

앨리스는 미미하게 웃었다. 내가 칭찬할 때만 보여주던 미소다.
그녀는 웃으면 얼음장 같은 분위기도 녹일 수 있었다.

"그 두 분께는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잖아!! 똑같......"
"똑같지 않습니다. 두 분은 성공하기 위해 저를 필요로 합니다."
"나는?"
"제스 도련님은 그냥 제가 필요합니다. 생존하기 위해서든, 천진난만한 성품을 지키기 위해서든."
"......"

천진난만이라...... 앨리스는 성악설을 믿는 모양이다. 잠시 할 말을 잊은 순간, 그녀는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쪽- 그녀의 입술이 손등을 스쳤다.
이때까지 앨리스와 신체 접촉을   것도 아니다. 밑가슴을 느낀 적도 있었고, 바싹 붙어서 감촉을 즐긴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앨리스의 손등 키스에 가슴이 미친 듯이 떨렸다.

"아...... 추, 충성이야?"
"맹세하겠습니다."

스르릉ㅡ 앨리스가 검을 뽑는다. 명검이라 불릴 법한 예기. 그녀는 날을 잡고 손잡이를 내게 건넸다.

"부디 받아주시길."
"그, 그래......"

얼떨결에 그녀의 검을 받아들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경건하게 말하는 앨리스.

"신명을 바쳐 그대를 섬기겠나이다. 이 몸과 육신이 살아있는 한, 누구도 그대를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오......"

이렇게까지 고전적인 충성 맹세라니. 난 헛웃음을 흘렸다.
물론 기분은 좋았다. 앨리스의 칼로 가볍게 어깨를 치며 답한다.

"맹세를 받겠어. 나도 주군으로서의역할을 다하지."
"감사합니다."

다시 검을 건네자, 앨리스는 소리 없이 납검했다. 부드럽게 일어나는 그녀.
기세가  다시 나갈 듯한 기세다.

"가.... 가려고?"
"예. 훈련장에서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니까 충성 맹세만 하고 간다고?"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앨리스의 천진한 물음. 차마 거기에 대고 '고백했으면 한바탕 떡을 쳐야지!'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나를 지키고 싶은 거잖아."
"예."
"그러면 가장 옆에서 지키는 건 어때?"
"무슨......"
"내 아내가 되는 거야. 그러면 누구보다 가까이서 날 지킬 수 있어."

아내는 한 명. 첩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잘나가는 귀족 가문이면 당연히 첩도 아주 많았고.
그런데 나는 첩이 아닌 아내를 제안했다.앨리스도 그걸 눈치챘는지 작게 중얼거렸다.

"아내......"
"딱 한 자리야. 항상 네가  자리를 차지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또 상상했고."

아내가 되면 잠자리를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물론 그것만 고려한  아니다. 무엇보다도 앨리스가 끌렸으니까 이러는 거다.
앨리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왜?  지키고 싶은 남자고, 결혼하고 싶은 남자는 따로 있어? 그런 거야?"
"아닙니다. 제가 모자랄 뿐입니다."
"뭐......?"

십존급이 와야 이길 수 있는 앨리스다. 그런데 부족하다니. 그녀가 생각하는 '아내의 자격'은 대체 뭘까.

"제 알량한 실력과 명성을 가지고, 제스 도련님의 아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십존의 경지에라도 오르겠다고?"
"예, 그때가 되면 다시 제안해주십시오.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미친..."

앨리스는 깊게 숙여 인사하고는 나갔다. 철컥철컥-. 갑옷 부딪히는 소리가 유독 차갑다.
허탈해서 침대에 주저앉았다.

"그럴듯한 여자와 떡치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한 녀석은 자신을 굴복시키라고 하고,  녀석은 본인의 자격이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문득 내 병사들이 그리워졌다.

"그 녀석들은 나와 손이라도 잡으려고 안달이 났는데...... 에휴."

천막 바깥에서 대기하던 노예를 불렀다.

"들어와!!"
"예."

식사 보조가 가슴을 출렁이며 들어온다. 난 그녀의 가슴을 주무르며 허전함을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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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모의전 이후로 히폴리타와  친해졌는데, 아쉽게도 그녀를 먹진 못했다.
항상 밥을 같이 먹고, 키스를 나눌 뿐이다. 요즘은 히폴리타를 노리기 위해 양기를 축적하는 중이었다.

'며칠만 더 모으면, 히폴리타의 방비책을 뚫을 수도 있을 거야.'

물론 며칠이 평화롭게 흘러가야 가능하다. 저번처럼 16 대 1로 탈탈 털리기라도 하면, 양기를 모은 게 허사로 돌아가는 셈이다.

한 달 동안 상품 부대를 적절히 운용했다. 적당히 생기고, 잘 꾸민 녀석들은 여자 병사에게 충분한 동기 부여가 되었다.
나도 가끔씩 포상을 주긴 했다.

'슬슬 진짜 포상을 줄 시간이네. 실력 상위권 10명, 발전 속도 상위권 10명. 총 20명한테 포상을 주면......'

양기가 분명 거덜  거다. 20명과의 파티가 기대되는 동시에 조금 무섭기도 했다. 즐겁기를 바랄 뿐이다.

보름 동안 섹스만 한 건 아니었다. 나도 방패술을 제대로 수련한 것이다.

'게릴라 작전에 투입된다는데, 부하들만 믿고 있을 수는 없지.'

한 달이나 매달리자, 슬슬 방패를 다루는데 감이 왔다. 오늘도 방패를 들고 열심히 수련하는데, 한나 누나가 다가왔다.

"동생!! 요즘은 좀 애쓰네?"
"그런 편이지. 요 보름 동안 1년 치 수련분을 했다고."
"크크큭, 원래는 1년 동안 그것밖에 수련을 안 했어?"

재밌다는 듯 웃는한나 누나.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

"아무튼 무슨 일이야?"
"그냥, 조금 심심해서 말이야."
"시간 많으면 병사들 연습 상대나......"

한나 누나가 갑자기 창을 휘두른다. 나는 반사적으로 방패를 들어 흐려냈다.
끼기긱ㅡ
곡면을 타고 흐르는 창날. 한나 누나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푸하하, 기술 봐라? 한 달짜리 치고는 괜찮은데?"
"그런 소리 많이 들었어. 그보다 방해할 거면......"

한나 누나는 손을 휘저으며 말을 막았다. 그러고는 평소처럼 호탕하게 말한다.

"동생이아니라 천인장한테 제안할 게 있는데 말이야."
"뭔데?"
"너 사비로 용병  고용하는 거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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