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4화 〉아버지 (84/111)



〈 84화 〉아버지

"허허, 막말이라면 내가 아니라 자네 아버지께 하는 건 어떤가?"
"아버지요?"

갑자기 아버지가  나온다는 말인가. 사납게 노려보자, 넬독은 느긋하게 종이를 날렸다.
나름 고절한 기술을 담은 투척. 일정한 속도로 다가오는 걸 거칠게 낚아챘다.

"이게 뭐길...... 음?"

나는 눈을 부릅뜨고 읽었다. 아버지, 하멜 드 홀란트의 이름이 적힌 문서였는데 내용이 가관이다.


이런 씨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아버지가 나를 최전방으로 보낸다고?

이럴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철저히 능력주의인 아버지다. 나를 믿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라도 중요한 역할을 맡길  없는 것이다.
황망하게 문서를 읽는데 이상한 문구가 보였다.


"보고서? 대체 누가 올렸길래?"

아버지가 읽었다는 건, 부대에서 올린 보고서가 아니라 가문 내부 보고서라는 뜻이다.
그런데 내가 끌고   기사와 사병들뿐. 보고서를 작성할만한 족속들이 아니다. 그나마 어울리는 건 마법사인......

"에델? 여기 보고서라는 거 설마 네가 썼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진짜 혹시나해서 묻는데, 나에 대해 좋은 말로만 점철된 아니지?"
"......"

대답 없는 에델. 드물게도 그녀의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나도 말문이 막혔다.

'어이가 없네. 에델이 좋은 마음으로 쓴 보고서가 이따위로 돌아오다니...'

역시 세상일은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내가 대강 상황을 이해한 듯하자, 넬독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알겠나? 내가 비난받을 사안은 아니네. 난 그저 자네의 아버지가 한 부탁을 들어줄 따름이야."
"그거 청탁 아닙니까?"
"하하, 최전방으로 보내라는 청탁이면 항상 환영이지."

제기랄. 듣고 보니 그랬다. 어디 후방으로 빼달라는 것도 아니고, 활약한 지휘관을 더 앞으로 보내 달라는 거니까 말이다.

다른 지휘관들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휘유, 우리 연대에서도 제스 홀란트의 이름은 지겹게 나오더라고. 제스 홀란트가 수인종 연합을 못 막으면, 대체 누가 막겠어?"
"저희 대대 분위기도 비슷합니다. 선발되지 못했다고 눈물을 쥐어짜는 녀석도 있습니다."
"맞아맞아, 게다가 이번에 정원도 초과했잖아?  활약하기 위해서 그랬던 거 아니겠어?"

썩을 놈들. 얄밉기는 진짜 존나게 얄미웠다.
이새끼들 얼굴을 다 기억하려다가 포기했다.

'거의 모든 지휘관이 동조하는데, 얘네 얼굴을 싹 기억해서 어디다 쓰냐..... 반란을 일으킬 것도 아니고.'

다른녀석에게 떠넘기기는 극히 어렵다. 만장일치로 내가 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적이 어떤지는 알아야 한다.

"수인종 연합이라고 했습니까?"
"그래. 오크 제국이랑 시끌시끌하니까, 주제도 모르고 발호한 놈들이지."

수인종 연합은 오크 제국과 인접해 있었다.
그러니까 거대한 우리 제국이 있고,  위쪽에 절반 크기쯤 되는 오크 제국이 있다.
수인종 연합은 오크 제국의 오른편에 위치하는 동시에, 우리 제국과도 맞닿았다.

다만, 국경을 마주했음에도 대체적으로 잠잠했던 건......

"산맥이 있지 않습니까? 그걸 넘어오는 겁니까?"
"그렇네. 정확히는 묘호 산맥을 정찰하던 레인저가 진군을 발견한 거지."
"급한 거 같은데..... 언제 발견된 겁니까?"
"보고는 어제 저녁, 레인저의 발견은 이틀 전이네."

제기랄, 응급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묘호 산맥의 산세가 꽤 험준해서 시간은 더 걸리겠다만, 우리 쪽은 아예 준비도  했다.

나는 짜증을 담아 물었다.

"암만 전쟁 중이라고 해도, 진군을 시작한 다음에나 발견하는  너무 느립니다. 방심한 겁니까?"
"흠...... 그 이야기는 따로 하지."

넬독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진다. 지휘관들의 표정을 살피니, 녀석들도 잘 모르는 이야기인 모양이다.

'사정이 있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규모는 어떻게 됩니까. 천인대로 막으라는 거 보니까 뭐......"
"하하, 국력이 제국의 십 분의 일도  되는 놈들이네. 별거 있겠나?"

역시..... 살짝 안심했다. 어쩌면 오크 제국의 전쟁에 한 손만 거드는 수준일 수도 있겠다.

"레인저의 말로는 최소 3천에서 최대 8천으로 잡고 있다더군. 조만간 좀 더 정확한 정보가  걸세."
"......?"
"왜 그러나?"
"혹시 제 천인대 인원이 몇 명인지 아십니까?"

넬독은 아주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천인대니까 천  내외겠지. 누구나 알고 있는상식......"
"그건 아는데, 왜 제가 최대 8천이나되는 군대를 상대해야 된다는 겁니까!!"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 질렀다. 그야 진짜 말이 안 되잖나. 어디 성에 틀어박히는 것도 아니고, 적병을 요격하는데 3배에서 8배의 인원을 상대로 싸우라니.....

"숫자에서도  배나 차이 나고, 거기에 수인종은 대체로 평균치가 높지 않습니까!"
"큰 차이는  나네."
"그래도!!"

평균적으로 인간보다  더 강한 수인종이었다. 그런데 숫자까지 많으면? 나한테 그냥 뒤지라는 거다.

'혹시 시간 끌기용으로 갖다 버리는 병력 아니야?'

이상한 의심까지 스멀스멀 올라온다. 한창 인기를 끄는 '제스 홀란트'를 버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너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넬독은 여전히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갸웃거렸다.

"어...... 설마 모르지는 않겠지만 말이네. 묘호 산맥 근처는 황야라고 생각하나?"
"황야는 아니죠."
"그럼 영지가 있지. 거기 귀족은  놓고 놀고 있겠나?"
"아......"

머리를 탁치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그러니까 내 천인대는 일종의 지원 병력이다.
해당 지역 귀족의 힘만으로는 방어가 힘들 테니까, 가서 도우라는 거다.

'묘호 산맥 근처에 변경백이 있던가? 아니지. 변경백은 오크 제국과 맞닿은 국경에 많아.'

오크 제국과 닿은 국경은 아주 길었다. 실제로 쳐들어오는 지역은 비교적 적었지만,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쳐들어올  있을 터.
변경백은 자신의 영지를 지키며 오크 제국의 기습을 방비했다.

"으음, 묘호 산맥 근처에는 누가 있습니까? 언뜻 생각나는 가문이 없는데......"
"가장  가문은 더피 백작가일세. 그 외에도 몇몇 가문이 있네만...... 큰 도움은 안 될 걸세."

더피 백작가? 존나 금시초문이었다.
에델을 바라보자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한다.

"음...... 제국의 50대 가문을 뽑을 얼핏 봤던 것 같기도 합니다."
"같기도?"
"없을 때도 있던 것 같습니다."

좆밥이잖아? 50대 가문에 턱걸이하거나,좀 처지는 세력.
암만 제국이 위대하다고 해도, 50등까지 위대하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수인종 연합과 대치하기엔 부족해. 턱없이 부족하고말고.'

나는 입술을조금 깨물었다.

"제스 천인대가 간다는 거에 반대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토착 세력까지 고려해도 부족할 듯싶은데요?"
"뭘 원하나?"

연대를 건드릴 수는 없다.  3000명으로 편제된 제국의 연대를 달라는 건 어불성설이다.

'애초에 내가 계급에서 밀리잖아?'

대신에 전투 당시 나를 구하러 왔던 독립대대를 떠올렸다. 독립대대 둘이면 괜찮을 거다.

"독립대대 둘을 주십시오."
"절대 안 되지. 단합력은 좀 떨어져도 우리의 최정예일세. 하나도 내주기 힘들어."
"썩을, 진짜 장난합니까? 달랑 하나만 보내는 건 죽으라는......"

넬독은 회의장의 끄트머리를 가리켰다.

"중대 하나는 어떤가? 150명쯤은 되는데 말이야."
"그것도 적은데......"

고작 그걸로 감지덕지해야 하나? 내가 투덜거릴 때였다.
넬독의 시선을 따라간 곳에서 의외의 사람을 발견했다.

"제이카...... 첫째 누나?"

그리폰 용병단의 간부였던 첫째 누나가 자리했던 것이다. 여긴 분명 제국군 회의실일 텐데?
내 의문을 넬독이 풀어줬다.

"참고로 용병 중대일세. 전원 그리폰 용병단이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