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더피 백작(2)
우리는 아주 태연하게 여관에 들어갔다.
1층은 식당을 겹업하는지, 테이블이 많이 보인다. 우리를 위해 비워놓은 듯, 텅 빈 테이블들.
경비대장은 그대로 올라가려고 했다.
"가장 꼭대기에 방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말하는 건 어때?"
"예?"
"솔직히 까라고."
"무, 무슨 말씀이신지......"
어버버대는 경비대장. 그 모습이 마치 진짜 모르는 사람 같았다.
'연기력이 일품인가? 아니면 경비대장은 진짜로 안내하는 역할만 맡았을 수도 있겠어.'
애매한 말단에게 정보를 많이 줘서 좋을 건 없다. 단지 시키는 일만 하는 역할인 것이다.
나는 혀를 쯧 차며 크게 외쳤다.
"대가리가 얼른 나오라고!! 그래야 이야기가 빨라지잖아!!"
"......"
잠시간 정적이 흐른다. 이내 천장이 열리며 인영이 툭툭 떨어졌다. 그 외에도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복면인, 바닥을 열고 올라오는 놈들도 보였다.
죄다 까만 옷을 두르고 얼굴을 가린 모습. 그들은 문답무용으로 칼을 빼 들고 덤볐다.
"일단 죽여어!!"
"셋밖에 없다. 최대한 빨리 처리해!"
두두두ㅡ
기세 좋게 달려온다. 물론 내가 질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미리 준비하던 에델이 가볍게 마법을 펼친다.
"멀티플 윈드 그립."
복면인 다수가 손아귀에 붙잡힌 듯 다리를 버둥거린다. 칼을 빼 들고 허둥대는 꼴이 꽤 우스웠다.
"뭐, 뭐야!"
"마법이다. 기운을 실어서 베어버려!"
나름 실력이 괜찮은 놈들일까. 저마다 대응을 시작한다. 문제는 내 호위가 에델 하나는 아니었다는 거다.
"이 건방진 것들이 내 동생을 건드려!!"
항상 그랬듯 분노하며 철창을 휘두르는 한나 누나. 본래 실력에서도 밀릴 텐데, 6위계 마법사의 견제까지 있으니 식은 죽 먹기였다.
"죽이진 마! 기절만!"
"쳇, 알았어."
퍼억-퍼억-! 한나 누나가 뒤통수를 칠 때마다 하나씩 허물어진다. 황급히 탈출한 놈들도 에델이 다시 견제하자 큰 저항을못하고 허물어졌다.
결국 복면인이 절반도 남지 않았을 때, 항복 선언이 들렸다.
"그마안!! 내가, 내가 설명하겠다."
"네가?"
남은 복면인 중에서 유독 기세가 강한 놈이었다. 다만 믿음이 가지는 않는다.
"내게 말하면 된다. 내가 이곳의 대표자......"
"어디서 거짓말을!!"
방패를 앞세워서 일단 전진! 앞으로 나섰던 복면인은 기겁하며 옆으로 뒹굴었다.
쿠당탕탕ㅡ!
벌떡 일어나서 항변하는 녀석.
"무, 무슨 짓이냐!! 진짜로 내가 대표자다!"
그리 말하며 복면을 벗어 던지는 녀석. 검붉은 머리칼이 눈에 들어온다. 더피 백작의 인상착의는 대강 들었다.
강인한 입매에 검붉은 머리칼. 딱 들어맞는 얼굴이었다.
습격자의 정체는 더피 백작이었던 것이다.
"진짜였어.....?"
아닐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속이 시커먼 놈들은 몇 번이나 겁을 줘야 제대로 된 녀석이 나오지 않나.
나는 그 상식에 입각해서 다짜고짜 공격한 거였다.
'뭐 어때, 가짜 대표자였으면 밝혀서 다행이고. 지금은 얼굴을 봐서 확인했으니까 이득이지.'
아주 태연한 태도로 방패를 등에 걸쳤다.
"크흐음, 복면을 쓴 그대 잘못이오. 어떤 귀족도 얼굴을 가린 자를 믿지는 못할 테니."
"하아.... 알겠다."
더피 백작은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 어찌할지 모르는 모습. 그야 본인의 계획이 실패했으니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나는 차분하게 테이블을 가리켰다.
"일단 앉을까?"
"그래."
검은 옷으로 둘러싼 더피 백작과 내가 테이블을 두고 앉는다. 내 옆에는 오직 한나 누나와 에델뿐이었다.
복면인은 절반 이상 쓰러진 상태. 여전히 숫자는 상대 쪽이 훨씬 많았지만, 기세는 온전히 내게 넘어왔다.
나는 사납게 노려보는 더피 백작에게 말했다.
"일단 제국군 지휘관을 협박한 이유부터 듣고 싶소만."
"하, 고작 천인대 하나 있다고 거들먹거리는 거야? 그따위 병력으로 내 영지를 지키러 온 거냐고!!"
저 소리인가. 화내는 것 자체는 이해할 수 있었다.
나야 병사를 잃어도 도망칠 수 있지만, 더피백작은 영지를 잃으면 어디로 가겠는가.
그냥 패가망신이었다.
"그래서 날 죽이려 한 이유는?"
"......"
"내 하녀와 우리 누나의 실력이 뛰어나서 다행이었지, 방금 복면인들의 습격이었으면 어지간한 귀족은 다 죽었을 거요. 날 죽이려 한 이유는?"
더피 백작은 입을 우물거렸다. 그꼴이 너무 답답해서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뻔하잖소!! 나를 죽이면 새로운 지휘관이 파견될 거고, 그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병력이 늘어나지 않을까 생각했겠지!"
"......마, 맞다."
뻔뻔하긴! 나는 씹어뱉듯 말했다.
"내가 죽은 건 수인종 연합의 탓으로 돌리려 했겠지! 생각보다 준비가 거세니 뭐니 하면서 어떻게든 병력 조금이라도 얻으려고!"
"......"
더피 백작은 할 말을 잃었다. 너무 빤히 보이는 수작을 부리면 이렇게 되는 법이다.
혀를 쯧쯧차며 생각했다.
'안전에 그렇게 신경 쓰는 사람이 지휘관과 병사를 분리시키려고 해? 그냥 대접만 하면 말도 안 해. 최대한 먼 여관으로 안내하는 꼴이란.....'
마을의 공터와 떨어져도 너무 떨어졌던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의심이 가는데, 여관 주위에 인적이 하나도 없었다.
여관 내부야 그렇다고 쳐도, 주위 건물까지 없다는 건 이상하다. 마지막으로 여관의 구조.
'겉으로는 1층이 굉장히 높아 보였는데, 실제 천장은 그보다 꽤 낮았어. 숨을 공간이 있다는 거지.'
홀란트 가문에서는 이런 교육을 받았다. 건물 구조를 통해 습격 가능성을 점치고, 다양한 공간에서 싸우는 법 말이다.
정말 실전적이고 나한테는 쓸데없는 교육이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쓰니까 신기했다.
"흥, 그대와 힘을 합쳐서 방어해야 할 터인데, 초장부터 이러니 제대로 싸울 수 있을지나 모르겠군."
나는 더피 백작을 살벌하게 노려봤다.
"당장 보고를 올리고, 더피 백작령은 포기하는 게 낫겠다고 주장해야겠어. 전선을 더 물리면 방어가 쉽지 않겠소?"
"아, 안 된다!!"
발적적으로 일어나는 더피 백작. 한나 누나가 창을 들어 바로 제지했다.
"야, 뒤로 빠져. 허약한 동생한테 접근하지 말고."
"내가 허약하지는 않은데....."
더피 백작은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다가다시 앉았다. 그녀의 얼굴에 수심이 드리운다.
"내가 미안하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평소처럼 그냥 싸워주지 않겠나?"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소. 죽이려고 한 인물에게 등을 맡길 수는 없잖소?"
"이, 인질을 줄게!"
"인질?"
더피 백작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갯짓 하나에도 절박함이 묻어난다.
"맞아! 그.... 내 딸을 맡길게. 혹시라도 내 움직임이 수상하면 바로 딸을 죽여!"
"하아, 이건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나뿐만 아니라, 앨리스와 한나 누나도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당황해서 우리를 훑던 더피 백작이 아차하는 표정을 짓는다.
"아....."
"딸이라고? 딸이 무슨 의미가 있소? 어차피 성인되면 다 내쫓을 자식을 가지고......"
"하, 하지만 아직 아들이 없는데......"
"그야 당연하잖소! 본인이 직접 임신해야 하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겠소!"
여자가 가문을 승계할 경우엔 이게 문제였다.일반적으로 아들의 무력이 훨씬 뛰어난데, 아들을 낳을 확률이 20분의 1 수준이다.
남자라면 씨를 잔뜩 뿌려서 해결하지만,여가주는? 임신을 20번은 해야 아들을 하나 낳았다.
'결국 다음 세대에는 방계가 가문을 잇거나, 드물게 다시 뛰어난 딸이 태어나길 빌어야지.'
여가주라면 본인의 능력이야 좋겠다만, 대를 이으려면 확률에 기대야 안다. 참 불공평한 세상이었다.
나는 더피 백작을 보며 생각했다.
'결국 이놈과 협력해야 하는 건 맞아. 어차피 근처에 더 세력이 큰 귀족도 없고.'
에델과 한나 누나라는 사기적인 무력이 있어서 제압했다만, 복면인도 실력은 괜찮았다.
나름 튼실하다는 소리다. 문제는 나를 노린 사건을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것.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의 처분은 의논 후 결정하겠소."
"어.....?"
"자비를 베풀 수도 있다는 거요. 여기 가만히 앉아서 기도하시오."
"아, 알았어."
우리는 여관 바깥으로 나왔다. 창문으로 더피 백작이 보여서 허튼짓을 하는지 감시할 수 있는 위치다.
에델에게 가볍게 부탁했다.
"소리가 흘러나가지 않게 해줘."
"저를 만능 상자쯤으로 아시는군요."
에델은 당연히 할 줄 알았다. 마법적인 차단막이 우리를 감싸자,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한나 누나였다.
"야, 동생아."
계속 말하라는 듯 눈썹을 올리자, 한나 누나는 시원스레 뱉었다.
"그냥 니가 저년을 조교해서 지배하면 안 되냐? 제일 편하잖아."
"오......"
역시 내 누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