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0화 〉호족을 파괴한다 (90/111)



〈 90화 〉호족을 파괴한다

팔천 중에서 일부가 산맥을 둘러서 왔다.
일부라는  좋지만, 문제는 상대가 호족이라는 것.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전원 진형을 만들어라!! 방패병 앞으로!"
"예!!"

갑작스러운 명령임에도  부하들은  따라왔다. 부지런히 움직여서 충돌을 대비한다. 우리는 마을의 경계보다 조금 튀어나온 곳에 위치했다.

'애꿎은 마을 사람들을방패막이로  수는 없으니까.'

하필 경비대가 이 타이밍에 빠졌다는 건 아쉽다. 하지만 상대 입장에서도  존재는 재앙이리라.
나는 살짝 흥분해서 히폴리타에게 외쳤다.

"히폴리타, 전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야! 상대가 내 천인대를 염두에 두고 습격했을 리가 없어!"
"아마도 그럴 거예요. 관건은 얼마나 피해 없이 잡느냐겠네요."
"그치!"

눈이 좋은 레인져가 재빨리 호족의 숫자를 셈했다. 손가락을 구부리며 뭐라 중얼거리더니 짧게 외친다.

"칠백에서 팔백 사이입니다! 호족 전투 병력을 죄다 끌고 온 것 같습니다!"
"전투 병력? 저놈들은 몸만 멀쩡하면 전부 싸울  있잖아."

수인종 연합 안에서도 최고의 육체를 지녔고, 그만큼 자신감이 넘치는 놈들이다.
제국 입장에서 그나마 다행이라면 극소수라는 점이리라.

'호족을 전부 합쳐도 5천이 안 된다는 게 중론이니까.'

호족 7-800명과 인간 병사 1200여 명. 일반적이라면 호족의 압승을 예측할 것이다.
하지만 내 천인대는 좀 달랐다.
바쁘게 지휘하는 히폴리타.

"용병 중대는 왼쪽으로 완전히 빠지도록! 무리해서라도 상대의 허리를 끊어야 해!"
"예!!"

150여 명의 그리폰 용병단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최하가 십인장 급의 실력자들이니 호족을 상대로도 분투할 거다.

"방패병 절반은 뒤에서 대기! 부양 신발을 쓰는 거야."
"예!"

 줄이나 됐던 방패병 중에서 한 줄이 몸을 뺀다. 내가 모르는 대비가 있는 모양이다.
나는 갈 곳을 찾다가 제스 기사단이 뭉친 곳으로 향했다. 16인의 기사가 나를 반긴다.

"천인장님! 저 괴물 자식을 휩쓸어버리는 겁니다!"
"좋지."
"이번 전투가 끝나면 다시 광란의 밤인 겁니다!"
"그것도.... 좋지."

그리폰 용병단은 왼쪽, 제스 기사단은 오른쪽, 본대는 중앙에 위치한다. 호족은 계속 달려오는 상태.
두두두두ㅡ

녀석들은 낮디낮은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그르르르-!"

견족이나 랑족의 경박한 울음과는 다르다. 흉통 자체를 흔드는 울음소리에 몇몇 병사들이 주춤거린다.

"모, 몸이 굳는데.....?"
"무기 잡아야 해....."
"겁먹지 마라. 너희 곁에는 제국의 백합이 있다!"

고고한 외침과 함께 나타난 건 앨리스였다. 그녀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갑옷 착용하고, 말을  채로 등장했다.
대체 언제 저렇게 깔끔하게 준비했는지 의아할 정도다.

앨리스의 검을 타고 끓어오르는 붉은 기운. 나와의 성교 이후, 앨리스는 기운이 빠르게 늘고 있었다.

'몇 달만 지나면 확실히 성장할 거야. 그동안 내가 죽어 나가는  문제다만.....'

사정교환. 그 고통스러운 섹스의 결과물인 셈이다.
마침내 호족이 화살의 사정거리에 들어왔을 때, 호족을 가장 먼저 맞이한  궁병이 아니었다.
기다렸다는 듯 주문을 외치는 에델.

"매시브 디깅!"

에델의 심장에서 검은 기운이 뭉쳤다가 폭발한다.
그녀의 머리칼이 휘날리며  먼 곳에 마법이 시전되었다. 폭탄이라도 터지듯 땅이 파진다. 삽시간에 커다란 덩어리 수십 개가 만들어졌다.
퍼엉-퍼어엉ㅡ!

"크르르..... 함정이다!"
"당황하지 말고 뛰어넘어라!"

신체능력이 월등한호족들은 구덩이를 훌쩍훌쩍 뛰어넘었다. 하지만 수백이 동시에 뛰면 당연히 발이 엉키기 마련이다.
구덩이에 걸리는 놈들이 등장했고, 연쇄효과로 다른 호족들도 바닥을 나뒹굴었다.
쿠당탕탕-

"머저리 자식들!"
"그르르.... 누가 먼저 넘어졌나!"

서로를 탓하는 녀석들. 원체 성격이 사나웠다.
결과적으로 구덩이를 넘은 호족과 넘지 못한 호족. 두 덩어리로 나누어졌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 히폴리타.

"용병 중대는 바로 돌격! 뒤처진 호족의 전진을 막도록!"
"예!!"

그리폰 용병단이 튀어 나간다. 완벽히 오와 열을 맞추진 않았어도, 수많은 경험으로 나오는 짬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도울  있으면서도, 동시에 방해하지는 않는 거리를 유지하며 돌격했다.
최선두에 선 인물은 제이카 누나.

누나는 큼직한 대도를 들고 기세 좋게 휘둘렀다.

까아앙ㅡ!
호족 중 하나가 발톱으로 대도를 막는다. 곧이어 발톱에 쩌저적 금이 갔다.

"조막만한 인간이.....!"
"괴물 사냥은 질리도록 해봤다는 거지."

제이카 누나의 호쾌한 검격이 이어진다. 다른 그리폰 용병단도 당장은 그럭저럭 싸우고 있었다.

'좋아, 저기는 잠시 저지할  있을 테고.... 구덩이를 뛰어넘은 무리는?'

구덩이를 뛰어넘은 호족이 숫자는 더 많았다. 저들의 충격량을 일반 병사들이 그대로 받으면 답이 없을 거다.

'충돌 한번에 튕겨 나갈 수도 있어!'

같은 인간이 아니기에 가능한 일. 나는 방패를 앞세우고 돌진했다.

"날 봐라ㅡ!!"

순간 몇몇 호족의 시선이 내 쪽을 향한다.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며 마주 달려오는 녀석들.
내 근처에 있던 제스 기사단은 황급히 따라왔다.

"천인장님!!"
"소중한 몸을 보호하십시오!!"

하지만 내 부하들이 나를 감싸기 전, 호족과의 충돌이 벌어졌다. 항상 그랬듯 방패를 믿는다. 다만, 기술은 조금 더 발전했다.

'비스듬하게 방패를 땅에 찍는다! 힘을 받아도내가 허공으로 날아가지 않도록.'

방패를 살짝 쪽으로 기울였다. 애초에 전신을 가릴 정도로 큼직한 방패니까, 이렇게 하면 방어를 뚫을 도리가 없다.
쿠웅-!

50kg의 방패가 흙을 파고든다. 이내 쏟아지는 호족의 공격. 녀석들은 몸을 통째로 들이박거나, 발톡을 휘두르고, 이빨을 들이밀었다.
평범한 자세였다면 몸이 들썩였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방패를 기울인 상태.

충격력이 전부 아래 방향으로 치환되었다. 카가강-! 삽시간에 열 번 가까이 얻어맞았는데도 끄떡없다.
작게 진동하는 방패 너머로 기회를 엿보았다. 마침  동작을 준비하는 호족이 눈에 잡힌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내게 도약하려는 자세다.

"크르르......"

녀석 입가의 침이 한 방울 뚝하고 떨어진 순간, 땅이 폭발했다.
퍼어엉-!
흙먼지를 뒤로하며 내게 쇄도하는 호족. 2m를 훌쩍 넘는 덩치에 전력으로 맞설 필요는 없다.

"하찮은 쇳덩이를 믿고 까부는......"
"멍청한 자식!"

방패를 조금 더 기울인다. 숫제 하늘을 보는 각도. 호족의 몸은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방패 위에서 미끄러졌다.
끼기긱ㅡ
그리고 녀석의 무게가 온전히 방패 위에 실린 순간, 나는 힘껏 방패를 밀어버렸다.

"하늘로 꺼져버려엇!!"
"크핫.....?"

큼직한 몸집이 하늘로 훙하고 날아간다. 타이밍 좋게 창이 하나 날아와서 호족을 꿰뚫었다.
콰직-!
허공에서 심장이 뚫린 채로 힘없이 추락하는 호족. 나는 한나 누나에게 엄지를  들어줬다.

"적절했어, 누나!"
"헹, 앞이나  보라고."

누나의 말마따나, 나는 호족의 시선을 너무 끌었다. 고작  명인 나를 향해 호족 십수 명이 눈빛을 이글거린다.

"그르르.....!"
"저 인간을 죽여."
"형제의 피를 갚아라!"

두두두. 땅이 뒤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다시 방패를  잡았다.
전투에서 내가 할 일은 이것뿐이었다.

'최선두에서 누구보다 많이 얻어맞기!! 내가 한 대를 더 맞을수록 부하들이 마음 편하게 때리는 거다.'

쏟아지는 공격, 조금씩 늘어나는 상처.
그럼에도 나는 웃으며 싸웠다. 내가 맞을수록 승리에 한발 가까워지는 것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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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호족의 최고 전사,산범은 작금의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호족의 최고 전사는 강인한 무력과 최소한의 지력이 동반되어야 얻는 자리다. '최소한의 지력'.
이 조건 때문에 산범은 차마 앞장설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지휘하는 호족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르르, 함정이라도 판 건가?"

산범의 솔직한 생각이었다. 애초에 이번 수인종 연합의 출정은 연합 내부의세력 구도를 바꾸기 위함이었다.

'견족이랑 묘족..... 숫자만 많은 그 잡종들 앞에서 떳떳해질 기회였는데!'

수인종 연합의 주류는 견족과 묘족이다.
나머지는 고만고만한 비주류들. 호족이 강인하다고 하나 숫자가 적으니 마찬가지로 비주류였다.

그런 와중에 오크 제국의 제안이 있었다. 자신들을 도와 인간의 제국을 치면 확실히 보답하겠다는 거다.
성공만 한다면 큰 이득이다. 하지만 실패할 경우에는 출혈이 너무 크다.
그 때문에 의견이 갈렸는데, 주류인 견족, 묘족은 반대였고 나머지 비주류는 찬성파였다.
이번 출정은 비주류가 자신들을 증명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던 것이다.

산범의 폐 깊숙한 곳에서 한숨이 나온다.

"크후우, 대체 왜 마을 하나 따위에 이따위로 병력이 많단 말이냐!!"

이미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호족의 전투 병력을 대부분 동원한 병력이다.
이기더라도 압도적이지 않으면 종족이 위태로울 터.

"크르르...... 대등한 전투를 생각한  아니다. 인간을 찢어발기고 산채로 뜯어먹었어야 하는데."

산범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처음부터 마법이 쏟아지질 않나, 괴상한 인간이 방패로 설치지를 않나, 방패병들이 훌쩍 뛰었다가 방패로 내리찍지를 않나.
하여간 괴상한 부대였다.

피해가 더 커지면 안 된다. 이겨도 문제였다.
산범의 동물적인 본능이 경고등을 켰고, 그는 호족의 가장 보편적인 해결책을 선택했다.

"대자아앙!! 네놈들 중에 가장 강한 놈이 나와라!! 일 대 일로 실력을 겨루는 거다!!"

산범은 호족의 최고 전사였다. 한낱 인간의 무력 따위는 무섭지 않다.
그리 생각하며 뱉은 외침 아래,  인간이 응대했다.

말을 타고 전쟁터를 가볍게 누비는 기사. 검끝에는 붉은 기운이 파지직거렸다.

"결투를 원하는 자가 누군가?"
"나다!! 호족의 최고 전사, 산범이다. 네놈이 대장이냐?"

또각-또각-
말을 멈춘 기사는 얼굴 가리개를 살짝 올렸다.

"백합기사단장, 앨리스라고 한다. 대장은 아니지만 결투할 자격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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