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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화 〉호족을 파괴한다(2) (91/111)



〈 91화 〉호족을 파괴한다(2)

산범은 이가 드러나게 웃었다.
인간 제국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기사단장'이 꽤 중요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저런 인간을 사정없이 으깨면 공포가 전파된다. 잘 싸우는 인간들이 삽시간에 오합지졸로 변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크르르, 제 발로 잘 찾아왔구나."
"나야말로 고마워."

앨리스의 싸늘한 말투. 어느새 산범과 앨리스를 중심으로 공터가 만들어졌다. 인간 측이나, 호족들이나 자신의 수장을 믿는 것이다.

"단장님!! 가죽을 벗겨버리는 겁니다!"
"산버어어엄!! 최고 전사의 위엄을 보여줘라!"

각기 다른 응원을 들으며 둘이 마주 본다. 산범은 말을  앨리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수를 학살하는 게 아니라, 고수끼리의 싸움이다. 말 따위는 방해일 터.

"그 하찮은 짐승에서 내릴 기회를 주마. 정당한 결투를 위한 거다."
"내리라고? 내가 한낱 짐승을 올려다볼 수는 없지 않느냐."

한껏 비웃는 듯한 앨리스의 목소리. 그녀는 실제로도 그리 생각했다. 자신이 말에서 내리면, 마치 괴물에 대항하는 기사처럼 보이게 된다.

제국의 백합이 약자로 그려지는 그림은 필요 없는 법.
어디까지나 압도적인 모습으로 이길 생각이었다. 물론 산범에게 그런 만용으로 보였고.

"그르르....... 야들야들한 살이 머리까지 들어찼나?"
"수인에게 지능 지적을 듣는  처음이구나."
"후회하지나 마라!!"

파앗-!
산범의 몸이 사라진다. 이내 앨리스의 주위에서 불꽃 십수 개가 튕겼다.
카강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 기운과 푸른 기운이 서로 뒤엉킨다. 다음 순간 산범이 나타난 곳은 아까의 반대편이었다.

"크르르..... 나쁘지 않군."

산범의 발톱은 꽤 엉망이었다. 푸르게 타오르는 기운을 담았는데도 그랬다.
그에 비해 여전히 안정적인 앨리스. 그녀의 말조차 겁을 먹지 않았다. 사실, 좀전의 충돌을 제대로 인식조차 못 했으리라.

"글쎄, 나는 그저 그랬는데."

앨리스의 냉정한 평가. 실제로 그녀는 '씨족의 어머니'에 비하면 산범이 세 수쯤 처진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오크와 호족은 인구가 다르니까 별수 없나.'

일만 명 중에서1등과  명 중에서 1등은 확실히 다르다. 최악의 경우, 백 명 중의 1등이 일만 명 중에서는 100등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앨리스는 그런 생각 속에서 굳이얼굴 가리개를 내리지도 않았다. 단지 말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릴 뿐.

"다행이다. 네 목숨까지 신경 써줄 수 있겠구나."

호족의 최고 전사, 산범 입장에선 이런 모욕이 따로 없었다. 눈이 뒤집혀서대노했다.

"회쳐먹을 년이!!"

우드득ㅡ!
산범의 몸이 잔뜩 부풀어 오른다. 이족 보행을 버리고, 네 발로 선다. 전신의 털이  올, 한 올 나풀거렸다.
이내 푸른 기운이 머리부터 발끝을 스치자, 산범은 한 마리의 호랑이가 되었다.

"크르르르."

귀기 서린 눈동자. 입에서는 침이 뚝뚝 떨어진다. 진짜배기 짐승이 되며 전반적인 능력이 상승한 것이다.

앨리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도련님 덕에 거의 완성됐지."

오러화. 전신을 기로 뒤덮는 기술을 펼친다. 그녀의 갑옷에 붉은 파도가 넘실거렸다.
붉은 파도는 갑옷도 넘어서 말을 살포시 감쌌다. 결과적으로 불타는 적토마가 된 앨리스의 군마.

"가자꾸나."

또각-또각-.
그녀는 가볍게 말을 몰았다. 그에 대항해 푸른 안광을 흘리며 달려드는 산범.

지그재그로  번씩 뛰다가 크게 도약하며 앨리스의 목덜미를 노린다. 단순하지만 마나메탈도 찢어발길 위력이 담겨 있었다.

"크아앙-!"
"음......"

앨리스의 눈빛이 차분하게 움직임을 훑는다. 동물화까지 했으니, 산범의 내구력은 상상이상일 것이다.
발톱뿐 아니라, 가죽을 찔러도 생채기가 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가 괜찮겠어.'

앨리스가 노린 것은 산범의 눈. 푸르른 안광이 빛나는 자리를 향해 검을 겨눈다.

"크르르!"

물론 산범의 반응도 크게 느리진 않았다. 앨리스의 검끝이 눈을 향하자, 바로 고개를 튼다.
동물화한 이 순간, 눈을 제외한 다른 곳은 검기에 맞아도 멀쩡하다.
산범은 승리를 그렸다.

'크르르, 반격을 피했어! 이대로면......  건방진 기사의 공격을 몸으로 때우고, 짓누를 수 있을 거다!!'

산범이 그리 생각할 때였다. 앨리스의 검기가일순 일렁였다.
환영? 환각? 그의 눈이 커진 순간, 검기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스스스스ㅡ
검기는 늘어나는데, 둘은 정지한 것 같다. 앨리스의 검기는 그런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빨랐다.

산범의 부릅뜬 눈. 그곳을 향해 붉은 검기가 쇄도한다.
가죽, 발톱 따위는 튼튼해도 눈은 전혀 다른 영역. 게다가 피할 수 있는 속도도 아니다.
산범은 문자 그대로  뜨고 당했다.

콰지지직ㅡ!
눈알을 찢고 거침없이 들어간다. 타오르는 검기가 내용물을 태웠으나, 정작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눈과 연결된...... 뇌까지 검기가 침입한 것이다. 네 발로 뛰어오른 산범은 검기에 꿰뚫린 꼬챙이 꼴이 되었다.

"크, 크르르...... 이, 이건....."
"짐승에게 어울리는 최후라는 거지."

가볍게 검기를 거두는 앨리스. 꿰뚫린 채, 부들거리던 산범은 꼴사납게 추락했다.
철푸덕하는 소리와 함께 호족의 최고 전사가 땅을 나뒹군다. 앨리스는 그 위로 고고하게 말을 몰았다.

오러화가 군마까지 감쌌다. 숫제 적토마처럼 보이는 상황. 군마의 근육이 한층 더 늠름해졌고, 그에 비해 산범은 한껏 쪼그라들어 있었다.

"흐, 흐으으....."
"짐승들이 강인한 건 알겠다. 하지만 어디 제국이 만만해 보이더냐?"
"그르르....."
"주제를 모르고 발호한 죄, 네놈들의 목으로 갚아라."

앨리스의 검이 하늘을 향한다. 이제 검날을 내리치면 산범의 목숨은 끝날 것이다.
이 순간, 호족의 최고 전사 산범은 종족의 미래를 생각했다.

'내가 죽으면...... 동족들은 복수를 부르짖을 거야. 피에 젖어 날뛰겠지.'

분노한 호족 팔백이다. 지금의 상황이 어떻든, 강인한 호족은 끝끝내 승리를 쟁취할 수도 있었다.
마지막 한 명까지 물러서지 않고 싸우는 종족이니.

승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종족의 미래는?
호족의 핵심 전력이 이곳에 몰려 있다. 복수를 외치는 순간, 종족의 미래가 사라지는 거였다.

'절대, 절대 그래서는  된다. 차라리 물러나서 연합의 비주류로 살지언정, 미래를 잃을 수는 없어......!!'

무조건 후퇴해야 한다. 그런 강박 속에 산범은 기이한 울음을 뱉었다.
뱃속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듯한, 쇳덩어리를 긁는 듯한 울음이다.
구우우우ㅡ!

산범의 울음을 들은 순간, 모든 호족이 움직임을 멈췄다.
약속된 신호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울음을 들으면 둥지로 돌아가야 한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각인되었다.

치열하게 싸우던 호족은하나둘 뒷걸음질을 쳤다. 더 싸우고 싶어서, 아직 진정되지 않은숨결이 흘러나온다. 그런데도 몸은 후퇴하고 있었다.

"그르르...."
"이놈들이 후퇴한다!!"

기회라는  외치는 병사들. 호족은 그들이 못내 미웠지만, 울음을 거부할 수 없었다.
반드시 둥지에 가야만 한다. 이후의 일은 동지에 도달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조금씩, 조금씩 뒷걸음질 치던 호족들은 이내 한 번에 등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그르르, 둥지로!!"
"둥지로 간다!!"
"최고 전사는 어디 있나?"
"......죽었다."

호족들끼리 정보를 공유한다. 그들은 흥분 상태에서 벗어나 어렴풋이 상황을 파악하는 중이었다.

두두두ㅡ
올 때만큼이나 신속하게 멀어지는 호족들. 그들의 뒤로 화살과 투창이 쏟아졌지만, 그리 많은 수를 잡지는 못했다.
제국의 병사들은 지친 서로를 쳐다봤다.

"이, 이긴 건가....?"
"그런 거 같은데."
"되게 짧었어......"

얼떨떨한 병사들 사이로 불쑥 튀어나오는사람이 있었다. 최선두에서 방패를 휘두르던 천인장, 제스 홀란트다.

"승리했다!! 수인종 연합의 최강 종족, 호족을 물리쳤다!!"

잠시간의 정적, 이내 병사들은 크게 환호했다.

"와아아아!!"
"천인장! 천인장! 천인장!!"
"제스 홀란트!!"

제스 홀란트에게 몰려가서 헹가래를 치는 병사들. 전투 후에도 뛰어다닐 정도로 힘이 남아 있었다.

"와아아!!"

제스 홀란트는, 웃으며 몸을 내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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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족과의 전투가 끝난 후, 우리는 재정비를 했다.
부상자를 치료하고, 각자의 무장을 살피는데 멀리서 허겁지겁 달려오는 전령 하나가보였다.

"음?"

신경 끄고 방패를 계속 닦는 중, 전령은 내 근처까지 다가왔다. 부하들이 막자 간절하게 외친다.

"영주님! 영주님의 전언입니다!!"
"통과시켜."

나는 방패를 꽉 잡고 전령을 바라봤다. 어느새 앨리스가 곁에 붙은 상황.
전령은 말에서 내려 털썩 무릎 꿇더니 떨리는 손으로 문서 하나를 내밀었다.

"지, 지원 요청입니다..... 부디 본성이 지원을 바랍니다....."

문서를 펼쳐도 내용은 똑같았다. 제발 와달라는 글귀.

"나를 죽이려 해놓고 이제 와서 도와달라고?"
"건방진 녀석입니다."

피식 웃으며 고개를 주억인다. 나는 앨리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앨리스경, 그 대장이라는 녀석 머리가 있나?"
"여기 호족 최고 전사의 수급입니다."

덜렁거리는 머리 하나가  손에 잡힌다. 눈알이 파괴되어 흉측한 형상.
나는 그걸 전령 앞에 내던졌다.

"이게 호족 새끼들 대장이다."
"......"
"협력은 급에 맞는 자들끼리 하는 거지. 최소한 더피 백작이 이 정도 공적을 세우기 전까지는 여기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처, 천인자....."

나는 냉정하게 말을 끊었다.

"가서 말한 대로 전해. 네가 할 일은 그것뿐이다."
"......"

돌아가는 전령의 어깨는 땅까지 처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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