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다종족의 약점
헤르파가 가져온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정확히는, 그녀가 되는대로 뿌리는 정보를 재해석한 결과가 놀라웠다.
"끄으음.... 영지민 육백을 죽여서 내 조건을 만족시켰다고?"
"그런 말인 듯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앨리스. 옆에서 듣던 히폴리타는 기가 찬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라면 그렇게 멍청한 짓은 안 해요."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겠지."
이제 곧 더피 백작의 전령이 수급을 가지고 올 것이다. 과연 그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한나 누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동생, 그 백작을 도와줄 거야?"
"약속은 했어."
"능력을 증명하라는 조건이었잖아. 저것도 능력이라고?"
"......"
애매하다. 결과적으로 성과를 올리긴 했지만, 마냥 크지도 않았다. 뭣보다 호족은 완전히 둥지까지 물러난 반면, 랑족의 잔당은 다시 합류한 것이다.
'종족마다 습성이 다르니까.....'
아직도 수인종 연합의 병력은 6천을 상회한다. 당장 내가 성에 들어가기도 힘들 것이다.
나는 눈살을 확 찌푸렸다.
"생각하니까 그렇네. 지원하려면 성에 합류해야 하잖아?"
"그치."
"근데 합류하려면 일단 수인종의 포위를 뚫어야 해. 지원하고 싶어도 힘들겠는데?"
내 말에 한나 누나가 어깨를 으쓱인다.
"글쎄, 꼭 지원이 그것만 있는 거야?"
"당연히 군사적 지원......"
말하다 입을 다물었다. 다른 길이 있나?
고민을 시작하려던 찰나, 히폴리타가 끼어들었다.
"우리는 치사하게 굴어야 해요."
"응? 치사하게....?"
"네! 일단 지원은 결정하신 거잖아요?"
지원을 결정..... 나는 고심 끝에 인정했다. 더피 백작은 나중에 응징한다고 쳐도, 당장 제국의 영토를 빼앗기기는 싫다.
게다가 미끼로 죽어 나간 영지민은 또 어떤가. 내가 나서지 않으면 더 심한 비극이 벌어질 것이다.
"도와줘야지."
"좋아요. 문제는 정면충돌이 힘들다는 거죠?"
"어..... 에델이 있어도 좀 그렇겠지?"
나는 에델을 힐끗 살폈다. 그녀의 한계는 아직 맛보지 못했다. 호족과의 전투에서 초반에도 활약하고, 이후로도 꽤 많이 사냥했다만 본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랐다.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는 에델.
"저도 수인종 육천을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구나....."
히폴리타는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치사한 작업이 필요한 거예요! 진득하게 괴롭히는 거죠."
"어..... 더 설명해줘."
"전통적인 방법은 많아요. 밤마다 불화살을 쏴서 제대로 자지 못하게 만든다던가!"
나는 바로 인상을 썼다.
"여긴 풀숲이 아닌데?"
"예시를 든 거죠. 식량만 노려도 꽤 힘들 걸요?"
"식량이라....."
그건 맞았다. 전통적으로 원정군을 괴롭히는 방법이 보급선을 차단하는 거다.
물론 수인종 연합은 숫자도 천 단위고, 주변 마을을 파괴하면서 식량을 얻으니까 좀 어려울 거다.
그런 뜻을 담아 히폴리타를 바라보자,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손가락을 흔들었다.
"모든 식량을 처리할 필요도 없어요. 고기! 고기만 노려도 괜찮아요."
"고기가 없으면 뭐라도 먹으면.....아!"
"거긴 엽표족이 있잖아요?"
히폴리타가 씩 웃는다. 나도 그녀의 말에 탄식했다.
다른 종족, 뭐 타조족은 초식에 가까웠고 견족, 랑족은 고기가 없어도 그럭저럭 버틴다. 하지만 엽표(치타)족은?
"고기가 없으면 굶어 죽겠어."
"정확해요! 사냥으로 충당하려고 해도, 엽표족이 천도 넘는데, 그들이 배불리 먹을 사냥감이 있을 리는 없죠."
"괜찮네."
고기를 노려서 종족 하나를 굶긴다. 사기도 떨어뜨리는 동시에 수인종 연합에 균열을 만들 수 있는 수법이었다.
요는 어떻게 노리냐는 것.
'곡식까지야 그럭저럭 불에 탄다지만, 고기는 타지도 않잖아?'
히폴리타는 어느새 에델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다.
"고기를 노리는 마법은 우리 고위 마법사님이 해줄 거랍니다. 그치?"
"하하....."
어색하게 웃는 에델. 그녀의 머릿속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진짜로 쓸 마법이 있는지 열심히 찾고 있겠지.'
히폴리타와 나, 앨리스, 한나 누나가 전부 에델을 뚫어지라 바라본다. 에델은 극도의 부담 속에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
"해, 해보겠습니다."
"좋아!!"
히폴리타는 신나서 에델을 흔들며 말했다.
"방법은 내가 알려줄게!! 말한 대로만 하면 될 거야!!"
"하하....."
잠시간의 준비 후, 백합기사단과 제스 기사단은 에델을 호위하며 길을 떠났다.
물론 나도 포함된 행렬이었다.
---------
식량은 누구에게나 소중했다.
그건 수인종에게도 마찬가지였고, 수인종의 보급 창고는 꽤 철저하게 방비되어 있었다.
각 종족의 정예 전사들이 눈을 부릅뜨고 교대로 지키는 것이다.
24시간 내내 방비하기 때문에 들어갈 틈이 없어 보였다.
엽표족의 정예 전사, 흑추는 팔짱을 끼고 날카롭게 주위를 살폈다.
"흠, 아무도 없군."
"당연한 말을 하냐."
동료가 핀잔을 준다. 흑추는 조금 멋쩍어졌다. 그래도 경계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는다.
"방심은 금물이다. 언제고 식량 창고를 노릴 수 있어."
"그건 너무 정론이야.... 얼마 전에도 성에서 찔끔 나온답시고 육백 명을 희생시킨 놈들이라고."
"그 과정에서 랑족의 수장이 죽었다."
흑추의 동료는 헹하고 웃었다.
"그 자식 복수는 해야지. 하지만 어차피 수장치고는 덜떨어진 놈이었어. 게다가 우리도 아니고 랑족의 수장인데?"
"전쟁에 네 사견을 넣지 마라."
니새끼 좆대로 해라. 흑추의 동료는 그리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엽표족은 누구보다 빠른 종족이니, 습격이 있어도 금방 반응할 거라 생각한 것이다.
(물론 이건 엽표족의 입장이었고, 외부에서 보기엔 지구력이 부족한 조루일 뿐이었다.)
흑추는 못마땅한 듯 말했다.
"우리는 풀떼기 뜯어 먹는 놈들이랑 달라. 그놈들은 식량 좀 없어도 어떻게든 버티지만, 우리는 창고가 털리면 금방 굶게 된다."
"알아알아. 중요하지요~~."
대답하면서도 흑추의 동료는 손톱 손질을 멈추지 않았다.
당장의 귀찮은 임무보다는 언젠가 있을 싸움을 위해 정비하는 게 낫다.
뇌까지 근육으로 들어찬 전사의 판단이었다.
다시 흑추가 입을 열려고 한 순간, 높은 울음이 퍼진다.
미요오오옹ㅡ!
"묘족....?"
흑추와 동료는 눈을 마주쳤다. 확실하다. 이건 묘족의 경고 신호였다.
'습격이야. 저쪽을 도와야 하나?'
하지만 저기는 곡물을 보관한 창고다. 고기는 죄다 흑추가 지키는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선뜻 나서지 못하는 가운데, 흑추의 동료는 번개같이 튀어 나갔다.
"넌 있어라! 나는 도우러 간다!!"
"이 자식이, 당장 우리 창고가....."
"인간을 찢어발길 기회잖아!"
파앗-
삽시간에 멀어지는 흑추의 동료. 마찬가지로 창고를 지키던 엽표족 대부분이 자리를 떠났다.
시스템 자체는 엄중했지만, 정작 구성원이안이했던 것이다.
흑추는 팔짱을 풀고 사방을 경계했다.
"습격이 반대쪽에서 왔어도 혹시 모른다...... 인간들의 병력이 그렇게 많지는 않겠지만......"
자신도 잘 생각하니, 인간들이 성동격서를 벌일 정도로 여유가 넘칠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너무 과민했나? 그리 생각하는 순간, 흑추의 눈앞에 뭔가 번쩍였다.
"플래시."
강한 빛이 터진다. 일시적으로 시야가 점멸했을 때, 흑추의 주위로 누군가 다가왔다.
감각을 마비시킨 후 기습. 훌륭했지만, 랑족의 감각이 그리 둔하진 않았다.
"어디서!!"
노호성과 함께 기척 쪽으로 발톱을 휘두른다. 하지만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어.....?"
적을 놓쳤다. 다시 기척을 찾아야..... 흑추의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묵직한 쇠창이 그의 가슴을 꿰뚫었기 때문이다.
콰지직-! 갈비뼈를 통째로 짓이기며 들어오는 쇠창. 허파가 뚫려서 울음도 잘 나오지 않았다.
"아우울...... 흐으...."
"치타 새끼 중에서 성실한 놈이 있었네."
"아우우울....."
마지막까지 동료에게 신호를 보내려던 흑추. 그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흑추를 처리한 침입자, 한나 홀란트는 씩 웃으며 외쳤다.
"헤르파가 제대로 정찰했어! 얼른 여기 털어버리자!"
멀리 숨어있던 기사들이 묵직한 발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