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0화 〉수성전 (100/111)



〈 100화 〉수성전

앨리스와내가 성벽 위로 올라간 건, 에델이 다시 돌아왔을 때였다.
최대한 빨리 마력을 회복한 에델이 리버스 그래비티를 걸어 우리를 올려준 것이다.

아직 컨디션이 별로인지,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에델. 그녀는 피범벅이 된 나를 보자 기겁해서 외쳤다.

"제스님,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무슨 소리야.  옆엔 앨리스경이 있었어."
"아..... 얼른 올라오십시오!"

성벽 위로 무사히 착지한다. 겨우 휴식인가 싶었는데, 성벽 위도 치열한 건 마찬가지였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잊고 주위의 광경을 관찰했다.

수많은 영지민이 계단에 늘어서서 물건을 운반한다. 손에서 손으로 옮기는 것이다.
내용물이야 다양했다. 집에서 쓰는 도끼 따위도 있었고, 끓는 물을 옮기는 무리도 있었다.

운반된 전투 물자가 성벽 위에 올라가면, 병사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투척한다.
도끼 좀 다뤘던 놈은 수인종의 몸통을 맞추기도 했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수인종에게 물을 퍼붓기도 한다.

사실 석궁, 활 따위를 쏘는 건 당연했다. 이미 손가락이 까지고 피가 주륵주륵 흐르는데도 열심히 활시위를 당긴다.

'이 와중에도 석궁은 꿀 빠는군. 하기야 원래 그렇게 생긴 무기니까.'

가끔씩 강력한 수인종이 성벽 위로 올라오면 재앙이었다.
운반을 맡은 영지민은 삽시간에 10명 단위로 죽어 나갔고, 기사가 출동해야 겨우겨우 진압되었다.

"지옥도....."

그야말로 지옥도라고할 있으리라.
그나마 내가 이끌고 온, 제스 기사단, 백합기사단, 그리폰 용병단 덕분에 성벽에 올라온 수인종을 그럭저럭 상대하는 듯했다.

가끔 백작령의 마법사도 보였는데,보통 마력이 탈진되어 성벽 위에 고꾸라진 상태였다.

나는 이를 악물며 에델에게 물었다.

"남은 수인종이 얼마나 되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멀쩡한 인원이 4천은 넘을 겁니다."
"백작령은?"
"측정이 안 됩니다. 영지민이랑 병사가 합쳐져서....."

그나마 더피 백작의 민심이 좋아서 다행이었다. 민심이 별로였다면, 영지민이 이렇게까지 자발적으로 돕지도 않았으리라.

'이런 전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뭐가 있지?'

평소처럼 방패를 믿는다? 그래 봐야 성벽에 올라오는 수인종 조금을 상대할 뿐이다.
지휘 능력? 여기에  부하들은 오히려 소수였다.
성욕 증진? 다들 죽을 판에 성욕을증진시킨다고 무슨 소용일까.

고민하던 중, 돌을 운반하는 영지민이 눈에 들어왔다. 날붙이로는 숫자가 부족하니 돌이라도 던지는 것이다.
처절한 모습이었지만,  눈은 번뜩였다.

'저거야! 50kg을 가볍게 휘두르는 내 힘!'

사실 50kg뿐이랴, 당장 방패의 무게가 3배로 늘어나도 똑같이 휘두를 수 있었다.
각성을 통해 신체 능력 자체는 어마어마했으니까.

나는 앨리스와 에델에게 외쳤다.

"너희는 각기 남쪽과 북쪽을 맡아. 힘을 보존하다가 도움이 필요한 곳에 써라."
"예!"
"알겠습니다. 도련님은 어쩌실 예정....."
"나는 수인종을 짓뭉갤 예정이다."

의아하게 보는 에델와 앨리스. 나는 행동으로 보여줬다.
당장 근처로 달려가서 영지민에게 돌을 건네받는다.

"그거 내놔!"
"예? 아.... 넵."
"가벼운데....."

대략 7-8kg?  가벼운 감이 있었다. 하지만  힘과 합쳐지면 괜찮다.
나는 성벽 끄트머리로 가서 사다리를 기어오르는 수인종을 봤다.

"아우우울-!"

울음을 내뱉으며 사다리를 오르는 놈. 저 수인종 하나를 맞춰도 좋겠지만, 그건 비효율적이다.

'뭣보다 돌을 피할 수도 있고, 투척 하나에 고작 수인종 하나는 수지가 안 맞아!'

나는 다른 것을 유심히 관찰했다.
놈이 열심히 오르는 사다리. 저걸 부수면 성벽을 오르는  자체가 힘들어지리라.

'잘 던져야 한다.'

돌을 꽉 잡는다. 목표는 고정된 사다리.
작은 크기도 아니다. 난 저것도 맞추지 못할 정도의 머저리는 아니었다.

다리를 먼저 내디디고, 이어서 몸을 회전시키며 투척!
쐐애애액- 콰지직!
사다리를 이루는 두 기둥 중에 하나가 으깨진다. 나름 튼튼하게 만들었겠다만,  힘을 버티기는 역부족인 것이다.

"어, 어.....?"

타고 오르다가 당황하는 수인종. 나는 재빨리 뒤로 손을 내밀었다.
이제는 영지민이 알아서 돌을 건네준다.

"여기 있습니다!"
"좋아."

아까의 과정을  더 반복했다.
쐐애액-콰직!
방금 맞추었던 기둥의 반대편이 으깨진다. 기둥 2개가 전부 없어진 사다리는 힘없이 떨어졌다.
덩달아 땅으로 추락하는 수인종.

"끄아아! 뭔 날벼락...."

녀석은 땅에 부딪히고는 한번 튕겨 올랐다가 다시 떨어졌다.
죽지는 않겠지만, 사다리를 부수었다는 게 무엇보다 크다.

 과정을 지켜본 에델은 눈을 빛냈다.

“역시 제스님이십니다. 능력의 활용은 뛰어나신 분....!!”

‘활용’은? 제길, 활용하는 것만 좋다는  같잖아.
내가 툴툴거릴 때였다. 뒤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린다.
투투투둑-.

"음?"

돌아보자, 근방의 영지민이 옮기는 모든 돌이 이쪽으로 모이고 있었다.
희망에 가득한 눈빛을 보내는 영지민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믿겠습니다!"
"아까처럼만 해주십시오!"
"제발 부탁합니다. 돌은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아......"

이렇게 간절한 얼굴을 보고 누가 거절할 수 있으랴.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 사다리 걸린 거 보이지?"
"예."
"저거  부수고 다른 곳으로 갈 테니까,빨리 돌이나 준비해."
"알겠습니다!"

어디보자. 가장 묵직한 놈이....
나는 아까의 2배 무게쯤 되는 돌을 집어 들고는 만족했다. 이거면 궤적도 더 안정적이고, 속도가 느려도 사다리를 잘 부술 수 있을 거다.

"그럼 다음 목표는.... 저거다."

의욕을 불태우며 발을 내디뎠다.
적어도, 내가 있는 성벽에서는 수인종의 비명이 훨씬 많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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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히폴리타가 이끄는 제스의 천인대는 아직도 도달하지 못한 상태였다.
제스가 이끌었던 기사단과 용병단은 기병이고, 히폴리타가 이끄는 천인대는 보병이다.

거기에 에델이란 고위 마법사의 차이까지 있었으니, 기동력이 극단적으로 차이 난다.

히폴리타는 병사들을 재촉하면서도 끊임없이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멀리서도 수인종을 위협할  있는 방법.....'

헤르파는 계속 더피 성과 부대를 오가며 정보를 전하는 중이다. 마침 헤르파가 돌아와서 최신 전황을 전달했다.

"오빠가 찬양받고 있어요오.....!!"
"하아, 그렇게 말하지 말고 전체적으로 이야기해줄래?"
"그러니까......"

헤르파의 설명을 들은 히폴리타는 미세하게 안도했다. 그래도 먼저 간 지원군이 시간을 번 모양이다.
동시에 불안한 예감도 스쳤다.

'시간을 버는 것도 전부 이길 수 있어야 의미가 생기죠. 그런데 천인대가 진입한다고 이길까요?'

천인대에서 핵심 병력은 이미 달려간 상황이다. 남은 건 평범한 병사들뿐.
조금 강하다고는 해도, 고작 병사 천 명이 얼마나 영향을 줄지......
히폴리타는 입술을 짓씹으며 중얼거렸다.

"지원군, 대체 다른 귀족은 뭘하고 있는 거죠?"

더피 백작을 제외하고 다른 귀족이 별거 없다는 건 안다. 해봤자 정규군이 수십 명인 영지일 것이다.

지원군? 지원군? 갑자기 히폴리타의 머리에 괜찮은 생각이 스쳤다.
수인종 연합도 머리가 있다면, 이 근방의 영지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을 상징하는 깃발도 말이다.

히폴리타는 재빨리 자신 휘하의 마법사를 불렀다.

"드레이크! 시킬 게 있다."
"아, 예."

애매한 나이의 마법사가 달려온다. 대단한 자는 아니고, 3위계 마법사로 히폴리타가 잡다한 일을 시킬 때 쓰는 자였다.
히폴리타는 마법사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자, 여기 보이는 문양을 따라 그릴  있지?"
"가능은 한데.... 지금 해야 합니까?"
"당연하지!"
"여, 여기서 색을 내려면 비싼 재료가 들어갈 텐데....."

돈 따위가 중요해? 히폴리타가 역정 내자 마법사는 바로 수그러들었다.

"하겠습니다. 정확히 어떤크기로....?"
"깃발. 여기 깃발에 문양을 그려 넣어."

별거 없던 깃발에 화려한 귀족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다. 히폴리타는 그걸 병사들에게 하나씩 넘겨줬다.

‘근방의 귀족 가문을 다 쓰는 거야. 등장은 수풀쯤이 좋겠지?’

공성전 와중에 갑자기 뒤에서 귀족 가문의 깃발 십수 개가 등장하면?
당연히 놀라자빠질 것이다.

“후후.”

히폴리타는 낮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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