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심연
일주일 후.
수인종 연합과 우리의 대치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정확히는 수인종 연합이 아주 느린 속도로 소형 영지를 점령하는 중이다.
나는 정찰을 다녀온 헤르파에게 물었다.
"오늘도 똘똘 뭉쳐서 다니냐?"
"네에..... 노리기 힘드러 보여써요오....."
나는 헤르파에게 핏방울을 건네주며 생각에 잠겼다.
'매복 작전이 성공한 건 두 번이 끝이야. 그걸로 족히 수인종 오백을 갉아먹긴 했다만......'
덕분에 경각심을 가진 수인종들이이제는 뭉쳐 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뭉친 상태로 마을을 점령하니까 속도는 상당히 떨어졌다.
하루에 영지 하나를 접수하던 놈들이, 지금은 3일, 4일에 걸쳐서 접수하는 중이다.
점령 속도가 느려지긴 했지만, 문제는 우리 쪽에서도 마땅히 반격할 수단이 없다는 거였다.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짜증 냈다.
"제길! 성을 나가서 전면전을 벌이면 질 테고..... 그렇다고 틀어박혀 있으니까 사나흘마다 영지 하나가 날아가고!"
"오빠아.... 진정해요오...."
느긋하게 피를 빨아먹는 헤르파. 하지만 나는 진정할 수 없었다.
당장은 괜찮다고 해도, 이대로 대치가 한 달을 넘어가면? 근방의 영지는 초토화될 거다.
응당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머리를 쥐어뜯는 내 곁으로 더피 백작이 다가온다.그녀는 수성전 이후로 항상 눈이 충혈된 상태였다.
검붉은 머리칼과 어우러져서 마치 광전사 같은 면모. 더피 백작이 스산하게 말한다.
"제가 가겠습니다. 저 썩을 것들을 모조리 쳐죽....."
"되지도 않는 소리는 그만! 작전도 없이 성을 나가는 건 자살이라고!"
"......"
본대에 지원을 요청해야 하나? 아니다. 안 그래도 오크 제국과의 싸움으로 바쁜데 병력을 더 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한숨을 푹푹 내쉬는 와중, 에델이 슬금슬금 다가온다.
"제스님, 지금도 충분히 훌륭하십니다. 애초에 8천이나 되었던 수인종을 5천 부근으로 줄이지 않았습니까?"
"그건 맞는데...... 이 자식들이 물러날 생각을 안 하잖아."
보통 부대의 4할이 박살 나면 퇴각하지 않나? 도통 놈들의 머릿속을 알 수가 없었다.
마지막 한 명까지 싸우는 건 소규모 전투에서나 의미 있다. 종족의 명운을 걸고 나온 놈들이......
내가 잔뜩 인상을 찌푸릴 때였다. 저 멀리서 한나 누나가 나를 부른다.
"동생!! 너랑 더피 공한테 손님이 왔는데?"
"손님.....? 이런 시기에?"
대체 무슨 대가리 빈 자식이 더피 영지를 방문한단 말인가. 나는 거칠게 몸을 일으켰다.
더피 백작도 나를 따라서 비척비척 걸음을 옮긴다.
"누구길래 그래?"
"와서 봐봐. 반가울걸?"
반갑다...... 병사를 가져온 자식이 아니면 전혀 반갑지 않을 텐데.
나는 끝까지 의심을 풀지 않았다. 그런데 가까이 갈수록 내 눈을 의심하게 되었다.
"어......? 무장한 병사?"
못 보던 얼굴인데. 게다가 제국 정규군도 아니고, 뭔가 애매한 무장을 갖춘 이들이었다.
한나 누나의 뒤에서 '사내' 몇몇이 등장한다.
'최고급은 아니어도 괜찮은 복장. 귀족인가?'
이런 시기에 날찾아오는 귀족.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근방에서 왔겠지. 수인종한테 영지가 박살 날 게 걱정된 모양이군."
"흥, 제 성이 공격당할때는 코빼기도 안 비췄던 놈들입니다."
더피 백작의 불평. 그리 멀지 않아서 귀족들에게도 들렸다.
그들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예를 갖추었다.
"명성은 많이 들었습니다, 백작님. 그리고 홀란트 천인장님."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는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각자 가문은?"
"어..... 미약하지만 토이 가의 가주직을 맡고 있습니다."
"저도 도카 가문에서......"
나는 지난 일주일 동안 지겹게 봤던 지도를 떠올렸다. 수인종의 예상 경로에 있는 녀석들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야 오는군그래."
"하하...... 너무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수인종 앞에서는 전부 한 편이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영지의 멸망을 앞두고 날 찾아오는 것까지는 이해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테니까.
다만 내가 짜증나는 점은, 이 귀족 사내들이 전혀 준비되지 않았다는 거였다.
나는 유독 배가 나온 사내를 가리켰다.
"가주라고?"
"예? 예....."
"국경의 영지를 맡았으면서 살이 뒤룩뒤룩 쪘어. 남자가 살찌는 게 쉬운 일도 아닌데 말이야."
"......"
과거 수련과 거리가 멀었던 나도 군살은 별로 없었다. 지금에 와서는 꽤 미끈했고.
그런데 저자식은 국경 부근의 영주인 주제에 살이 뒤룩뒤룩 찐 것이다.
그 점을 지적하자, 영주의 얼굴이 단박에 굳었다. 다른 영주들도 긴장한 건 마찬가지다.
'걸음걸이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어. 제대로 수련한 영주는 없어. 딱 한 명 빼고는......'
나는 귀족 무리에서 유독 눈빛이 청명한 사내를 바라봤다. 나보다는 작아도, 적당히 훤칠한 키에 안정적인 자세.
은은하게 풍기는 기세는 적어도 기사급의 실력자라는 걸 나타내고 있었다.
게다가 나이도 젊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데, 저 나이에 영주인가?
"너는 이름이 뭐지?"
"저...... 말입니까?"
내가 지목하자 녀석이 흠칫한다.
"그래. 말 끌지 말고 빨리 대답해."
"조쉬 드 베흐나라고 합니다. 작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았습니다."
"흠..... 베흐나 가문? 그건 꽤 멀리 있는데."
다른 녀석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지역이다. 하지만 조쉬 베흐나는 비교적 먼 곳에 위치한 영지였다.
다른 영지를 방패막이 삼지 않는다는 것부터, 준비가 되었다는 것까지 훌륭하다.
'좋아, 보통은 남자면 그냥 넘기겠지만, 지금은 나머지가 하도 별로니까 눈에 들어오네.'
일단 만족했다.
여기서 내가 머리를 굴려봐야 뭐가 나오지는 않을 거다. 나는 재빨리 적절한 인물을 찾았다.
"히폴리타는 어디 갔지?"
"어...... 저기 오네."
다크 서클이 턱 끝까지 내려온 히폴리타가 걸어온다. 그녀는 우리를 보더니 대번에 파악했다는 듯 끄덕였다.
"드디어 지방 영주가 움직였네요."
"예상했어?"
"어제쯤 올 줄 알았어요."
히폴리타는 반쯤 좀비가 된 몰골로 귀족을 훑어봤다. 이어서 그들의 뒤에 있는 삼백여 명의 영지병도 살핀다.
"삼백...... 꼴랑 이거 데리고 와서 같이 싸워달라고 했나요?"
내게 묻는 히폴리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설마 그렇게 양심이 없겠어? 방금 이야기를 시작했으니까, 뭐라도 제안하겠지."
"그렇죠?"
우리의 대화를 들은 귀족 무리는 대번에 얼굴이 굳었다. 삼백 명.
작은 숫자기는 해도, 저들 입장에선 영혼까지 끌어모은 병력일 거다.
'근데 진짜 한 줌이라는 게 문제야. 게다가 본인도 수련 안 하는 놈들인데, 영지병은 제대로일까?'
모를 일이다. 최소한의 군기는 있는 듯했지만, 그 이상은 파악하기 힘들었다.
딱딱히 굳은 귀족 무리 사이에서, 아까의 젊은이가 나섰다.
"조쉬 드 베흐나입니다. 우선 체링겐 가문의 신동을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하아, 인사는 됐어."
히폴리타는 싸늘하게 응대했다. 하기야 조쉬 어쩌고가 멀끔하든 말든, 그녀에게 크게 상관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조쉬 베흐나는 히폴리타의 냉대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희에게 계획이 있습니다."
"뭔데, 말이나 들어보자."
너희 따위에게서 나보다나은 생각이 나올 리 없다. 히폴리타의 태도는 딱 그거였다.
솔직히 내생각도 크게 다르진 않았고.
'뭐 얼마나 대단한 계책이 나오겠어. 그냥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온 거겠지.'
나는 내심 녀석들을 어떻게 이용할지 고민했다. 삼백이면 그 자체로는 적지만, 내 천인대에 더하면......
이런 생각을 할 때, 조쉬 베흐나는 결연하게 말했다.
“저희는 극독을 준비했습니다.”
“극독......?”
“예, 수인종에게 먹일 극독입니다.”
이것들이 장난하나. 그냥 때려잡는 것도 힘든 와중에 잡아다 독을 먹이자는 거다.
어이가 없어서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후우, 독을 말이지...... 어떻게 먹을 건데? 응? 생각은 해 왔고?”
히폴리타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러던 중, 예상도 못 한 말이 튀어나온다.
“영지민의 살에 독을 주입할 겁니다.”
“......?”
“놈들은 영지민을 뜯어먹어서 식량을 보충하고 있습니다. 살에 극독을 넣으면, 먹이기는 쉬울 겁니다.”
나와 히폴리타는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심히 어이없는 발상이라 정신이 멍하다.
‘심연...... 심연을 엿본 거 같은데.’
인간이 차마 저지르면 안 되는 일이 있다.
내 생각에 영지민 살에 극독을 주입하고, 수인종에게 먹히도록 유도하는 건, 충분히 그 부류에 속했다.
나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답했다.
“일단...... 각오가 충분하다는 건 알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