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9화 - 방송 준비
날씨가 맑고 쾌청한 아침이었다.
물 한컵으로 목을 축이고 대충 세안을하고 외출복을 챙겨 입었다.
바람이나 쐴 겸 근처 공원을 좀 뛸 생각이었다.
"힘세고 강한아침! 만일 내게 물어보면 나는 복이."
엘리베이터 거울을 보며 저 대사를 치는 내 모습을 누군가 봤다면 나는 아마도 부끄럼사 했을지도 모르겠다.
탁-탁-탁-
규칙적인 뜀박질 소리와 함께 스타트를 끊었다.
아츄~ 널 보면 재채기가 나올것 같아~
상큼하게 어딘가 간질간질한 걸그룹의 노래를 들으며 리듬감 있게 질주하자
이내 흘러가는 개천을 낀 기다란 보행로가 나타났다.
우레탄이 깔린 보행로 끄트머리에 서서 제자리 뛰기도 하고 이리저리 관절들을 돌려주며
스트레칭을 이어갔다.
몸풀기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진심으로 뛰진 않았다. 그러면 큰일난다.
이론상 인간의 최대 뜀박질 속도가 시속 40~60킬로미터 라는데
나는 치타의 최고 속도인 시속 110킬로미터 만큼이나 빠르게 뛸 수 있다.
고작 30여초도 유지하지 못하는 치타에 비해 나는 심폐지구력과 근지구력 또한 궤를 달리하기에,
한시간은 족히 최고속으로 달릴 수 있다.
여기서 전력질주라도 해버리면 당장 실존하는 BC코믹스의 플래시라고 해외토픽에 나올거다.
탁-탁-탁-
적당히 평범한 사람의 속도로 뛰고있으니
벤치에 앉은 한 여성이 눈에 띄었다.
반려견을 세 마리나 데리고 있었는데
대형견 한 마리에 중형견 그리고 소형견 각 한 마리씩 이었다.
"강아지를 종류별로 키우는 사람인가보네."
가까이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꼈는지 개들이 목청 좋게 짖어댔고
주인이 급히 목줄을 잡아당기며 조용히 시켰다.
"죄송해요, 혹시 놀라셨나요?"
인성 합격.
또라이같은 견주들도 많은데 이 여자는 사람이 된 사람인듯 하다.
"아뇨, 제가 일부러 다가온건데요, 뭘. 괜찮습니다."
호이엔 둘리로. 아? 아닌가
호의엔 호의로.
젠틀한 미소로 화답하자 그녀 또한 마주보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마음씨 만큼이나 얼굴도 예쁜 사람이었다.
"이 친구들은 호적이 어떻게 되요?"
밑도 끝도 없는 드립도 그녀는 상냥하게 잘 받아 주었다.
"얘는 마음이 골든리트리버고 올해로 세살이에요, 맹인 안내견 교육을 받다가 탈락해서 저에게 오게 되었어요."
"이 아이는 뭉치고요 웰시코기로 올해 다섯살 이구요, 새끼때 버려진 유기견이었는데 제가 데려다가 키우고 있어요."
"여기있는 귀요미는 꼬미, 한살 요크셔테리어에요. 지인에게 분양받았어요."
오우 굉장한 투 머치 인포메이션 이었다.
이 사람 정체가 뭐지?
좋은일 하는거보니 나쁜사람은 아닌것 같은데, 오묘했다.
그래도 내가 물어봐 놓고 싫은 티를 낼수는 없겠지.
"아하, 그렇군요. 여기로 늘 산책나오시나봐요?"
"자주는 아니고 날씨 좋을때는 되도록 나오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산책을 자주 시켜줘야 하는데 주인이 저질체력이라 아이들이 늘 욕구불만이에요."
"강아지들을 위해서 노력하신다니 좋은 주인이시네요! 다음에 만나면 또 인사해요."
"네, 살펴가세요."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하고 왔던 방향을 향해 되돌아 달렸다.
탁-탁-탁-
또 만날일이 있을까? 그러고보니 서로 이름도 묻지 않았네.
같은 동네사람인데 인연이면 다시 만나겠지 뭐.
집에 돌아와 가볍게 샤워를 마치니 오전 9시였다.
아침에 먹으려고 사둔 과일을 내어왔다.
사과와 토마토였다. 대충 흐르는 물에 빡빡 씻어서 껍질채로 입으로 가져갔다.
아삭-
달달한 사과의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사과를 어느 나라의 왠 사신이 그렇게 좋아한다지?
그 놈은 씨까지 다먹어버리던데, 난 그렇게는 못하겠다.
사과 하나를 해치우고 토마토를 집어들었다.
푸슉-
상큼한 과즙이 입안을 가득채웠다.
신선한 토마토의 쥬시함은 정말 끝내준다.
조리해서 먹는게 몸에 더 좋다지만 적어도 아침에는 이 식감과 새콤함을 포기할 수가 없다.
분자요리에서는 이 쥬시함만을 추출하기 위해 원심분리기에 토마토를 넣고 돌리기도 한다던데.
먹은걸 정리하고 텔레비전을 틀었다.
당연히 뉴스채널이다. 누가보면 뉴스만 보는줄 알겠네.
"미확인 검은 구체에 대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습니다......현재로선 어떠한 방식도 통하지 않으며......전문가와 연구진들이 머리를 맞대고......정부는 각국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며......"
혹시나 해서 확인해봤으나 이미 알고 있는 일들이 그대로 일어나고 있었다.
현 시각을 기준으로 블랙 포탈이 나타난지 거의 하루가 지나는 시점이었다.
블루 포탈로 변화하는건 7일 전후.
내부에 들어간 사람이 없거나, 들어간 사람들이 모두 죽었을 경우에
레드 포탈로 변화하기까지는 대체로 3~4일 전후.
레드 포탈이 되어서 성장하는 시간은 대략 5일 전후.
다시 블랙으로 바뀌기까지는 하루면 충분했다.
레드나 블랙이나 어떤 방식으로도 저지가 불가능 하다는건 동일하지만 위험하지는 않은 블랙에 비해
레드는 성장중에 다가가면 구체에 닿은 부분만큼 잡아먹힌다.
첫 포탈을 클리어 하는걸 목표로 잡긴 했지만 남은 6일동안 평범한 시민의 신분으로 세상 사람들을 설득해서 포탈에 제대로 된 준비를 마친 병력을 투입하는게 과연 가능할까 회의감이 드는것도 사실이었다.
성공하면 그야말로 첫 단추부터 대박이었지만 그저 목표를 높게 잡은것 뿐이었지 실행 가능성이 요원한 일이었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밀어부치고 싶은것도 사실이었다.
최초의 포탈을 클리어 해버리면 저게 처음이자 마지막 포탈이 될 수도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분명히 한국에 등장한 최초의 포탈이 공략에 실패하고 성장을 끝 마치고 나서야 다른 포탈들이 등장했단 말이지.
둘의 상관관계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내 가설이 맞는다면 일이 정말 쉬워지니까,
할 수 있는 한은 최선을 다해봐야 될것 같다.
잠시 쇼파에 앉아있었는데 그 사이 민지에게 톡이 왔다.
'난 출근중(이모티콘)'
'오늘 꼭 병원가봐야해 알겠지?'
통곡하는 귀여운 이모티콘과 함께 병원을 가라는 말이었다.
'알겠어, 오늘 병원 다녀올테니까 걱정하지마. 나 생각보다 더 괜찮으니까.'
여기 오고 난 후로는 자꾸만 거짓말만 는다.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르니 이사를 가야될 것 같다.
이 모습을 보여줄 순 없으니까.
아침에 뛸때 찰랑거리는 머리가 좀 거슬렸다.
말릴때 너무 오래걸리기도 하고.
그렇다고 묶기도 그렇고. 아무래도 미용실에 들러야 할것 같다.
시크한 쿨워터 여성! 차가운 도시여자.
좋아 똑단발로 간다.
나는 바뀐 몸을 내 스타일로 꾸민다는 만행을 저지르기로 했다.
근처 미용실을 검색했다.
머리를 망치면 기분이 더러운건 남녀 불문의 문제였으므로 후기도 꼼꼼하게 봤다.
가격이 높지만 실력이 확실하다는 곳으로 선택했다.
미용실은 예약을 하는게 국룰이다.
전화를 해 오픈시간에 맞춰 칼 예약을 걸었다.
집에서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보며 시간을 좀 죽이다가 출발했다.
"예약하셨어요?"
"네, 열시에 예약했어요."
"복님 맞으세요?"
"네."
"네, 상담 먼저 할게요. 이쪽으로 와주세요."
응? 대게 뭐할거냐고 그 자리에서 물어보고 대답하면 의자에 앉히지 않나?
문화충격이었다. 여자들은 시술할 헤어디자인에 대해 상담을 먼저 받고 진행하나보다.
직원분은 여러종류의 머리사진이 들어있는 파일철을 펼치며 물었다.
"어떤 스타일 하려고 하세요? 원하시는게 따로 있으신가요?"
"똑단발이요."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 따로 펌이나 염색은 괜찮으시구요?"
"그냥 자르면 되는거 아닌가요?"
스타일링에 대한 무지를 자랑하는 수준의 질문이었지만
디자이너는 별 다른 표정 변화없이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여기 보시면 이런 스타일을 똑단발이라고 많이들 말씀하시는데요."
"이게 그냥 커트만 들어간게 아니에요 다 펌도 들어가고 매직도 들어가고."
"또 머릿결이 손상되니까 영양도 다 들어가고 두피도 케어를 다 해줘야해요."
"블랙 컬러도 블랙 내에서 다 염색이 있어요."
아따, 마! 영업 지리게 해버리네.
그래 이 미모를 안 꾸미는것도 죄야.
화장이야 할줄도 모르고 어차피 전쟁터에서 굴를 인생이니 배울 필요도 없겠지만,
그리고 이미 완성형 얼굴이라 화장을 하면 오히려 미모가 죽을지도 모른다.
그치만 머리는 해야겠지.
갑자기 왜 꾸미냐고 묻는다면 그럴 필요가 있어서 라고 대답하겠다.
"저기요."
"네?"
"견적 얼마가 나오든 상관없으니까, 똑단발 스타일로 제일 예쁘게 해주세요."
우리의 헤어디자이너씨는 영업 성공에 싱글벙글 웃으며 자리로 나를 안내해 주었다.
"어머~ 머릿결이 너무 좋으세요."
"감사합니다."
"아까는 못 물어봤는데 혹시 무슨 모델일이나 연예계 쪽 일 하세요?"
"아뇨, 그냥 집에서 놀아요."
멋쩍게 웃으며 대충 대답하는데도 무슨 질문이 그렇게 많은지
끊임없이 스무고개가 이어졌다. 이러다가 나랑 친구라도 먹을 기세였다.
예쁜것도 참 피곤한 일이구나~
어딜가든 모두의 관심과 호의를 받는 삶이라니
아름답고도 슬프구나.
펌용 롯드가 말린 머리에 비닐을 뒤집어 쓰고 기계 아래에서 열을 쬐는데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한폭의 그림 같았다.
이 꼬라지로 예쁘기 어려운데, 그 어려운걸 제가 해냅니다.
"어머~ 너무 잘나왔다 그쵸?"
시술이 다 끝나고 나니 딱 내가 원했던 그 이미지가 나왔다.
역시 예쁠수록 긴 머리보다는 단발을 치라더니 맞는말 인가보다.
목선과 얼굴선이 그대로 드러나니 훨씬 더 예뻐 보였다.
워낙에 깨끗한 피부톤에 기다랗고 예쁜 목과 솟은 곳 없이 일자로 쭉 뻗은 승모라인과
보기 딱 좋은 적당한 넓이의 가냘픈 어깨까지.
정말로 기가 막혔다.
아앙~
누나 나 죽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