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6화 〉15화 - 너 내 동료가 되라 (16/74)



〈 16화 〉15화 - 너 내 동료가 되라

나는 최대한 편안한 목소리를 가장하며 말했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요, 아무짓도 안할테니까."


 말이 도움이 됐던걸까? 진기한은 조금은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바짝 긴장했던 허리에 힘을 풀었다.

"자, 그래서 저에게 정확히 어떤점이 알고싶으시죠?"

이 사람은 내가 저지른일로 나에게 거짓말은 소용없다고 압박만 했을뿐,
아직 원하는 바를 말하지 않았다.

"아들을 통해 확인하긴 했지만, 다시 묻겠습니다. 그 흔적 본인이 맨손으로 낸게 맞습니까?"

"네, 맞아요. 직접 주먹을 휘둘러서 벽을 후려갈겼습니다."


그는 크흠~ 하고 한번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이어갔다.

"우리와 같은 인간이 맞습니까?"

"푸훗~."


상대방은 어렵사리 말했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고작 벽  깨먹은거 가지고 인간이 맞냐뇨? 그런짓을 할수 있는 사람은 꽤나 많을텐데요?"

진기한은 내 대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요, 어쩌면 스트롱맨 대회 우승자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당신은 명백히 연약한 여성의 몸을 가졌고, 더군다나 그 체구 또한 약해보이기 그지 없습니다."

"그리고 벽을 그렇게 박살을 내놓았음에도 손등엔 가벼운 생채기의 흔적조차 남아있질 않군요."
"당신은 명백히 인간의 그것을 벗어났습니다."

반박할 수 없는 정론이었다.
이런 몸뚱이를 가지고 그런짓을 저지르는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제가 외계인 같은거라고 생각하는건 아니시겠죠? 팩트만 다뤄야하는 기자분께서 상상력이 참으로 풍부하시네요."

기분 나쁘라고 비꼬는 내 말투에도 그는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공포심과 긴장감이 어느정도 풀리며 본인의 평소 모습이 나타나는듯 했다.
뚫어지듯 나를 쳐다보는 눈빛에 먼저 백기를 들어올린건 내쪽이었다.

"생체실험의 결과물이나 사이보그 같은것도 아니니까 그렇게 쳐다보지 마시고요."


너스레를 떨며 대답하자 그도 입꼬리를 슬쩍 말아올렸다.
아무래도 내가 자신에게 적대적이지 않다는걸 확실하게 눈치 챈것 같다.

"미확인 흑색 구체, 뉴스에서 맨날 떠들고 있으니 그게 무엇인지는 잘 아시겠죠?"

"네, 세간의 관심이 주목된 일이니 기자로서 당연히 예의주시 하고 있습니다만..."

지금  얘기가 왜 나오나 싶은 표정이던 그는 이내 말끝을 흐리며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놈이 나타나고 부터입니다. 제가 이렇게 변화된건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말 그대로에요. 강원도에 괴상한게 나타났다는 뉴스속보를 보았고, 그날 밤 끔찍한 꿈을 꾸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보니 몸이 평소와는 다르더군요, 쇳덩이라면 모를까 맨손으로 상가 벽을 부수는것 따위는 그리 힘든일도 아닙니다."


그는 이어지는 내 말에 대경실색을 하며 되물었다.

"그럼 복이씨 같은 사람이 또 있습니까?"


"그건 저야 모르죠, 하지만 나 하나만 특별하다는 생각보다는, 이런일이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도 있다는 가설이  신빙성이 있지 않을까요?"


그는 알겠다는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면 방송에서 찾으시던 이상한 꿈을 꾸는 사람들이라는게..."


"맞습니다. 저와 같은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고 싶었어요. 방송도 그래서 시작한거구요."
"이 방법이 가장 빠른것 같아서요."


그는 제법이라는 듯한 표정을 보였다.
하긴 나는 기껏해야 20살 언저리로 보이는 어린 여자일 뿐이다.
이렇게 능동적으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어떠한 수단을 마련하고
그걸 실행에 옮겼다는것 자체로서 대견하게 보이는 것이다.


"확실히...지금 가진 패중에서 가장 훌륭한 패를 내미셨다고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오밤중에 찾아온 그는 궁금하던 바를 물었고 나는 충실히 대답하였다.
기브 앤 테이크는 관계의 가장 기본인 법.
이제는 내 차례였다.


"이제 제 차례네요? 궁금증은 해결되셨을테고, 단순히 그게 궁금해서 오신건 아니겠죠?"
"그저 호기심에 찾아와서, 그게 충족됐다고 돌아갈 생각이면 많이 실망스러울 것 같습니다."


은근히 압박감을 풍기며 묻자, 진기한은 잠시 고민하는듯 하더니 이내 결심하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복이씨가 무언가를 하려고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방송을 보면서도 느꼈고, 지금 직접 말을 섞어보니 더 확실해졌습니다."


그렇게 본인 주장의 물꼬를 튼 진기한씨는 하나씩 자신의 주장에 뒷받침 되는 근거를 대기 시작했다.

"인터넷 개인방송을 즐겨보는건 아니지만, 여러 사회문제가 일어나기도 하는 무대이니 만큼, 저 또한 어느정도는  바닥 생리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방송을 처음하는 날에 후원금이 물 밀듯이 밀려오는데도 별로 기뻐하는 기색이 없으시더군요."

내가 그랬던가? 후원들어올때 기뻐하는 티를 약간씩은 냈다고 생각했는데.
시청자들이 재벌가 딸이냐고 물은게 돈 받고 별로 안좋아해서 그랬나보다.


"마치 그런 돈 따위 아무 의미도 없다는듯 말이죠. 부자라서 그렇다고 넘겨짚기엔 글쎄요?
여기가 그렇게 고급 아파트는 아니지 않습니까?"

"지난번 저와 있었던 기막힌 사연도 있고 말이죠."


"더군다나 수익의 전액을 기부하겠다는 폭탄 발언까지, 복이씨의 행동은 어딘가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리고 욕설에도 칭찬에도 큰 반응없이 시종일관 헐렁하던 방송 태도를 유지하더니, 방송 막바지에 꿈에 대해 얘기할때는 매우 진지해 지시더군요."


"본인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다른 케이스가 있는지를 찾으려는게 아니라, 무조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느껴지는 말투였습니다."

"종합적으로 벽에 남겨진 흔적까지 떠올려 봤을때, 당신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고, 무언가 목적이 있다."
"이게 제 결론입니다."


역시 먹물 출신이라 그런지 날카로운 추리였다. 그가 내 윗집이기에   있는 결론이긴 했겠지만,
그래도 여러 단서들을 가지고 여기까지 온건 결코 그가 멍청이가 아니라는걸 뜻했다.
내가 미친 살인마면 어쩌려고 용케도 찾아온걸 보면 그 용기도 가상하고.


"시나리오는 잘 들었습니다. 훌륭하네요. 그래서요? 저에게 원하는게 뭡니까?"

"복이씨가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듣고, 알고싶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제가 돕고싶군요."


나는 의도적으로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제가 하려는게 무슨일 인줄 알고 돕겠다고 말하는거죠?"
"사회체계를 부수고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려는 걸 수도 있잖아요?"


진기한은 내가  뱉은 말에 일말의 두려움도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제가 사람을 잘 못 본거겠죠. 시작부터 어긋난 잘못된 도박을 했으니 왕창 잃겠군요."
"가진 밑천을 다 털리겠네요. 어쩌면 가장 중요한 목숨까지 잃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점점  그가 마음에 들었다.
이건 나도 확실히 난놈이었다.
추론력, 판단력, 실행력, 배팅을 거는 배짱까지.
적어도  기준에선 확실하게 인사이드라인, 합격이었다.
그와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것 같았다.


그렇다고 진실을 말해 줄 순 없다.
이럴땐 진실과 거짓을 섞는게 가장 좋은 법이다.
9할의 진실과 1할의 거짓, 인간을 속이고 이용하는데 있어서 가히 최상의 레시피다.

먼저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진실을 콸콸 쏟아 붓는다.

"얼마전 나타난 흑구는 시작에 불과해요, 곧이어 더한 놈이 나타날겁니다."

"앞으로 대 재앙이 일어날겁니다. 인류는 살아갈 터전을 잃고 혼란에 휩싸이겠죠."


"당장에 종말이 찾아오는건 아니지만 제대로 대처하지 않으면 종말에 버금가게 될겁니다."

"이건 일종의 전쟁과도 같습니다. 시간과 인력, 그리고 비용이 필요하니까요."

9할의 진실을 아낌없이 탈탈 털어넣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듯이 격한 눈동자의 떨림을 애써 진정시키며 물었다.


"그게 무슨...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저 모든걸 알고있고 그걸 확신하듯 말할  있는겁니까?"

나는 당당히 그와 눈을 마주치며 한 글자씩 또박 또박 힘을 주어 말했다.

"꿈에서 봤습니다. 그 하얀방에서 말이죠."

음식의 맛을 결정할 최후의 조미료로,
1할의 거짓을  스푼 털어넣는다.

"미래를 보셨다는 말씀이시군요. 보통 그런말을 하면 미쳤다는 소리를 듣겠지만..."
"복이씨는 이미 보통의 인간이 아니시니, 믿을 수 밖에 없군요."

그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듯 침묵하였다가 곧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제게 모든 얘기를 해주셨다는 것은, 저를 믿는다는 것으로 보아도 되겠습니까?"

"믿는다기보다는, 필요하다고 해두죠. 아직 믿음을 운운할 사이는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기자님이 이런 얘기 밖에 나가서 해봤자 누가 믿어주지도 않을텐데요 뭐."

"필요에 의한 관계라...실체 없는 믿음보다 더 확고한 고리로 이어진 사이죠."

"동의합니다. 서로를 필요로 하다 보면 곧 의지하게 되고 그게 곧 믿음으로 이어지는 법이죠."
"근거없는 믿음이 선행되는건 우매한 자들이나 하는짓 입니다."


"그런 이유로 오늘 저를 찾아온건 우매한 도박이었네요."

다소 뒷북이긴 해도  믿고 나를 찾아왔냐는 가벼운 핀잔이었다.

"제 스스로의 사람보는 눈을 믿었을 뿐입니다."


오호~ 날 믿고 온게 아니라 본인의 능력을 믿고 오셨다?
이 양반이 한마디도 안지려고 하네.
그래, 저정도는 되어야 드센 사람들 사이에서 휘둘리지 않고 취재 할 수 있겠지.



"그래서 절 위해 무엇을 해주실 수 있죠?"


"제 능력이 닿는건 뭐든지, 할 수 있는 모든것을 해드리죠."

스파크가  듯한 강렬한 눈빛이 오고가고,
 사람은 약속이라도  듯이 동시에 손을 내밀어 맞잡았다.
마주잡고 흔드는 두 손엔 굳은 결의가 느껴졌다.

나 자신을 잃어버린 빌어먹을 세상에서,
처음으로 동료가 생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