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32화 - 손가락으로 하는 살인
마음껏 쌓였던 감정을 해소하며 긴장이 풀어졌나보다.
흙바닥에서 잠이들다니 말이다.
"곤란한데..."
하얀방에서 정신을 차리자 걱정이 앞섰다. 엄연히 무단출입을 했기 때문이다.
문제가 생기지도 않았는데 전날 밤 CCTV를 굳이 돌려볼 일은 없을테니,
조용히 빠져나갈 생각이었는데. 격렬하게 솟구치는 감정에 매몰되는 바람에 쓰러지듯 잠든듯 했다.
"어쩔 수 없지. 큰 죄를 지은건 아니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뭐."
납골당 같은 곳이 문을 닫은 후에도 찾아오는 유족들이 없는건 아니다.
그들은 들끓는 그리운 감정에 휩싸여 잠긴 문을 부수고 들어가기도 하니까.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순 있겠지만, 도의적으로 비난하기엔 애매한 문제인 것이다.
일단은 이곳에 들어왔으니, 오늘은 시간을 죽이기보단 몸을 쓰는 법을 심도있게 연구했다.
머릿속에 가상의 적을 그려놓고 육체가 기동할 수 있는 한계치를 시험해보며, 어떤식의 파괴와 뒤틀림까지 몸이 견디는지 자해도 조금 시도했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체력의 한계치를 측정해 보기도 하고, 호흡없이 얼마나 견디는지 등 각종 생체실험을 감행했다.
이곳에서 죽음에 이르르는 충격을 받게 되면 몸 상태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확인이 어렵진 않았다. 때때로 실험이 심히 고통스러운 순간도 있었지만, 이런 방식의 단련을 견디는 자를 걸러내기 위해 각성 첫날의 고통이 있는 것이다. 초능력이 생기면 심장이 터질때까지 수십, 수백번의 반복 트레이닝을 감행해야 하니까.
훈련을 이어가던 중, 공간이 와장창 깨져나가기 시작했다.
눈을 뜨자 누군가 내 몸을 살살 흔들며 깨우고 있었다.
"아가씨, 지금 여기서 뭐하는거요?"
아직 이른 새벽, 출근한 수목장 관리인이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아, 죄송합니다. 사정이 있어서 밤 중에 담을 넘어 들어왔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문제가 된다면 죗값은 치르겠습니다."
"이 분 추모 온거요?"
"예에..."
"흠, 이 집에 딸은 없는걸로 알고있는데..."
"은사님 이십니다."
"그렇구려. 앞으로 이러면 안되요. 그땐 이렇게 안 넘어가요."
문제가 있으면 연락하겠다며 연락처를 요구하기에 군말 없이 넘겨주고 자리를 벗어났다.
훔친 물건도 없고 시설을 부수지도 않았으니, 따로 연락이 오진 않을 것이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여명이 다가오기 전의 시간.
가장 어두운 시간이라고도 불리는만큼, 차창 너머로 눈에 담기는 광경엔 적막함만이 가득했다.
집에 도착하니 정말 피곤했다. 몸 보단 정신적으로 지쳤다고 보는게 맞을 듯 했다.
바깥에서 새우잠을 잤음에도, 이 강건한 육체의 컨디션은 그리 나쁘지 않았으니까.
욕실로 들어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깊숙이 가라 앉았던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방송 일정은 시청자들과의 약속이니 미룰 수가 없다.
큰일이 생겼다면 모를까, 조금 우울한걸 빼면 괜찮다고 할 수 있는 상태였다.
어느새 창 밖으로 태양이 떠오르며, 온누리에 밝게 빛을 비추었다.
거울을 보자 침울한 표정의 소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웃자. 이럴때 일수록 웃어야해.
억지로 입꼬리를 당겨 올리자 괴상한 표정이 지어졌다.
결국 손가락을 입에 걸고 들어올리자 그제야 얼굴 근육이 움직였다.
몇번의 안면 스트레칭을 하고 나서야 표정이 자연스레 풀어졌다.
'밖에서 자서 입이 돌아갈 뻔했나?'
애써 가벼운 생각으로 분위기를 환기 시키며 옷을 입고 방송 장비를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몇번이나 왔다고 벌써 익숙해진 길가에서 방송 준비를 마쳤다.
"다들 잘 잤어? 이제 아침이니 일어나야지."
[한창 잘 시간인데...아우]
[해가 중천에 떠야 일어나는데ㅜㅜ]
[아침형인간님이 90,000원 후원 하셨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하루도 화이팅 하세요'
"네~ 좋은 아침이요. 그래요, 다들 아자아자 화이팅 합시다!"
[아 복이때매 강제기상하네 ㅋㅋㅋㅋㅋ]
[미안해 복아 나 너무 졸려 더 자야될거같아...]
[출근길 든~든~합니다]
[오늘 아침도 복이국밥 한그릇 든든하게 하는구먼]
《제목 : 국밥방송 온했다 기어들어와라》
[사진]
아침엔 역시 뜨끈한 국밥이지
출근충들 다 들어오슈~~
ㄴ 밤샌 백수는요??
ㄴ 잠이나 자라 ㅋㅋㅋ
ㄴ 절대 못자지 ㅋㅋㅋㅋㅋ
ㄴ 일단 보고 방송 쉴때마다 끊어서 자라 ㅋㅋㅋㅋ
ㄴ 오늘도 달리기 하는건가?
ㄴ 그럴듯?
"오늘도 저번이랑 같은 코스로 달릴게요~."
[로드마스터님이 100,000원 후원 하셨습니다!]
'저도 지금 아침운동으로 자전거 탑니다'
"오, 자전거 좋죠. 그럼 같이 운동하는 느낌으로다가 가봅시다~."
가볍게 바닥을 밀며 코스 주행을 시작했다.
[로드마스터님이 100,000원 후원 하셨습니다!]
'자전거는 안 타시나요?'
"조만간에 자전거도 한번 타 볼까요? 예전엔 많이 탔었는데."
[안돼 물리학시간이 종료되버려!!]
[달리기가 최고야아아앙!!]
[자전거도 은근히 자세때매 좋을듯?ㅋㅋㅋㅋㅋ]
[자전거는 카메라 뒤에 달아야됌ㅋㅋㅋ]
[오우야...뒤태 생각만해도 크으으으]
[앞모습도 바짝 숙여서 좋음ㅋㅋㅋㅋㅋ]
"떽! 순 머리에 음란마귀만 끼어가지고!"
[저는 늘 순수한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제 마음은 누구보다도 순결합니다!]
[엌ㅋㅋㅋㅋ이새키들 태세전환 보소 ㅋㅋㅋ]
[사이버남친님이 800,000원 후원 하셨습니다!]
'그러고 노는거까진 좋은데 대신 적당히들 하자잉'
[홀리쉣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이버남친 등장ㅋㅋㅋㅋㅋㅋ]
[니가 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일해라 절해라 하지마라!]
[이래라 저래라 아님??ㅋㅋㅋㅋㅋㅋ]
"미모 이용해서 방송하면서 섹시이미지 싫다 뭐, 성적인 시선 싫다거나 그런말은 안할테니까. 대신에 티내지 말고 속으로들 생각해~."
[넵...]
[저렇게 말하니 숙연해지네...]
[우리가 미안하다 ㅠㅠㅠㅠㅠㅠㅠ]
[머가 미안함ㅋㅋㅋ몸뚱이로 장사하는데 솔직하니 호감이네]
[장사? 미친 X발새끼가 돌았냐? 자기앞으로 한푼도 안가져가는데]
민감한 주제이니만큼 채팅창이 험악해졌다.
개인적으로 누가봐도 복장이나 컨셉이 유혹이면서 말로는 딴소리 하는걸 좋게 보진 않았었다.
도를 넘는 야한표현에 눈물을 흘렸다거나하는, 그런말에 사실 이해는 하더라도 공감은 못했었다.
본인이 그런걸로 관심받아서 떠놓고, 돈 벌어놓고 이제와서 싫다거나 상처받았다거나 하는것들 말이다.
그리고 좋은걸 보여주면 그냥 조용히 보면되지 그걸 꼭 발정난 티를 내며 당사자 귀에 들어가게 만드는 놈들은 이해 조차 못했었다. 나랑은 뇌 구조와 사고방식이 아예 다른 무언가라고 생각했을뿐.
후자는 여전히 이해조차 안되지만, 익명성이라는게 원래 그런 성질을 가지는 법이니 납득은 된다.
그런데, 전자는 내가 겪어보니 멘탈이 흔들릴 수도 있다는걸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아직까지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몸을 잠시 빌려쓰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경향이 강하다.
분명히 내 몸이지만, 미묘하게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나 스스로를 여자라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타인이 날 매력적인 여자로 바라보며 어떠한 욕망을 내뿜더라도 나 또한 제3자와 비슷한 어딘가에 위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기에, 약간의 불쾌함만을 동반할 뿐인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내가 공감해주지 못했던 그녀들에겐, 비록 그것이 스스로 선택한 길 일지언정 아픔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걸 알게되었다. 회사에서 월급 준다고 늘 감사한 마음으로 일을 하는건 아니지 않은가.
"아무튼 막말하는 친구들. 얼굴 안보이니까 그러는건 잘 아는데, 크게 상처받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좀 고쳐. 악플러들 다 키보드에서 손 떼라구~."
탁-탁-탁-
규칙적인 발소리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며 생각했다.
악플에 의해 죽어간 사람들, 앞으로 죽어갈 사람들.
그저 그런 삶을 살았던 나는 사실 그들이 죽든지 말든지 별로 큰 관심이 없었다.
그 돈을 가지고 왜 죽나? 나는 이렇게 일하고도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는데.
돈을 쉽게 벌어서 멘탈도 약한가? 당장 내가 너무 힘들때면 그런 인간 이하의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라면, 내 말 한마디를 수천 명이 듣게 되는 이 곳이라면.
적어도 내가 옳다고 생각해왔던 이야기정도는 꺼내도 되는게 아닐까 생각했다.
달리기를 이어갔다.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르게. 조금 더.
[복이 화났나...말없이 뛰네]
[근데 진짜 ㅈㄴ 빠르네 허]
"화난거 아니고, 잠깐 생각 좀 정리하느냐고 그랬어요."
"악플러들, 악의적으로 키보드 몇번 두드린 그 행동이 누군가에겐 무엇보다도 날카로운 비수가 될 수도 있다는걸 꼭 인지해줘요. 다른게 살인이 아니야. 그짓도 살인미수나 다름없어."
이쯤하면 됐겠지. 나는 말투와 표정을 바꾸며 다른 주제의 이야기를 꺼냈다.
"어젯밤에 그 꿈 꾸신분들 계신가요?"
[백색공포증님이 30,000원 후원 하셨습니다!]
'저 오늘 꾼거같아요 처음이지만 너무 기억이 생생해요'
"맞아요. 하루만 꿔도 잊을 수가 없죠. 정신차리고 나면 망각하는 평범한 꿈이랑은 뭔가 달라요."
[나도...오늘 꿨어 아침에 눈 떴는데 너무 무서웠어]
"무서워 하지마. 괜찮을거야. 나도 벌써 꽤 됐는데 괜찮으니까. 응? 너무 걱정하진 말자."
[그 꿈 관련해서 기사도 났던데?]
"그래? 많이 났어?"
[많이 나진 않았고 최초 보도 하나에 그거 고대로 배껴서 따라 쓴 기레기들 후속보도 조금]
코스를 다 돌고 벤치에 앉아서 기사를 확인해봤다.
<현대인의 신종 질병? 불면증의 진화인가?>
<정신질환의 일환으로 봐야 하는 것인가? 백색방의 공포>
<동시다발적으로 여러사람에게 나타나는 증상이 있다?>
<갑작스레 증가하는 이상한 꿈. 재앙의 징조일수도 있다.>
<백색의 세상과 검은색의 미확인 구체의 상관관계는?>
제목만 다르지 내용은 다 비슷했다. 애초에 이에 대해 제대로 된 취재를 한건 진기한 하나뿐이니까.
나머지는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들과 진기한의 기사를 보고 배껴서 썼을 뿐이다.
꿈에 대한 이상현상은 앞으로도 계속 나타날 것이므로 9시 뉴스에서 보도하는것도 금방일거다.
운동도 끝났으니 방송을 마치려던 내 귀에 자그맣게 어디선가 앓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끼이잉..."
"이게 무슨 소리지?"
나는 카메라가 전방을 비추도록 돌리고 천천히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