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51화 - 야밤의 불청객
보급대가 오자 부대의 분위기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진입 다음날에 왔어야 할 보급이 3일이나 더 지난후에 왔으니 그럴만 했다.
외부와 완전히 단절 됐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쉽사리 떨쳐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예? 사망자가 백여 명에 달한다고요?"
"고작 몇 마리의 접근을 허용했을 뿐인데 발생한 피해입니다. 적들의 저력이 생각보다 더 뛰어납니다."
도착한 보급대장은 회의에서 입을 다물지 못할 놀라운 소리만 연속해서 들어야했다.
여태까지의 전투현황과 피해상황, 이 곳의 커다란 규모와 아직도 다 탐색하지 못했다는 것까지.
"보급이 늦었다는건 대체 무슨 소립니까? 저희는 약속된 때에 맞춰서 투입되었습니다."
"역시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이 곳과 바깥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게 분명하군요."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는 충격적인 사실보다도, 앞으로의 보급이 매일이 아닌 수일에 걸쳐 들어온다는 현실이 더 피부에 와 닿았다.
군인들이 상황회의를 하는 동안, 나는 얼른 보급대의 규모에 대해 듣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보급대는 현재 백이십사 명으로 구성 되었습니다. 두 번째 투입인지라 보급보다는 전투원의 보충에 더 비중을 뒀습니다. 다음에 오는 인원들은 정말 물자만 잔뜩 챙겨오는 보급대일 확률이 큽니다."
124명이 우리와 같은 군장을 싸고 왔다는 얘기였다.
나쁘지 않았다. 전사한 인원만큼 그 자리가 다시 채워지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장군들은 전쟁을 할때 사람 목숨을 그저 숫자로 계산한다더니 이런 환경에 계속 처해있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찾아오는데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표식을 잘 해두었더군요. 아마 이후에 올 후발대들도 헤맬 걱정은 없을겁니다."
"예, 비전투원들이니 때에 맞춰 인솔 인원들도 보낼테니 문제 없겠습니다."
"하긴, 캠프와 포탈이 그리 멀지 않으니 그 방법도 가능하겠군요."
모든것이 순조로웠다.
소모됐던 전투원들이 채워졌고, 전투물자도 어느정도는 충당이 됐다.
그리고 전투경험이 쌓인 수백의 살아남은 병력들이 있었다.
비록 계획과는 달라졌지만, 앞으로도 주기적으로 보급이 들어온다고 생각하니 공략이 멀게만 느껴지지가 않았다. 여전히 한정된 자원이긴 하지만, 완전한 고립이 아닌, 어떻게든 버텨만 내면 계속해서 채워진다는건 사람들에게 막연한 희망을 안겨주었다.
이번 회의에서 분대 규모가 조정되었는데, 소수로 다녀봤자 의미가 없다는 판단하에, 백여 명으로 구성된 3개의 중대로 나누었다. 교전이 일어났을 때의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하여 화력집중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
보급이 왔지만 임무는 별 다른 변화 없이 현 체제를 유지하는걸로 회의가 마무리 됐다.
전투원이 보충 됐을뿐, 모든 인원이 나눠쓰기엔 탄약이 충분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3일 후 돌아오는 보급에 맞춰서 전면적인 움직임을 가질 생각이었다.
다음 보급엔 전투원이 들어오지 않을테니, 현재로선 최대한 전투원 소모를 피해야했다.
자리로 돌아오자 한소희가 손가락에 희미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오~ 열심히 하고 있네?"
"네, 조금 재미있어요. 신기하기도 하구요."
"너무 무리하지 말고, 초능력은 극도의 피로감을 동반하는 경우가 잦으니까."
"걱정마세요. 그보다 언니가 회의 하는 동안에요, 이 상태로 계속 있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 상태는 준비 단계의 느낌이에요. 이렇게 되기까지 집중이 필요한데, 한 번 성공하고 나면 언제든지 뿜을 수 있을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래? 그래서 느낌대로 사용은 해봤어?"
"아뇨, 언니 오면 하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 상태가 얼마나 유지되는지 정말로 소모되는건 없는지 확인도 할 겸요."
"그래, 실험으로 알아내려는 그런 탐구심이 중요한거야. 기특하네 알아서 잘하구. 그럼 테스트도 할 겸 잠깐 일어나야겠네."
바깥에서라면 하얀방에서 초능력 시험을 비교적 손쉽게 할 수가 있다.
꿈에서의 수련은 실질적인 능력의 상승은 이루어지지 않지만, 현재 가진 능력 한도에서 어떻게 해야할지를 알 수 있는것 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
캠프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능력 확인을 시작했다.
한소희는 언제든지 할 수 있을것 같다는 말과는 다르게 끙끙대며 넝쿨을 뿜어내지 못하였다.
손끝이 아까보다 눈에 띄도록 밝고 푸르게 빛이 나는데도 뽑아져 나오는건 없었다.
"왜그래? 뭐가 잘 안돼?"
"끄응...왜 안되지...? 분명히 준비가 다 됐다는 느낌이 들긴 드는데요."
"음? 혹시 그건가?"
나는 허리춤에서 대검집을 뽑아내어 근처의 바닥에 꽂았다.
"여기다가 해봐."
한소희가 대검을 바라보고 땅을 향해 손가락을 펼치자 속박 능력이 발동되었다.
꽂혀 있던 물건이 그대로 넝쿨에 칭칭 감겼다. 칭칭 감긴채로 발견되었다는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보이는 것처럼 정말 빛의속도만큼 빠를지도 몰랐다.
"이거 만지면 위험할 것 같아?"
"잘 모르겠어요. 그치만 그렇진 않을 것 같아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만지지 마세요!"
"초능력은 너의 감각이 가장 중요한거야. 니가 느끼기에 접촉이 위험하지 않을것 같으면 그런거야."
손을 내밀어 넝쿨을 건드려보았다.
신기하게도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대검을 그대로 손으로 움켜쥐었지만, 힘을 주어 당겨보아도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상당히 신기한 능력이네. 육안으로 보기에 질감이 느껴지길래 만져질 줄 알았더니, 그냥 홀로그램처럼 통과해 버리잖아? 그리고 이 대검은 완전히 여기에 못 박힌듯 멈춰버렸네. 혹시 이걸 이대로 움직일 수 있겠어?"
"잡은채로 물체를 움직여보라는 거죠? 음, 아뇨. 못 하겠어요."
"그럼 더 강하게 쥐어서 압박을 가하는건?"
"그것도 모르겠어요."
지금 안되는건지 앞으로도 영영 안되는건지는 훈련을 더 해봐야 아는 법이지만, 어찌됐든 준비단계가 필요하다는걸 안 것 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이젠 마지막 실험을 한가지 해보고 들어갈 참이었다.
나는 대검을 소희의 등 뒤에 꽂고는 능력 사용을 요구했다.
"안 돼요."
"그래, 고생했어. 이제 들어가자."
능력 사용을 끝내자 두통과 어지럼증이 몰려오는지 한소희가 비척거리기 시작했고 결국 나에게 업힌 채 캠프로 돌아왔다. 초능력은 사용하는 순간의 소모와, 사용이 끝난 후의 반동이 뒤따라 온다.
고작 한 줄기로도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저번에는 어떻게 아무렇지 않았던 건지가 의아했다.
어느정도 예상은 했지만, 한소희가 물체라고 인식을 해야만 능력 발동이 가능했다.
또한 시야에 잡혀야 붙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번 붙잡아만 두면 시야에서 벗어나도 상관이 없었다.
나는 공기중에도 분자형태의 물질들이 존재하니까 그걸 한번 붙잡아 보면 어떻겠냐고 설명 해봤으나, 그녀는 그저 난색을 표했을 뿐이었다. 이게 인식의 문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어찌됐든 현재로선 불가능했다.
잠자리에 돌아와 텐트에 몸을 파 묻었다. 공략의 실마리가 보이자 간만에 마음이 편안했다.
'지금까지 처럼만 하면돼. 지금까지 했던대로만...'
그날 밤은 악몽을 꾸지 않았다.
"으아악!"
기상시간보다 먼저 일어나지 않은 점은 좋았다. 푹 잤다는 얘기니까.
알림소리가 익숙한 기상하십시오라는 소리가 아닌 점은 나빴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얘기니까.
용수철이 튕기듯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옆자리의 한소희도 소란에 깨어나 상체를 일으킨 채 한쪽 팔로 바닥을 짚으며 상황 파악을 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았다.
메뚜기였다. 어쩌면 곱등이 일수도 있었다. 곤충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정확한 종은 모르지만, 지금 그딴게 중요한건 아니었다. 다행히 변형은 없이 거대화만 이루어진 괴수였다. 전갈꼬리를 달고 있는 곤충 녀석들도 있는데 그 놈들은 독 때문에 훨씬 위험하다.
건장한 성인의 팔뚝만 한 동체를 가진 놈들은 뒷다리로 펄쩍 펄쩍 뛰어가며 사람에게 튀어올랐다.
'어째서 이렇게 접근하도록 경계병이 알아채지 못했지?'
보호색 때문이었다. 야행성인 놈들이 어둠을 틈타 초원의 색과 비슷한 색깔로 큰 소음 없이 다가오자 지근거리에 올때까지 눈치채지 못한 것이었다. 경계의 소홀함도 한 몫했을 것이다. 여태까지 취침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므로.
"전원 기사앙! 습격이다!"
지금 사격을 하면 아군이 말려들고, 뛰어다니는 거대 곤충을 정확히 조준해서 쏘는것도 쉬운게 아니었으므로 모두 총검을 소총에 착용하거나 손에 쥐었다. 개머리판으로 후려치는 병사들도 있었다.
나도 빠르게 곤충들이 날뛰는 곳으로 달려가 군홧발로 놈들을 짓밟았다.
얼굴로 튀어오르는 놈을 손등으로 쳐내니 배가 터져나가며 진액을 질질 흘려댔다.
독이 있거나 살상력이 대단한 놈들이 아니었기에 처리가 어렵진 않았다.
손에 쥔 대검으로 한 호흡에 세 마리를 베어버렸다. 문제는 모닥불 빛에 의존해야 하기에 시야가 그리 좋지 못했다는 것이다.
피유웅-
그때 조명탄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주변이 대낮처럼 밝아지자 군집한 놈들이 그대로 드러났다.
수백 마리를 훌쩍 넘는 대형 군집이었다.
"쏴!"
사람과 뒤섞이지 않는 군집을 향해 화망을 형성한 사격이 이어지고, 놈들은 미친듯이 날뛰며 우리에게로 달려들었다. 이미 진형에 들어와 있는 놈들을 처리하기 위해 이리뛰고 저리뛰며 진땀을 뺏다.
기습임에도 불구하고 놈들이 그리 강하지 않다는 생각에 부대는 점차 안정을 되 찾으며 진압을 해 나갔다.
한 걸음 크게 내디디며 바닥에 있던 놈을 밟아 터뜨렸다.
동시에 좌우로 튀어오르는 두 놈에게 왼 주먹과 대검을 먹여주자, 전방으로 튀어오른 두마리가 얼굴에 닿을 듯 가까워 왔다. 고개를 틀며 한 놈을 베어버리고,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 사이에 등 뒤에 매달린 놈을 몸을 흔들어 털어 낸 뒤 발로 짓눌러 으깨버렸다.
곳곳에서 같은 상황이 이루어졌다.
이내 전투가 끝나고 전황 정리가 시작됐다.
놈들에게 물어 뜯겨 상처를 입은 병력들이 꽤 있었지만, 피륙의 상처에 불과했다.
재수 없게 목덜미를 수차례 공격 당한 전사자가 한 명 발생했다. 잠시 애도의 시간을 가지고 그의 유품을 챙기고 시신을 매장했다. 표식을 해 뒀으니 공략에 성공한다면 찾아내어 가족에게로 인도 될 것이다.
놈들을 처리하며 사방팔방으로 튄 체액도 골칫거리었다.
곤충 특유의 진액이 몸과 옷에 들러붙어 끔찍한 악취와 혐오감을 불러 일으켰다.
마음 같아서는 한번에 씻고 싶었지만,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르기에 순번을 정해 차례로 냇가에서 몸과 의복을 닦아내었다. 오랜만에 잘 잤다 싶었더니, 참으로 개같은 새벽녘이었다.
"으, 언니이. 제 몰골 좀 봐요. 토할 것 같아요."
"나도 구역질 나올 것 같아. 차라리 피가 낫지. 이거는 정말 역겹네."
진액을 닦아내고 옷을 벗어 물에 대충 빨아서 짜내고 입었다. 이 곳에서 옷을 물에 대충 헹구고 입어 체온으로 말리는 일은 이미 익숙했다. 실제로 구토를 하는 인원들도 꽤 나왔다. 남녀를 불문하고 커다란 곤충의 잔해는 혐오감을 주기에 충분했기에.
진영 내부에서 죽은 놈들의 잔해를 치워내고 불태웠다.
역설적이게도 놈들이 타들어가는 고소한 냄새는 오히려 식욕을 자극했다.
곧 있으면 해도 뜰터라, 다시 잠자리에 들지 않고 그대로 일과를 시작했다.
인원들이 재정비를 하는동안 서서히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아직 태양이 떠오르진 않았으나, 하늘은 이미 하얗게 샌 그때였다.
여명과 함께 찾아온 그것은,
이제서야 타오르기 시작한 작은 희망의 불씨를 까맣게 다 태우고도 남을 지독한 것이었다.
부아아아아앙-투두두두두두두웅-
어디선가 대기를 떨어울리는 거친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