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8화 〉57화 - 안녕히, 안녕히. (58/74)



〈 58화 〉57화 - 안녕히, 안녕히.

날이 완전히 밝고 회의 시간이 되었다.
실상 회의라기 보다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내가 연설을 하는 자리였다.

"여러분, 어제 보셨다시피 전투부대가 괴멸 되었습니다. 현재 전투인원이 부족한 상태에요. 내일이나 모레에 새로운 전투원들이 오겠지만, 그때까지 우리가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여러분을 무장시킬 생각인데 이의 있으신분 있습니까?"

"싸워야 한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요?"

"이렇게 위험하다는 얘기는 없었다고요!"

"계약이랑 다르잖아! 이런 법이 어딨어? 내가 나가면 가만히 있을것 같아?"

여기저기서 항의가 빗발쳤다.

"여러분보고 싸우러 나가라는게 아닙니다. 최소한의 자기보호를 위한 무장을 부탁드리는 겁니다. 다음 보급이 올 때까지 주둔지에서 머물겁니다. 하지만 이 곳으로 적들이 쳐들어올 때 두 손 놓고 그냥 당하실 겁니까?"

"우리는 보급품 이송에 대한 임무의 보상만 약속 받았습니다. 그런 심적 부담을 진다면 무언가 합당한 보상이 있어야지요!"

"옳소! 이런 식으로 꽁으로 부려 먹으려는지 알게 뭐요!"

니들 개죽음 당할까봐 대비를 위한 무장을 하라는데도 뭐가 저렇게 불만이고,  와중에도 이득을 보고 싶은 걸까. 비록 돈이 필요해서 들어왔지만, 최소한의 신념은 가지고 있던 자들과 함께하다가 속물들을 보니, 괜히 입안이 까끌거렸다. 어쩌면 저게 맞는걸지도 몰랐다. 가슴을 진동시키던 낭만주의자들은 모두 떠났으니까.

"그 점은 제가 책임지고 나가서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총대를 매는 사람이 있으면 불만있는 자들은 조용해 지는 법이다.
내가 책임지겠다고 하자 다들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이 말을 기다렸겠지.

"이 중에 총 쏠  모르시는 분 계십니까?"

남자  명과 여자들 전부가 손을 들었다.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에게 구체적인 무장 지시를 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조준하고 방아쇠만 당기면 되는 소총과 기관총으로 무장했으니 큰 문제는 없을터다.

병사중에 포병 주특기를 가진 인원이 하나 있어서 그에게 무장을 하지 않은 인원들 여러 명을 보조로 딸려 붙였다. 저 정도 인원의 보조면 박격포 한대로도 분당 최대 발사수를 난사할테다.
나머지 비전투원들은 기관총의 탄띠를 삽입하는 역할로 지정했다.
장전이 받쳐주면 성능이 확연히 오르는 화기들에 보조를 잔뜩 붙여놨으니, 부대 화력이 얼추 갖춰진 셈이다.

"여러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혹시 모를 상황에 방어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비일 뿐입니다."

나는 대중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그야말로 사력을 다했다.

"언니는 지금도 여전히 고군분투하시네요."

"다  업보지 뭘. 이제 와서 누굴 탓하겠어."

내 자리로 돌아가자, 곧바로 틱틱거리는 한소희는 예전의 성격으로 돌아온듯 했다.
귀여운 깍쟁이 같으니라고.

주둔지에서 딱히 할게 없으니, 초능력 훈련이나 하기로 했다.
약간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우리는, 일단 한소희의 능력부터 점검해 보기로 했다.
그녀의 열 손가락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왔다.
빛이 진해지며 열 개의 줄기가 뻗어 나왔다.

"능력이 성장했구나?"

"네, 조금 무리하면 주먹까지도 가능할 거에요."

"그래,  풀려서 망정이지. 다음부터는 저번처럼 그렇게 무리하면 안돼."

"알겠어요. 그래도 죽는것 보단 낫잖아요."

이젠 내 차례였다. 일전에 한소희가 했던 과정을 그대로 답습해야 했다.
눈을 감고 그날의 심상을 떠올려본다.
분노, 좌절, 무기력, 후회. 포탈에서 느낀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스쳐간다.
아니다. 이게 아니었다. 이런 감정들은 도움은 됐을지언정 정말 필요했던 게 아니었다.

내가 원했던 건 절망적인 상황을 뒤집어 버릴  있는, 한 가닥 희망.
무한한 가능성. 아픔을 딛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용기.
살아갈 의지.   자체.

두근- 두근- 두쿵- 두쿵―

심장이 고동소리를 냈다.
고요한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듯.
갓 태어난 아이처럼 힘껏 소리내어 울었다.

검은 안개로 만들어진 왕관이 머리에 씌워졌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만천하에 새로운 왕이 탄생했음을 선포하듯.

눈을 뜨지 않아도 주변이 상세하게 느껴졌다.
제3의 감각이 열린듯한 기분이었다.
반개한 눈을 뜨자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지금  상태가 준비단계 라는걸.

손을 내밀어 주먹을 쥐었다.
바닥에 꽂혀있던 나뭇가지가 보이지 않을때까지 땅속을 파고들었다.
한점을 기준으로 움켜쥐거나 반대방향으로 힘을 써 공중으로 띄운다거나 하는건 먹히지 않았다.
그저 만유인력의 방향을 따라 더 과중한 힘을 부가할 뿐이었다.

힘을 사용하는 동안 심장박동이 엄청나게 올라갔다.
이러다 심장이 터지는게 아닐까 싶을정도로 가슴에 과도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반동으로 온몸의 근육이 쥐어짜지는 듯 혹사당하며 서있는 것조차 힘들어 바닥에 주저 앉아버렸다.

"괜찮아요?"

"응, 처음이라 그래. 너는 멀쩡해 보이네?"

"조금 어지럽긴 한데, 한 번 극약처방을 해서 그런지 견딜만하네요."

어느덧 시간이 오후를 넘어서 저녁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총 108명의 인원. 27명의 비전투원을 제외하면, 81명이지만.
탄약 보조가 붙고 안 붙고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므로, 100여명의 유효 전력이 있는 부대로 볼 수 있었다.

주둔지는 저녁식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사실 준비랄 것도 없지만.
나는  와중에 김준 병장이 꼰대중에서도  꼰대라는걸 깨달았다.
일전의 공략대는 각자 자기 가방에 식량을 넣어두고 먹었다.
식사시간이 정해져 있긴 했지만, 본인 가방에서 꺼내먹는 그런 느낌이었단 얘기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난민들 배식하는 것 마냥 줄 세워두고 하나씩 나눠주고 있다.
두 개씩 받아 갈까  그러는지 얼굴과 이름도 외울 듯이 철저하게 확인했다.
고작 백 명이 조금 넘는 인원이니 금방 나눠주긴 할테지만, 어떤 의미로든 어메이징한 인간이었다.

한소희와 나는 순번의 가장 뒤에 섰다.
따로 식량을 빼주며 배려하려고 하기에 괜찮다고 거절했다.
팀장이라는 허울로 그런 별것도 아닌 편의를 제공 받으려다가 누군가의 원한을 사고싶진 않았기에.

"오 팀장님,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네, 김 병장도 맛있게 드세요."

"한소희 씨,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아, 네. 김준 씨도 그러세요."

목도  아픈가. 모든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식사 인사를 해줬다.
이걸 좋다고 해야할지 나쁘다고 해야할지.

"언니,  사람 완전 FM이네요? 당황스럽네요."

"그러게, 직업군인들도 안 저랬는데. 그 분들이 특이했던 건지 저 사람이 특이한 건지."

"저렇게 매사에 진지한 사람 처음봐요. 막 이상한 사람인거 아니에요?"

"아닐 거야. 좋게 봐줘야지. 지금이 위기 상황이라고 생각해서 더 철저하게 하려는것 같은데. 지금도 사람들이 새로운 보급대장한테 의지하는게 보이잖아. 본인도 피곤할텐데 저렇게 하기가 쉬운것도 아니잖아."

"듣고 보니 또 그렇네요. 열심히 하는 사람한테 괜히 뒷담화 한것 같아서 미안하네. 헤헷."

혀를 삐쭉 내밀며 민망해 하는 그녀를 일별하며 자리로 돌아왔다.
지평선을 바라보며 천천히 식사를 하고 있자니 뉘엿뉘엿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여기가 딴건  별로여도, 풍광하나는 정말 끝내주네."

"그건 그래요. 너무 깨끗하고 좋아요. 숨 쉬는게 이렇게 기분 좋은건줄 이제서야 깨달았다니까요."

"빗물도 그냥 마셔도 돼. 산성비도 아니라 맞아도 대머리도 안 될걸?"

"언니..."

"응? 왜그래?"

"언니, 혹시 탈모인 거에요?"

"에? 무슨소리야 갑자기?"

"말 안하려고 했는데, 대머리 얘기 하시는거 보니까...언니 지금 머리가 듬성듬성 비어있잖아요."

"아, 이거 전투 중에 머리에 부상 입어서 그래! 탈모는 무슨 얼어죽을 탈모야. 큰일 날 소리를 하네 얘가."

"아, 아~ 부상? 괜히 오해했네요.헤헤헷."

보복으로 그녀의 말총머리를 쭈욱 잡아당기자 장난치는  꼭 남자애들 같다며 질색을 했다.

어둠이 찾아오고 모닥불이 타올랐다. 고작  명의 군인들이 근무를 도맡기에 나와 한소희가 한 타임씩 맡아주기로 했다.

김준의 말로는 어차피 근무는 안서고 자빠져 잘테니 못 믿어서라고 둘러댔지만, 내가 보기엔 시켜도   것 같다. 자기들이 왜 불침번을 서냐고 난리를 치고, 그에 대한 보상 운운하겠지. 예비군은 즉시 전력이 아니라는 말이 완전히 헛소리는 아닌 것 같다. 근데 예비군이랑 민방위가 우리나라 주요 전력 아니었나?

한소희와 나는 그리 많은 잠이 필요 없기에 초번초 근무를 늘려 두배의 시간동안 서주었다.
근무 하나를 서준다고 해놓고 시간상 두 개를 서주는 셈이 되자, 병사들이 굉장히 고마워했다.

혹시라도 다시 공격이 있을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변을 살폈다.
한소희도 벌레에게 당한 기억이 강렬하게 남았는지, 농땡이 피우지 않고 주변을 열심히 살폈다.

교대 시간이 되고 다음 근무자의 표식이 되어있는 텐트로 가서 사람을 깨웠다.
한소희 쪽을 슬쩍 보자 다음 근무자의 어깨를 마구 흔들며 깨우고 있었다. 충격이었다.
기존에 초인들은 근무 제외였기에 애초에 근무라는걸 처음 서 볼테니, 그럴만 하긴 했지만...

"일어나세요. 근무시간입니다."

"으음...네에..."

그래, 이렇게 접촉 없이 목소리만 들어도 일어나는게 대한민국 군인이란 말이다.
근데 이거 좋아할 일이 맞는건가? 푹 못자고 늘 긴장상태라는 거 아니야?
어찌됐든 교대를 마치고 각자의 텐트로 돌아왔다.

"안녕히 주무세요 언니."

"그래, 너도 잘자고."

저렇게 예의 바른앤데...몰라서 그랬던거야 몰라서.
자꾸 신경쓰이는걸 보니 자고 있는 사람의 어깨를 마구 뒤흔들던 충격이 꽤나 컸나보다.

밤하늘을 잠시 감상하다가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꿈 속에서 수 많은 사람들의 행렬을 마주쳤다.
얼굴만 아는 사람, 이름도 아는 사람, 조금 더 깊이 아는 사람.
모두 나를 지나쳐 가며 어깨를 만져주고, 머리를 만져주었다.
눈을 맞춰주었고, 작은 미소를 지어주기도 했다.

기나긴 행렬이 끝나고, 나는 뒤를 돌아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잘가요. 잘가요.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잘가요. 잘가요. 두 손을 모아 크게 소리쳤다.
안녕히. 안녕히. 마주잡은 두 손으로 기도를 했다.

부디, 안녕히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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