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61화 - 정신차려 오 팀장!
"기상! 기상 하십시오!"
이제는 익숙한 알람음 같은 저 외침을 시작으로 공략대의 하루가 시작됐다.
이른 새벽이 아닌, 오전 중에 일어났음에도 대원들은 많이 피로해 보였다.
나와 한소희는 동이 트자마자 먼저 일어나 수 시간의 정찰을 마친 뒤였다.
물이 벌써 다 떨어졌기에 식수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다행히도 오늘 내에 당도할 거리에 있는 개울을 발견했다.
인원들의 준비가 끝나고 이동이 시작됐다.
짐 배분이 적절하게 이루어졌고, 비전투 인원들은 박격포와 기관총의 탄약수로 재배치되었다.
지원화기와 공용화기는 장전이 받쳐주면 성능이 배로 뛰기에 최대한의 활용처를 찾은 셈이다.
장거리에선 보조를 돕다가 근거리에 접어들면 개인화기를 쓰는게 가장 좋지만, 나는 아직 그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괴수한테 죽고 말지, 뒤통수에 총알이 박히기는 싫었다.
현재 전투원에 비해 탄약이 남아도는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다음에 오는 보급이 여태까지의 순서대로 순수한 보급만 들어온다면 탄약이 아니라 시간당 화력이 모자라는 상황에 직면하게 생겼다.
전투원이 건실할 때는 탄약 부족에 시달리고, 지금은 그 반대의 상황에 직면하니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목적지까지 두 시간정도의 거리를 남기고 땅을 울리는 진동과 함께 지평선 너머로 괴수의 군집이 달려오고 있었다. 분명히 목적지까지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을 하고 왔었다. 진입 초반에 마주친 놈들은 우리가 찾아다닌 거였고, 교전은 우리의 선택사항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먼저 달려오는 놈들을 마주하기 시작했다. 종국엔 주둔지까지 여러 번 쳐들어 왔고.
그렇다는건 저놈들이 우리를 알고 찾아 왔다는 얘긴가?
괴수가 누군가의 지시를 받는단 얘기는 금시초문이다.
시야가 보이지도 않는데 선제공격을 위해 먼저 움직인다는 것도 들어보지도 못했다.
포탈엔 특정한 의지 같은게 없다. 혼란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저 조합을 보라.
누가봐도 영혼까지 끌어모았다는 게 역력한 괴수들의 군집이었다.
개, 치타, 곰, 코뿔소, 독수리까지 이 곳에서 마주한 모든 종이 한번에 몰려오고 있었다.
"대형 갖추고 전투 준비이이이!"
달려드는 괴수에게 적합한 대형을 취하며 화기들을 배치했다.
전투를 겪어보지 않은 인원들이 잔뜩 긴장하는게 느껴졌다.
손을 떨지언정 이번엔 도망치는 사람이 없었다.
펑-삐이익-슈웅-쉬이익-
초탄의 탄착지점을 확인한 박격포들이 효력사를 시작했다.
하늘에서 빗발치는 포탄세례에 괴수들이 정신을 못 차렸다.
포탄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괴수들의 처참한 잔해만이 널브러졌다.
"맛이 어떠냐! 괴물새끼들아아아!"
전투의 흥분으로 마음껏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인원들도 나왔다.
비행속도가 시속 300킬로미터를 웃도는 괴물 독수리는 초당 백 미터씩 접근하는 아성을 선보였다.
놈들이 대열을 맞춰서 접근했으면 지상과 대공을 동시에 사격해야 되는 최악의 경우가 벌어졌겠지만, 그 정도로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게 천만 다행이었다.
전투원들이 일제히 총열을 높게 들어올렸다.
"전원! 사격 개시이이익!"
장 대위의 명령과 함께 탄환이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지상을 향해 쏘아지는 포탄과 상공을 향해 쏘아지는 탄환이 일대 장관을 이뤄냈다.
그 화망을 뚫고 기어코 달라붙는 녀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선회해 포대쪽을 노리는 놈들도 있었다.
"소희야! 뒤로!"
"네!"
한소희를 포대쪽으로 보내고 이쪽은 내가 맡기로 했다.
쏜살같이 달려나간 그녀가 넝쿨을 보내 사람을 찍어내기 직전의 독수리를 붙들었다.
투다다당-타다당-
왼손의 넝쿨과 오른손의 사격으로 버티던 그녀가 이내 양손을 다 사용하며 외쳤다.
"쏴요!"
포대의 인원들이 소총으로 놈들을 쏴서 정리했다.
진형의 전방에 내려온 놈들도 사정은 같았다.
놈들은 공격이 성공하기 직전에 바닥에 잡아당겨지듯 처박히기 시작했다.
한소희도 나도 최선을 다했지만, 피해를 전무하게 할 순 없었다.
그러려면 초능력을 무리하게 끌어와야 하는데, 그건 최선을 다한게 아니다. 무리해서 망쳐버린거지.
우린 지상 괴수들과의 전투도 이어가야 했기에, 능력을 적당히 조절하며 사용했다.
공중 폭격기나 다름 없는 놈들을 처리한 대가치고는 피해가 아주 적었다.
그리고 이내 사거리로 다가온 지상을 향해 발포를 시작했다.
아끼지 않고 쏴댄 박격포의 위용에 놈들은 이미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따라라라라라라라라락-투두두두-투다다다당-타다당다다다당-
전방을 향해 집중포화가 이뤄지고, 날쌘 몸으로 기어코 접근해내는데 성공한 소형 개체들은 그대로 척추가 접히며 땅바닥에 처박혔다. 이미 숨이 다했음에도 달려오던 관성에 의해 쓰러지며 진형에 부딪히려는 거대 코뿔소는 한소희가 붙들었다. 앞의 동료를 방패삼아 오던 놈이 그대로 뒤꽁무니에 부딪히며 균형을 잃었다. 다시 일어나기도 전에 날아드는 총탄에 벌집이 되어버렸다.
총탄과 초능력까지 극복하고 접근한 놈들은 그 울분을 풀기라도 하듯 인간의 목숨을 앗아갔다.
손톱을 휘두르려 상체를 일으켜 세우는 곰괴수의 면상에 총알을 먹여주며, 그 가랑이 아래로 잽싸게 뛰어오르는 개새끼의 머리통에 싸커킥을 후려갈겼다.
뒤로 넘어가는 곰괴수와 머리통이 터진 채 옆으로 날아가는 개괴수 사이로 치타괴수가 온몸을 날리는 통한의 뿔 찌르기를 질러왔다. 그대로 뿔에 스치듯 빗겨내며 총검을 가져다 댔다.
두개골에 칼날이 깊숙하게 박힌 놈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왼쪽으로 몸을 회전 시키며, 회전력으로 검을 잡아 빼며 그대로 수평으로 휘둘렀다. 모가지가 반쯤 베이는 괴수를 일별하며 같은 방향으로 한바퀴 더 회전하며 돌려차기를 날렸다.
몸통을 걷어차인 괴수가 고통스러운 괴성을 내며 쓰러졌다. 그대로 방아쇠를 당기며, 감각에 느껴지는 등 뒤의 괴수를 바닥에 발라버렸다. 피떡처럼 변한 것이 프레스로 누른듯한 처참한 광경이었다.
격렬했던 전투가 끝이 났다.
나는 철퍼덕 주저앉아 터질듯한 심장을 달래며, 입가에 흐르는 핏줄기를 닦아냈다.
몸이 진동이라도 오는 전화기처럼 덜덜 떨렸다. 손가락이 말을 안들어서 간지러운 얼굴을 엉거주춤하게 손목으로 긁었다.
한소희는 아예 드러누워서 미동도 하지 않고 오르락내리락 가슴만 움직였다.
그러다 갑자기 엎드려서 팔뚝으로 얼굴을 가리는걸 보니 또 토하는것 같았다.
쟤는 맨날 토하네, 매스껍다고 토하는 것도 습관인데.
몸을 회복하며 조금 쉬고 있으니, 어느정도 상황을 정리한 장인하 대위가 다가왔다.
"실로 엄청난 전투력이군요. 깜짝 놀랐습니다. 맨몸으로 괴수들을 박살내시다니."
"예, 뭐. 금칠은 그 정도면 됐습니다. 정확한 피해 상황은 어떻습니까?"
주위를 둘러보니 그리 심각하진 않은 듯 했다.
"사망자 12명에 부상자 5명입니다."
"적들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그렇다해도 전투인원에 비해서 만만한 숫자는 아니었는데, 피해가 적으니 기쁘네요."
사상자가 17명이나 나왔는데도 기쁘다고 말하는 나를 보며, 스스로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 안의 무언가가 닳아 없어진 기분이었다.
사망자 중엔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있었다. 문신 깡패였다.
나는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그를 직접 매장했다.
중상으로만 이루어진 부상자 중 유일한 경상자가 있었는데, 바로 임보람이었다.
박격포 포탄을 들고 뛰다가 앞으로 쏠리며 넘어졌다고 했다.
가슴이 무거워서 넘어진건가?
"보람 씨, 괜찮아요?"
"네, 네. 괜찮습니다. 죄송해요. 이런 실수나 하고. 음? 왜 그러세요?"
전장에서 발이 꼬여 넘어지는 일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내가 갑자기 아랫입술을 꽉 깨물자 그녀가 알아차리고 재깍 반응했다.
사실 커다란 가슴 두 개만으로 한계였는데 포탄까지 더해지니까 중심을 못 잡은거 아니냐고 머릿속으로 생각한 나는, 분명히 어딘가 망가진 게 분명했다. 원래 이 정도 또라이는 아니었다. 어, 아니었다고!
그것도 잠시, 그녀가 이곳에서 험한 꼴을 당했음을 인지하자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괜히 미안해져서 뭔가 부탁할 일이 없냐고 물어봤다.
"저... 팔이 이런데 제가 찰과상이 좀 생겨서요. 약을 바르기가 조금 어려워서... 치료는 남자분들이 해주셔서 말을 못 했어요..."
"네, 제가 발라드릴게요 쓸린 데가 어딘데요?"
그녀는 양팔이 다 금이 가서 부목을 댄 삼각건 안에 들어가 있었다.
"가... 슴이랑, 배... 쪽이... 요."
나는 잠시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 음, 응? 잠시만. 잠깐만. 이거 맞아? 동성끼리니까 당연한건가? 그렇지.
이상하거나 무리한 부탁이 아니지. 응응. 그건 맞지.
"허, 음. 네. 그러면 상의를 벗어야 하겠네요. 이쪽으로 오세요."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진정해 심장 이 미친 새끼야. 초능력 쓸 때보다 더 뛴다? 어? 빠져가지고?
팔이 아픈 그녀를 대신해 옷도 내가 직접 벗겨 주었다. 기분이 정말로 묘했다.
상의가 벗겨지고, 속옷만 남은 그녀의 상반신이 드러났다.
이내 천천히 속옷까지 벗기자, 그녀는 가리지도 않고 그대로 상체를 쭉 폈다.
거대한 두개의 봉우리가 덜렁거리며 그 위용을 아낌없이 자랑하고 있었다.
이건 대체 무슨 컵일까? 감도 안왔다. 이거 사이즈 측정이 되기는 하는걸까?
호리호리한 몸에 왕가슴이 달린 만화 몸매는 아니었다.
그녀의 덩치가 작은 편이 아니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말이 안되는 사이즈였다.
그야말로 육덕눈나 그 자체였다. 머리에 지렁이가 기어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미칠 것 같았다.
정신을 가다듬으며 상처를 살펴봤다.
어찌나 세게 쓸렸는지 배는 그렇다 쳐도 가슴까지 속옷을 뚫고 찰과상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근데 저 최상급 에어백을 뚫고 배가 쓸리다니 뭐 바닥에다가 슬라이딩이라도 거하게 한건가?
"앗, 따거."
"쓰라려도 조금 참아요."
손가락에 약을 찍어 발랐다. 배에 연고를 가져다대자 따가운듯 움찔하는 그녀였다.
체형에 걸맞게 뱃살이 몽실몽실 잡혔다. 쫀득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대망의 그곳을 향해 손가락을 뻗어갔다.
살살 문질러가며 약을 발랐다. 약을 다 바르고 이제 그만 끝내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나는 정신줄을 놓아버렸다. 전장의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합리화를 하고 싶었으나, 비겁한 변명이었다.
손바닥에 연고를 치덕하게 바르고 상처가 없는 그녀의 가슴에 그대로 손바닥을 올려서 주물렀다.
손아귀에 잡혀드는 그 감촉은, 말로 표현이 안 되는 엄청난 질감이었다.
아아, 글로리. 생명의 축복, 풍요의 상징, 모성 그 자체. 아아......
"저... 팀장님?"
"히익!"
개 버러지처럼 놀라며 당황스러운 표정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 치료는 다 하셨나요?"
"아, 아, 예. 다, 다 했어요. 그, 죄송합니다. 너무 부드러워서 그만. 저도 모르게... 죄송합니다 정말로. 제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미안해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제가 보람 씨한테 이러면 안 되는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건지 정말로! 진짜로! 죄송합니다. 그냥 죽여주세요. 달게 받겠습니다."
두 손을 싹싹 빌며 그녀에게 굽신거리며 사과를 했다.
무릎을 꿇으라면 꿇고 절을 하라면 대가리를 땅에 처박을 수도 있었다.
정신 차려라 이 미친놈아!
"그러셨구나...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어요. 마사지 받는 것 같아서 시원하기도 했고...원하시면 조금 더 하셔도 좋아요."
나는 오늘 전장에서 백의의 천사를 만났다. 지친 내 마음을 간호해주는...
나는 정말로 조금만 더 마사지를 해주고, 그녀와 함께 일어났다.
정리와 휴식이 전부 끝나고, 목적지를 향해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주변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지만,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강행하기로 했다.
슬쩍 임보람을 바라보니 그녀의 얼굴이 터질듯 붉어져 있었다.
임보람을 지킨다.
머릿속엔 오직 그 생각 뿐이었다.
농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