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춘천행(4)
그대로 몸을 날린 소희가 태클을 시도했다.
놈은 백스텝을 밟으며 그녀의 얼굴로 주먹을 날렸으나, 두터운 가드를 뚫지 못했다.
그대로 복부에 어깨로 부딪히며 놈의 허리를 붙들었다.
제압도 안 되고 넘어뜨리지도 못하는 태클이 무슨 소용인가 싶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등에 팔꿈치를 찍어가는 놈의 동공에 내 모습이 비쳤다.
섬전 같은 플라잉 니킥이었다. 황급히 양팔로 가드를 올렸으나 그대로 팔뚝에 무릎을 찍어 버리며 소희의 등을 밟고 뛰어올라 놈의 후방을 점했다.
놈이 상체를 돌리며 팔을 휘둘렀으나 가볍게 숙여 피했다. 그때 허리를 붙든 소희가 놈을 비스듬하게 들어 올렸다. 그 상태로 후두부에 꽂혀 들어가는 내 주먹에 놈의 대가리가 자명종처럼 뎅- 하고 울렸다.
연속으로 뒤통수를 두들기자, 놈이 차라리 안면을 맞는 게 났다고 판단했는지 고개를 돌리며 소희에게 팔다리를 마구 휘두르며 공격했다.
놈의 옆얼굴과 뒤통수에 무차별적인 난타가 폭우처럼 쏟아졌다.
소희는 놈의 필사적인 타격에도 눈을 꼭 감고 이를 꽉 물고 견뎠다.
저 독기는 내가 대련으로 심어준 것이다.
놈의 정신이 잠시 아득해지자, 나는 그대로 놈을 붙잡아 바닥에 눕혀 관절기를 걸었다.
사지를 속박하는 트위스트였다.
으아악- 놈이 관절과 근육이 찢기는 고통으로 울부짖고, 한소희는 그대로 바닥에 모로 누운 놈의 복부를 뻥뻥 걷어찼다. 아마도 내장이 다 망가졌을 거다. 입에서 피와 내장 조각을 토하는 걸 끝으로 놈을 놓아주었다.
상하체의 관절이 다 뒤틀리고 근육이 찢겼으니 당분간 움직이지 못할 거다.
두개골이 깨지진 않았으나, 안와가 부서졌는지 터진 안구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충격적인 광경에 놈의 일행은 벽에 바짝 붙은 채로 온몸을 떨고 있었다.
오줌을 지린 놈도 있었다.
전투를 돕지 않은 걸 보니 초인은 한 명인 것 같았으나, 혹시 모를 일이다.
나는 놈들에게 다가가 한 명씩 손목을 비틀어보았다.
모두 일반인이었다.
난데없는 충돌음에 펜션 주인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노는 것 치곤 소리가 너무 크다는 생각에 주인이 오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터다.
그만큼 짧은 전투 시간이었음에도 소희가 부딪힌 벽이 우그러지고 격렬한 전투가 치러진 바닥이 움푹 내려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해왔다.
두 명의 경찰관은 끔찍한 사건 현장을 본 듯 미간을 찌푸리며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고참으로 보이는 사람이 벌려놓은 일에 비해 침착한 나를 보더니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내 내게서 상황 설명을 들은 경찰관은 초인이라는 소리를 들은 순간부터 내가 마약이라도 빨았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저, 선생님. 상대방이 상처가 심해서 동행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거 하룻밤이면 나아요. 그놈 부상으로 문제 생기면 그때 출두할 테니 연락해 주세요."
"선생님,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시고요. 이런 식으로 협조를 안 하시면 특수 폭행범으로 현장에서 체포해야 합니다.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로 사람을 폭행해놓고 도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저기, 경관님. 지금 저랑 실랑이할게 아니라, 일단 상부에 보고하세요. 분명히 윗선에서 따로 지시가 내려올 겁니다. 윗선에서 정당방위 운운하며 저를 찾으면 그때는 제가 제 발로 가도록 하죠."
"그 말 꼭 지키셔야 할 겁니다. 도주하거나 반항의 여지가 보이면 무력 제압하겠습니다."
오른손에 테이저건을 쥔 경찰관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무전기를 들어 올렸다.
잠시간 시간이 흐르고 다가온 그의 표정은 더더욱 찌그러져 있었다.
"허,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만. '피해자'만 서(署)로 데리고 오라는군요."
쯧, 비아냥거리기는.
"현장 상태나 제대로 보시죠."
그제야 자세하게 벽과 바닥을 확인한 경찰은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맨몸으로 한 겁니다. 아까 농담한 거 아니고, 저놈 정신 차리면 망가진 몸으로도 격렬하게 반항 할 겁니다.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놈입니다. 망설이지 말고 몽둥이로 머리통 후려 까고, 가능하다면 실탄들은 총이라도 쏴버리세요. 뭐, 물론 상부에서 지침이 내려오겠지만, 노파심에 얘기하는 거예요."
나는 수갑을 끊고 철창을 부순 놈이 경찰들을 몰살시키고 탈출하는 결과를 바라지 않았다.
아직 세상은 초인에 대해 잘 모른다.
각성 초반이니만큼 초인의 개체 수가 워낙 적기 때문이고, 힘을 얻었다고 범죄에 사용하는 놈들이 과반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국가는 초인의 존재에 대해서 아직은 은폐하려 쉬쉬하고 있으나,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 못할 터다.
패거리를 차에 태운 경찰이 떠나고, 우리는 망가진 객실을 바꿔주겠다는 주인을 만류하며 그냥 여기서 묵겠다고 했다. 피해 보상은 가해자인 놈들에게 받겠지.
나는 약통을 열며 한소희를 불렀다.
"이리 와서 앉아봐."
"괜찮은데⋯."
"다쳤는데 약은 발라야지."
멍 자국에 연고를 바르는 게 뭐 얼마나 효과가 있는진 모르겠다만.
손가락에 연고를 짜서 환부에 가져다 댔다.
소희는 눈가를 찌푸리며 몸을 움찔거렸다.
"아⋯아얏-"
"많이 아파?"
"아녜요, 참을만해요."
"배도 발라야 해."
"네? 배, 배는 괜찮은데⋯."
"얼른."
속마음과는 다르게 장난기를 쏙 빼고 말하자, 그녀는 순순히 지시에 따랐다.
조심스레 걷어 올려지는 상의가 명치 부근에서 멈췄다.
조금만 더 올려줘⋯ 쇄골까지 올려줘⋯
눈을 꼭 감고 옷자락을 붙잡은 팔을 덜덜 떨고 있는걸 보니, 죄책감은커녕 더 흥분됐다.
붉게 부어오른 배에도 연고를 발라줬다.
손바닥으로 살살 쓰다듬어주자 잔뜩 굳어있던 몸에서 긴장이 조금 덜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 확 덮쳐? 아니야, 이 짐승 새끼야 정신 차려!
내면에서 끊임없는 싸움이 이루어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결국엔 이성이 본능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다 됐다."
"감사합니다⋯."
"이제 그만 자자."
침대가 두 개여서 그다지 어려울 건 없었다.
한소희가 먼저 눕고 나는 불을 끄고 내 침대로 가 누웠다.
눈을 감고 찾아올 수마를 기다렸다.
***
"후, 또 여긴가."
잠이 듦과 동시에 의식이 돌아온 곳은.
온통 하얀색 일색의 공간이었다.
얼핏 보면 방처럼 생겼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간의 경계가 없었다.
무한하게 펼쳐진 백색의 공간, 일명 '하얀방'이었다.
"일, 이, 삼, 사⋯."
나는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별다른 의미는 없다.
그냥 좀 세다가, 지루해지면 또 다른 짓으로 시간을 때울 테니까.
"가자- 가자- 전차야! 무한궤도 전차야!"
"멸공의 횃불 아래-"
"천년이가도~."
군가를 부르면서 힘껏 달리기도 해보고, 목청이 터지라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시간이 지랄같이 안 갔다. 아니, 시간은 잘 가는데 보내야 할 시간이 긴 것일지도.
쿵-쿵- 바닥에 머리통을 찧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지금 두개골의 내구성을 실험해 보고 있다.
반복되는 행위에 머리통이 깨지고 뇌수가 흘러나오더니 금방 다시 복구됐다.
죽음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아- 언제 일어나냐. 지겨워 죽겠다아! X바아알! 누가 나 좀 꺼내줘-"
이곳은 각성자들의 감옥이었다.
***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햇살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팔에 묵직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려보니 한소희가 품 안에 들어와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부드러운 손길로 귀밑머리를 쓸어올려 뒤로 넘겨주었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요동 질을 쳤다.
그녀의 눈가가 몇 번인가 꿈틀거리더니 이내 활짝 열렸다.
마주친 눈동자엔 서로가 담겨있었다.
이제서야 확실하게 깨달았다.
나는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 동생으로서가 아닌, 여자로서.
내 품에 안고 보듬어주고, 지켜주고, 사랑해주어야 할 나의 여인이 되길 바랐다.
눈동자가 뜨거운 열망으로 타올랐다.
시선을 마주친 소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숨만 고르고 있었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그녀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죄, 죄송해요⋯. 밤중에 잠이 안 와서요⋯."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바라보던 시선을 입술로 옮겼을 뿐이다.
그녀를 품에 안은 내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그녀 또한 그 변화를 느끼는지 덩달아 숨을 가쁘게 쉬기 시작했다.
다시 마주친 시선 속에서, 나는 고개를 앞으로 내밀듯 아주 조금 움찔거렸다.
소희는 고개를 뒤로 빼거나 하지 않고, 그대로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참을 만큼 참았다.
고개를 꺾으며 다가간 나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첫눈처럼 닿았다.
반사적으로 몸에 경직이 오며 눈을 더 세게 감는 그녀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과 따스한 그녀의 체온이 느껴졌다.
조심스레 맞닿은 입술을 움직였다. 가볍게 벌렸다가, 호흡을 들이마시며 가볍게 그녀의 입술을 잡아먹었다.
코로 호흡을 내쉬며 왼손으로 그녀의 허리께를 감싸며 자연스럽게 자세를 바꿨다.
똑바로 누운 그녀를 내가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오빠. 우리 이러면 안 되잖아요⋯."
한소희는 나를 올려다보며 사슴 같은 눈망울로 애원했다.
"그걸 누가 정하는데⋯?"
"세상 사람들이⋯."
"그런 건 상관없어. 내 눈엔 지금 너밖에 안 보여."
활활 타오르는 내 눈동자를 마주한 그녀는, 그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작게 끄덕일 뿐이었다.
따스한 손이 그녀의 뺨에 닿고 연이어 입술이 입술을 포갰다.
허리에 있던 손은 어느새 견갑 부근을 단단히 받치고 있었고.
그녀의 양팔은 두려움과 불안함이 섞인 채 내 어깨를 붙잡았다.
"무서워 하지 마⋯."
"겁이 나요⋯. 오빠⋯. 나 처음⋯."
"알아⋯. 아무 걱정 하지 마⋯."
"흐윽⋯."
다정하게 위로하는 내 모습에 그녀의 눈망울에 옅은 눈물이 고였으나, 결코 흐르진 않았다.
호수처럼 슬피 반짝이는 눈망울 아래의 입가는 선명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처음 겪어보는 일에 대한 두려움과 그럼에도 끝까지 가고 싶다는 기대가 뒤섞인 표정이었다.
이럴 때 남자는 여자에게 확신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 두고두고 못난 놈이 되지 않는 법이다.
"사랑해."
"저도⋯ 저도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