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화 〉낯선 도시에서 (4/164)



〈 4화 〉낯선 도시에서

청량하게 울리는 종소리에 칼린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방 밖에서 종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이게 이 곳의 알람 시스템인가, 하고 그는 혼자 납득했다.


알림이 울렸다고는 해도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지 몰랐다. 일단 침대에서 일어나기는 했지만 누군가의 안내도 없고 밖에서 하는 말을 알아 들을수도 없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의 재질을 보았을 때, 높은 확률로 이건 잠옷이다. 그는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지 조금 고민했다.

그러나 방 안에 옷장같은 것은 따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잠깐 상황을 보기 위해 문을 조금 열고 밖을 쳐다보았다. 그의 어중간한 지식과 상식은 오히려 상황에 적응하기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목만 빼고 밖을 두리번 거리던 그는, 문 오른쪽 벽에 붙어있던 풍채가 좋아보이는, 날카로운 인상의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둘은 그렇게 어색하게 서로를 마주하다가, 노인쪽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칼린님."
그 정장을 입은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서는 문을 활짝 열고서는 팔을 접고 나오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칼린은 잠깐 망설이다가, 그가 집사정도의 위치일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를 따라갔다.

그 노인이 안내한 곳은 욕실이었다. 칼린이 잠깐 멈추고 노인을 돌아보자, 노인은 세수하는 시늉을 했다. 그는 그걸 보고 말을 알아듣고 세면대에서 세수를 하다가 자신의 머리카락의 길이를 까먹고 있었기에 앞머리가 다 젖어버렸다. 칼린이 젖어서 붙은 머리를 넘기며 이 세계 수도꼭지에 물 온도 조절 기능은 없다고 판단할 때, 그 광경을 그대로 지켜보고 있던 늙은 집사는 왠지 봐서는  될것같은 것을 본 기분에 슬그머니 등을 돌렸다.


다음으로 그들이 향한 곳은 드레스룸이었다. 칼린은 그제서야 자신이 있는 곳이 상당히 크다는 것을 깨닫고, 이곳이 저택같은 느낌이 아닌 성채같은 느낌이라고 파악했다.


드레스룸에서 노집사는 잠깐 고민하다가 시중에게 그의 옷을 입히는 것은 불상사를 일으킬 것 같아 칼린에게 옷을 입는 제스쳐를 취해보았다. 실은 칼린도 혹시 옷도 스스로 못입게 될까봐 내심 걱정하고 있던 터라, 기쁘게 수긍하고 드레스룸 안으로 숨었다. 노집사는 드레스룸 안의 그에게 갈아입을 옷을 전달하고 구경온 시종들을 쫓아냈다.


그가 받은 옷은 성채 내부구조와는 대비되는 분위기의, 흰색 단색의 셔츠와 검정 단색의 정장세트였다. 단이 나눠져 있지 않은 카라에 더블버튼 블레이저, 바지 기장은 발목을 덮을 정도까지 오는 정도였다. 일부 의도를  수 없는 두꺼운 띠가 있었으나, 드레스룸 안에 있는 그림을 보고 얼추 따라서 끼워 넣을 수 있었다. 옷의 치수가 맞는 것은 어제 그가 잠들어 있을 동안 측정이 끝났기 때문이다.

옷을 전부 갈아입은 그가 드레스룸을 나오자 집사는 두가지 이유로 놀랐다. 첫번째는 분명 길에서 주웠다는 그가 정장을 입는 방법을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는 점에서였고, 두번째는 그냥 빌어먹게 아름다워서였다. 그제서야 집사는 어제 그의 주인이 손님을 경계하라 한 이유를 알  같았다.


다음에  곳은 성의 중앙부, 영주의 식탁이었다. 길게 뻗은  식탁의 맞은 편에 요나가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그제서야 칼린은 전날 저녁에 있던 일이 떠올라 오늘 아침 침대에서 일어난 것이 이상하다고 깨달았다.


늙은 집사가 칼린의 곁을 떠나 요나의 왼쪽 뒤에 서서 조용히 대기했다. 칼린은 차마 식사에 참여하지는 못하고, 갑작스레 이어지는 침묵속에서 식사를 멈춘 요나를 조금 떨며 쳐다볼 뿐이었다.


"앉지 그래?"
요나가 포크를 흔들면서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사실은 굉장히 무례한 행위였으나, 요나가 그에게 예의를 지킬 이유도 없었고, 어차피 그는 이 세계의 무례를 이해도 못했다.

그 제스처를 신호로, 칼린은 쭈뼛대며 식탁 의자에 앉았다. 그가 앉은 자리에 식사는 없었다. 그나저나 꽤 긴 식탁인데도 그와 그녀 둘만이 마주 앉아있었다. 그녀는 입을 닦고 말했다.

"그래서, 어디에서 왔지?"
그녀가 방금 말한 것은, 이제 막 그녀의 조국과 전쟁을 끝마친 빅센마르크의 언어였다. 칼린은 그녀가 수화를 사용하고 있지 않아 무슨 말을 하는 지는 몰랐지만, 확실하게 바뀐 억양과 발음 등으로 그녀가 지금 자신에게 통용되는 언어를 찾는 중이라는 것은 얼핏 알 수 있었다.

"모르데룬 출신인가?"
그녀는 다시 언어를 바꿔서 말을 걸었다. 칼린은 그저 멀뚱히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쉽게도 요나도 타국의 언어에 전문가는 아니다.  두가지도 전장을 돌아다니면서 적군 포로에게서 배운 단어를 어설프게 짜집었을 뿐이다. 출신지를 묻는다면 에테롬에게 맡기면 된다. 상인인 그는 각국의 다양한 언어를 알고있다.

"뭐, 일단 먹으라고, 아침이다."
그녀가 뒤에서 대기하던 집사에게 명령하자, 집사는 잠깐 자리를 비웠다가 곧 음식차를 끌고 들어왔다.
은쟁반을 열어보면, 안에는 수프가 있었다. 비록 고기는 들어있지 않았지만 그가 전생에 먹었던 통판 수프와 비슷할 정도의 짙은 향이 나는, 잘 만들어진 야채 수프였다. 거기에 조금은 딱딱한 빵과 같이 나이프와 포크가 나왔다.


"먹도록 해."
그녀는 양 손으로 포크와 나이프를 흔들며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식사를 재개했다. 칼린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이정도의 요리를 먹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고, 어제 하루 꼬박을 잠들었기에 상당히 배고프기도 했다. 그는 요나가 식사를 멈추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서 포크와 나이프를 이용해 식사를 시작했다.

'포크와 나이프의 사용법을 알고 있는 건가.'
그녀는 그런 칼린의 모습을 보며, 묘하게 잘입은 정장 등으로 미뤄보아 그가 어쩌면 망국에서 도망쳐나온 왕족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늑대 아래에서 자란 야생 소년같은 것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미안하지만 디저트는 없어. 이해해 달라고."
그녀가 다 먹고 메이드들에게 그릇을 치우게 하며 말했다. 물론 칼린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부터 우리 성에서 너의 가정교사를 붙일 것이다. 너의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를 가르칠거야. 그리고 기초적인 예법과 상식까지. 어떻게 가르칠지 막막하지만, 우리 가정교사는 유능하지."
그렇게 말한 요나는 집사를 시켜 칼린을 가정교사에게 안내하도록 명했다. 집사가 칼린을 데리고 떠났다. 그녀는  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다가 그 둘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의자에 기대 다리를  뻗었다.

"이게 요기(妖氣)라는 겁니까, 아버지..."
잠깐 대화한 것만으로도 기가 빨리는 듯한 경험을 한 그녀는, 잠시 뒤에 있을 공무원과의 만남을 위해 잠깐의 휴식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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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가 안내한 곳은 그가 잠들었던 방보다 조금 작은, 그러나 벽 한면을 전부 차지하는 창이 뚫려있는 방이었다. 문을 열자 흑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칼린은 잠깐 눈을 찌푸렸다가, 이윽고 눈에 들어온 풍경에 숨을 죽였다.

역광으로 비치는, 의자에 반듯하게 앉아있는 여인의 상이 들어왔다. 움직임이 전혀 없기에 칼린은 처음엔 정교한 조각상이라고 착각했다.  목석같은 실루엣이 움직이며 칼린에게 다가 왔다. 그는 미끄러지는 듯한 그 움직임에 눈을 떼지 못하고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폰 에스테리나 리쿠르트."
그 형태가 청량하게 마음을 꿰뚫는 듯 한 목소리로 손을 가슴에 대고 말했다.


"당신의 이름은?"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측면에 붙어있는 칠판에 글자를 적었다. 그 일련의 과정을 전부 보던 칼린은 마치 그녀가 뭐라했는지 알아들은 듯한 느낌이 들어서, 분위기에 홀린 듯 자신의 이름을 흘렸다.


"칼린."
그녀는  목소리를 듣더니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칼린."
그녀는 그렇게 그의 이름을 되내이고 칠판에 또 문자를 끄적였다.

"칼린, 당신은 아름답군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칼린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겉보기만 아름답다면, 그건 도금한 쓰레기와 진배 없습니다. 어쩌면 아직은 당신의 이름에 걸맞는 상태일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그렇게 두지 않겠습니다.
칼린이라는 말은, 사실 뷔르겐이라는 옛 국가에서 보석을 뜻하던 말이었습니다. 하렘의 일원들에게 주어지는 별명으로 쓰인것이 우리 국가와 전쟁 중에 와전된 단어지요."
칼린은 그녀가 말하는 것이 자신의  교수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전달하는 어투가 그랬다.

"지식이란 것은 보석을 남창으로, 남창을 보석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제가, 당신을 보석으로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방의 불을 켰다.

그녀는 갈색 머리에 안경을 끼고 있는 미녀였다. 안경을 고쳐 끼운 그녀는 고개를 칠판으로 돌렸다.

"당신의 가정교사로서 성 내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칼린."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사람 좋은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칠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름을 묻는 법부터 시작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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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쿠르트는 그녀의 아버지 대부터 요나의 성 내 가정교사였다. 요나는 그녀의 아버지에게 교육받으며 리쿠르트를 언니처럼 생각하면서 지내왔다. 요나의 어머니가 죽고 일자리를 잃은 부녀는 생업을 위해 아버지는 왕국의 대학교수로, 딸은 벨카의 고등학교 교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전쟁이 선포되자 대학생들과 반전운동을 하던 리쿠르트의 아버지는 교도소에 수감되었었다. 장교였던 그녀의 어머니는 그의 사상을 지지하나 군인으로서 본분을 우선한다며 전장에 나갔고, 남편같은 반역자가 아님을 증명하라는 이유로 최전방을 전전했었다. 리쿠르트도 학교에서 반역자의 딸이라는 오명을 달고 버텼어야 했다.

전쟁이 끝나자, 일부 경범죄자들의 특별사면이 이뤄졌다. 최전방에서 공적을 쌓은 어머니 덕분에, 그녀의 아버지는 같이 수감되었던 대학생들과 감옥을 나올  있었다.

거리에서는 아직 그녀의 가족들을 반역자라고 불렀고, 그녀의 아버지는 복직을 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의 교사는 상당한 돈을 받았으나, 그녀의 가족들이 사는 집에 머무르기엔 부족한 금액이었다. 리쿠르트의 어머니가 전쟁 후 보상금으로 얻은 돈을 전부 사용하기 전에 무슨 수를 썼어야 했다.


저녁시간에 요나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그런 상황에 있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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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해라."
요나가 서류작업에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순조롭다고 밖에는   없네요. 머리도 나쁘지 않고, 배우려는 의지도 강한 아이입니다."
리쿠르트는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칼린이라는 소년의 가정교사를 맡은지 나흘째, 벌써 칼린은 기본적인 회화까지 가능할 수 있게 성장했다. 하루 중 10시간 정도를 공부에 할애하며 나온 성과지만, 보통 이런 스케쥴을 짜더라도 따라올 수 있을지는 별개의 일이다. 하지만 요나는 그 대답에 불만족스러운 듯 했다.

"공부의 경과 말고, 그와 함께하면서 이상한 것은 느끼지 못했나?"
리쿠르트는 요나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안다. 칼린이라는 소년은 배우는 것이 지나치게 빠르다. 옆에 오래 머무른 사람들 만이  수 있는 것이 있다. 리쿠르트가 생각하는 것이 맞다면, 아마 칼린은 이미 기초적인 산수과정 등은 끝마친 외국인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리쿠르트는 여기서 말을 아꼈다. 오랜만에 만나게 된 요나는 자신이 알던 그녀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왜 그녀가 경계하고 있는 대상을 가정교사까지 고용해서 교육을 시키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꼭두각시로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리쿠르트는 어디까지나 그의 가정교사로서 온 것이다.


마치 그녀의 거짓말을 간파하듯 리쿠르트를 바라보던 요나는, 이윽고 시선을 돌리며 담배를 두개비 꺼냈다.


"유년기를 함께 보냈던 너이다. 믿고 맡기고 있어. 한창 혼란스러운 시기일 텐데, 힘든 일을 시켜 미안하군."
그리고 한대를 손가락으로 반바퀴 돌려 리쿠르트에게 내밀었다. 리쿠르트는 요나에게 다가가 담배를 받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제 방으로 들어가도 좋아.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요나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장식용 등불에 담배불을 붙이고는 업무를 재개했다. 리쿠르트도 짧게 인사하고 방을 나섰다.
'슬슬 직접 접촉해 봐야겠군.'
요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업무를 계속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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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린은 현재 말하기, 듣기, 쓰기와 함께 기초적인 산수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상한 의심을 받는 것은 피하고 싶은 그는 일부러 산수에서 구구단을 몇 문제 틀리곤 했다. 다만 일정 수준 이상의 높은 성적만 유지하면서, 10시간의 공부시간 중 산수의 비중을 최소한으로 유지하는 중이었다.

첫번째 날의 저녁부터 칼린은 성의 시종들과 식사를 하게 되었기에, 이제 칼린의 존재는 성 내에도 꽤나 알려지게 되었다. 그들의 영주는 칼린과의 대화나 접촉을 최대한 피하라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그 외모에 끌려 하나 둘 씩 말을 걸게 되어서 칼린의 회화능력은 수업 외의 요소로도 꾸준히 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접하는 것이 리쿠르트였다. 아직 제대로 된 회화가 불가능한 칼린이기에 간단한 일상 회화가 전부였으나, 간간이 계속해서 다른 언어로 질문해 오는 리쿠르트에게서 그녀의 지적 탐구심을 느낄 수는 있었다. 그녀에게서 칼린은 전생의 자신의 선생님들을 겹쳐 보고는 했다.


그런 나날 속에서 칼린은 굉장히 행복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외로움 때문에 환각과 대화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점이었다. 그를 괴롭히던 환각은 무시할수록 점점 연해져 그가 매 순간 신경쓸 필요 없는 정도가 되었다.

5일차의 아침에, 그는 이제 자신의 발로 일어나 씻고 옷까지 갈아입은 뒤 식사를 하러 간다. 식사를  마치고서는 교육실로 간다. 평소처럼 그렇게 진행되었어야 했다.


"칼린님, 주인님이 부르십니다."
노집사가 식사를 끝마친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칼린에게 요나는 속을 알 수 없어서 불안한 존재지만, 이제 그는 어느정도 말도 알아들을 수 있다. 그는 요나의 성격을 조금은 파악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요나는  밖의 훈련소에서 검을 연습하고 있었다. 노집사와 칼린이 훈련소에 도착하자, 그녀는 휘두르고 있던 검을 바닥으로 던지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칼린은 훈련복을 입은 요나를 보고, 떡대는 없지만 상당히 단련한 몸이라고 평가했다. 확실하게 역삼각을 이룬 상채와 군살 하나 없이 들어간 허리, 확실하게 선이 그어진 팔과 다리로   있었다. 노집사는 팔에 걸쳐두고 있던 수건을 그녀에게 건냈다.


"공부는 잘 되어가나, 칼린?"
그녀가 칼린이라는 이름에 힘을 주며 말했다. 칼린은 요나가 자신을 묘하게 못마땅해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의 근본이 경계심이라는 것도 안다. 때문에 칼린은 그녀에게 자신이 배운 최대한의 예를 갖추며 답했다.


"영주님, 덕분에, 순조합니다."
요나는  광경을 보며 익숙해지지 않는 미모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예상보다도 빠른 교육 진행 속도에 놀라움을 삼켰다.


"이젠 내 말을 조금 알아듣는 것 같네. 열심히 공부하고 있나 보군. 우리 성의 '부족한' 대우에도 만족스러운 것 같고 말이야."
요나는 도발적인 미소를 띄며 그렇게 말했다. 띄엄띄엄 알아들은 칼린은 거기에
"당찹니다."
라고 해맑게 답했다. 당치도 않다고 대답하고 싶었던 것이었지만, 어찌됐든 뜻은 전달되었다.

"하지만 공부만 계속하면 오히려 효율이 떨어지지. 운동은 제대로 하고 있나?"
요나가 노집사가 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무기 진열고에 다가갔다. 그리고 목검을 두자루 쥐고서는 한자루를 칼린쪽으로 던져주었다.


"대련은 어때, 도련님!"


칼린이 검을 아예 다룰  없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그가 아직 전상민이었을 때는 경호원으로써 단봉을 다루는 법까지는 배운 경력이 있다. 초보자가 검을 다루는 것은 단봉의 그것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일정 길이 이상의 검이 사용되지 않는 그의 시대에 한한다.


칼린이 지금 받은 목검은 확실한 장검이다. 약 60센치정도의 찌르기도 베기에도 용이한 무기. 그는 이런 무기를 다루는 방법을 전혀 모른다. 그가 머뭇거리는 것을 본 요나가 말을 이었다.

"어이쿠! 우리 국가의 보병은 이 무기를 사용하거든. 혹시 다른 편리한 무기를 찾는다면, 진열고에서 하나 골라서 사용해도 좋아."
진열고에는 그녀가 준비해둔 여러가지 목재 무기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중 어떤것도 안전한 시대를 살아온 칼린에게 익숙한 것은 없었다.


"뭐야, 혹시 남자면서 마법사인가? 그래서 그렇게 생긴건가?"
요나가 작게 도발했지만, 아직 이세계의 생태를 모르는 칼린으로서는 도발로 받아들일 수도 없는 발언이었다. 계속해서 묵묵하게 있던 칼린은 검술을 배워보자는 생각으로 그녀가 던져준 목검을 집었다.

"하나 가르쳐주세요!"
그 검을 그대로 집을 줄은 몰랐던 요나는 잠깐 당황했다가, 이윽고 그를 훈련장 안쪽으로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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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칼린은 정말 검의 끝도 그녀에게 댈  없었다. 그 압도적인 반사신경을 이용해 검의 궤도를 보며 막아내면서도, 하나하나가 무거운 그녀의 참격에 가드가 계속해서 무너지며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을 뿐이었다. 칼린은 그녀의 덩치에서 어떻게 그렇게 무거운 참격들이 날아오는 지 알 수가 없었다. 강하게 단련되어있지만 그 체구에서 나올 힘이 아니었다.

반면 요나는, 칼린이 검에 대해 완벽하게 초보라는 것을 알고  놀라고 있었다. 검마다 사용법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그녀가 상대해보고 판단한 바로는 칼린은 이런 종류의 무기에 전혀 조예가 없었다. 다만 반사신경은 비정상적으로 뛰어난 듯 해 거기에만 의존해 검을 막았을 뿐이다.


그녀는 칼린에게 있던 의구심이 더욱 커졌다. 포크와 나이프를 양손으로 자연스럽게 사용했을 때 부터, 요나는 칼린을 외국에서 온 귀족정도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대체 뭐하는 자식이지?'
그는 결코 실력을 숨기고 있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요나는 그가 검을 잡았을 때의 손만 보고도 그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냥 당초에 하려고 했던 것을 하기로 했다.


'너가 그렇게 계속 미지로 남아있겠다면-'
그녀는 지쳐서 앉아있는 칼린에게 다가가서 목검을 치켜올렸다.


'내가 네 속을 까발려주지.'
그리고 그녀를 등진 칼린에게 검을 내리 꽃았다.


"안됩니다, 주인님!"
놀란 집사가 말리려고 뛰어갔으나, 그녀의 검은 이미 칼린의 머리를 향해 내리 꽃히고 있었다.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요나는 한 순간 세상이 돌더니, 갑자기 바닥에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급하게 일어나서 보니, 칼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다만 무릎을 앉은 자세보다 조금 피고, 요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요나는 처음 겪는 일에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잠시 할말을 찾던 요나는 도저히 이 말 말고는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대로 뱉었다.


"너 뭐하는 자식이야."
요나가 검을 고쳐잡았다. 지금의 그녀는 대답에 따라 목검으로 칼린을 때려죽일 준비도 되어있다.

칼린은 당황하고 있었다. 요나의 수수께끼를 생각하며 쪼그려 앉아있을 때, 곁눈으로 뒤에서 공격하려는 요나를 발견한 그는, 그 자세에서 그대로 요나를 업어쳐 버렸다. 그도 결코 의도하고 행동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저지른 것은 저지른 것이다.

"죄송합니다!"
칼린이 바로 고개숙여 사과했다. 하지만 요나는 그걸로 납득하지 않았다. 아니, 요나는 애초에 사죄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칼린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뭣들 하시는 겁니까!"
일종의 긴장상태가 유지되고 있을 때, 날카로운 소리가 그 정적을 깨고 들려왔다. 수업실에 없는 제자를 찾아다니던 리쿠르트였다. 메이드에게 그가 어디에 갔는지 듣고 최대한 황급히 찾아  것이었다.

'요나가 그렇게 간단히 넘어갈리 없었어. 실책이다.'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일단 칼린을 그녀에게서 치워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수업시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방해되지 않는 것 아니었습니까!"
리쿠르트가 그렇게 말하자, 요나는 작게 혀를 찼다.

"너무 화내지 마라. 바로 수업으로 돌려보내도록 하지. 그리고 앞으로는 이 시간쯤에 그와 대련시간을 가지도록 하겠다. 1시간정도. 사전통보를 하지 않아 미안하군."
그렇게 말한 그녀는 칼린을 지나치며 목검을 주웠다.

"알레프, 넌 나를 따라와라."
노집사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는 성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리쿠르트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칼린에게 황급하게 달려갔다.


"칼린, 괜찮습니까?"
칼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괜찮지 않았다. 너무 많이 맞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의 뛰어난 반사신경은 그가 자각도 못하고 요나를 업어 쳤을 때의 영상을 선명하게 재생하고 있었다.


그 때 맞닿은 살결, 거리, 심장의 고동-
긁힌 상처에서 흘러나오던 피냄새까지도.

그의 흡혈욕구가 다시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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