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낯선 도시에서
갤러한은 식사를 끝마치고 화장실로 갔다가 오는 길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벽에 기대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밝은 갈색을 띄는 굴곡진 풍성한 장발, 머리색과 맞춘 듯 한 눈은 부드러워 보였지만 유약해 보이지는 않았다. 품위 있게 멈춰 있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굉장한 미녀였다.
그가 화장실에 들어갈 때는 없었던 사람이다. 분명 자신이 화장실로 가는 것을 보고 따라와서 기다린 거겠지. 갤러한은 그렇게 생각하고 가볍게 말을 걸어보았다.
"처음보는 얼굴인 걸, 추파 걸러 왔다고 해주라."
그녀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양 팔을 갤러한의 어깨에 얹으며,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리고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안너..안ㄴ..안녕하데요?"
중간까지 기대에 부풀어 있던 갤러한은 귀찮을 것 같은 여자라고 직감했다. 서로 밀착된 그 상태에서, 갤러한이 먼저 어색해서 고개를 못 들고 있는 그녀를 떼어 내며 말했다.
"아가씨, 이런 거에 익숙해 보이지는 않는데. 혹시 내가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리쿠르트면 돼요.."
그 이름은 들은 적이 있다. 분명 칼린의 가정교사라고 들었었다.
"음, 리쿠르트씨. 훌륭한 유혹이었는데, 전 아직 죽은 제 아내를 못 잊어서요. 저 말고 다른 사람에게 하면 바로 먹힐 겁니다."
그렇게 말하고 고래를 돌린 갤러한은, 복도 멀리에서 소니아와 릴로가 걸어오는 걸 보았다. 갑자기 재미있는 생각이 떠오른 갤러한이 아직 얼떨떨하게 서있는 리쿠르트에게 말했다.
"예를 들어, 저기 있는 제 일행인 릴로에게 써먹으면 바로 먹힐 겁니다. 둘 중 더 까맣고 더 키 큰 쪽이요. 저 친구는 양방향이거든. 혹시 나만 노리고 있던 거면, 가슴을 두 번 찢는게 되니 미안하고. 이만!"
빠르게 그렇게 말하고 나서, 갤러한은 그들 쪽으로 뛰어왔다. 그리고 소니아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작게 말 걸었다.
"저 여자가 릴로한테 작업 건다에 100생텀 건다."
"? 딜."
짧게 말을 전달한 갤러한은 릴로에게 소니아 좀 빌려간다며 그녀를 데리고 코너를 돌았다. 그리고 그 뒤에 숨어 상황을 보았다.
"저 여자랑은 무슨 관계인데 그딴 헛 내기를 하는 거야?"
"화장실에서 돌아가는 길에 만났어. 쉿, 시작한다."
화장실에 들어가려는 릴로의 길을, 리쿠르트가 한 팔을 뻗어 막아낸다. 그 장면을 보며 갤러한은 회심의 웃음을, 소니아는 경악을 하고 있었다.
"맙소사, 갤러한. 네가 맞았어."
#
리쿠르트가 그런 짓을 하고 있던 것은, 떠돌이들에게 칼린과 영주의 관계 등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딜레마를 겪고 있었다. 칼린을 돕고 싶었지만, 동시에 개입했다가는 다시 끔찍했던 학교로 복귀해야 될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의 상황을 알아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런 방법을 떠올렸다. 꽤 좋은 아이디어였지만, 방법이 안 좋았다.
고지식한 선생님이 누군가를 능숙하게 유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갤러한에게 최대한의 용기를 내서 해낸 유혹이 실패하고 나서 머릿속이 하얗게 된 그녀는 아무 생각도 못하고 갤러한의 말을 따르고 있었다.
일단 기세로 길을 막은 그녀는 다음 말을 떠올릴 수가 없어서 그 상태로 굳어버렸다. 물론 릴로도 크게 당황했다. 갑자기 화장실 가는 길이 막힌 것은 둘째로, 여자에게 대쉬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가ㅆ...언니? 잠깐 시간 될까요...?"
가만히 있던 리쿠르트가 목을 한 대 맞은 것 같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자, 릴로는 살짝 뒷걸음질 치며 대답했다.
"음, 힘들 것 같은 걸요, 화장실로 가던 길이었거든요..."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오른팔로 앞을 막고 있던 그녀가 몸을 왼쪽으로 돌려 릴로의 퇴로를 막아냈다. 그 장면을 보며 갤러한과 소니아가 조용히 입을 가렸다.
"잠깐이면 되니까, 이야기만이라도?"
"아니, 제가 그.. 이성애자라서, 뭐랄까, 시도를 안 해 볼 생각은 없었는데, 아무리 저라도 조금 준비가 필요 하달 까요, 이건.."
릴로의 눈동자가 여기저기 헤엄치며 리쿠르트를 피했다. 최대한 접촉하지 않기 위해 목을 뒤로 쭉 뺀 그녀는 마치 겁먹은 미어캣의 경계자세같은 모습이 되었다.
"예? 아니, 아니예요! 그러려던 게 아니에요! 맙소사, 미안해요!"
그 반응에 당황해서 양 팔을 벽에서 황급히 떼 네는 리쿠르트를 보며, 갤러한은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벽 뒤에서 나와 무릎까지 두드리며 웃었다.
"아하하! 아하, 아, 맙소사.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고 싶으신 지 들어나 봅시다, 어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찔끔 흘린 그는, 검지 손가락으로 눈가를 닦으며 그렇게 말했다. 리쿠르트의 얼굴이 찌르면 터질 듯 붉어졌다.
#
"음, 제자와 주인의 관계를 알려 달라니..."
갤러한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올리고 입가에 대며 생각하는 듯한 제스쳐를 취했다. 그리고 그 손가락으로 리쿠르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무리죠, 그건!"
밝았던 리쿠르트의 얼굴이 와르르 무너지듯 표정이 급변했다. 갤러한은 그게 조금 귀엽다고 생각하며 이유를 설명했다.
"뭐, 제가 선생님이 싫어서 그러는 건 아니고, 사실은 우리도 들은 게 없거든. 영주님과 칼린의 관계라니, 우리가 선생님한테 듣고 싶던 건데."
"그런가요..."
그렇게 말하는 리쿠르트는 뜨거운 물에서 꺼낸 상추 마냥 늘어져서 뒤돌았다. 갤러한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득 볼 방법을 찾았다.
"잠깐, 선생님. 칼린과 요나의 일인데 우리에게 묻는 거라면, 선생님이 칼린에게 직접 묻는 건 못한다는 거지?"
리쿠르트가 약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갤러한이 가슴을 피고 엄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뭔 이유인지는 모르겠는데, 난 물어봐 줄 수 있거든. 어때?"
그 말에 리쿠르트는 조금 생각을 해 보았다. 그녀가 칼린에게 직접 묻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성 안에서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을 요나에게 들켜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하루에 두시간만 성 안에 머무르다 밥 먹고 자리를 뜨는 떠돌이들은 확실히 자신에 비해 정보를 얻기에 유리했다.
"정말 그래 주시겠어요?"
찬란하게 웃는 리쿠르트에게 갤러한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 맨입으로는 안되지. 떠돌이는 공짜로 일하면 죽걸랑."
검지와 엄지를 모아 동그라미를 만들며 그가 그렇게 말했다.
"질문 하나당 25생텀. 나쁘지 않은 값이죠?"
25생텀, 괜찮은 셔츠 하나를 살수 있고, 투척용 단검을 5자루 살 수 있고, 저질 아대를 하나 살 수 있는 값이다. 딱 말해서 싼값은 아니다.
리쿠르트는 자신의 제자와의 수업시간을 떠올렸다. 그리고 전쟁중의 자신을 떠올렸다. 요나가 자신을 막아낸다면, 자신만의 방법으로 칼린을 도울 뿐이다. 상황을 이해하고 암약(暗躍)해서 성에 머무르며 그를 돕는다. 그게 그녀의 계획이었다.
"매일 점심시간이 끝나고 만나는 걸로, 질문 하나당 25생텀 받아 들이겠습니다. 질문에 대답을 못들으면 돈은 없는 걸로."
그렇게 말하며 리쿠르트가 내민 손에 갤러한이 힘차게 악수했다.
갤러한은 그대로 식탁에 돌아왔다. 그리고 먼저 와서 앉아있던 릴로에게 작게 전했다.
"나 그 여자 꼬셔 볼 거야."
릴로가 조금 짜증난다는 듯 돌아보며
"난 안 도와줄 꺼야."
라고 단호히 답했다.
"알아. 너도 같이 헌팅 당했으니까 정으로 말해 준거야."
그렇게 말하며 갤러한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녀를 떠올렸다. 정말 재밌을 것 같은 여자였다.
#
저녁을 먹고 칼린이 방으로 들어갈 때 였다.
"칼린님, 영주님이 찾으십니다."
그렇게 말하며 노집사가 칼린을 불러냈다. 칼린은 이번에는 무슨 일일지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집사를 따라 영주실에 들어갔다.
요나는 그닥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평소에도 굳은 표정을 유지하는 요나이기에 기분 좋아 보이는 일은 별로 없었으나, 최근에는 칼린도 요나와의 대련을 통해 그녀의 여러가지 표정을 봐 왔었다.
분명 오늘 오전에 대련할 때 까지만 해도 그녀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칼린은 자신이 실수한 것이 있었는지 곰곰이 떠올려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칼린. 나에게 숨기고 있는 것이 있나?"
요나의 질문에 칼린은 눈에 띄게 당황해 버렸다.
"질책하려는 것이 아니다. 겁먹지 말고 대답해라. 나에게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거지?"
그녀의 말투가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칼린은 대답할 수 없었다.
'지난번에 괴물이라고 어정쩡하게 말한 걸로 난 솔직하게 말했다! 하면서 면죄부를 따낼 생각이었겠지. 왜, 진짜 솔직해 지려면 지금 말하면 되는 게 아닌가? 넌 인간이 아니고 매일 저녁 벌레처럼 피를 빨아먹는 일을 참기 위해 이빨을 뽑아내고 있다고. 그러려던 게 아니었나? 칼린?’
짐승이 낮게 그르릉대는 듯한 목소리가 칼린에게 들려왔다. 압도당하기 시작한 칼린에게는 그것이 영주의 질타인지 자신의 환청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너 다운 방식이야, 전상민. 가볍게 농담처럼 네 무거운 진실을 던져버리고는, 언젠가 밝혀지면 자기는 말했다고 빠져나가지. 더럽고 역겨워라.'
칼린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숨통이 막힌 것 같아서 소리를 내기는 커녕 숨조차 쉬기 벅찼다.
"칼린?"
되묻는 영주에게 칼린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
영주의 말과 거의 동시에 말한 탓에, 영주는 혹여 자신이 잘못들은 것일까 싶어
"아무 일도 없다고?"
라고 질문했다.
칼린은 스스로도 지금 상태가 상당히 어색하고 거짓말 티가 나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평소에 포커페이스에 유능한 그였기에 더더욱 잘 알 수 있었다. 그가 하고 있는 짓은 그저 이 상황을 넘기기 위한 궁여지책에 블과했다.
요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서랍에서 담배를 두 개피 꺼내 한 개피를 칼린에게 건냈다.
"담배를 피고 있던 것은 알고 있었다. 리쿠르트가 전해주었겠지."
칼린이 그 담배를 받으러 다가오자, 요나는 칼린의 뒷통수를 잡고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그리고 칼린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이 성 안에 있는 이상, 나에게 숨길 수 있는 건 별로 없다는 거다."
마치 때려 박는 듯한 말이었다. 칼린이 얌전하게 가만히 있자, 요나는 그를 놓아 주었다. 그리고 책상위에 있는 등불로 칼린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넌 그걸 모를 정도로 멍청한 놈이 아니지. 분명 상인에게 팔릴 때 까지만 버티면 너의 승리라고 생각할 거야. 그게 맞기도 하고."
말을 하며 자신의 담배에 불을 붙인 요나는 깊게 연기를 빨아들이고 내뱉었다.
"하지만 칼린. 상인에게 팔리기 전의 네놈은 나의 것이다. 그걸 알아둬라."
그렇게 말하며 담뱃재를 털어낸 그녀는, 얼이 빠져 있는 칼린에게 전달했다.
"2주 후가 나의 생일이다. 성에서 사교파티가 열릴 예정이야. 그 때 네놈은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된다. 그 날은 네 모든 일정이 취소될 테니 알아 두도록."
그리고 그녀는 다시 업무를 시작했다. 칼린은 그런 그녀에게 인사하고 뒷걸음질로 방을 나섰다.
한참동안 그녀는 기계처럼 업무를 계속했다. 갖가지 서류를 확인하고 검토하면서 싸인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필압을 조절하지 못해 종이를 뭉개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젠장할.."
작게 욕을 하고 그녀는 알레프를 호출했다.
"17일 후보다 더 일찍 올 방법은 도저히 없다고 하던가?"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물어본 것은 의사의 도착 일자였다. 알레프가 가볍게 고개를 젓자 요나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담배를 하나 더 꺼내 불을 붙였다.
#
칼린은 침대 위에 대자로 뻗어 눈을 가리고 누워 있었다. 방에 들어가 가장 먼저 확인해 본 것은 그가 모아둔 송곳니였다. 그건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확실히 숨어있었다.
도대체 뭐가 들킨 건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요나가 자신의 어디까지 파악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요나가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칼린의 그런 불안감을 유도하기 위함도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길어야 한달이면 끝난다. 한달만 자신이 참고 버티면 적어도 이 성안에서 자신은 괴물이 아닌 채로 넘어간다. 요나의 말대로다. 칼린이 노리는 것은 그저 시간 끌기였다.
그리고 그 시간을 벌기 위해 오늘도 칼린은 입 안에 손을 집어 넣었다.
#
다음날부터, 요나는 대련시간을 없앴다. 그렇다고 그 시간에 공부를 시킨 것도 아니고, 그저 그냥 쉬는 시간으로 두었다. 때문에 칼린이 영주를 마주할 일이 없어졌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있다가 사라지자 칼린은 상당히 아쉬웠다. 하지만 어제 그런 일이 있었던 직후라 영주를 만나기 조금 불안했었기에, 여러가지로 복잡한 기분이었다.
"그럼 나랑 할래?"
칼린이 대련시간이 없어졌다고 말하자, 갤러한이 그런 제안을 던졌다. 칼린으로서는 그와 대련 경험을 가지는 것은 상당히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잠깐 화색이 돌다가, 이윽고 표정을 고치며 말했다.
"하지만, 갤러한에게 그런 권한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뭐, 잠깐 비밀로 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 그 나이 때 되면 좀 반항기가 있어야..."
그는 말끝을 흐리다가 물었다.
"그러고보니 너 몇 살이냐?"
"네?"
그 질문에 일행이 하나 둘 씩 모였다.
"야 진짜로. 물어 보려다가 까먹고 있었어. 몇 살이야 너?"
"그러네요. 보기에는 어려 보이는데 키는 멀대같이 크고. 행동하는 것도 가끔 아저씨 같아. 몇살이죠?"
하나 둘 씩 모여 나이를 묻기 시작하자 칼린은 급하게 머리를 굴렸다. 서른 여섯이라고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스무울..."
납득이 안가는 표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그는 나이를 조금 더하기로 했다.
"세에엣?"
그 말에 릴로가 환호성을 외치며 륑게와 소니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둘은 이해가 안가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돈을 건내 주었다.
"딱 애매하게 철들기 시작할 때라니까. 말했지?"
"생긴 건 10대인데."
"하는 짓은 가끔 30은 먹은 것처럼 굴면서 말이야."
각자의 감상이 오고 갔다. 갤러한은 뒤의 일행들을 전부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그럼 23세 칼린씨, 혹시 우리끼리 대련하는 거에도 영주님 허가가 필요한 건가? 애인에게 잡혀사는 구만, 응?"
"아, 영주님과 그런 관계는 아니에요."
뭔가를 말하려는 릴로의 입을 틀어막고 갤러한이 질문했다.
"그럼 무슨 관계야? 보기에는 아빠와 딸인데."
"그게-"
#
"...요나가 칼린을 팔기 위해서 육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거죠?"
갤러한이 10생텀이 5장이라는 걸 확실하게 확인하고서 대답했다.
"엉. 그렇게 말하니까 전부 이해 되던걸요? 왜 도련님이 영주님한테 꼼짝 못하는 지 알았어."
리쿠르트도 가문명이 있는 귀족 출신이다. 딱히 인신 매매에 대해서 끔찍한 일이라고 일일이 덜덜 떠는 타입은 아니었다. 찬성하지는 않았지만, 적극적으로 반대운동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귀족에게는 익숙하게 접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단 그녀의 애제자가 그 대상이라면 말이 다르다.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았다. 그리고 가만히 자신의 제자와 있던 일들을 회상해 보았다.
얼마나 눈치 챌 기회가 많았는가. 매일마다 안색이 안 좋아 지는 것이 당연했다. 그 교육이 모두 끝나면 그는 어디론가 팔려 나갈 테니까. 담배를 피고 눈물을 흘린 것은, 아마도 몰락한 자신의 모습에 대한 한탄과 다시는 이걸 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섞인 눈물이었으리라.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마음이 따뜻하고 전도가 유망한 학생이다. 그의 이야기를 팔리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된다. 그것 만큼은 막아야 한다.
"갤러한, 부탁이 있어요."
"얼마든지요, 선생님."
그녀는 주머니에서 지폐를 몇 장 더 꺼냈다. 세 보지 않아 모르지만, 적어도 5장은 넘어 보였다.
"일주일 후, 저와 칼린과 당신 셋이서 성 밖으로 나올 기회를 만들어 주세요."
"우, 애 데리고 데이트하는 겁니까?"
리쿠르트가 노려보자 갤러한은 조용히 건내진 돈을 주머니에 넣고 사과했다.
"그리고 매일마다 그 '사회수업'에서 있던 일을 이 시간에 저에게 보고해주세요. 가능할까요?"
그는 조금 생각하다가, 그녀와 접점이 늘어나는 일이라면 일단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그걸 수락했다.
"그 정도는 공짜로도 가능하죠."
#
대련시간이 사라진 것으로 아쉬움을 느끼는 건 칼린 뿐이 아니었다. 오히려 요나가 그 결정 때문에 더 힘들어 하고 있었다. 급증한 일 때문에 영주실에서 가만히 일만 하고 있으면 버섯이 되어가는 기분이었고, 혼자서 검연습은 더이상 집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칼린이 병을 앓고 있을지도 모르는 이상 무리해서 몸을 움직이게 할 수는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교육시간도 줄여버리고 싶었다.
그녀의 마음 속에는 자각하지 못한 서운함도 있었다. 그녀가 칼린을 마주하며 벽을 허물은 만큼, 칼린도 그녀에게 벽을 허물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에게 남창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괴물이라 부르며 경계하다가, 최종적으로는 상인에게 그를 팔아 넘길 요나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조금 뻔뻔한 것이라고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었다.
외통수였다. 머리가 좋은 칼린은 금방 이 나라에 대한 기본들을 익힐 것이다. 그가 그런 것을 전부 익히고 나면, 다방면에 재능을 가진 그를 돼지같은 상인에게 팔아버리는 것이다. 어딘가 사교계에서 귀족 아가씨들에게 던져주는 미끼같은 역할로 쓰이게 하기 위해서.
적어도 그 전에 그의 병을 치료라도 해주고 싶다. 적어도 그 전에, 그가 나에게 의지하게 만들고 싶다. 적어도 그 전까지 그는 나의 것이니까, 온전하게 내 것으로 있게 하고 싶다. 그녀의 갖가지 욕구불만이 한계에 도달했다.
"알레프, 혼자 있고 싶다."
영주의 말에 노집사는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 시계를 확인했다.
"...식사시간에 부르겠습니다."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섰다. 요나는 정말 오랜만에 자신의 응어리 진 욕구를 마주할 시간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