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8화 〉아버지와 아들 (48/164)



〈 48화 〉아버지와 아들

굉음과 함께 충격파로 인한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다. 장벽 너머까지 날아오는 바람에 부대원들은 버틸 수 있었지만, 마레는 몸을 납작 엎드렸음에도  바퀴를 뒤로 굴렀다.

뜨거운 열기가 한순간 몰려오는 가 싶더니, 이윽고 흰색의 먼지같은 것이 그들을 덮쳤다. 제한된 방독면의 시야에 보이는 것은 순백 뿐이었다. 장벽의 위나 옆으로 날아오는 일부 파편들이 위협적으로 그들을 덮쳤다.

현장의 그 누구도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고막에서는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시야는 완전히 가려져 있었다. 그들은 그저 상황이 빨리 끝나기를 빌면서 몸을 납작 엎드리고 있었다. 오직 마레만이 구르다가 멈춘 자리에서 배를 깔고 엎드려 미친듯이 글을 적고 있었다.

바람이 멎어가고 있었다. 압도적으로 불어온 충격파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던 부대원들은 드디어 숨을 조금 쉴 수 있었다. 다만  순간에도 방독면은 벗을 수 없었기에 제한된 호흡과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상황을 버텨내고 있었다. 극한의 상황과 산소의 결핍이 그들 눈의 실핏줄을 터트려서, 칼린을 제외한 부대원들은 눈이 붉어져 있었다. 맨 앞에 서있던 라드와 도르베, 갤러한은 눈에서 피까지 흘리고 있었다.


나무들이 뽑히고 날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갤러한의 말대로, 불은 붙지 않았다. 그저 충격파뿐이었다. 그리고 근방이 다시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바람이 멎어가는 것을 느끼며, 부대원들은 하나 둘 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그들은 시청각이 마비된 상황이었기에 아무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가장 멀쩡한 편이었던 칼린은 손으로 방독면의 렌즈를 닦아냈다. 뿌옇게 일어난 모래먼지 사이로 무엇인가가 한 방울 씩 떨어지고 있었다. 마침내 칼린의 방독면에도 떨어 졌을때, 칼린은 그것이 뭔지 눈치챘다.

"피..."
붉은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하늘을, 칼린은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갖가지 '조각'들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을 보았다. 칼린은 자신의 상처부위를 한번 닦아내고 더 깊게 칼을 꽂은 뒤 피를 흘려냈다. 그리고 대부분의 부대원들은 눈치조차 채기 전에 우산처럼 하늘을 가리는 장벽을 만들어 냈다. 살점이 터져 나가는  끔찍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지만, 어차피 아무도 들을 수 없었다.

마레는 우산 밖에 있었다. 그는 굼벵이처럼 기어가며 우산 안쪽으로 들어가다가, 자신의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에 압도당했다. 흩뿌려지는 피, 회색의 시야, 흩어지며 날아오는 시체 조각들까지. 마레는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에 눈을  수가 없었다.

"...이거다."
나즈막히 말한 마레는 네발로 기듯이 달리기 시작해서 칼린의 방어막 아래로 기어들어갔다. 그리고 완전히 구겨져버린 자신의 노트를 넘겨 피에 젖은 손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카마인 영지에서의 언데드 처리는 그렇게 끝이 났다.




"해냈네."
약 2시간 정도 후에야 그들은 겨우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모래먼지가 가라앉은 전장의 땅은 검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칼린은 그것이 마치 황토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튀어 있는 시체 파편들을 바라보며, 부대원들은 기진맥진함에 누구 하나 일어날 수 없었다. 멍하니 앉아 있던 그들은 누락된 사람은 없는 지 서로를 확인하고 다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 마레조차 조용히 있었다.

"마레님, 왜 여기에  것입니까. 대답에 따라 군법회의까지  수도 있습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마레가 있는 쪽으로 발을 옮긴 도르베였다. 마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열심히 글을 적고 있었다.


"마레님-"
도르베는 말을 하려다가 말문이 막혔다. 마레의 다리는 그의 예상보다 심각한 상태에 있었다. 정강이가 완전히 부서진 것인지 그는 한쪽 다리는 애처롭게 늘어놓은 상태로 글을 쓰고 있었다.

"마레님, 그 다리는-"
"조용.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다리가 부러진 것을 눈치채지도 못했다. 그저 떠오른 영감을 끊임없이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도르베는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갤러한의 옆에 가서 앉았다.


"갤러한, 마레는 이 영지에 두고 가도록 하자. 저 정도로 무모한 자를 같이 데리고 다닐 수는 없다. 카마인에서 다리부상 치료를 맡기고 먼저 임무를 나가자고."
"네가 말하는  조금 느낌이 이상하다만... 동감이야."
갤러한은 그렇게 말하고 녹슨 수통을 꺼냈다.

"이...이거 상황 끝난 것 맞지, 얘들아?!"
소니아는 아직도 귀가 멍멍해 소리를 질러대며 말했다. 핀은 아직도 엎드린 상태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어.. 끝났어. 어떻게든 해냈다. 카마인도 끝이야..."
갤러한은 모두를 돌아보았다. 그들 모두 아직도 살아있는 실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분위기 고양을 위해서라도 조금 무리하기로 했다.

"그럼-!"
그는 삐걱거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킨 뒤 한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 모두가 주목하게 만든 후, 그는 방독면을 벗어 던지며 말했다.

"이번에도 아무도 죽지 않고 임무 성공이다, 새끼들아!"
다들 그 말에 드디어 자신의 생존을 확인했다. 실감이 다가오자, 그들의 몸에 고양감이 부풀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아! 살았다! 씨발!"
"해냈다!"
"술이다!!"
그들은 하나 둘씩 방독면을 하늘로 벗어 던지며 생환을 축복했다. 그 고양감 속에서, 칼린은 그저 웃었다. 그리고 이리하에게 다가갔다.


"이리하, 죄송했습니다. 저 이제 정신 차렸어요."
이리하는 칼린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은발이 방독면을 스치며 아찔한 기분이 들게 했다. 그녀는  은발만큼이나 찬란하게 웃었다.


"누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완벽할 수는 없어요... 제가 스스로 책임을 져야 겠죠. 이 결론이 나올 때까지 너무 오래 걸렸네요."
"조용."
이리하는 그렇게 말하고 칼린의 방독면을 잡았다. 칼린은 그녀가 자신의 방독면을 벗길 것이라 생각해 조금 움찔했다. 그러나 이리하는, 반대손을 뻗어 칼린의 정화통을 돌려 빼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녀는 그 정화통을 멀리 던져버리고 달빛처럼 웃었다.

"돌아온 걸 환영해, 칼린!"
모두들 자축의 분위기에 도취되어, 서로를 껴안으며 웃었다.


"자 그럼, 보고하죠!"
그리고 칼린이 또 초를 쳤다.

"...야, 이 분위기에 그건 좀 아니지 않냐?"
륑게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칼린은 소니아에게 다가갔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일단 보고는 해야 되니까."
소니아도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의 말을 인정하기는 했다.


"하, 뭐. 네 말대로, 보고는 보고지."
쓰게 웃으며 소니아는 영주에게 보고를 걸었다.

#

"바로 발두르로 가라구요??"
'그래. 카마인에서 발두르는 반나절이면 간다. 발두르에서 하인킬은 하루면 충분하고. 바로바로 출발하도록. 시간이 촉박하다.'
"하...하지만... 우리 진짜 전부 죽을 뻔 했다구요!"
'그래. 하지만 네크로맨서는 너네를 기다려 주지 않아. 이제 나흘이면 그도 하인킬에 도착할 것이다. 더 주체할 시간이 없어.'
소니아는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그들 전부 소니아가 무슨 대화를 하고 있을  예상이 간다는 표정이었다.


'마레는 카마인의 병원에 두고 가거라. 부대원의 업무에 방해하지 말라는 조건을 어겼으니, 굳이 같이 벨카로 돌아올 필요도 없겠지. 부상이 완치되면 벨카로 찾아오라고 전해다오.'
소니아는 다시 활기가 솟던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낙심하고 있던 그녀는 절망속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영주님, 칼린도 쉬고 싶다고 하는데요?"
소니아는 부대원들과 조금 떨어져서 작게 속삭였다. 영주는 거기에 잠깐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정말 그렇게 말하던가?'
"네. 지금 너무 지치고 힘들다고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는데, 그걸 전달해 주면 어떻게 될지..."
그 말에 영주는 침묵을 유지하다가 힘겹게 대답했다.

'....오늘만이다. 다음 날 아침에 출발하는 거다. 오늘 저녁까지 모든 것을 해결하도록.'
"와! 영주님, 맞는 선택한 겁니다!"
소니아는 그렇게 말하고 혹시 다른 말이 나오기 전에 링크를 끊어 낸  동료들에게 돌아갔다.

"설득했어! 오늘 저녁까지는 마을에 머무르자!"
"야! 야! 어케했냐 씨팔!"
아스타가 뛰어들며 소니아의 머리를 격하게 쓰다듬었다. 칼린도 다른 부대원들과 같이 기뻐하면서도 물어볼  밖에 없었다.


"진짜로, 어떻게 설득하신 거예요?"
"넌 몰라도 돼. 영지로 가서 마레 맡기고 거기 영주한테 보고 때리고 씻자!"
소니아는 그 말과 함께 부대원들을 데리고 앞장섰다. 칼린은 조금 어리둥절 하면서도 마레를 업고 그녀를 따라갔다. 마레는 업히는 순간까지도 펜과 종이를 내려놓지 않았다.


#


하루의 회복기간을 가지고 그들은 다시 마차로 발을 옮겼다. 다음 영지인 발두르에 도착했을 때에 시간은 13시 반이었다.

"영주에게 허가 받았어."
발두르는 화공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가  때 까지 기다렸다가 불을 지르기에는 너무 시간이 촉박했다. 때문에 이번에는 낮에 봉쇄령을 내리기로 했다. 15시까지 소금부대원들은 급하게 구성된 보급물자들을 영주민들에게 나눠 주고, 16시가 되어서야 전장으로 나올  있었다.


"몇명?"
"한.. 70정도 되는  같네요. 한 방에 끝내죠."
하룻밤만의 제대로 된 휴식만으로도 부대원들은 많이 회복할 수 있었다. 그들은 평소처럼 불을 지르고 가만히 타오르는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있잖아, 나 이 광경이 이젠 익숙해 졌어."
소니아는 그렇게 말하며 보고를 하기 위해 뒤로 빠졌다. 그녀를 시작으로 하나 둘 씩 등을 돌리며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칼린은 그 자리에 앉아 여느때와 같이 언데드들을 카운팅하기 시작했다.


"열심히 하네."
뒤에서 말을 걸어온 것은 이리하였다.

"먼저 가셨던 것 아니었나요?"
"다시 돌아왔어. 대화 가능하지?"
칼린은 몇일 전의 일이 떠올랐다. 그리고 가만히 옆으로 자리를 조금 옮겼다. 이리하는 그의 옆에 앉았다.

"넌 이제서야 다시 칼린으로 돌아온거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칼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만하세요, 갑자기 무슨.."
칼린은 그 손길이 쑥스럽기도 하고 익숙하지 않아서 고개를 조금 옆으로 뺐다. 그러나 이리하는 팔을 더 뻗어 칼린의 뺨을 잡아 그녀에게 끌었다.

"약속대로, 내가 아는 네 비밀을 말해 줄게."
 말에 칼린은 얼굴에 조금 띄우고 있던 홍조가 가셨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넌 사실-"
그녀의 입에서 나올 다음 문장이 칼린이나 그녀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칼린은 바짝 긴장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등록 마법사지?"
그리고 그는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에 얼이 빠져 멍하니 있다가, 얼떨결에 자신도 모르게 대답해 버렸다.

"그게  개소리예요?"
이리하는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그저 머리를 더 세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한테는 숨길 필요 없어. 난 봤으니까. 네 팔이 순식간에 낫는  봤어.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상시적인 유지가 되는 최고위 재생 마법류겠지. 이해해. 그런 마법이라면 밝히기 힘들겠지."
칼린은 그제서야 상황을 이해했다. 그리고 그 상황이 자신에게 상당히 훌륭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도 눈치챘다.

"아... 이미 다 보신 건가요?"
"그래. 걱정마. 비밀로 해 줄 테니."
칼린은 그녀의 말에 김이 팍 샌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알고 있다는 비밀이 전부다 오해였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와 참을  없게 되었다.

"왜 웃어?"
"아니, 그냥 저를  게 이리하라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말하며 칼린은 계속 웃었다. 이리하는 그런 그를 보며 같이 조금 웃었다.


"몇일 전까지는 영주를 제외한 전원을 불신하더니, 이제는 내가 그거에 대해 말하고 다닐 거라고 생각도 안하나 보네. 극복이 빠른 걸?"
칼린이 지금 웃을 수 있는 것은 왕국에서 미등록 마법사에 대한 체벌이 어느 정도로 강한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칼린은 웃으면서 떠 보듯 물었다.

"그러네요. 제가 이리하씨를 믿을 수 있도록 만들어 줄 만한 게 있을 까요?"
"그러면 내 비밀도 듣는 거 어때?"
이리하의 제안은 꽤 솔깃했다. 자신이 미등록 마법사라는 것은 오해니 애초에 성사되지 않을 거래였지만, 그래도 그녀의 비밀은 궁금했다. 어쩌면 그녀가 가진 저주에 대해 말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네요."
칼린이 이리하를 돌아보며 그렇게 말하자, 이리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일어나려는 칼린을 앉히고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도 너랑 같은 미등록 마법사야."
칼린의 웃음기를 띄고 있던 얼굴이 굳었다. 다행인 건 그녀가 그의 표정을 볼  없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더 자세한 건 아직은 못 말해줘. 하지만, 언젠가 때가 올 꺼야. 그 때 너는 내 편이 되어 줄 거야."
이리하는 별같은 머릿결을 흩날리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을 옮겼다. 그리고 칼린에게 들으라는 듯 말했다.


"그럼, 평등한 세계를 위하여."
평등한 세계라는 말은 칼린에게 익숙한 단어가 아니다. 아니, 전생에는 당연하게 넘어갔던 말이었지만, 신분제가 기본인 이 세계에서는 쉽게 내뱉을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칼린은 한동안  자리에 굳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었다.


#

도르베는 텐트 안에서 진통제를 사탕인 것 마냥 씹어 먹으며 다리의 장치를 조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텐트 앞에 인기척이 느껴져서 정면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텐트 뒤로  인영을 보고 누군지 바로 알아낼 수 있었다.


"갤러한인가. 무슨 일이지?"
"잠깐 들어가도 되냐?"
도르베는 공구함을 치우고 등불을 텐트 위쪽에 다시 걸어 두었다. 그리고 갤러한이 들어올 수 있게 텐트의 천막을 올렸다.

"술을 좀 가져왔지."
갤러한은 그렇게 말하며 들고 있는 양철 캔을 흔들어 보았다. 도르베는 웃으며 하나를 받아 가져갔다.


"받아만 두지. 진통제를 먹고 있어서 술은 마시면 안되거든... 그거 아나? 빅센마르크 군들은 이 진통제를 술에 녹여서 마약처럼 복용하기도 했어."
"귀한  배웠군. 여기 좀 앉을게."
갤러한은 대충 대답하며 공구함을 끌어와 위에 앉았다. 그리고 도르베와 눈을 맞췄다.


"아스타랑 화해할 생각 없냐?"
도르베는 그 말에 들고 있던 캔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밀려오는 불쾌감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래도 그는 확실히 성장한 것이었다. 소금부대에 입대하기 전의 그였다면 바로 당장 나가라고 일갈했으리라. 대신에 그는 갤러한의 이야기도 조금은 들어 보기로 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발두르에서 하루만 더 가면 하인킬이야. 내일 아침 출발이고.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나면 결사대의 임무가 시작돼."
"...뭔 상관이지?"
"후회할  남기지 말라는 거다. 너네 둘 꽤 사이 좋았었잖아? 이번 일이 둘 중 하나의 마지막이  수도 있어."
갤러한은 그렇게 말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도르베는 그 말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떨궜던 술을 다시 들었다. 그리고 그 뚜껑을 열었다.

"안 마시려고 했는데, 못 참게 만드는군. 갤러한, 효를 챙기지 않는 것은 인간 이하라는 거다."
도르베는 그렇게 말하고 술을 들이 마셨다. 따뜻한 열기가 그의 몸 안쪽으로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넌 분명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겠지."
그러다가 갤러한의 말에 술을 마시던 것을 멈췄다. 그리고 그를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네가 뭘 알-"
"아스타의 아버지가 마약중독자였던 것은  해줬지."
갤러한은 그렇게 도르베의 말을 끊고 자신의 술병을 열었다.


"아스타가 자기 아버지를 죽인건, 환각상태에 있던 아버지가 개 어머니를 죽이려 해서 그랬던 거야. 그 전에도 비슷한 일이 많았었고, 아스타와 걔의 오라버니는 항상 두들겨 맞고 살았다는군."
갤러한의 눈 안에는 연민의 감정이 드러나고 있었다. 도르베는 말을 멈추었다가 쏘아붙이듯 말했다.


"결국 부모도 인간이다. 완벽할 수는 없어. 그게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죽일 이유가 되지는 않아."
"그러면 말이다."
갤러한은 술을 한 모금 들이마시고 말했다.

"부모답지 않은 것들도 전부 부모로서 대우해야 한다는 거냐?"
갤러한의 말에는 왠지 모를 억울함이 드러나고 있었다.

"부모답지 않은 것이 어디 있느냐. 너를 낳아주고 길러줬다면-"
"길러주지 않았어!"
"...뭐?"
도르베는 자신의 말을 끊은 갤러한을 바라보았다. 갤러한은 목소리가 너무 컸음을 깨닫고 조금 진정했다.

"길러주지 않았다고, 우리 엄마 아빠는 말이야. 난 천애 고아였고, 아스타의 아버지는 씹새끼였다는거지. 우리한테 부모는 그냥 자기 만족으로 애를 낳아버리고 책임은 지지 않은 쓰레기들일 뿐이야."
갤러한은 다시 술을 한번 쭉 들이키고 말을 이었다.


"아스타가 그랬었어. 결사대 임무를 받은 후에 너가 계속 자면서 아버지, 아버지 거렸다고. 그게 걱정된다고 했었어. 너도 자기처럼 자기 아버지랑 문제  있는 놈이라고 생각했었지. 아닌가?"
도르베는 임무 첫날이 떠올랐다. 분명 아스타가 자신을 장난으로 깨웠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가 꾸고 있던 악몽을 잊게 해주었었다.


"이봐, 부모 자식간의 문제는 어느 한쪽이 씹새인 걸로 끝나는 경우가 별로 없긴 하지.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는 경우가 확실히 많지.. 하지만 단순히 씹새들 아래에서 자라서 사이가  좋을 수도 있는 거라고."
도르베는 침묵했다. 갤러한은 그런 도르베를 보며 한숨을 한번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약 그때 아스타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걔가 죽었었을 꺼야. 정당방위로 갈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 죄를 짊어졌지. 세상 일에는 여러 케이스가 있는 거라고. 그러니까 부탁인데, 아스타에게 미안하다고 한마디만 해주면 좋겠어."
그는 자신의 과거 동료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중에서 죽은 동료의 얼굴들을 회상해 보았다.

"누군가 죽고 나면 늦어. 다른 관점도  받아들이라고. 진짜 후회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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