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아버지와 아들
"뭐...뭐야..."
아스타는 그가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빨려 들어가기 전에 한 말을 똑똑히 기억한다, 장면까지도 생생하다. 그는 고맙다고 했다.
"그...그걸 왜 지금 말하는 건데, 씨발.."
꿈틀대고 있던 시체들은 술자가 사라지자 하나씩 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꽂혀 있던 곳을 잃어버린 화살들도 하나 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땅은 다시 살아있는 사람들의 것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네크로맨서를 놓쳤다.
"야! 이런 병신이! 나오란 말야!"
아스타는 그가 들어갔던 곳으로 달려가 검으로 맨 땅을 후려댔다. 그녀의 손바닥이 찢어지며 피가 터져 나왔다. 아랑곳하지 않고 바닥을 후려대던 그녀는 결국 검이 부서지고 나서야 그걸 집어 던졌다. 그리고 넝마가 된 손으로 그 바닥을 때리기 시작했다.
"이 씨발, 나오라고! 뭐가 고마웠다냐, 씹새끼야! 나와!"
몇 번을 더 두들기며 그 땅이 피로 조금 질척해 질 때까지 반복하던 그녀는, 힘이 풀렸는지 양 팔을 떨구며 허리를 굽혔다. 그녀의 시선 아래에 비가 내리듯 물방울이 졌다.
"뭔가, 뭔가 방법이 있을 꺼야. 애초에 그건 뭔데? 마법이야? 주술이야?"
"...이제와서 그게 무슨 상관이야, 칼린과 도르베는 우리가 모르는 곳으로 떨어져 버렸어. 우리 10명이 덤벼들어야 상대가 되던 괴물이랑 같이..."
륑게는 소니아의 말에 그렇게 말하며 담배를 꺼냈다.
"칼린이... 칼린이 이렇게 간다고?"
갤러한도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그는 잠깐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으려고 입을 가렸다가,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바닥을 향해 뱉어 냈다. 그리고 머리를 붙잡고 심호흡을 했다.
"...전장에서 가는 순서가 있는 게 아니었지. 왜 내가 그걸 잊고 있었던 걸까."
갤러한은 그 자리에 주저 앉아 그의 담배를 꺼냈다. 그리고 입에 한줌을 쥐어 밀어 넣었다. 그런 갤러한을 위로하려는 듯 릴로가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핀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의 시야로 봐서는, 칼린과 도르베가 그냥 갑자기 땅 속으로 끌려 들어간 것이었다. 그게 실제로 벌어진 일임을 핀이 알 방법이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소니아에게 다가가 물어보았다.
"카...칼린씨와 도르베씨는 어디로 가신거죠? 네크로맨서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소니아도 알 수 없었다. 정말로 대답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가만히 입술을 깨무는 소니아의 반응에, 핀은 다른 해석을 했다.
"주...죽은 건가요?"
핀의 떨리는 그 목소리에 아스타가 덤벼들었다.
"뭐라고 했냐, 장님새끼야?"
"아스타! 그만!"
핀의 멱살을 쥔 아스타를, 소니아가 끼어들며 말리려 했다. 그러나 아스타는 넝마짝이 된 손으로도 핀의 멱살을 놓지 않았다. 핀은 찔러들어오는 피냄새에 눈가를 찌푸렸다.
"누가 죽어, 이 씨팔! 누가 죽었냐고!"
그렇게 말하며 들어올린 아스타의 주먹이 누군가에게 뒤에서 잡혔다. 이리하였다.
"넌 뭐야 씨-"
아스타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그녀에게 묵직한 주먹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이리하는 그녀를 때린 주먹을 쓰다듬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왜 그렇게 흥분해, 피아식별 안되냐?"
이리하는 싸늘하게 아스타를 내려다보았다. 아스타는 그 주먹에 멍하니 있다가, 점차 머리로 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 넌 좆도 아무것도 안 느껴지나 보지?"
"꽤 괜찮은 섹드립이라고 말한 거야, 아니면 진심이야?"
뜬금없는 이리하의 말에 아스타는 정신이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를 여전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이리하는 손을 내밀었다.
"네 말대로, 아직 누가 죽은 것도 아니고, 시체를 찾은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흥분했냐고."
이리하의 말을 듣던 아스타는 멍하게 입을 벌리며 스스로 일어났다.
"어디로 갔는 지 모르잖아... 미친 괴물같은 놈이랑 이상한 곳으로 이동당했다고."
"그들은 소금부대용 인장을 달고 있어. 윌레인 국가 안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벨카로 돌아 갈 수 있겠지."
대화에 낀 것은 라드였다. 그는 가만히 그들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전투 최후반부에, 그 노인네는 마법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 정도의 상태였어. 칼린은 그를 완벽하게 제압하고 있던 상태였고. 자신과 직접 붙어있는 칼린을 향해 전기마법을 사용할 수도 없을거고, 지금은 자신의 근처에도 전기마법을 못쓰겠지. 젖은 상태니까."
라드의 건조한 목소리는 뜻밖에도 이런 순간에 침착함을 되찾게 하기에는 최고였다. 아스타는 천천히 이성을 되찾아 가며 그를 바라보았다.
"너... 너도 걔들이 살아 돌아오길 바라고 있는 거냐?"
라드는 아스타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평소에 달고 다니는 비틀어진 웃음이 없었다. 그리고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한테도 꽤 큰 문제라서 말이야."
떨어지는 듯한 감각 속에서도 칼린은 네크로맨서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도르베가 그를 잡고 있었다. 이윽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둔탁한 착지감이 느껴졌다. 삐걱이는 소리와 고른 바닥의 감각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나무 판자 바닥 같았다.
"이...이건...?"
칼린은 조심스럽게 질끈 감았던 눈을 열어갔다. 새가 우는 듯한 소리,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짐승이 나무를 긁는 듯한 소리, 강아지의 짖는 소리, 따뜻한 온기, 더 따스한 향기, 포근한 빛-
완전히 눈을 뜬 칼린은 자신이 어디인지 알면서도 모를 것 같았다. 그는 작지만 아늑한 오두막집의 안에 있었다.
"무슨..."
"이...이제 놔주시지 않으렵니까.... 팔이, 팔이 너무 아파요...."
칼린은 그제서야 다시 제정신을 찾고 자신이 제압중인 노인네를 보았다. 후드가 벗겨지고 완전히 얼굴이 드러난 그는, 생각보다 훨씬 순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그 노인은 눈물까지 흘려가며 반대쪽 팔로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며 바닥을 쳤다.
"진짜, 진짜 부러져요...! 저 늙었으니까, 진짜 이번에 부러지면 평생 못 나아요...!"
겁먹은 듯 그렇게 말하는 노인을 칼린은 의심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노인은 그런 칼린의 시선에 화들짝 놀라며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저...저! 믿을 수 없으시겠죠! 당연하죠! 그냥! 제가 가진 것들 전부 하나씩 뺄 테니까, 그냥 조금 살살 잡기라도 해주세요! 저 진짜 너무 아파요 지금!"
"무슨 수작이냐!"
칼린을 잡고 있던 도르베도 뒤늦게 칼린과 같은 과정을 겪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검을 뽑아 그에게 들이 밀었다.
"예! 수작이고 뭐고 진짜 전부다 말 해 드릴 테니까! 일단 풀어주세요 제발!!"
"칼린! 절대 그 기술...인지 뭔지를 풀지 마라! 이대로 생포해간다!"
칼린은 가만히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눈이 지나치게 순해 보여서, 얕보였으면 얕보일 것 같지 악행들을 먼저 저지르고 다닐 것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도르베, 칼 계속 겨누고 계세요."
"칼린!"
칼린은 천천히 그를 잡은 팔을 풀었다. 숨조절을 하며 붉어지고 있던 그의 얼굴이 원래의 색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아직도 얼얼한 그의 팔을 붙잡고 흔들어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팔을 몇차례 돌려 보았다.
"감사합니다... 진짜 너무 아프네요, 그거. 군인들은 전부 그런 걸 배우나요?"
"네가 알바는 아니지. 자, 이제 이대로 나가자."
도르베는 그렇게 말하며 노인의 목에 검을 더 바짝 들이 밀었다. 노인은 초연하게 그 검을 조금 밀어냈다.
"뭐, 진정하시고요. 계속 겨누고 계시면 팔 아프지 않으십니까?"
"양팔 올려라. 개수작 부리지 말고."
"그, 그러면 저 문만 열어주세요.."
노인은 도르베보다 칼린이 대화가 통한다고 판단하고 칼린에게 부탁했다. 노인이 말한 문은 그들이 들어오게 되었던 문이었다. 칼린은 그가 다시 전장으로 돌아갈 생각일 것이라 판단하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뭔가가 덮쳐 들어왔다.
"뭐-"
"칼린!"
뭔가가 덮쳐 들어온 것을 확인한 도르베는 바로 검을 하나 더 뽑아 노인의 목에 들이 밀었다. 노인은 크게 당황하며 양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아뇨, 오해예요, 진짜로! 좀 저쪽을 보세요!"
"또 무슨 수작을-"
"도르베! 괜찮아요."
칼린의 목소리에 도르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칼린은 커다란 달마시안에게 깔려 있었다. 그 달마시안은 칼린의 가면을 마구 햝아대고 있었다.
"그냥 개예요... 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칼린은 사람을 잘 따르는 그 개가 귀엽기도 해서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마치 쓰다듬어 지기를 기다리는 듯한 그것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번 손이 닿을 때마다, 개의 귀가 뒤로 접혀 들어갔다.
칼린은 처음 들었던 긁는 소리와 개소리는 이 친구가 낸 것이라고 깨달았다. 그러나 전장에서는 본 적이 없는 개이다. 사실 전장에 오두막이 있던 것도 아니다. 칼린은 그대로 개에게서 시선을 문 밖으로 옮겼다.
거기에는 넓은 들판이 있었다. 형형색색의 채색으로 이뤄진 꽃밭이었다. 바람이 그걸 쓸어 넘길때마다, 갖가지 배색이 섞이며 자극적으로 눈을 찔러 들어왔다. 지평선 너머에는 높이 솟아 오른 산이 보였다.
푸른 하늘의 가운데에, 주홍색 지붕의 풍차도 하나 있었다. 하늘하늘하게 돌아가는 풍차의 날개는 평화로운 분위기에 정점을 찍어냈다. 불어오는 바람에 담겨오는 아찔한 꽃냄새에 칼린은 고개를 돌렸다. 도르베도 넋을 잃고 문 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은 천천히 팔을 내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일단 진정하고, 대화나 해보지 않으렵니까?"
'칼린과 도르베가 어딘가로 사라졌다고...'
소니아는 통신 너머의 요나가 보이는 것 같았다. 싸늘한 목소리가 마치 공격처럼 그녀의 명치를 때려왔다.
'그리고... 네크로맨서도 놓쳤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냐?'
"....죄송합니다, 지휘관님..."
소니아는 요나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왠지 모르게 그 말과 함께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는 침착하게 목을 옥죄어 오는 듯한 힘이 있었다.
'모두에게 전달해라.'
한동안 침묵 상태이던 요나가 입을 열었다. 소니아는 급하게 모두를 불러 모은 후 파래진 안색으로 몸을 굽히며 물어보았다.
"모...모두를 불렀어ㅇ...습니다, 지휘관님."
'내 말을 그대로 전달해라.'
소니아는 모두를 바라보며 그녀의 말을 그대로 육성으로 전달하기 시작했다.
'너네들 전원.'
"너네들 전원-"
'칼린없이 벨카땅을 밟는다면.'
"....칼린없이벨카땅을밟는다면...?"
소니아는 그렇게 말하고서 입을 막았다. 그리고 새하얘진 얼굴로 숨을 참았다가 거칠게 내뱉는 것을 반복했다.
'네 입으로 전달해라, 소니아. 빨리.'
"뭔데, 연결 끊겼어?"
다가가려는 륑게를 소니아는 손으로 막으며, 최대한 흐느낌을 억제하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붉어진 눈으로 모두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내가 직,직접, 참수해....주마..."
그녀는 사시나무처럼 떨면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자신이 우는 것이 들켰다가 영주의 심기를 거스르게 될 것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세겨들어라. 이만.'
요나는 그렇게 말하고 연결이 끊어졌다. 부대원 중 그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감히 떠벌일 때가 아니었다.
요나는 소니아와 통신이 끝난듯 하더니, 의자를 거의 부시듯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부지깽이를 가지러 갔다. 그리고 그걸 쥐고 전력을 다해 테이블에 후렸다. 테이블이 큰 소리를 내며 완전히 부서졌다.
"젠장! 젠장! 젠장! 젠장!"
그녀는 엉망으로 머리를 풀어 헤치며 윗도리를 벗어 던졌다. 그리고 그 부지깽이로 계속해서 방 안에 물건들을 부시기 시작했다.
"무능한 것들, 무능한 것들! 내가, 내가 갔어야 했다!"
요나는 그렇게 소리지르며 방 안의 모든 것들을 부수고 다녔다. 부서진 책장이 무너지며 쓰러지고 나서야, 그녀는 겨우 이성을 조금 되찾았다. 그녀는 멍하게 서있다가 곧 터져 나오는 울음에 눈을 가렸다.
"아아, 칼린... 내 실수다... 내 실수로구나... 내가 욕심이 과했다.."
그녀는 머리를 쥐어 뜯으며 오열했다. 그리고 붉게 충혈된 눈으로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알레프으으으!!!"
그녀는 절규하듯 그렇게 소리질렀다. 문 밖에서 대기하던 그녀의 노집사가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네, 주인님."
"칼린이- 칼린이 실종되었다. 그를 찾아야 한다. 그를-"
"주인님, 조금 진정하시고서-"
"진정하라 했느냐!"
요나는 완전히 이성을 잃고 있었다. 그녀는 총애하는 노집사에게까지 욕설을 뱉기 시작했다.
"네놈이 미쳤구나! 칼린, 칼린이 실종되었단 말이다! 내 손을 벗어나 있어...! 어떻게, 어떻게 잡아낸 나의 행복인데, 어떻게 얻어낸 보물인데..."
그녀는 평소같이 호령으로 큰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미친 자의 발악과도 같은 악바리로 쥐어 짜내듯 소리치고 있었다. 그녀의 목이 완전히 잠겨 버렸다.
그녀는 그 말까지 마치고서 다리의 힘이 풀린 건지 자리에 풀썩 앉았다. 그리고 그대로 눈을 가리며 다시 또 울었다. 약 3분이 지난 후에야, 그녀는 눈물을 닦아냈다.
"알레프, 아직, 아직 그 자리에 있느냐?"
"예, 아가씨."
그녀는 다시 평소의 침착한 어조가 돌아와 있었다. 목은 완전히 잠겨 있었지만, 평소의 침착함을 일부라도 되찾은 것 같았다.
"난 칼린을 찾아낼 것이다. 반드시 찾아야겠다. 넌 인쇄소와 지난 번 파티에 초대되었던 모든 귀족들에게 연락해라. 칼린의 소재지를 찾아내라. 인상착의에 대해서는 내가 직접 설명하겠다."
"아가씨, 보고에 따르면 칼린씨가 실종된 지 아직 1시간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상황을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집사의 말은 타당했다. 그녀도 백분 공감하고 이해한다. 다만 지금 상황에서는 다르다.
"두번 말하지 않겠다."
알레프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이성이 돌아와 있었다. 분명, 방금 전처럼 이성을 놓아버린 광인의 눈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 안에 깃든 감정이었다. 그 눈에 있는 것은 절망, 분노, 자책감, 걱정, 그리고-
집착과 정념이었다.
칼린과 도르베는 왠지 모르게 테이블에 앉아, 1시간정도 전까지 자신의 동료들과 목숨 걸고 싸우던 대상에게 차를 대접받을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그 노인은 앞치마까지 두르고 홍차를 끓여 낸 뒤 그들의 컵에 따라 주었다. 환상적인 점핑이었다.
"저기..."
칼린은 곧 터질 것 같은 표정을 하고 다리를 신경질적으로 떨고 있는 도르베 옆에서,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노인은 고개를 굽히며 눈을 크게 뜨고 칼린을 보다가, 마치 큰 실례를 했다는 듯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아, 창문을 열어 두고 있었네요. 죄송해요, 신경쓰였죠?"
"아, 아뇨! 전혀요!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와서 오히려 좋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칼린은 양 손을 휘 저으며 말했다. 도르베는 결국 이 느긋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며 일어났다.
"우리가 왜 네놈과 차를 마시고 있는 것이지? 뻔뻔한 범죄자 주제에!"
"도르베씨! 잠깐!"
"더 이상은 못 기다려! 마나를 회복하려는 네 속셈은 이미 다 파악했다! 모가지를 따주마!"
의자에서 올라와 식탁에 한쪽 발을 얹으며 검을 뽑으려는 도르베를, 칼린이 옆에서 뜯어 말리고 있었다. 노인은 그런 그들을 보며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차를 들이 마셨다.
"차...차까지 마시기 시작하는 거냐... 너, 네놈을 그냥,"
"제발, 도르베씨! 일단 진정 좀 하세요!"
도르베의 눈에서 이성이 사라지는 것이 보이기 시작하자, 칼린은 아예 덤벼들 듯 그를 잡아 누르고 있었다. 노인은 홍차를 두 모금째 마시고 나서야, 덕을 깨달은 노인들만이 지을 수 있을 법한 관록있고 인자한 웃음을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걱정마세요. 저도 여러분이 설마 여기까지 따라 오실 줄은 몰랐기에... 여기까지 따라오셨으니, 이제 전 도망도 저항도 할 수 없어요. 잡혀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젊은 사람들과 대화가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랍니다."
"...도망도 저항도 불가능하다고?"
도르베가 의문이라는 듯 그렇게 말하자, 노인은 웃음을 지으며 깜빡했다는 듯 뒤의 다락을 뒤지러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거기에서 지도를 꺼내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여기가 어딘지 설명을 안 드렸군요."
그는 지도의 한 점을 가리켰다. 칼린은 아무것도 모른 채 어리둥절하게 지도만 바라보았지만, 도르베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서...설마,"
"네, 맞아요."
노인은 빙그레 웃었다.
"침묵의 산, 기적이 존재하지 않는 땅. 다미스 산 부근이예요."
도르베의 눈가와 입가가 동시에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뻐끔거렸다.
"이제 안심하고 대화가 가능할까요?"
그와는 대조적으로, 노인은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