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아버지와 아들
부대원들은 하인킬의 전장에 앉아서 칼린과 도르베를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두 시간 가량이 지났었다. 그러나 아무도 섣불리 먼저 자리를 뜰 생각은 없었다.
딱히 칼린과 도르베의 복귀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어디로 돌아올 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다만 자신들의 실패를 곱씹으며, 잘못 풀리면 영주에게 살해당하게 생길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이변을 눈치챈 것은 아스타였다. 그녀는 도르베가 끌려간 바로 그 자리에서 도르베의 다리 교정 장치를 들고 망연히 서 있었다. 그 때, 눈 앞에 작은 문고리가 자라나는 것이 보였다.
"야, 저... 저거 뭐냐? 나만 보이냐?"
아스타의 말에 라드와 갤러한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바닥에서 자란 문고리를 보았다. 그 문고리를 따라 이윽고 작은 틈새가 생기더니, 곧이어 그것은 문이 되었다. 천천히 문이 열리며, 발이 튀어나왔다.
누구 하나 먼저 말 할 것도 없이 다급하게 무장을 챙겼다. 그리고 그 장소를 향해 경계태세를 유지했다. 모두의 경계 속에서 문 너머로 나온 것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도르베였다.
"도르베!"
아스타가 들고 있던 부러진 검을 집어 던지며 그를 향해 달려갔다. 도르베는 고통스러운 웃음을 짓고 아스타를 향해 절뚝이며 걸어갔다. 일행들이 하나하나 모이기 시작했다.
"도르베, 이 씨발놈아! 진짜 걱정했단 말이야!"
"아, 미안하군... 다들 걱정 마, 나도 칼린도 무사하다. 다만..."
도르베는 그렇게 말하다가, 지친 듯 비척비척 걸어가 근처의 바위에 쓰러지듯 앉았다. 소니아가 급하게 자신의 수통을 가지고 와 도르베에게 내밀었다.
"...난 괜찮아. 아니, 역시 주거라. 필요할 것 같다."
그는 바짝 마른 입술에 수통을 댔다. 몇 번인가 목을 울리고 물을 마시고 있을 동안, 칼린도 그 문을 통해 나왔다. 그의 정장에는 피가 묻어 있었고, 검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강보를 들고 있었다.
"칼린! 너 임마 그걸 그대로 따라가면...!"
갤러한은 화내려고 했지만 비져 나오는 웃음을 참아낼 수 없었다. 그는 계속 애매하게 말이 끊어지다가, 결국 말로 하는 것을 포기하고 칼린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칼린은 그저 비틀댈 뿐이었다.
"야, 야 임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말해줘야지! 왜이렇게 기운이 없어!"
갤러한은 그렇게 말하며 칼린의 어깨를 쥐고 흔들다가, 그가 들고 있는 강보를 눈치챘다. 분위기를 파악하고 점점 느려지는 갤러한을 보며, 칼린은 느리고 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네크로맨서... 사냥 성공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들고 있던 강보를 힘없이 갤러한에게 들이 밀었다. 갤러한은 엉거주춤 그 강보를 받아냈다. 아찔한 피냄새가 그의 비강을 자극했다.
그는 그 강보를 열어 보았다. 편안한 얼굴을 한 노인의 머리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을 찾기 위해서 모든 일을 벌였다고. 아들의 유품만 고향에 묻어 줄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고 했습니다만, 절대로 살아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 손으로.."
칼린은 가만히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갤러한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갤러한, 지난번에 이데에서 발견했던 시체의 유품을 주시겠어요? 군번줄들이랑 같이요."
갤러한은 곤란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모두가 살아남았고, 네크로맨서를 토벌했다. 임무의 완벽한 성공이었다. 그러나 생환자의 분위기가 축하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웠다. 그는 자신의 가방을 열어 그 때 얻은 캔들과 군번줄들을 꺼냈다.
"몇개는 그냥 바닥에 쏟았는데..."
"괜찮아요. 파나빈의 흙만 남아 있다면.."
칼린은 힘없이 그 유품들을 받았다. 갤러한은 그런 칼린을 바라보다가, 륑게에게 눈치를 줬다. 륑게는 망설이다가 자신의 가방을 열고 군번줄 다발을 꺼내서 칼린에게 건내 주었다.
"그...오해는 하지 말고, 우리가 군번줄을 빼돌린 건 아니니까. 그런데 전에 이데에서 일한 적 있다고 했잖아.. 그 때 시체 군번줄은 나라보다 동네 철물점이나 암시장이 더 비싸게 쳐줘서 그쪽으로 팔았었거든... 아, 그래서 이데에 도착했을 때 다시 산 거니까! 두배 값으로 샀었다?!"
변명하듯 말하는 륑게에게서, 칼린은 군번줄을 받았다. 약 30개정도 되어 보였다. 그러니까, 노인의 아들이 들고 있던 것을 포함해 약 4~50개의 군번줄이었다. 칼린은 묵직한 무게를 받아들이며 다시 문고리를 잡았다.
"이 중에는 그의 아들의 것도 분명히 있겠죠. 안식을 찾아 주고 오겠습니다."
엄숙하게 말하고서, 칼린은 그 문고리를 땅에 댔다. 그리고 천천히 잡아 빼듯 문을 연 뒤, 나왔을 때 만큼 자연스럽고 갑작스럽게 들어갔다.
"ㅇ, 야, 도르베.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걱정하며 묻는 아스타의 말에도 도르베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런 전개가 될 것이라고는. 정말.
그는 고개를 더 내리 숙였다. 그리고 양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잘 풀릴 줄은 몰랐다. 그는 웃고 있었다.
철컥,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노인은 발을 동동 구르다가, 그 소리에 나이에 맞지 않는 방종함을 보이며 달려갔다. 칼린이었다.
"그 방법이 먹혔나요?"
"그럼요. 자, 확인할 게 많아요."
칼린은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에 군번줄을 내려 놓았다. 차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대량의 군번줄이 쏟아져 나왔다.
"아드님의 것을 찾아 봐야죠."
"저, 정말 감사합니다...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조건'만 지키시면 됩니다. 아셨죠?"
칼린이 제시한 조건은 두가지였다. 그를 대신할 시체의 머리를 만들어 낼 것, 다시는 파나빈을 벗어나지 말 것이었다.
"네, 지키고 말고요..."
노인은 떠듬떠듬 눈물을 흘리며 군번줄들을 하나하나 쓰다듬었다. 눈 앞이 부얘져서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루벤... 루벤을 찾아 봐야죠. 하지만 일단, 더 중요한 게 있어요."
칼린은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주머니에서 루벤이 들고 다녔던 금속 캔들을 꺼냈다.
"이건...?"
"당신의 아들이 들고 다니던 거예요. 직접 보시죠."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그걸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하나씩 열어보았다. 각지의 흙을 살펴보던 노인은, 마침내 마지막 캔에 손을 대 보았다. 그 캔에는 파나빈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아... 제 아들은.."
노인은 그 캔을 자신의 아들인 것처럼 쓰다듬어 보았다. 캔에는 루벤이 마지막으로 마을을 들렀던 때의 날짜가 적혀 있었다.
"제 아들도... 고향을 그리워했던 거군요... 오오, 루벤...!"
그는 그 캔을 사랑스럽다는 듯 품으며 입을 맞추었다. 계속해서 흐느끼는 그를 걱정하며 달마시안이 다가왔다.
부자의 상봉은 마침내 이뤄졌다. 원하는 형태는 아니었지만, 가장 따뜻하고 아름다운 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슬슬 돌아가야죠. 너무 늦으면 걱정할 테니."
노인은 자신의 아들의 군번줄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남은 군번줄은 칼린이 다시 챙겼다. 이것들은 정당한 방식으로 국가에게 넘길 것이다.
"정말 변변찮은 보답하나 드리지 못했네요... 이대로는 안되는데."
칼린은 그의 말에 잠깐 고민하다가, 그냥 계속 떠올리고 있던 것에 대해 묻기로 했다.
"그럼 혹시 질문 하나만 답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이 노인네가 아는 것이라면, 뭐든지요!"
밝게 대답하는 노인에게 칼린은 이 세계에서 요나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던 것을 물어보았다.
"혹시 다른 세상...아니, 다른 세계로 이동되는 마법이나 주술에 대해 들어 보신 게 있으신가요?"
노인은 그 말에 잠깐 벙 쪄 있다가 머리를 긁으며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무리해서 떠올리려고 해 봐도, 그런 마법도 주술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다른 세계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힘들었다.
"그러니까, 뭐, 다 같은 인간이고 똑같은 세계인데,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던가, 미묘하게 다른 세계인...."
칼린은 나름의 설명으로 덧붙여 보려고 했지만, 그도 역시 제대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애초에 그 노인의 반응을 보면 정답은 나온 것이나 다름없다.
"...잊어주세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칼린은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리는 없다, 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다시 움직이려고 했다. 노인은 그런 칼린을 보며 목석같은 눈을 찡그렸다.
"아니, 그 질문에 대답은 못 드리지만, 다른 도움은 분명히 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노인은 주름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문 앞에서 고민하다가, 표정을 밝히며 그에게 제안했다.
"그렇지! 이 노인네가 마지막으로 칼린씨의 점이나 보게 해주세요. 뭔가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저...점이요?"
"당신의 앞날에 축복을 빌며, 점을 쳐드리고 싶습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의 부탁이예요!"
칼린은 점을 믿지 않지만, 마법이니 주술이니 신기한 것들이 가득한 이세계이다. 그는 얌전하게 다시 테이블에 앉았다.
"잠깐만 기다려 보시죠. 제가 전부 가져오겠습니다."
노인은 즐겁게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리고 다락에서 커다란 판을 가져온 그는, 칼린을 마주하며 판을 내려 놓았다.
"일단, 그 가면을 벗어보지 않으렵니까? 얼굴을 봐야 해서..."
칼린은 그의 말에 잠깐 고민했다. 그러나 다시는 볼 일 없는 노인에게 얼굴을 숨길 필요는 없다고 판단하고 가면을 벗었다.
"오오오...! 맙소사!"
노인은 눈을 크게 뜨며 뒤로 잠깐 물러났다가, 곧 그를 향해 몸을 끌며 다가왔다. 그리고 얼굴을 만져보며 감탄했다.
"맙소사..! 칼린님은 그 인성만큼이나 외모도 고우시군요..!"
"..점치려는 게 아니셨나요?"
칼린은 일일이 이런 반응이 불편하다. 외모로 칭찬을 들어 본 적 없었던 그로서는 상당히 간지러운 기분이다.
"아! 죄송합니다. 늙은이의 주책이라 생각하시고 넘어가 주세요. 하지만 정말로... 말도 안되는 외모인지라..."
노인은 끝말은 거의 중얼거리며 넘어갔다. 그리고 판의 크기에 맞는 거울을 하나 꺼내 와, 판의 밑바닥에 깔았다.
"거울에 얼굴을 비춰주시렵니까?"
칼린은 판 바닥의 거울을 바라보았다. 깨끗한 거울이었다. 단순히 깨끗하다기 보다는, 다른 것까지 비춰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노인은 곧 바둑돌같은 것을 5알정도 꺼내 와, 그 판 위에 집어 던졌다. 거울 속 칼린의 모습이 조금 흔들렸다.
"이제 머리를 치워 주세요."
칼린이 머리를 치우자, 노인은 그 바둑돌의 배열을 꼼꼼히 확인했다. 그리고 혀를 내둘렀다.
"왜 그러시죠?"
"아니... 이 늙은이가 평생을 점을 치며 살아 왔지만.."
노인은 안색이 흙빛이 되어갔다. 그리고 칼린을 다시 바라보았다.
"칼린씨, 당신의 인생은 앞으로도 험난할 겁니다... 무슨 인생을 살아오셨는지, 어디에서 오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아니 어쩌면 앞으로 더욱 힘든 일이 찾아 올 수도 있어요.. "
노인의 말에 칼린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인과라는 것이죠... 당신의 인과는 너무 뒤틀려 있어요. 상처입고, 고통받을 겁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너무도 선해서... 그 인과로 혼자 고통스러워 질지도 몰라요."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 칼린의 손을 쥐었다. 온기가 전해졌다.
"부디 믿음직한 동료들과 모든 것을 잘 헤쳐 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칼린씨에게 드리고 싶은 것이 생겼네요."
그는 주머니에서 조약돌을 꺼냈다. 깎아진 대리석같은 흰색의 돌이었다. 아니, 무언가의 뼈같이 생기기도 했다.
"이게 뭐죠?"
칼린이 그 돌을 받고 질문하자, 노인은 가만히 그의 손에 그 조약돌을 쥐어 주며 말했다.
"윌레인 대륙을 넘어서, 바다를 건너면 위대한 섬이 하나 있습니다. 거기에는 무덤이 있지요. 역사를 통틀어, 가장 오래된 무덤이예요. 첫번째 인간의 무덤입니다."
칼린은 그 돌을 내려다보았다. 특이한 질감이었다. 까슬까슬하게 느껴지면서도 부드러움이 같이 존재했으며, 약간의 온기도 느껴지는 듯 했다.
"그 무덤으로 떨어진 성운의 파편이에요. '인과를 피하는 돌'이라고 부르죠.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당신의 운명을 크게 바꿔줄 수 있는 물건이 될 겁니다. 칼린, 이 돌을 간직하세요."
"...명심할게요."
칼린은 그 돌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칼린은 그의 점을 나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크게 대수롭게 생각하지는 않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문고리를 잡은 칼린은 조금 귀찮다는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칼린, 당신의 안에 있는 것을 조심하세요."
"안...이요?"
"네. 안에 있는 것이요. 몸 안이 아니라, 영혼의 껍데기 안에 숨어 있는..."
"그게 무슨..."
"아...직은 확답을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네요. 그냥, 칼린씨는 스스로를 경계할 필요가 있어요."
노인은 그렇게, 처음 만났을 때처럼 후드를 다시 눌러썼다. 그리고 그늘진 얼굴에서 하관만을 보이며 빙그레 웃었다.
"다시 만났을 때에는 그게 뭔지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전 그 때까지 칼린씨가 말한 이세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칼린은 얼굴을 조금 찡그렸다.
"...우린 다시는 만나서는 안되요. 할아버님은 이곳에 평생 계셔야 한다구요."
"당연하죠, 조건을 잊은 것이 아니에요, 칼린씨. 하지만, 언젠가 칼린씨가 이곳에 찾아와서- 저를 만나게 되실 겁니다. 장담해요."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 손을 흔들었다. 칼린도 그의 말에 깊은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저 그의 웃음을 흉내내 듯 빙그레 웃어 보인 뒤,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가면을 썼다.
"왔냐, 칼린."
갤러한은 이제 바닥을 열고 나오는 칼린의 기묘한 등장같은 것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는 바로 칼린에게 달려가 음식과 수통을 건냈다.
"야, 첫 살인이니까 힘들었을 텐데, 아, 진짜 마음도 안 좋고 할 텐데, 그럴 때 일단 배가 불러야 되거든-"
"괜찮아요, 갤러한."
칼린은 그렇게 말하고 도르베쪽을 보았다. 도르베도 칼린을 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오히려 지금, 기분이 나쁘지 않네요."
그런 말을 하는 칼린을 보며 갤러한이 살짝 뒷걸음질치자, 칼린은 자신이 어떤 식으로 보일지 깨닫고서 급하게 수습했다.
"아, 아니, 사람을 죽여서 기분이 좋다, 이런 게 아니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양 손을 휘젓다가, 이렇게 말하는 것 보다 효율적인 방법이 있을 것 같아 바위 위로 발을 옮겼다. 마치 단상 위처럼 높이 선 칼린은 모두를 한 명씩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진짜 위험한 임무였는데 아무도 안 죽고 해냈잖아요. 도르베는 부상을 입고 있었고, 저는 실수 투성이었는데도 잘 해냈어요. 기적같은 일이야."
모두가 우뚝 선 칼린을 바라보았다.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다.
"저는..저는 이제 여러분을 정말 제대로 믿어보려고 해요. 앞으로 한 걸음 더 가보려고 해요. 부족하니까 여러분에게 더 기대보려고 해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조용히 가면의 스트랩에 손을 댔다. 앉아 있던 아스타와 이리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숨을 죽였다. 도르베도 침을 삼키며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태양이 내려 앉으며, 빛이 그들을 강렬하게 비추었다.
"그런 의미를 담아, 다시 한번 인사 드립니다. 칼린이라고 합니다."
그는 스트랩을 풀고 가면을 벗었다. 그리고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뜨며, 모두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런가, 칼린을 되찾았나!"
'네, 그리고 칼린이 네크로맨서의 목도 가지고 왔습니다!'
"칼린, 칼린을 바꿔다오!"
'아니, 그, 그럴 수가 없는 마법인지라..'
요나는 잔뜩 흥분해서 방 안을 이리저리 돌며 말하고 있었다. 칼린은 반나절도 되지 않아 자신을 납치했던 네크로맨서의 목을 따왔다. 그녀는 그게 너무 기쁘고 자랑스러워서 맨정신을 유지할 수 가 없었다.
"아니, 됐다! 자세한 이야기는 내가 칼린에게 직접 듣고 싶다! 최대한 빨리 복귀하도록!"
요나는 그렇게 말하고서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어버렸다. 칼린이 어떻게 활약했는지 어중이 떠중이를 거쳐서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충실한 종, 그녀만의 칼린에게 직접 듣고 싶었다.
그녀는 침대에 풀썩 누운 후, 웃었다. 호탕하게, 크게, 그녀답게 웃어댔다. 그리고 숨을 고르던 그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잠시 그렇게 누워 있었다. 그녀가 있는 곳은 칼린의 방이었다.
"...끊으셨네."
소니아는 그렇게 말하며 갤러한을 보았다. 갤러한은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뭐, 우리를 직접 죽이려던 영주다! 하루 정도는 늦게 가자고!"
그들은 아직도 전장에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전장에서 이미 축제 분위기가 되어버려서 움직이지 않고 있던 것이 크다.
"아직도 못 믿겠어.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생겼지?"
아스타는 칼린의 볼을 당겨 보기도 하고 톡톡 쳐 보기도 하며 계속 만져보고 있었다. 칼린은 조금 귀찮은 듯 손을 밀어냈다.
"이런 것 때문에 숨겼다구요."
"..진짜 재수없는 말인데, 이해는 간다."
아스타는 손이 계속 쳐 내지면서도 그의 얼굴에 손을 갖다 대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라드도 진귀한 것을 보는 듯한 눈으로 칼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양쪽이 피 튀기게 싸울 만하네."
"뭐라고 하셨어요?"
"응? 아니, 혼잣말이다."
상인은 분명 그를 표현할 때 '살아있는 금강석'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었다. 실제로 보니 의외로 그렇게 과장된 표현은 아닌 것 같았다.
이리하도 놀란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의외로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었다. 그녀가 칼린을 유심히 보던 것은, 그의 껍데기 때문이 아니었으니까.
"이제 슬슬 하인킬로 들어가요... 어두워지고 있잖아요."
"조, 조금만 더..."
핀은 칼린의 '조형미'를 느껴보겠다며 손바닥을 칼린의 얼굴에 문대보고 있었다. 나머지 부대원들은 가방을 챙기며 엉덩이를 털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며 부드럽게 덮여 오는 어둠속에서, 칼린은 말 못할 평온함을 받고 있었다. 그는 드디어 이세계에서 자신의 정착지를 찾아낸 기분이 들었다.
"자! 움직이자."
갤러한은 선두에서 힘차게 외치며 칼린을 돌아보았다. 바람이 불어온다. 시작의 순풍이다. 참 오랜만에 그는 이 기분을 느낀다. 등을 맡길 동료들, 소속감, 신뢰.
"많이 어두워졌네."
이리하는 그렇게 말하며 챙겨온 호롱에 불을 붙였다. 길게 뻗은 어둠속에서, 앞길을 비춰줄 빛이 태어났다. 칼린은 드디어 앞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