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암투(暗鬪)
칼린은 눈을 떴다. 그는 모두가 뻗을 때까지 술 상대를 해주다가, 모두가 뻗어버린 후 잠깐 눈을 붙이러 갤러한의 방에서 수면을 취했었다.
계단을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칼린은 계단 가운데에 알몸으로 뻗어 있는 릴로를 가볍게 뛰어넘고 술집을 천천히 보았다.
술집의 모든 테이블을 일렬로 모아 세워 둔 끝에는, 속옷만 입고 전신에 기름칠을 한 채로 바닥에 꼬라 박혀 있는 핀이 있었다. 입구 쪽 옷걸이에는 어떻게 버티고 있는 지 모를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륑게가, 흰색 원피스를 입고 잠들어 있었다. 와중에 역시 사이즈가 너무 작았었는지 원피스는 찢어져 있었다.
그는 카운터 쪽을 돌아보았다. 카운터 안쪽에는 소니아가 아직 술잔을 쥔 상태 그대로 뻗어 있었다. 그녀의 맞은 편에는 주인장과 그의 아내가 같이 뻗어 있었다.
아스타는 근처 바닥에서 큰 대자로 뻗어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상의는 릴로의 속옷과 함께 천장 조명에 걸려 있었다.
바닥에는 아스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깨진 접시들과 음식들로 가득했다. 칼린은 그런 참사현장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피식하고 웃었다. 그리고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가, 청소용품을 꺼냈다.
"뭐해, 칼린."
"아, 이리하. 제가 깨웠나요?"
이리하는 적당히 술을 마시다가 졸리다 하며 방으로 들어갔었다. 그래서 그녀는 진짜 재밌는 장면들을 놓쳤다.
"...뭐야, 이건."
이리하는 눈을 비비며 내려오다가 실수로 릴로를 밟고 나서야 현장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칼린의 청소로 깨진 조각들이나 음식들은 대부분 치워졌지만, 아직 술집 안은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되어 있었다.
"죄송해요. 새벽에는 조금 난잡해졌었거든요.. 지금 청소 중이었어요."
칼린은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서 다시 빗자루를 쥐고 여기저기를 쓸어 내기 시작했다. 이리하는 그런 칼린을 바라보다가 청소 도구함에서 대걸레를 꺼내 들었다.
"도와줄게."
"예? 아뇨, 괜찮아요! 이리하씨는 먼저 잠들었었기도 했고, 이건 끝까지 같이 달렸던 제가 책임 져야죠!"
손사레를 치며 말리는 칼린을 가볍게 무시하며 이리하는 대걸레를 물통에 집어넣었다.
"돕고 싶어서 돕는 거야. 괜찮아."
칼린은 그 말에 가만히 물을 머금은 대걸레를 꺼내는 이리하를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대걸레는 빗자루질 끝나고 해 주세요. 지금은 솔직히 좀 방해예요."
"아... 미안."
"별 말없는 걸 보니 영주한테 말은 안 했나 보네."
이리하는 그렇게 말하며 빗자루질을 했다. 나무바닥이 쓸리는 소리가 퍼져 나갔다. 묘하게 침착해지는 소리였다.
"...그냥요."
칼린은 짧게 대답하고 음식물들을 쓰레받이에 밀어 넣었다. 이리하는 그런 그를 보며 웃었다.
"말 했잖아. 넌 안 말할 거라고. 내가 전화기를 부순 것도 말 안 했지?"
"아, 말하기를 원하는 거예요? 정말.."
칼린은 조금 큰소리로, 이리하쪽을 돌아보지도 않으며 대답했다. 이리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마정석은 제대로 챙겼으니까, 그것만 영주에게 돌려주면 전화기를 다시 만드는 건 그렇게 비싸게 안 들어 갈 거야. 다시 만들면 안 부술게. 이젠 너도 스스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아니, 제 선생님도 아니고 참.."
칼린은 결국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걸 선심 쓰듯 말하는 이리하가 어이가 없어서, 그런데 또 그게 그녀 다웠기에 밉지는 않아서 웃었다.
"선생이 아니야. 등불이지."
이리하도 웃으며 대답했다. 슬슬 바닥에 깔려 있는 것들은 청소가 끝난 것 같았다. 칼린이 이리하가 적셔 두었던 대걸레로 손을 뻗을 때였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술집 문이 열렸다. 갤러한은 숨을 죽이며 들어왔다가, 눈 앞에 참사를 목격하고 조금 당황해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청소중인 이리하와 칼린을 목격했다.
"아, 갤러한씨. 어서오세요."
"어, 어... 수고한다."
갤러한은 그렇게 말하며 문을 닫았다.
"다시 잠굴까?"
"아뇨, 그냥 들어오세요."
칼린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청소에 집중했다. 일단 제일 급선무는 온몸에 기름을 바른 핀을 세우는 것이었다.
"이리하씨, 다리를 잡아주세요."
"응."
미끌미끌한 핀을 둘이서 잡아 테이블로 얹은 후, 그들은 바닥에 흥건한 기름을 보며 짧게 탄식했다.
"뭐, 나도 도와줄까?"
"...부탁해요, 갤러한씨. 정말 손을 빌리고 싶지는 않았는데.."
"야,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마. 이런 건 도와야지."
"감사합니다. 먼저 짐부터 정리하고 오셔도 되요."
"어어, 그럴라고."
그렇게 말하며 갤러한은 가방을 들고 릴로를 뛰어 넘어 방으로 올라갔다.
"그럼...다시 시작하죠."
"응."
불꺼진 술집 안에서 아침햇살이 비쳐 들어오며 조금 따뜻해 지기 시작했다. 청소는 별 말없이 진행되었다. 어색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냥, 아침의 묘하게 차분한 분위기라는 것이었다. 조용하면서도 분주하게 셋은 청소를 계속했다.
참 이상하게도, 바쁘면서 여유로운 아침이었다.
"들어와라."
요나는 평소보다도 이른 아침을 시작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한 숨도 자지 않았다. 밤을 새워가며 가만히 성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가 뜨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었다.
영주실에 들어온 것은 그녀의 노집사였다. 왜 인지 그는 평소보다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였다.
"영주님, 손님이십니다..."
노집사는 힘없이 말하고 나서 문을 완전히 열었다. 그 뒤에는 마레가 서 있었다.
"아, 이런."
영주는 피곤한 머리를 움켜쥐었다. 마레는 목발을 짚으며 영주에게 다가왔다.
"요나씨! 반갑습니다! 전에 인사를 드린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정식으로 만나는 것은 또 처음이군요! 다시 한번 인사드려도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검날만큼이나 차가우셔라! 그러면 자기소개는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마레는 그렇게 말하며 목발을 옆에 내려놓고 요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자신이 가져온 종이시트를 요나의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그건 뭡니까?"
요나의 질문에 마레는 자신도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테이블을 몇 번 탭 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것'에 대한 이야기는 영주님의 홍보 상태에 대해 듣고나서 하는 게 순서에 맞을 것 같네요! 영주님이 워낙 올곧고 잔치례를 좋아하시지 않는 성격이니 그냥 주제 본론만 똑바로 잡아 질문 드리자면, 지금 홍보를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아직도 말이 너무 기십니다."
요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서랍에서 종이를 꺼냈다. 그녀가 생각하고 있던 계획안이었다.
마레는 그걸 받아 읽어 보았다. 총 3페이지에 도달하는 내용이었으나. 마레는 그것을 30초만에 전부 읽고서 다시 테이블에 올려놓고 비극적인 것을 본 것 마냥 이마를 탁 쳤다.
"이럴수가! 말도 안돼요! 말도 안됩니다! 실례지만, 영주님. 제가 이 타이밍에 홍보를 위해 자원한 것은 정말 좋은 선택이었군요! 제 말은, 이대로 가면 영주님의 부대원들이 이뤄낸 업적은 역사책은 커녕 옆 동네 꼬맹이들도 모르는 사실이 될 겁니다!"
"뭐가 문제라고 보십니까?"
"먼저 여기! 사진을 찍으셨는데, 그걸 신문에만 실으시겠다구요? 말도 안됩니다! 신문이라니, 그걸 누가 봅니까?"
요나는 조금 눈살을 찌푸렸다.
"...어느 정도의 교양이 있는 시민이라면 전부 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만."
"하! 아뇨! 교양이 있는 사람만 보는거죠! 수도와 대도시의 어느 정도 평민급으로는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보는 겁니다! 맙소사, 이 벨카땅에도 신문이 들어온 건 1년이 안되지 않았나요?"
마레는 고개를 휘저으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구구절절하게 활자가 주인 신문에 사진을 집어 넣는다니... 아까운 짓이에요! 윌레인에 문맹들을 생각하셔야죠. 전 국민이 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 극 대본을 쓰시던 마레씨가 그런 말씀하시다니, 문맹들에게 어떻게 부대의 공적을 알립니까? 음유시인이라도 풀렵니까?"
요나는 피곤하기도 하고 일일이 큰 동작으로 떠들어대는 마레가 성가셔서 조금 쏘아붙이듯 말했다. 그러나 마레는 그런 요나의 말투 같은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게 두번째 문제예요! 영주님은 왜 음유시인을 사용할 생각은 하지도 않으신 겁니까? 그들이야 말로 여기저기에 무훈을 퍼뜨리기에는 딱 좋은 사람들인데!"
"음유시인들은 자신이 원하는 영웅담이 아니면 퍼뜨리지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가장 먼저 음유시인들에게 영웅담을 퍼트려야죠! 네크로맨서에 대한 소문을 먼저 퍼뜨리면 음유시인들은 좋다고 그 소재로 노래들을 만들 겁니다! 이 시대가 얼마나 위기에 처했는지, 그런 불안감을 부를 만한 곡으로 뽑아 댈 거예요. 사실, 음유시인들은 벌써 이와 관련된 노래들을 많이 뽑았습니다. 남은 건 그 네크로맨서가 죽었다는 것을 알리기만 한다면, 지들이 그 영웅이 누구인지 찾아다니게 될 거라구요!"
마레는 그렇게 말하고 종이를 한번 탕, 하고 내리쳤다.
"요컨데, '영웅들이 네크로맨서 토벌에 성공'보다는, '최악의 적, 네크로맨서 사망'이 더 읽기 자극적이고 빠르게 퍼질 거라는 겁니다."
"...그건 일리가 있군요."
"그리고 두번째로, 신문으로 뭔가를 하려는 생각은 집어 치우세요! 몇개 되지도 않는 도시만 챙겨서 뭐가 홍보가 되겠습니까?"
"신문은 계속 성장하게 될 예정-"
"앞으로의 성장률은 집어치워요! 홍보에서 중요한 것은 단적이고 강렬한 현재 뿐입니다! 최대한 널리, 최대한 간편하게! 이걸 해내야 돼요, 우리는."
"무슨 다른 방법이라도 있으십니까?"
요나의 말에, 마레는 그제서야 그가 가져온 종이를 집어 들었다.
"있고 말고요. 요나경은 그냥 비행정만 빌리시면 됩니다."
"...비행정을요?"
"생각해 보시죠, 영주님."
마레는 그렇게 운을 띄우고, 카마인에서 있던 일을 떠올려 보았다. 마지막에 하늘에서 흩뿌려지던 그 시체더미들. 어디로 시야를 돌려도 떨어지고 있는 인간의 파편들. 꿈과 같이 내려오는 자극적인 광경. 그것은 작은 축제였다.
"하늘에서 종이가 떨어지는 겁니다... 종이에는 긴말도 적혀 있지 않아요. 단순하게 부대원들의 사진이나 그림이 걸려있죠. 적힌 것은 단 한마디. '소금부대'. 그리고 뒤에는 네크로맨서의 효수 사진이 찍혀 있는 겁니다. 거기에도 단 한마디, '네크로맨서'. 그렇게 적혀 있는 종이가 하늘에서 무수히 떨어진다고 생각해 봐요... 어디로 시야를 돌려도 그 종이가 날아다니는 겁니다! 사람들은 그 정보를 얻는 것을 피할 수 없어요! 가난한 자든, 부유한 자든, 결손자든, 군인이든, 모두에게 평등하게 내려오는 정보인 겁니다!"
"...정말로 그게 홍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요나가 못마땅하다는 듯 물었다, 그녀에게는 그가 제안한 방법이 너무 실험적으로 느껴졌다. 마레는 씩 웃으며 말했다.
"종이라는 것은 어떤 곳에 쓰든 도움이 되지요. 하다 못해 땔감으로 쓰려고 해도 쓸 수 있어요. 글을 못 읽는 자들도 일단 마구 챙길 겁니다. 홍보라는 것은 일상에 깊게 녹아 내려서 알아채지 못하는 수준이 되었을 때 효과가 가장 커요. 절 믿으세요, 아름다우신 영주님. 이게 최적의 홍보방법이 될 겁니다."
마레는 그렇게 말하고 빙그레 웃었다. 영주는 그런 마레를 한참을 쳐다보다가, 크게 한숨을 내쉬고 등을 뒤로 뺐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되는 거죠?"
라드는 아직도 전신이 쑤셨다. 상인의 주먹은 꽤 매웠다. 그래, 분명 그의 주먹이 아팠던 것이다.
적당한 응급조치만 받고 그는 거리의 뒷골목에 내팽개쳐 졌었다. 그가 지갑을 들고 다니지 않은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애용하던 망토마저 누군가에게 뺏겨 있었다.
그는 이대로 누워서 한 4시간정도만 더 자고 싶다는 강렬한 유혹을 직면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그는 지금 바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마차..."
힘들게 몸을 이끌며 이동한 그는, 지레 겁먹은 마부에게 다가갔다. 마부는 그런 그를 보며 질색했다.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모셔드리면 됩니까?"
"아니, 그건 필요 없소."
라드는 그렇게 말하고서 셔츠의 밑단 쪽을 더듬어 보았다. 거기에 미세한 틈새가 벌어지면서, 안에서 지폐가 조금 나왔다.
"왕도로 최대한 빨리. 15시 전에 도착하면 두배로 드리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20생텀을 꺼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평소 요금의 2배에 도달하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당신은 부상자인데.."
머뭇거리는 마부를 잠깐 지켜보던 라드는 곧 내밀었던 돈을 다시 집어넣고 다른 마차를 보러 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부는 허겁지겁 그를 막으며 돈을 받았다.
"왕도로 한 분 모시겠습니다!"
"좋아. 물이나 술도 있으면 좀 나눠주면 좋겠군."
그는 그렇게 말하고 마차에 탔다.
라드는 왕도에 도착하자마자 개인용 비행정을 이용했다. 왕도에서만 실험적으로 사용중인 2인승의 날아다니는 탈것이었다. 마도공학의 정점인 기술력이었지만, 한번에 소모되는 마나가 너무 커서 타지역까지 상용화는 아직 힘든 단계였다.
그가 비행정에서 내린 곳은 주술 상점이었다. 라드가 애용하는 곳이었다.
"여, 한동안 안보이길래 죽은 줄 알았다."
안에는 주술사 치고는 쾌활해 보이는 여성이 라드를 반겨주었다.
"...죽지는 않았지만, 덜 죽었다에 가깝구만. 미안하지만 포션은 못 줘. 병원두고 포션을 먹으려는 놈들은 전부 정신병자들이거든."
"그런 거 아니야."
라드는 피식하고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지금 내 상태를 감출 수 있을 만한 상품 있나? 일시적인 것이라도 좋아."
"아, 그런거라면.."
그 주술사는 분주하게 창고 안쪽을 찾아보다가 망토를 꺼냈다. 그 망토에 먼지를 털어내며 주술사가 소개를 시작했다.
"치료고 뭐고 다 필요 없고 몸상태를 감추고 싶은 것뿐이라면 이 망토면 충분해. 적군과 아군 모두에게 부상입은 것도 숨기며 용맹하게 싸운 전사의 망토에, 투명거미의 거미줄로 코팅한-"
"아아, 설명은 됐어. 그거면 될 것 같군."
라드는 그렇게 말하며 망토를 받았다. 마침 입고 있던 것도 없어진 상태이다.
"...양산이 불가능한 제품이야. 많이 비싸. 솔직히 나도 만들어 놓고 쓸데가 없어서 쳐 박아 둔 거였고. 진짜 살 꺼야?"
"물론이지. 계산은 나중에 할게."
"...너라면 떼먹지는 않겠지! 알았다!"
흔쾌히 받아들이는 주술사의 말에, 라드는 가볍게 감사를 표하고 상점을 급하게 나섰다. 그가 곧바로 발을 향한 곳은 병원이었다.
"프롤라인을 만나려고 합니다."
그는 망토를 둘러매고 조금 불안한 듯이 카운터 직원을 바라보았다. 망토가 진짜 효과가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이 반, 나머지 반은 자신의 누이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 병실에 계실 겁니다."
망토의 성능은 확실했다. 라드는 넝마짝 같은 몸을 끌고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며 누이의 병실로 걸어갔다.
병실 문 앞에서, 그는 잠깐 호흡을 골랐다. 어디까지나 평소처럼. 이상하지 않게. 그리고 그는 병실 문에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병실 너머로 작게 그런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치고는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라드는 잔뜩 긴장한 상태로 문을 열었다.
문 너머에는 검은색 장발을 길게 늘어트리고 있는 미인이 있었다. 핏줄이 드러날 정도로 창백해서 바람만 불어도 부서질 것 같은 인상이었다. 그러나 머리색 만큼이나 짙은 검은색을 띈 두 동공은 왠지 모르게 동생의 그것을 닮은 느낌이었다. 그래, 그의 누이는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와 단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나 왔어, 누님."
라드는 반정도 홀린 듯 그렇게 말했다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라드의 누나, 프롤라인은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휠체어를 밀어서 화분에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화분을 힘들게 잡아 올려 라드에게 집어 던졌다.
"나가. 피냄새가 밴다."
라드는 눈 앞에 깨진 화분을 바라보며 드디어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래, 너무 흥분했었다. 평소와 같이 해야 됐었는데.
"정말, 여전히 성질이 급하다니까, 누님은."
그는 얼굴에 웃음을 머금었다. 평소의 라드와 같은 기분 나쁘게 일그러진, 비웃음을 머금은 그것이다. 그는 깨진 화분의 근처로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이 화분도 누군가한테 받은 거 같은데... 누구야? 남자친구라도 생긴건가?"
"너한테 해줄 말같은 거 없어. 그대로 나가."
"왜 그러셔, 들어오라 했으면서."
"너 인줄 알았다면 들어오라고 말할 바에는 차라리 창밖으로 뛰어내렸을 꺼야."
프롤라인은 단호하게 라드를 거절했다. 라드는 그런 그녀에게 조금 강압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를 향해 이것저것 집히는 대로 물건을 던져 대기 시작한 프롤라인의 양손을, 라드는 한손으로 붙잡았다.
"밥 제대로 먹고 있어? 한 손으로 양 손목이 붙잡히는 건 좀 놀랍네."
"이...이거..놔..."
그녀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몸의 한계에 도달한 상태였다. 라드는 그런 그녀를 잡은 상태로, 반대손으로 과일을 하나 집어먹었다.
"참, 왜 그렇게 날이 서있는지 몰라, 내 누님은. 나한테만 너무한-"
"그 손 놔!"
조금 심약한 듯한 그 목소리에 라드는 문 쪽을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곱슬머리에 빼빼 마른, 누가봐도 싸움에 재능은 없어 보이는 남자가 한 명 서있었다.
"드미트리! 안돼요!"
"아하, 드미트리라고 하는 구나."
감 잡았다는 표정을 짓는 라드를 보며 프롤라인의 안색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라드는 그의 누님을 잡았던 손의 힘을 풀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 누님에게 화분을 갖다 준건 형씨인가?"
"하이든, 그에게 손 끝이라도 댄다면 맹세 하건데 내가 아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누님, 난 이제 하이든이 아니라고."
라드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누이에게서 손을 완전히 풀고 새로 들어온 손님을 향해 시선을 완전히 돌렸다. 새로 들어온, 드미트리라 불린 남자는 라드를 견제하며 천천히 프롤라인에게 다가왔다.
"왜 그렇게 쫄았어, 형씨. 얼른 와."
비웃으며 자신의 누이에게서 거리를 벌린 라드의 앞으로, 남자는 빠르게 파고 들어가 프롤라인의 앞에서 양팔을 펼쳤다.
"그녀에게서 떨어지세요! 싫어하잖습니까!"
빈약한 가슴팍을 활짝 열어 재낀 자세. 그는 확실히 싸움과는 연이 없이 살아온 것 같았다. 떨면서 그렇게 말하는 조금 못미더운 모습에 라드는 눈가를 조금 구겼다.
"형씨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군. 내 이야기조차 꺼내지 않은 거야, 누님? 가슴아프네."
라드는 그렇게 말하고 풀린 듯한 눈으로 남성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의 누이는 그게 무슨 표정인지 알고 있다.
"안돼! 드미트리, 비켜!"
그리고 라드의 주먹이 그를 향해 뻗어졌다. 그러나 그에게 닿지는 않았다. 라드는 그의 바로 앞에서 주먹을 멈추고 있었다.
"...싸우러 온 건 아냐. 서로 얼굴 못 본지 6개월은 됐으니까, 그냥 인사차로 온 거라고."
라드는 기분 나쁘게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는 등을 돌렸다.
"누님은 남자 선택 좀 잘해야 할 것 같군. 건강해."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서 죽어버려!"
등 뒤로 들려오는 분노에 찬 저주를 들으며 라드는 문을 닫았다.
"...비키지 않았어."
누님이 고른 남자. 드미트리라고 했었던가. 그는 주먹이 닿기 직전까지 몸을 피하지 않았다. 눈은 감았지만,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역시 누님이야.."
라드는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멈출 수 없었다. 가볍게 콧노래까지 부르며, 복도를 지나갔다. 그리고 어떤 예고 동작도 없이 맞은편에서 그와 지나쳐 가는 여성을 붙잡고 귀에다가 작게 속삭였다.
"맞은편 병실의 다리를 다친 환자, 너, 카운터 쪽에서 대기하던 동양계 여성 하나. 프롤라인이나 그 남친의 손톱만 부러져도 그 셋은 확실히 죽일거야."
여성은 얼어붙었다. 언제 눈치챈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여성을 두고, 라드는 다시 콧노래를 이어 부르며 발걸음을 옮겼다.